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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전통무예가 많다. 그러나 정작 전통무예는 없다."
현재 국내에는 각종 무예 단체가 무려 1백개가 넘는다. 이들의 대부분이 민족무예,전통무예를 표방하고 있는 데 거의가 비논리적이고 황당한 연원을 주장하고 있어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다. 본지에 연재한 무예들도 전통성 여부를 따져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비교적 민족의식으로 과거의 무술들을 재평가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비전된 전통무예로 알려져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는 종류였다. 여기에는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고 다만 소개에 그쳤다.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무예의 역사성, 전통성을 확인하는데는 대체로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는 문헌적 자료와 사실상의 전승실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택견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를 입증할 자료는 물론 전승계보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예가 구전심수로 전해졌고 더구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입증이 불가능하다고만 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두번째 방법은 그 무예의 현재의 실기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대체로 각 민족마다 행동양식에 독특한 리듬과 동선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의 고유한 가락과 춤사위 등의 특성과 무예의 동작을 비교해 보면 쉽게 판단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해 볼 때 주로 은류로 전승했다는 무예들은 중국무술과 유사성이 많이 발견되고 시중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하는 종류는 일본무술에 가까운 특징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알려진 몇몇은 고전 춤사위와 택견 등의 동작을 모방하고 있어서 외견상으로는 판단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본지에 소개할 대상이었던 것으로는 이미 소개한 것 외에 십팔기와 한풀, 수벽치기 등이 있다. 십팔기는 대한십팔기협회 김광석 회장이 무예도보통지를 실연한 것이라 한다. 한풀은 삼랑무 한풀연구소 김정빈씨가 1970년대에 일반에게 공개한 것이다. 수벽치기는 중앙문화센터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데 벽치기 전인이라는 육태안씨는 기천문 출신이다.
이외에도 공권도, 권법술, 기공무술, 무합도, 불무도, 봉술, 도봉술, 국술, 궁중무술, 한무도, 심도, 격검도, 정도술, 권격도, 태수도, 토착무술, 작대기도, 선배 도리체, 회전무술... 등 다 기억할 수 없을 만큼 가지 수가 많다.
우리 무예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반도 이북을 포기하고 외교정책에 의지하여 국가를 보위하기 시작한 이래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주자학이 성풍하던 시기의 조선에는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민간에 의해 민속경기놀이로 전승되던 무예는 일제시대에 와서 거의 절멸하고 말았다. 해방이후 이땅에 봄비 맞은 풀처럼 무수히 자라난 수많은 무예들의 모습은 바로 어두운 역사에 대한 반작용의 표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민족은 전통이가지는 지속적 특징에 의해 민족성이 일관되고 민족적 양식이 형성된다. 한민족의 흥융은 강한 역사적 전통의 근원적 힘에 의하지 않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무예 역시 그가 가지는 고유한 전통의 여부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민족무예를 지향하는 무예가 왕성한 것은 민족의 장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찾아 볼 것을 찾아보다가 하는 수 없을 때는 그와 방불한 것을 만들어 볼 수 밖에 없다."는 심정에 대하여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수박도 >
수박도 경연대회 웨스트포인트에서 개최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1984년,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강당에는 정복을 멋있게 차려입은 사관생도와 옛 고구려 무사의 복장을 갖춘 사관생도가 2열로 길게 도열해 있는 가운데 백발 홍안의 자그마한 동양인 노인이 당당한 걸음으로 단상으로 걸어올라갔다. 그러자 대표사관생도가 그에게 정중하게 지휘도를 바쳤고 그 지휘도를 받아든 노인은 브라스 밴드가 팡파르를 울리는 가운데 "전 미국 수박도 경연대회"의 개회를 엄숙하게 선언하였다. 단하에는 고구려 무사복장을 한 1천여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도열하여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 작은 체구의 노인은 수박도의 창시자요, 무덕관의 총관장인 황기(당시 71세)옹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잡지인 블랙벨트에서 89년도 "올해의 무도인"으로 선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 그로부터 수박도를 배운 사람들은 그 유명한 브루스 리, 척 노리스 같은 스타를 위시하여 미,불,이 등 20여개국에 걸쳐 10여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처럼 이 노인을 "위대한 마스터"로 추앙받게 하는 수박도란 과연 무엇인가? 수박이라는 말은 후한의 반고가 저술한 한서 예문지 수박육편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고려사 충혜왕조에 처음 나오는데 주로 수박희로 표기되고 있다. 당시의 수박 혹은 수박희란 특정한 무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맨손의 무예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최근에는 "수벽치기"라는 이름을 가진 무예가 소개되어 수박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수벽치기와 수박도는 역사적 기술적으로 전혀별개의 것이다. 황기 노인이 수박도를 창설한 것은 1960년, 체육관련 사단법인으로 출발하면서다. 그러나 그 이전에 1945년 11월 무덕관이라는 도장을 개설하였고 이때 화랑도의 화자를 따서 "화수도"라고 했으나 일반 사람들이 잘 모르므로 그냥 당수도라고 불렀다. 당수도 무덕관이 1955년경부터 수박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것은 황옹이 우연한 기회에 규장에서 본 무예도보통지 때문이었다. 그는 동양무술을 집대성한 이 책을 읽고 난 후 민족무예에 대한 눈을 뜬 것이다.
