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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산악회 USA 원문보기 글쓴이: sunny
볼트 바이러스
지난 해 여름, 인수, 선인과의 15년 만의 해후는 벅찬 감격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게 상해가는 모암을 보아버린 나의 마음은 여태껏 편치 않다. 이번 달 마운틴에 실린 글을 보노라면 상황은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해서 대책이 시급하다. 한국 산악 운동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인수, 선인에서의 공중도덕이 지하철 1호선의 그것만도 못하다면 기막힌 노릇이다. 새치기를 해대고 스틱 클립을 휘두르며 벌이는 추태쯤이야 외면하면 그만이고, 그들이 하산해버리면 해결될 일이나 멀쩡한 바위를 쪼아내고 아무데나 볼트를 박아대는 작태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일이다. 인수와 선인은 우리가 다음 세대로부터 잠깐동안 빌려쓰고 있는 소중한 자연 유산 가운데 하나이며 그것을 온전히 후대에 물려줘야할 책임은 그 바위를 오르내리는 산악인의 몫이다. 글 올린 이의 주장대로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리지꾼들과 자질 없는 인터넷 산악회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기보단 한국 산악계 전체가 떠안고 해법을 찾아야할 공동의 과제이다. 퇴락해가는 인수, 선인이 역겨워서 발걸음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찾아가 지키고 앉아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정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한국의 산악운동을 견인하는 선각들의 의무다. 남의 나라 산에 태극기 휘날리는데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바로 지키는 것부터 먼저 풀어야겠다. 산골짝마다 유산객들의 가무음곡으로 떠나갈 듯하고 산자락마다 쓰레기 더미가 넘쳐날 때, 자연보호란 단어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 묵묵히 쓰레기 봉지를 들고 산을 내려오던 산악인들의 미덕을 되살려야한다.
당면한 과제는 볼트에 대한 개념을 모든 클라이머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재정리하고 기준을 정립하는 것이다. 볼트는 자연적인 확보물 설치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부득이하게 채택되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에 대한 보편적 이해와 합의가 절실하다. 또 등반 스타일과 각 암장의 특성에 따라 볼트의 허용 범위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인수, 선인같은 전통적인 암장의 코드와 80년대 이후에 개발된 스포츠 클라이밍의 암장의 코드는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인수와 선인에 무분별한 볼트의 오용과 남용이 횡행하는 것은 현재 그곳의 풍토와 토양이 그럴만 하기 때문인데, 스포츠 클라이밍 암장의 코드가 여과 없이 유입되는 것도 여러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인수봉 취나드 에이길 3피치 크랙에 줄지어 설치된 볼트가 허용되었거나 묵인되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는 볼트를 제어할 방도는 없다. 일정한 기준 없이 등반자의 편의만 위해 설치된 볼트는 그 당위성의 경계가 전적으로 개개인의 임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립스틱을 휘두르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제멋대로 볼트를 때려박는 얼토당토 않은 사람들을 나무랄 규범이나 이념적 토대가 없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취나드 에이길의 볼트나 얌체족들이 마구 박아댄 볼트나 등반 윤리에 대한 개념이 박약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한 볼트들이 함께 갖는 존재의 가치는 등반자의 안전과 편의를 도모한다는 점인데, 편의 도모가 지상의 과제일 바에야 인수봉에도 백운대와 마찬가지로 쇠줄 난간과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볼트 한 두개 더 박는 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냐고 한다면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케이블카를 놓고 관통 도로를 뚫자는 개발론 조차도 쌍수로 환영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다. 볼트 억제에 대한 개념의 정리가 절실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흔적 남기지 않기” 로 축약된 자연 보호 정신과 가볍게, 빠르게, 자유롭게로 표현되는 가장 현대적인 등반 스타일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대 등반 사조의 접목과 실천이 없다면 한국의 산악 운동은 그 놀라운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등반 흐름의 주류와 동떨어진 변방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국의 경우 80년대 이후에 개발된 스포츠 클라이밍 암장에서는 볼트에 대한 허용 범위가 관대한데 반해 전통적인 트래드 클라이밍 암장에서는 아주 엄격한 볼트 코드가 적용된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암장은 산타 모니카 마운틴에 있는 에코 클리프란 곳이 있다. 90년대 후반에 본격 개발된 스포츠 클라이밍 암장으로 남가주 인근에서는 알아주는 5.12이상의 고난도 루트가 즐비하다. 문제는 이곳의 암벽이 쉽게 부서지는 취약한 화산암이란데 있다. 