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는 저마다 독특한 결말이 기다린다.
그 예정된 길을 꾸준히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그 결말에 도달할 것이다.
-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중에서
‘그루밍족’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패션과 미용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는 남성 소비자 집단을 뜻하는 말입니다. 저도 오늘 백화점에서 토너와 수분크림, 피부에 탄력을 주는 퍼밍 제품을 구매했습니다. 제 일이 대기업을 상대로 한 영업이다 보니 외모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젊음은 기업 조직 내에서 철저한 자기관리의 지표로 작용합니다. 경제 불황이 지속되면서 노화(老化)는 곧 경쟁의 장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악덕이 되고 만 것이죠. 사회적 성숙과 현명함의 획득이란 고전적 의미는 퇴색한지 오래고, 젊은 외양이 주는 자기 효능감이 경쟁력의 요소로 자리합니다.
유진숙의 작품 속엔 노년과 청년의 시간, 이 두 개의 시간대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를 살펴볼까요? 초록빛깔 신체를 가진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세숫대야 속 깨금발을 하고 선 소년은 얼굴을 감추려 긴 실크햇을 썼습니다. 그의 몸을 씻기는 성인 남자도 보이네요. 둘은 원래 한 사람입니다. 씻기는 쪽은 어른이 된 작가의 모습이고, 소년은 내면에 잠재된 ‘성인아이’ 입니다.
작가는 어른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자기 속 존재에게 매를 들기보단 씻겨주는 쪽을 택합니다. 씻김은 치유이자 받아들임입니다. 내 안의 못난 자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퇴행과 성장으로 난 두 갈래 길 위에서 작가는 성숙을 받아들입니다. 산 정상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죽어버린 새를 안고 우는 노인의 모습도 있습니다. <시간 앞에서의 대화> 에선 백발노인이 엎드려 우는 남자를 위로합니다. 눈 속을 헤치고 오느라 버거웠을 남자의 삶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노년의 시선입니다. 청년의 머리칼을 자르는 노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호호백발의 이발사는 청년에게 말을 건 냅니다. “잘려나가고 다시 자랄 머리카락처럼 자네의 상처도 그렇게 아물 거네”라고.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연탄재를 개어 사용합니다. 연탄재는 젊은 날의 에너지를 소진한 채 하얗게 세어버린 삶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그 연탄재를 아크릴 물감에 개어 캔버스에 바르면 ‘두 개의 시간대를 관통하는 치유’의 그림이 됩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단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안도현의 시편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긍정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는 자신의 저서 <행복의 조건> 에서 성공적인 노화의 문제를 다룹니다. 노화가 곧 ‘상실과 쇠퇴’와 연결되는 요즘, 노화라는 말 앞에 ‘열정적인 삶과 성취’를 의미하는 성공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단연코 이 두 단어가 견고하게 결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930년대 후반 하버드 대학에서는 ‘행복한 삶의 원동력’을 발견하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하버드 졸업생 286명과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한 고등학교 중퇴자 집단, 지적 능력이 뛰어난 중산층 여성 집단 세 집단을 선정, 72년이 넘는 지금까지, 그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과정을 살펴보았죠. 하버드 졸업생이라고 해서 인생에서 현저한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니었고, 슬럼가의 중퇴자 중에서도 정신적, 물질적 성공을 거둔 사람의 비율이 또한 높았습니다.
조지 베일런트는 47세 무렵까지 형성한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는 결과에 도달하는데요. 이외에도 주관적으로 건강상태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성공적인 노화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라는 점. 과거에 일어난 불행한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 우연한 만남을 통해 더욱 행복한 노년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지 베일런트는 연구 집단과의 인터뷰 결과를 토대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화를 위한 행복의 조건은 고통에 대응하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는 것과 노화와 더불어 주어지는 3가지 과업을 이행하는 것”이라 최종 결론을 내리지요.
방어기제란 스트레스나 불안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숨기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옳고 선한 것만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악하고 부정한 것은 모두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태도인 ‘투사’는 가장 대표적인 방어기제 중 하나입니다. 지역감정이나 마녀사냥은 바로 이 투사의 산물이지요. 반면 고통을 예술로 변화시키는 승화나 성숙한 유머감각, 자기가 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풂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이타주의, 욕구의 억제를 통해 연기하는 것은 건강한 방어기제입니다. 여기에 노화와 더불어 완성해야 할 과업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조언가가 되어 다른 개인이나 후배를 돌볼 수 있으며, 과거의 전통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단체를 조직하거나 모임을 이끄는 의미의 수호자를 자처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통합과업에선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하나뿐이며 죽음이란 국면을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건강(Health)의 어원이 전인성(Wholeness)에서 왔다는 사실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결국 전인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겠죠. 저는 세월이 흘러 노년기에 접어들 때,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의미의 수호자’입니다. 패션 아카이브를 만들어 옷을 통해 각 세대의 정신적 풍경을 설명하고 다른 세대들과 소통하고 싶었거든요. 여러분은 어떤 과업에 끌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