황옹은 10세때 고향인 경기도 장단에서 거리의 불량배 7-8명을 발길질로서 순식간에 해치우는 택견을 보고 매료된것이 무술인생을 걷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정작 24세때 만주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중국무술을 2년간 배웠다. 그 후 서울로 돌아온 그는 주로 일본 무술 교본을 보고 혼자 수련을 하였던 것이다.
황기옹은 아무리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일본 가라데 출신이 이끄는 단체에 흡수되는 치욕적인 일" 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 이탈하여 새로만든 태수도협회에 들어갔고 그는 외톨이로 혼자 남게 됐다.
1965년 태수도협회가 태권도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군사문화의 토양에서 우후죽순처럼 세력을 뻗어감에 따라 그의 입지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그는주위의 권고에 따라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10년만에 웨스트포인트에서 재기의 화려한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수박도는 아직도 당수도란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의 권법이 중국무술이므로 수박도의 뿌리에 대한 의문이 재기되기도 한다.
< 고무도(古武道) >
현존하는 격투기술 포함 농기구로 하는 농민무술
지금도 산간에서는 겨릿소에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쟁기라는 이름의 원말은 "잠기"이다. 그리고 잠기는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가 바뀐 말이다. 예전에는 땅을 가는 농기구와 전쟁에서 쓰는 무기를 같은 말로 불렀다. 그때는 농사짓는 사람이나 군인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았다.
농기구를 들고 전쟁터에 나서면 그것이 곧 무기가 되고 군인이 되었던 까닭이다. "잠기"는 18세기 초에 "장기"로 바뀌었는에 이때까지도 농기구와 무기라는 뜻이 함께 들어 있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병장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 무렵부터 유래된 것이다.
근세까지 농기구를 병장기 삼아 싸웠던 흔적은 동학농민전쟁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별다른 무기를 가지고 있을 턱이 없는 농민군은 손에 농사 짓던 도구를 들고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일종의 농민무술이 되었다.
이를 후에 독립군 출신인 이인의(李仁義) 선생이 고무도로서 체계화와 보급에 나섰고, 아들인 이도윤(李道潤)씨가 전수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고무도는 활, 창, 칼 등과 같은 정규 무기를 사용하는 것과 장대, 낫, 괭이, 쇠스랑, 도리깨, 노와 같은 농기구를 이용하여 싸우는 법, 맨몸으로 하는 법 등 세가지로 분류된다. 이중에 정규무기 사용법은 군사무술로 흡수되고, 농기구를 이용하거나 맨손으로 싸우는 기술은 생활무술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무도이다. 고무도의 기술체계에서 농기구를 쓰는 무기술은 장봉, 단봉, 중봉, 노봉, 도리깨봉, 죽창, 삼지창, 수리검, 낫, 철퇴, 쌍절봉 등이 있다. 그리고 맨손무술은 유술과 권법으로 나누는데 유술은 씨름, 굴리기, 쪼우기(조르기), 꺾기, 비틀기, 업어던지기, 메어치기 등과 택견과 같은 족치기가 있다. 권법은 장구치기, 주먹치기, 팔굽치기가 있고 장법(掌法)에는 밀어날리기, 후려날리기, 당겨날리기 등이 있다. 또한 이른바 "난다리"라고 하는 박치기의 기법이 있다. 말하자면 고무도에는 현존하는 모든 격투기 기술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고무도는 상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술이지만 이것은 특수층의 특별한 동기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민족의 주체인 민중들이 생업인 농사를 통하여 농기구 사용법에서 얻은 미립을 구체화한 생활무술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체계적, 조직적으로 전승되지 아니한 까닭에 물밑으로 흘러와 일반인의 인식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여 그 참된 가치와 역사발전 기여도에 대하여 도외시되어 온 불행한 무술이다.
농민들은 손에 괭이와 삽과 몽둥이와 죽창같은 것을 들고 부패한 관리를 징벌하고 일본군대의 신식무기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삶은 보다 효율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강구하도록 만든 여건이었던 것이다.
