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洗禮
세례는 신약시대부터 발생하여 유대 사회에 엄청난 사회적 종교적 파장을 일으켰고 그리스도교에 계승되어 현대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례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성사라고 하며 이 성사를 받으면 원죄原罪는 물론 본죄本罪와 그에 따른 잠벌暫罰까지 모두 용서를 받는다는 성사라고 가르친다.
오래 전 얄팍한 교리 실력으로 이것을 설명하자, 유명 연구소 한 박사님이 표정이 요상하게 변하더니 헛웃음을 짓곤, “그러면 내가 오늘 밤 열두시시까지 화끈하게 죄를 짓고, 내일 세례로 모든 죄를 용서 받을란다‘라고 황당하게 대답하여 부끄러운 교리 전달에 두고두고 미안했다.
역사상 세례 운동을 가장 먼저 선포하고 시행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와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는 “죄사함 즉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다.(마르1,4-5;루카 24,47) 마태오는 ‘하늘나라 도래를 위함’(마태 3,1~12) 또는‘구원)의화를 이루는 것’(마태 3,15)이라고 한다.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같은 맥락을 제시하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은 세례를 복음서 마무리에서 다시 반복하면서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다.(마태 28,16-20)
사도 베드로는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라고 한다(1베드 3,21). 사도 바오로는 더 간단 명료하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로마 6,3;갈라 3,27)이라고 제시한다.
세례가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것이라면, 전체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관계에 즉각적으로 연결되고 적용된다. 그리고 그 고리는 ‘할례’와 ‘속죄’ 정결례‘로서 세례는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종합세트와 같다.
한처음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사람은 참으로 완전하여 지극한 조화와 평형을 이룬 세계였다. 따라서 일련의 할례 정결례 세례등이 필요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원죄를 짓고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와 결합이 무너지고 멀어진 인간은 그 회복이 필요했다. 따라서 요청되는 그 첫 번째 장치가 할례割禮이다. 할례란 하느님과 맺는 계약이다. 히브리인으로 태어난 모든 남자는 태어난지 8일만에 신체의 가장 중요한 생식기인 포피를 벗겨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것으로 유다 민족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자신이 완전하게 하느님께 속한다는, 하느님의 사람 됨을 할례자의 물리적 몸에 새기고 기억하며 살기 위한 예식이었다.(창 19,9-14) 이러한 할례는 예수와 초기 교회시대까지 이어져 ’할례없이 구원없다‘는 완고한 폐단을 낳기까지 하였다.(사도 15,1)
그러면 살아가면서 일상과 경신례의 영역에서 저지른 잘못과 죄로 ’거룩함)정결함‘을 상실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 잘못과 죄를 벗기 위한 장치가 ’정결례와 속죄 예식‘이다. 각종 영역에서 정결례를 위한 규정은 허다하게 있었고, 요식 행위를 갖추어 정결례를 치르면 부정 즉 죄와 잘못을 용서받고 정결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공동체에 동참할 수 있었다.(모세 오경 특히 레위기참조) 이러한 정결례는 죄와 잘못이 발생할 때마다 수시로 빈번하게 행해졌고 사제가 담당하였으며 오랫동안 히브리인들 사회를 통제하면서 신약시대까지 이어졌다.
정결례보다 한층 위중한 것으로 ’大속죄일과 속죄 제사‘가 있었다. 大속죄일은 매년 한 번 일곱째 달 초열흘날에 있었다. 이 날 모든 구성원은 일체의 노동을 금하고 속죄예물을 준비하여 이 예식에 동참했다. 권위를 인정받은 대사제가 지성소 안에 들어가 사제 집단,하느님 백성전체, 통치자등 각계각층의 구성원들을 위한 속죄 제사를 거행했다.(레위기 16장 참조) 또한 하느님께 경신례를 담당해야 하는 사제들의 임직식을 위해서도 속죄 예식이 거행되었다.(레위기 8,34)
신약성서에서 속죄일과 속죄 예식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해하며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하느님이요 사람이신 예수께서 단 한 번 거룩한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벗겨주셨다고 한다.(로마3,25;8,3;히브리2,17;1요한 2,2;4,4)
신약시대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할례,속죄제,정결례‘ 세 가지 규정을, 단 하나 ’세례‘로 통합하여 전환했다. 그것도 힘들여 공들여 물적 예물을 준비하고 갖출 필요 없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회개만 하고, 요르단 강으로 자신을 찾아와 세례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천년 이상 유다인 공동체에서 목숨처럼 숭배하고 강조하던 경신례가 하루 아침에 요절복통한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도 돈벌이 하나 되지 않는 ’경신례‘로, 과연 이 운동을 시작한 세례자 요한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나다를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득권 세력의 종교사회 선동죄 목 잘려 죽어야 하는 참수치명 사건이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무친 외경심으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어느 몹쓸 통치자와 상간녀의 생일 축하 농단에 의한 것으로 처리한다. 예수님도 당시 종교사회 전반에 복음을 선동하시는 죽을 죄를 지셨는데, 그분의 죄목도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정치적으로 제한되는 죄목이었다. 다른 듯 비슷한 두 분의 죄목과 희생적 죽음에 대해 복음사가들의 차별화된 기록을 깊이 들여다 볼 이유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1월 8일 PM 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