클라이머들의 은어로 초스 (choss) 라 불리는 지저분하고 낙석이 많은 바위의 전형적인 곳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떨어져나오는 암석 조각을 접착제로 붙여놓고 자연 홀드가 없는 구간에는 인위적으로 홀드를 파내서 완성한 루트가 허다하다. 크랙이 있다손 치더라도 볼트가 줄줄이 박혀있는 것은 물론이다. 미국의 다른 전통적인 암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에코 크랙에서는 버젓이 행해진다. 나도 연전에 이곳에 짧은 크랙을 한줄기 찾아 길을 냈었다. 등반 사진을 클라이머들이 내용하는 어느 웹사이트에 올렸더니 대번에 크랙이 있는데 왜 볼트를 박았냐는 딴지가 들어왔다. 대꾸를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차에 친절하게도 엉뚱한 이들이 대신 답을 올려놓았다. 한사람은 “ 에코 클리프는 트래드가 아닌 스포츠 클라이밍 암장이라서 정상적인 규범이 적용되지 않는다. ” 는 다분히 퉁명스럽고 선언적인 토를 달아놓았다. 또 다른 이는 “암질이 초스이기 때문에 캠이나 너트로는 확보를 할 수 없다.” 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올렸다. 고전적인 클라이머들의 시각으로 보면 에코 클리프에서의 관행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는 그 나름대로의 존재 가치가 있으며 즐겨 찾는 클라이머가 적지 않다. 그러나 누군가 에코의 저열한 코드를 요세미테, 엘도라도 캐년, 슈왕겅크 등의 미국의 전통적인 트래드 클라이밍 암장에 써먹으려 들었다간 엄청난 사달을 각오해야만 한다.
여기서 동쪽으로 80마일 정도 떨어진 타퀴츠란 곳으로 가면 사정은 딴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암벽 등반 급수의 기준인 요세미테 데시멀 시스템이 사실은 요세미테가 아닌 여기 타퀴즈에서 태동했다하니 미국식 전통 암벽 등반의 본산이라해도 무방하겠다. 준수한 용모는 우리것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인수, 선인과 거의 같은 질의 화강암이며 그 생김새도 아주 비슷하다. 이곳에는 미국의 첫 5.9 루트로 알려진 오픈북이란 길이 있다. 1952년 로얄 로빈스가 초등한 메가 클래식인데 한국의 취나드 에이와 놀랍게 흡사하다. 반세기가 넘도록 오픈북이 클라이머들로부터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클래식 클라이밍 루트로서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픈북 전구간에는 고정 확보물이 거의 없다. 등반자가 너트나 캠을 설치하면서 올라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구간이 끝나는 지점마다 확실한 앵커를 스스로 만들어야한다. 볼트 클립에만 익숙한 클라이머들에겐 부담스럽고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난이도가 5.9에 불과한데도 클라이머들로 붐비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고 오픈 북에 도전하는 이들은 50년전 로얄 로빈스가 초등 때 느꼈던 것에 비견할만한 감흥을 고스란히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오픈북에도 취나드 에이처럼 줄줄이 볼트로 말끔히 위생처리가 되었다면 감동과 성취감은 반감될 것이다. 오픈북만 5.9급의 효시로써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선을 따르는 타퀴의 고전 루트들은 대개 이렇게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적인 고전 루트에서는 초등자가 피톤 등으로 자신의 등반 흔적을 일부러 남긴다거나 후등자들을 배려해서 고정 확보물 따위를 설치하는 것은 해묵은 방식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과잉 친절 대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해서 후등자로 하여금 초등자와 거의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새롭게 떠오르는 신개념 초등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중부 유럽의 체코와 독일 접경에 보헤미아와 삭소니라는 샌드 스톤 암장이 있다. 지금은 비록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져 있지만 지리적으로는 한 동네나 마찬가지인 이곳은 19세기부터 비롯된 암벽 등반의 전통을 옹골차게 지켜 내려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의 클라이머들은 너트 같은 금속 확보물 대신 로프의 매듭을 확보물로 사용하는데 이러한 전통은 피톤이 개발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고리가 달린 볼트는 소나 말을 말뚝에 묶어두는 볼트를 변형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매듭에 의한 기발한 확보 방법을 창안했고 귀하고 값비싼 금속 대신 흔하고 저렴한 로프 매듭이 이 지역의 독특한 확보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중부 유럽의 연약한 샌드 스톤에선 피톤이 제 구실을 못할 뿐만 아니라 침식으로 부터 암석을 보호하는 파티나라는 표면층이 금속 확보물에 의해 쉽게 파손되기 때문이다. 이곳의 클라이머들이 현대적인 확보물과 초크를 마다하고, 때론 신발마저 벗어던진 채 맨발로 기이한 스타일의 등반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알피니즘과 자연보호 사상이 각별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곳의 환경에 걸맞게 고안된 등반 스타일과 전통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독일 영토인 삭소니에선 잠깐이나마 너트와 초크가 사용된 때가 있었으니, 젊은 볼프강 귈리히가 활동하던 시절이라 한다. 하지만 곧 너트와 초트의 사용은 공식적으로 금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법으로 제한되어 있다. 다만 이 독특하고 엄격 등반 윤리는 색소니를 비롯한 샌드 스톤 지역에 국한될 뿐 여타의 화강암이나 석회암 지역의 암장에서는 일반적인 등반 스타일이 적용된다.