지난 91년 5월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대한고무도협회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의 농경생활에서 터득하여 온 농민무술을 체계화하여 생활무술로서 보급을 시작하였다. 협회 설립자 이도윤(57세) 회장은 1957년 부산 범일동에서 수박도 무덕관을 개설한 이래로 줄곧 무술 지도자로서 평생을 살아 왔다. 그의 무술이력은 화려하다. 65년 설립한 충무관은 전국 각지에 1백여 개의 지관을 거느린 큰 세력을 형성한 때가 있었고, 75년에는 대한쿵후협회를 창설, 회장을 맡았고, 부산시 태권도협회의 전무이사,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최근에 고무도 교본을 발간한 그는 쿵후 교본, 합기도 교본 등을 내기도 한 저술가이다. 그가 이렇게 여러가지 무술을 통달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군 출신의 가친으로부터 종합적이고 다양한 술기의 고무도를 전수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이 도주하여 만주를 방랑하게 되었다. 구련성에서 일본군 두명을 맨주먹과 박치기로 쓰러뜨리기도 하고 무술의 고수들인 일본 고등계 형사들과 대결을 벌이는 등의 신화적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제 늦게나마 고무도가 생활무술로서 가까이 다가와 우리 삶의 질을 높여주는 역할을 맡아 나섰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도인마을 청학동 >
삼성궁 한풀선사 수천개 솟대 혼자 해내
그 유명한 하동의 재첩국 한 사발로 한속을 달랜 후, 진주 방향으로 십여리를 가면 횡천 삼거리가 있다. 여기서 청솔 내음이 그윽한 육십리 묵계 계곡을 타고 지리산 품안 깊숙이 안겨 든 곳이 도인마을 청학동이다. 도인마을에 채 닿기 전에 목장승이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서있는 샛길이 있고, 이곳에서 활 한바탕 상거에 삼성궁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정작 건물이나 드나드는 입구조차 보이지 않고 다만 옹기종기 서있는 바위앞에 커다란 징이 하나 걸려 있다. 이 징을 세번 두드리면 바위 뒤에서 장검을 둘러맨 삿갓 도인이 훌쩍 나타난다. 이 도인의 뒤를 따라 바위 뒤를 돌아가면 성곽같은 돌무더기가 나타나고 바위가 뒤엉킨 사이로 작은 구멍이 나있다. 이 구멍을 지나면 갑자기 눈앞에는 수천개의 돌탑과 맷돌, 옹기들의 탑들이 펼쳐져 있다. "여기가 만다라인가?"
청정한 연못 속에도, 석양이 비껴 간 하늘 자락에도 온통 솟대가 드리워져 있다. 그 사이 사이에서 선비의 후예, 화랑의 아들들이 칼춤을 춘다. 보검이 바람을 갈라 놓은 틈으로 둥둥 북소리가 흐른다. 칼노래가 흐른다. 수행자의 눈빛이 타오르는 것은 저녁 노을의 빛이 아니다. 그것은 억겁의 인연을 풀어내리는 고요한 불꽃이다.
이 수천개의 솟대를 혼자 손으로 해냈다는 삼성궁의 한풀선사. 그는 대춧빛 얼굴에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 긴 머리카락과 긴 수염을 가진 전형적인 도인이다. 남해 노량에서 병원을 하던 강준상씨의 아들로 태어나 여섯살때 부친의 친구 낙천선사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아홉살때 수계를 받고 한풀(大氣)이라는 법명으로 살아왔다. 한풀선사는 초,중학교를 검정고시로 넘기고 고등학교부터 정상교육을 받았다. 78년에 중앙대에 입학,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유,선 이전의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를 민족적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신이 건설한 삼성궁은 옛 소도(蘇塗)를 복원하여, 민족의 정통 도맥인 선도를 지키고 신선도를 수행하는 민족의 도장으로 가꾸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늘날 잃어버린 민족의 위대한 얼과 뿌리를 찾아 천지화랑의 정신을 일깨우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실현하려고 한다. 그 실천적 방법으로서천부경, 삼일신고, 참정계경의 삼화경과 삼륜, 오계, 팔숙, 구철의 덕목과 오상, 육예를 수행하는 것이다.
삼성궁의 무술은 선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무, 군무, 기무로 나눈다. 예무는 인간의 본능적 투쟁술이며, 군무는 사회적 욕구에서 생성한 집단적 전투술이고, 기무는 공부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예무는 춤과 노래를 바탕으로 한 각종 권법, 검법을 망라한 24반 무예이고 군무는 집체수련과 진법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기무는 삼일신고의 삼법수행을 바탕으로 한다. 즉 감정을 그치고, 숨을 고르게 하며, 부딪침을 않는다는 뜻이다.
