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4년(중종39)∼1629년(인조7) = 86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중회(仲懷), 호는 목옹(木翁) · 양지정(養志亭)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별제(別提)송백상(宋百祥)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정언(正言) 김익(金釴)의 딸이다. 사헌부 장령(掌令)송호의(宋好義)의 증손자이고, 승지 송시철(宋時喆)의 8촌이다. 척암(惕庵) 김근공(金謹恭)과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9)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보임되었고, 1582년(선조15) 염근리(廉謹吏)로 선발되어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1583년(선조16) 과천현감(果川縣監)이 되었고, 1585년(선조18)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다. 당시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토호(土豪)들이 남의 땅을 겸병(兼幷)하였으므로, 힘없는 백성들이 괴로워하였다. 그가 현감으로 부임하여 법대로 처리하자 토호들이 그를 모함하여 파직시켰으나, 도리어 백성들은 그를 위해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1586년(선조19) 강음현감(江陰縣監)이 되었다가 1년 만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다. 1588년(선조21) 운봉현감(雲峯縣監)으로 나갔는데, 이듬해 <기축옥사(己丑獄死)>로 죽은 이발(李潑) · 이길(李洁) 형제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가 죄인과 친하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3년(선조26) 당진현감(唐津縣監)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29)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가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1년 만에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를 거쳐 형조 정랑으로 승진하였고, 재령군수(載寧郡守)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36) 군기감(軍器監) 첨정(僉正)에 임명되었고, 곡산군수(谷山郡守)로 나갔다가, 2년 만에 다시 세자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다. 이때 세자 광해군은 익위 송선이 현명한 유학자라는 말을 듣고 그를 존경해 익위가 옥보(玉寶)를 잡고 따라야 할 경우에는 그것을 소환(小宦)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여 그가 빈손으로 호종(扈從)하도록 하였다. 1607년(선조40) 선조가 승하할 무렵에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나갔다.
광해군~인조 시대 은거 생활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이 즉위하여 가자(加資)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가 점차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은퇴할 생각을 가졌다. 1613년(광해군5) 송선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양근군수(陽根郡守) 정근(鄭漌)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박치의(朴致毅)의 가마를 본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정근이 고변하는 바람에 체포되어 혹독하게 국문(鞫問)을 당하였다. 박치의는 ‘강변칠우(江邊七友)’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강변칠우’는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계획했다고 거짓 자백하여 김제남(金悌南)과 영창대군을 죽게 만든 서얼(庶孼) 출신 7명을 가리킨다. 박치의는 일당이 체포당할 때 혼자 도주하여 행방을 감추었다. 그의 가마를 목격한 이야기가 허구인 것이 밝혀져서 송선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사건 직후 이천부사(利川府使)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늙었다는 핑계로 사임하고, 도성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1618년(광해군10) 충주의 북촌(北村) 개천동(開天洞)에 옮겨가, 시냇가에 정자를 지어놓고 ‘양지정(養志亭)’이라 일컫고, 산수를 즐기면서 자기의 별호를 ‘목옹(木翁)’이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을 때 그의 나이가 80세라고 특별히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풍(淸風) 수촌(水村)으로 피난하여 우거(寓居)하다가, 1629년(인조7)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86세였다. 그는 글씨를 잘 썼다.
성품과 일화
송선의 천성은 독실하고 행실이 방정 엄격하여 평소 몸가짐에 법도가 있었고 행동에 예법이 있었으며 법을 지키고 청렴하여 조금도 세속을 따르거나 구차스럽게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가까이 사귄 인물은 한백겸(韓百謙) · 홍가신(洪可臣) · 권용중(權用中) · 홍이상(洪履祥) · 이덕신(李德臣) · 김창일(金昌一) · 강복성(康復誠) · 우복룡(禹伏龍) · 허잠(許潛) 등인데, 모두 당대에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처음에 그는 홍가신과 함께 행촌 민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는데, 고인(古人)의 학문을 서로 잘한다고 항상 재주를 겨루었다고 한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묘적산(妙寂山) 아래 족장지(族葬地)에 있는데, 부인과 같은 언덕에 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재령이씨(載寧李氏)는 별제(別提)이형(李衡)의 딸로, 자녀는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 송시보(宋時保)는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냈다.
송선 (宋瑄)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중회(仲懷), 호는 목옹(木翁)·양지정(養志亭).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송호의(宋好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의교위(守義校尉) 송회(宋檜)이고, 아버지는 송백상(宋百祥)이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사간원정언 김익(金釴)의 딸이다. 김근공(金謹恭)과 민순(閔純)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학식이 높은 선비)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고 1582년 염근리(廉謹吏)로 발탁되어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제수받고 과천현감과 포천현감을 지냈다.
포천 현감 재직 당시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겸병(兼倂)의 풍조가 만연했었는데, 송선이 법을 엄하게 하여 단속하자 토호들이 이를 꺼려하여 현감 부임 3개월 만에 파직되었으나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다시 강음현감과 사헌부감찰을 거쳐 운봉현감이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 이발(李潑)·이길(李洁) 형제가 죽음을 당하자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송선이 이들을 염해 주었는데, 이 일로 그만 파직되었다.
다음 해 당진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기근의 구제를 잘해 명망을 얻었다. 뒤에 호조좌랑·병조정랑·형조정랑·군자감첨정·곡산군수·단양군수·재령군수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이천부사가 되었으나 연로함을 이유로 사퇴하고 개천(開天)에서 10여 년을 은거하면서 양지정(養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정묘호란 때에 청풍으로 피난하여 수촌(水村)에서 우거하다 죽었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