지난 달 콜로라도의 엘도라도 캐년에 갔던 길에 갔던 길에 ACE (The Action Committee for Eldorado) 라는 조직이 엘도라도 암벽에 설치되는 모든 고정 확보물을 관장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1992년 주립공원 수석 레인저인 밥 톨의 요청으로 조직된 에이스는 클라이밍 커뮤니티가 볼트를 비롯한 고정 확보물 추가 설치의 가부를 결정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생성 배경이 오늘 우리의 현실과 닮은 꼴이다. 80년대 후반에 들면서 볼더 시티 인근의 암장에서는 볼트를 둘러싼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에는 시 당국과 공원 관리소에 의해서 새로운 볼트의 설치가 금지된 상황이었다. 또한 엘도라도 캐년에서는 일부 클라이머가 클라이밍 커뮤니티의 일반적인 의지와는 달리 기존 루트에 새 볼트를 추가하거나, 예전 부터 고정된 피톤을 볼트로 대체하고, 기존 볼트를 제거해버리는 엉뚱한 짓을 해대는 바람에 시끄럽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엘도라도의 일부 루트들의 특성에 심각한 변화를 불러왔고, 로칼 클라이머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그 뜻은 가상했지만 온당치 못한 그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새로 설치한 볼트의 일부가 다른이의 손에 의해 까부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되자 엘도라도 캐년 전체를 관장하는 콜로라도 주립 공원측은 엘도라도는 모든 클라이머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산이며 클라이밍 커뮤니티의 합의가 없는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은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생겨난 에이스는 클라이밍 커뮤니티의 중지를 모으는 자율적 조직인 셈이다. 에이스가 운영하는 고정 확보물 설치 검토 시스템은 고정 확보물의 설치가 필요한 새로운 루트나 기존 루트의 변경에 대한 신청을 클라이밍 커뮤니티가 사전에 검토하는 방식이다. 에이스의 역할은 현지 클라이머들의 정서와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고 최종 결정은 공원 관리측이 내리게 된다. 에이스는 아메리칸 알파인 클럽, 액세스 펀드, 아메리칸 마운틴 가이드 협회, 콜로라도 마운틴 클럽, 그리고 로칼 클라이머들로 구성되어 폭넓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을 꾀하고 있다. 고정 확보물을 설치하고자 하는 사람은 에이스에 먼저 신청서를 제출하여야 한다. 신청서에는 고정확보물의 설치 계획과 필요성 등에 대한 설명과 아울러 도면이나 사진을 곁들여야한다. 에이스는 신청 내용을 커뮤니티에 공개해서 찬반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다음 공원관리 측에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전 검토 시스템으로 인해 엘도라도 캐년에서는 엉뚱한 볼트가 설치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볼트를 두고 반복되던 볼썽 사나운 마찰도 잠잠해졌다.
볼트에 관한 논란은 세계적으로 80년대 후반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90년대 들어 나름대로 타협점을 찾고 마무리가 된 사안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한국에선 아직도 볼트에 대한 개념이 말끔이 정리 되지 않은 것 같다. 특히 기존의 루트에 초등자와 사전 협의 없이 임의로 고정 확보물을 추가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금기라는 가장 초보적인 등반 상식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클라이머들의 자발적인 의식의 개혁과 실천에 의한 정리가 가장 바람직한 일이긴 하나,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엘도라도 캐년의 에이스를 타산지석의 교훈으로 삼아 비슷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신중하게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수, 선인은 대체할 수 없는 한국 산악운동의 본산이며 세계 어느 곳의 암장과 비교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클래식이 암장이다. 다른 나라의 전통적인 암장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암도 그에 합당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산악인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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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ain / Jan. 2009 정재학
첫댓글 한국에서도 문제가 많지 인수 크랙이란 크랙에 다 짖어놨으니... 요즘 많은 볼트땜시 수준과 능력이 안되는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통에 안전 사고에 무방비해.. 다시 뽑는것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