삼성이란 한배임(환인), 한배웅(환웅), 한배검(환군)을 뜻하지만 삼성궁에서는 이 세 정인외에도 역대 우리나라 왕조의 태조, 각 성씨의 시조, 현인, 무장을 모시고 숭배한다. 그리고 옛 소도제천을 부호라하여 하늘에 제를 드리고 환무백회를 시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풀선사는 삼성궁의 이러한 의식은 결코 종교성을 띄고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따라서 민족성원으로서 민족장래에 대한 발원만 있다면 어떤 종교, 종파가 참여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아직 세상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삼성궁무예는 해마다 10월의 청학 단풍제와 개천대제 때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리고 기회만 닿을 수 있다면 아무라도 무예를 전수받을 수 있다고 한다. 기이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무술이야말로 민족무예라는 것이다. 최근 몇몇 대학에서 동아리 결성이 이루어지고 있고, 차츰 일반인들에게도 조용히 퍼져가고 있는 것이 삼성궁의 무예이다. 기러기가 제 살던 곳으로 찾아들 듯이 우리도 우리가 떠나왔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 뫄한뭐루 >
무예문화 5천년 겨레얼
몸과 마음 해탈 뜻을 의미
"학열진을 동작의 형태로 하여 나타난 뫄한뭐루 무예는 삼천리를 원점으로, 북쪽으로 전진하는 "누리 뭍녘 돌굼", 남쪽으로 남진하는 "누리 물녘 돌굼", 동쪽으로 동진하는 "누리 햇녘 돌굼", 서쪽으로 서진하는 "누리 달녘 돌굼"에 이어 이들의 간방인 해뭍돌굼, 달뭍돌굼, 해물돌굼, 달물돌굼 등 8방 동작으로 진격하는 세계적인 입체 대련 전투무술입니다."
세계정무 뫄한뭐루를 소개하는 말이다. 이글만으로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기만하다.
"뫄한뭐루는 충무 통영 고성지역 토박이 말로서 뫄는 몸과 마음의 해탈을 뜻하는 말이고, 한은 하늘과 생명과 도가 하나라는 우리의 한사상, 뭐루는 '마루얼' 곧 종가정신, 겨레의 전통과 주체의식을 뜻한다."
뫄한뭐루의 창시자 한씨(58세)의 풀이이다. 그의 직함은 무성 총령 본존 총령. 본존은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정하였고, 무성(武聖)은 제자들이 지어 올린 것이라 한다. 하총령은 경남 진주 금곡의 운문마을 태생으로, 고려때 거란대첩의 명장 하공진 장군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는 20대에 10여년을 맨발로 전국을 방랑하다가 뫄한뭐루 무예를 창시하였다 한다.
"10년을 떠돌아 다니며 무예를 연구했는데 어느날 꿈에 현몽을 하였다. 높은 산에서 흰옷입은 노인들이 춤을 추듯 이 무술을 펼치는데 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히 기억되어 그것을 재현하였다"는 설명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어쨌든 그는 10년의 방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 이듬해인 67년 충무시 태평동에 도장을 차렸다. 그리고 71년에는 뫄한뭐루의 전국적 보급을 위해 상경하여 서울역전, 마포경찰서 옆, 남산의 보이스카웃건물, 서부 이촌동 등지로 옮겨다니며 도장을 운영하였다. 지금은 서울에 네곳을 비롯하여 대전, 부산, 마산, 수원 등지에 열대여섯군데에서 그의 제자들이 뫄한뭐루 도장을 개설하고 있다. 뫄한뭐루의 도장들은 서울잠실의 성존도관, 대전의 진성도관 등 모두 일곱개의 도관으로 계파를 형성하고 그위에 총령원이 있어 10만의 회원을 관장한다. 뫄한뭐루의 특성은 1) 공격과 방어의 구별이 없다. 2) 고정중심이 아닌 이동중심이다. 3) 전후좌우 완전회전 굴신동작이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4) 한가지 돌굼(형) 수련으로 맨손, 봉, 검, 총검, 내공술기가 체득된다. 5) 일대다수의 실전대련에 능숙해진다. 6) 세한손의 호흡수련으로 원력을 얻어 극치적 건강인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은 뫄한뭐루의 수련체계에 나타난다. 1) 기본수련(손, 발, 몸쓰기 각 8개) 2) 기본돌굼(앞나기, 앞마기, 앞구기, 앞바기 각 8개) 3) 호흡수련(영정체의 삼성일합의 12배력 내공일세한손) 4)대련(그림자대련, 헛치기, 실전대련) 5) 병기수련(봉, 검, 기타무기) 6)회복수련(흩어진 기의 재충전, 건강법) 7)단련(수도, 족도, 유연성, 기합) 8)정리운동(도인법) 9)사배 바쳐절. 이중에서 사배 바쳐 절은 수련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하게 하는데 전우주의 대계와 개체적 자아의 합일의식이라고 한다.
뫄한뭐루의 수련특성이나 수련법은 시중에 유행되고 있는 여느 무술들과 별다른 특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뫄한뭐루에서는 하총령이 "신선들이 학을 타고 한산도 앞바다에 내려와 동작을 펼쳤는데 꿈을 깨 이를 지필묵으로 펼쳐내니 이순신의 학익열진하고 똑같았다. 이 진법을 인체에 대입시켜 신체무예로 승화시켰다."는 말을 굳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뫄한뭐루가 한민족의 특성을 한, 터, 살, 몸, 열,저(나), 맘, 몸의 7대 본질로 추출하고 한국의 진리화를 무술로 체현한다는 강령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지난 대전 엑스포 때 뫄한뭐루 군무단이 한산대첩 수륙 대제전을 공연하여 뫄한뭐루라는 생소한 낱말을 넓게 인지시켰다. 그리고 하총령은 최근 대한민국 무술인 총연합회의 총재가 되어 무술을 국방부에서 관장해야 한다는 색다른 주장을 제기하며 난해하고 황당하기조차 한 무술 논리를 펼쳐 나가고 있다. 아무튼 오천년 겨레의 얼이 서린 무예문화가 새 민족사를 일구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다.
< 민족무예도장 경당 >
고구려 무예 가르치던 연원
수형생활중 무예도보통지 탐독
직할시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농촌 모습 그대로인 광주시 광산구 지산동은 아직도 본양면이라는 구지명으로 더 잘 통한다. 이곳 탑동마을 어귀에는 "민족무예도장 경당"이라는 글을 배에 써붙인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서있고 그 뒤 대밭모퉁이를 돌아서면 낮은 비탈위에 기와를 얹은 2층집 한채가 황토마당을 치마처럼 펼치고 앉아있다. 여기가 24반무예를 전수하는 경당의 본당이다. 경당이란 고구려 때 평민자제들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치던 교육기관이다. 이 고구려 사학의 정신을 이어 민족의 간부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경당을 세운 사람은 이곳에서 태어난 임동규(56세)씨이다. 그는 광주일고와 서울상대를 나와 소위 "운동권"에서 활동하다가 시국사범으로 피검되어 무기징역을 곱배기로 받은 쌍무기수였다. 그가 10여년의 수형생활중에 무예도보통지를 탐독, 수록된 24반무예를 재현하였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라고 하면 무술을 신비한 것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책처럼 평가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본이다. 임진왜란의 병화를 겪은 조선종부는 군사력 강화를 목적으로 명나라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군사들에게 훈련시켰다. 당시에는 한교가 정리한 육기였던 것을 영조때 18반무예로 보강하였고 다시 정조때 마상술 육기를 더하여 24반무예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정조 14년(1790년)에 와서 언해본을 만들어 군사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임동규씨는 1989년 12월 석방되자마자 감옥에서 연구한 24반무예를 사회에 전파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는 "우리에게는 우리 체질에 맞는 우리 몸짓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국제화시대, 무한경쟁의 시대일수록 주체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며 민족무예는 국가경쟁력의 재고에 기층적 역할을 할 것이다."라고 소신을 밝힌다.
그는 민족무예의 수련을 통하여 강건한 심신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현대 무사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지,덕,체가 균형을 이룬 교육만이 민족의 장래를 보장할 수 있다며 현재 입시위주의 우리 교육풍토를 꼬집는다. 임동규씨는 수감생활의 부자연스러움과 운동부족, 섭생의 불안정 등으로 인하여심한 위장장애를 겪었다고 한다. 그러나 좁은 감방에서나마 빗자루를 들고 검법을 연마해 가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성적인 위통증이 사라졌다. 뿐만아니라 피부마저 윤기가 흘러 면회온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지금도 같은 연배의 주변 사람들에 비하여 건강이나 체력면에서 월등한 것이 모두 무예 24반을 수련한 덕택이라고 말하며 껄껄 웃는다.
무예24반은 검법을 기초로 창, 곤, 마상술, 권법 등 한, 중, 일 3국의 옛무술을 총망라하고 있다. 경당에서는 중국무술을 모방한 권법 대신 우리 전통맨손무술인 택견을 채택하고 있고 활쏘기도 추가하고 있어서 그 다양성이 우선 흥미를 끌고 있다.
경당무예는 간단한 운동복과 목검 하나면 운동장이든 빌딩의 옥상이건 주택가의 공원이건 어디에서나 할 수 있다. '무에24반을 하면 머리가 좋아진다'거나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경당의 선전문구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진지한 수련태도와 바람을 가르는 밋진 검법을 보면 누구라도 한번쯤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 기천문 >
실전적이라 겉보기 멋진 춤
무학과 단학 처음 공개
무른 것과 같고 아득한 것과 같으며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큰 근원으로 비어 있으며 그것을 있다고 말하자니 형체가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자니 만물에 의지하여 태어났다. 이것을 이름하여 기천이라 한다.
옛 중국에서 동방 최고의 선도로 일컬어졌다는 기천문은 고래로부터 전해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심신수련법이라고 한다. 그 유래와 전승과정은 문헌상으로 알려진 것이 없고 다소 황당한 무협소설처럼 이야기로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1970년대 초 부산의 무술가에 괴이한 10대 소년이 나타났는데, 가벼운 마사지로 골절된 팔뼈를 일주일만에 접골시키는가 하면 불치병의 환자를 단순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낫게하는 기행을 하였다. 이러한 신통력을 몰지각한 사람이 악용하여 치료비를 받아 가로채는 사건이 벌어지자 소년은 훌쩍 산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년 후 관악산의 작은 암자에서 기천문을 수행하는 몇명의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이 등산객들의 입을 통하여 알려졌다. 그러나 특별한 관심을 끌지못한 채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그리고 1993년 10월 31일, 서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93기천문 대동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5백여명의 기천문 문인들이 길놀이를 시작으로하여 기천무학과 기천단학을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하였다.
여기에는 그동안 기천문을 배운 바 있는 여러 무용단이 기천무를 추었고 서울대, 연세대 등 서울의 10여개 대학과 전남, 강원, 부산 등 10여개의 지방대학에 결성되어 있는 기천청년학생회가 대거 참가하여 무예 10종을 펼쳐보였다. 그들은 "전 민족 성원에게 이 주법을 전하라"는 선대 기천문 박대양(44세 본명 정용)진인으로부터 전해진 기천을 배운 사람들이다.
박대양 기천문주는 대여섯살의 어린 나이에 우연히 원예라는 도인을 만나 기천을 전수받았다. 기천에는 행인, 공인, 법인, 정인, 도인, 진인, 상인의 일곱품계가 있는데 원혜가 상인의 열에 들고 박문주는 진인의 경지를 터득했다고 한다. 마지막 산중도인 박진인이 바로 부산에 나타났다가 지리산 천은사로 들어간 그 소년이다.
소문에 떠돌던, 서울 관악산에서 그로부터 기천을 배운 초기의 제자는 현재 기천연수원 원장으로서 기천의 대중화를 주도하고 있는박성대,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는 전진효, 해동검도 총관장 김종호, 수벽치기의 육태안 등 손꼽을 정도의 소수이며 이들보다 조금 늦게 입문한 탤런트 나한일등이 있다.
최근 시중에 인기 무예로 꼽히는 해동검도, 심검도, 수벽치기 등이 기천문의 분파라는 얘기다.
기천은 무학과 단학을 공부한다. 실전적이라는 무학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멋진 춤이다. 춤인가, 무술인가로 화제가 되고 있는 택견보다 훨씬 춤적 요소가 많다. 이것은 작년 서울무용제에서 대상을 탄 '밀물 현대 무용단'의 작품이 기천무를 응용한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잘 설명이 된다.
최근 기천은 문이라는 용어가 중국무술의 문파로 오해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그냥 "기천"이라 부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산중에서 소수의 사람들간에 행하던 것과는 달리 일반대중에게 널리 보급되기 위해서는 신비주의적울을 걷어내고 보편적 가치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연원의 규명과 함께 난해한 기법은 단순화, 체계화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 해동검도 >
내부분열 외부압력 받아
멋진 검법 많은 사람 지지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우리 나라는 옛부터 궁시 한가지 기예만 있고, 칼과 창은 헛되이 무기만 있고 쓰는 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당하매 우리 군사들은 창을 가졌으되 휘둘러 싸워보지도 못하고 칼은 칼집에서 채 뽑지도 못하고 흉악한 왜적의 칼날에 꺾이고 말았으니 이것이 모두 창과 칼을 쓰는 법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던 까닭이라 밝혔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도 무예는 외면되어 왔고, 급기야 일본에게 국권을 탈취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의 치욕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방이후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종류의 무술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들 무술 중에는 일본무술을 우리 것으로 변형시킨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알맹이는 일본무술 그대로이면서 형식, 논리만 우리 것이라고 강변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일제시대 이전부터 우리 민족이 발달시켜 온 무술이라고 객관적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활쏘기, 씨름, 택견, 단 세 종류뿐이다. 이외에 연원이 불분명하다는 단점을 무릅쓰고 각종 무술과 문헌자료, 그리고 인접 전통분야를 참조하여 전통무술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단체들이 많이 있다. 이중에서 두드러지게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해동검도이다.
해동검도는 현재 미국에서 선불교를 포교하고 있는 원광(김창식)스님이 1960년대에 창안한 심검도가 그 전신이다. 원광은 당시 화계사 주지 종산대선사(68세)로부터 참선검법을 구전심수로 이어받아 득도하였다고 한다. 원광은 1969년 포교를 목적으로 서울 역수동에 도장을 개설하였다. 이때 고등학생이던 신이철(현 목사), 나한일이 처음으로 문하생이 되었고, 뒤를 이어 정도근, 송복근, 김정호(대한 해동검도 총관장) 등이 차례로 제자가 되었다. 그후 원광이 도미함에 따라 그 도장은 나한일이 맡게 되었다. 해동검도란 명칭은 1983년 나한일이 서초동에 도장을 개설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해동검도는 심검도와 분리되었고 김정호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대한해동검도협회와 결별한 한국해동검도협회(회장 나한일)호 양분되었다. 나한일과 김정호 양씨의 불화는 법정시비로까지 번졌다. 여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체육회 가맹단체인, 대한 검도회가 해동에 대하여 "검도"라는 명칭사용을 중지할 것 등 몇가지 이유를 들어 고소를 해왔다. 또 나한일씨가 TV드라마 무풍지대로 인기가 올라가면서 그가 검도 7단이라고 소개되자 대한검도회에서는 유단자 사칭으로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고소사건은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기존의 검도계의 반목은 해묵은 것이었다.
이렇게 내부분열과 외부압력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한국해동검도협회는 전국의 48개 도장 및 수련단체를 두는 괄목할 발전을 하였다. 최근에 한국 해동검도를 중심으로 해동검도를 국민생활체육으로써 뿐만 아니라 현대적 스포츠로 개발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검도경기와는 달리하여 90센티미터의 짧은 죽도와 훨씬 가볍게 만든 호구를 착용한다. 그리고 목과 허리아래의 공격에 가산점을 주는 등의 경기규칙을 정했다. 이 규칙에의해 내년 쯤 공식경기를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해동검도에서는 일본검도의 하까마 대신 우리 고의를 입도록 하는 등 되도록 우리의 전통양식을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해동검도는 나한일씨의 인기에 의해 유명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스타를 만드는데 해동검도가 끼친 영향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해동검도가 누가 보더라도 한번 쯤 해보고 싶을 만큼 멋진 검법이며 또한 해동검도가 지향하는 민족전통무예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대가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바람에 스치는 장삼 한자락처럼 이어져 온 승가의 무예가 사상을 넘어 온 중생에게 봄볕처럼 펴져가고 있는 것이다.
< 선무도 >
각종 병장기 기술 총망라
불교 전통의 밀교 수행법
경주 석굴암에 가보면 입구의 맨 앞 좌우에 인왕이 버티고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인왕은 이왕이라고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왼쪽의 역사는 입을 쩍 벌리고 잔뜩 움켜 쥔 오른 주먹을 높이 쳐들고 있고 왼손은 엄지를 안으로 말아 쥐고 아랫배를 방어하고 있다. 바른편의 인왕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곧 내려칠 듯이 왼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오른손은 다섯 손가락을 부채살 모양 쫙 펴서 허벅다리를 가리고 있다. 입을 벌린 것은 '아'라 하고, 입을 다문 것을 '음'이라 하여 산스크리트 문자의 첫글자와 끝글자를 나타낸다. 밀교에서는 인왕의 형태가 시작과 끝을 의미하고 본체적인 힘이 두개의 파생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인왕의 형상이 전통적인 불교 수행법의 하나인 선무도의 행공자세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인욕을 기조로 하여 이상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을 본원으로 한다. 하지만 대승적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방편으로 불교무술이 필요수단으로 발달하여 왔는데, 인왕의 상에서 그러한 모습이 나타나있는 것이다.
선무도는 여래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무술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다스린 데서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와, 승려들의 심신연마와 호신술로 익혀졌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에 와서 숭유억불 정책과 무를 천시하는 풍조에 밀려나 쇠퇴하엿고,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아예 그 자취마저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후 지금부터 30여년전인 1960년대 중반에 부산 범어사 청련암에서 양익 큰 스님을 중심으로 몇몇 뜻있는 승려들이 불가의 전승무술을 발굴 정리하여 금강영관의 체계를 세우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청련암에는 전국의 사찰에서 수많은 무예승들이 모여 들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적운 스님은 지난 85년 서울 종로 거리에 금강영관의 포교도장을 개설하고 선무도, 또는 선관무라는 이름으로 일반 대중에게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적운 스님은 불교무술의 수행이 불자들의 능동적인 심신을 고양하고, 수행에서 얻어지는 에너지(기)가 개인의 건강한 삶과 사회복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산속의 무술을 사바세계의 거리에 끌어 내놓은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은 출가하기 전 10여년간 다른 무술을 익혔고, 또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을 전공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다.
세계선무도진흥회 회장인 적운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의 규정국장과 경주 기림사 주지등 요직을 두루 거친 불교계의 중진이다.현재 선무도 본원인 골굴사(경주군 양북면 소재)에서는 매주 토요일 1박2일 의 선무도 수련법회를 주재하고 있다.
선무도는 골굴사 본원을 중심으로 서울, 부산, 경주, 울산, 포항 등 17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미국, 캐나다에도 포교원을 개설하고 있다. 이 선무도 포교원을 거쳐간 연인원은 지난 10여년동안 2만여명을 상회하고 있으며, 현재 수련중인 회원들만 해도 2천명에 이른다고 한다. 선무도의 구성은 선요가, 선무기공, 선무술로 대별되며 무관, 입관, 행관의 수행법이 있고 봉검등의 각종 병장기 기술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선호흡이나 선요가는 수천년전부터 불가에서 전승되어 온 비법이라고 한다.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선무도 수행으로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화되어 질병예방과 치료효과가 크다는 것이 임상실험을 통해 입증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구하기 위한 수행은 몸과 마음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되며 오직 둘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삼미를 얻을 수 있다고 설파한다. 조화란 몸과 마음은 물론, 강함과 유함, 정과 동, 주관과 객관, 너와 나, 우주와 나와의 조화를 포괄한다. 이것이 부처의 중도사상이며 곧 선무도 수행의 핵심이다.
오늘날, 극심한 대립과 갈등, 파쟁과 분열, 이기와 배타가 넘실거리는 우리사회에서 선무도의 수행은 건강한 삶의 길잡이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수행은 무예의 순리를 깨우치게 하여 강건한 심신과 호신술을 함께 얻는 현실적 공덕이 되기도 한다.
< 합기도 >
호흡양성법 단련 독특해
신비의 무술이라고 감탄도
힘은 유한하고 질도 같지 않다. 가령 1백근을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은 2백근을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을 이길 수 없다. 2백근을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은 3백근을 드는 힘을 가진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즉 힘으로써 한다면 어찌 백전 백승을 기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힘에 대해서 힘으로 대항한다면 힘이 약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에게 절대로 이길 수 없지만 힘을 쓰지 않고 기를 쓴다면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도 이길 수 있고 게다가 기라는 것은 양성하면 할수록 무한하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문제이다. 이론적인 해석이라면 정신적인 기가 충실 향상하고, 극한대에 이르면 육체적인 힘에 대해서 백전 백승의 경지에 이른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합기도에서도 이런 힘이 아니라 기로써 기술을 쓴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계승하고 육체적인 힘에 대해 기의 힘 또는 호흡력이라는 무한한 힘으로써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호흡력은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 아무래도 정신적인 힘이라는방향으로 향하게 되는 듯 하다. 무술에서는 전통적으로 힘에 대해서 기로 이긴다는 하나의 사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전통위에 호흡력이 있는 것이고 손짓 하나만으로도 상대가 튀겨나가는 그런 신비적인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합기도 시범을 보고 있으면 조그만 손 끝이 닿아도 상대가 나가 떨어지는 일이 허다 하다.
최근에는 기의 신비가 무엇인가 하며 매스컴에서도 관심을 크게 갖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스승의 작은 손짓에 제자가 나가 떨어지는 그런 비기를 텔레비젼 같은 곳에서도 자주 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신비의 무술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과연 그것이 진짜일까 하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합기도에서는 기, 마음, 호흡력을 익힘으로써 그런 신비적인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기의 활용에 의해 무한한 힘을 내자면 기, 마음, 몸이 제각각이 되면 안된다. 기가 심기를 일으키고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통일이 되지 않으면 우스운 결과가 나오고 만다.
마음가짐에 따라 자신의 힘을 내는데 일관했을 경우 그 힘의 기능이란 의외로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 호흡력은 즉 기의 힘을 의미한다. 합기도란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심신의 묘미를 호흡력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기력 혼력 호흡력을 충분히 내야만 기술이 살아난다. 훈련에 의해 신체 전체에서 나오는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효과적으로 힘을 활용하거나 또는 기력이 충분하게 담긴 힘도 호흡력에 포함된다.
모든 단련은 호흡력의 양성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하겠다.
호흡력이 없는 기술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무술은 자기의 호흡력을 충분히 내면서 상대의 힘을 거슬리지 않고 움직이면 상대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
합기도에서는 자주 기의 힘, 기의 흐름이라는 말이 쓰이는데 이것이 합기도의 기술적 생명으로서 흐를 때 그 힘을 호흡력이라고 한다. 호흡력이란 자신의 단전 즉 자신의 몸무게 중심부분으로부터 기, 마음, 몸의 일치된 힘이 무슨 연마에 의해 흐르는 것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호흡 양성법의 단련은 합기도의 독특한 것이다. 게다가 이 호흡법 유무강약으로 기법과 심경의 깊고 얕음을 엿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흡양성법은 합기도의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호흡법이란 호흡력을 배양하는 방법이다. 호흡이 없는 합기도는 힘이 들어 가지 않은 씨름과 같은 것이다. 완력등의 근육적인 힘과 대조를 이루는 이 호흡력은 검을 치켜 올리고 내리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지 검을 치켜 올리고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체술적으로 상대에게 손목을 잡히고 나서 행하는 것이므로 대단히 합리적인 단련 방법이다.
대기를 몸 가득히 들이쉬어 자연과 한몸이 되었을 때 기력이 충만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호흡력을 발휘한다. 겨루지 않는 마음과 기술이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내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그것만이 합기도를 절대 불패의 무술이 되게 하는 것이다. 호흡던지기는 바로 합기도의 중추이다. 기, 마음, 몸이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그 참다운 기능이 발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