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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이 무색할 정도로 급속하게 예배의 현장들이 오염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예배의 갱신과 성경적 예배를 외치는 만큼, 다른 한편에서는 예배의 심각한 훼손이 자행되고 있다. 더구나 이러한 예배의 심각한 오염과 훼손은 모두 교회 내적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며, 나아가서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회자들에 의하여 이런 현상들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인 두 방향에서의 시도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배의 역사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특별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역사를 되짚어보며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회복하거나 혹은 더 발전시켜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구약 시대의 예배
만일 우리가 구약 성경의 내용을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구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예배에 관한 사실들에서도 많은 부분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 가운데, 특별히 오늘날의 현대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적인 배경들과 그 당시의 여러 형태의 종교적 행위들을 과거의 유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 단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한편으로는 정당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모순에 빠지게 한다. 구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오늘날까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과거적인 행동들은 오늘날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물론 구약적인 종교적 유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로 말미암아 오늘날의 교회와 실제적인 관계가 없을 수 있다. 가령 제사 제도라든가 혹은 제사장 제도들처럼 그 시대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하지만 구약 시대의 행위들도 하나님의 분명한 의도와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어져온 것들이다. 물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성취된 경륜들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역사 속에서 허용되고 진행되었던 많은 종교적 행위들은 그 자체로도 충분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있었던 다양한 종교적 행위들(오늘날 유대적인 것들로 간주되는 것들까지도)을 연구하는 까닭은 그것을 다시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한 것들을 명령하시고 허용하신 의미들을 연구함으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유익들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과 가정을 통한 가장 원시적 형태의 예배
우리에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사실들에 관해 유추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특별히 하나님과 첫 사람 아담의 가정 사이에 있었던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정적인 예배에 관해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첫 번 살인자인 가인과 관련한 내용이 바로 예배와 관련된 부분이라는 사실에 적이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가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 까닭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히11:4). 히브리서의 언급대로라면 가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믿음으로(믿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함에도 예배드리는 영적인 자세가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거절당한 것이다(창4:3~5). 물론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서 11장의 전체 내용처럼 믿음이라는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드렸다는 사실과 함께 그들의 예배 이면에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는 결국 예배라는 것은 사실 첫 사람인 아담의 가정에서 그 영적 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단초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비록 그 당시의 예배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배하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진다.
창세기 4장 26절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과거에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소수의 사람이나 가정에서의 예배는 보다 보편화 되었고,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예배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1)
족장 시대의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생활을 단을 쌓았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예배하는 생활을 충실하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성경의 기록들은 아브라함이 유목을 하면서 옮겨가는 지역마다 가장 처음에 한 일이 하나님께 예배 할 마땅한 장소를 찾아 예배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창12:7,8, 13:4,18, 22:9 등 참조).
같은 시기에 살았던 욥의 경우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욥의 경우에는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 예배를 주도적으로 드리는 가정에서의 제사장 역할을 감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경건하게 예배하였다(욥1:5 참조). 그리고 이러한 족장들의 예배 신앙은 이후 세대들에게 영적 유산으로 전해졌으며, 특별히 아브라함의 족보를 통해 야곱(이스라엘)과 그 자녀들에게까지 전수되었다. 따라서 성막이 만들어지기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었다.
성막을 통한 공동체의 예배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만드시고,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 기록들은 개인이나 한 가정의 역사를 다루기도 하지만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예배의 경향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처럼 개인적인 예배도 드릴 것이지만 출애굽의 역사부터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로서의 예배를 더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위 시내산 사건(출19장~24장 참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신앙 공동체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그 기초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웨버(Robert E. Webber)는 이 시내산 사건 속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의 만남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들이 있으며, 이 요소들이 공중 예배의 본질로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예배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2)
성막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예표라는데 공감한다.3)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출40:34~35)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인식하였다(출24:4~8). 제사장을 두고, 여러 절기와 매주 안식일을 지켜야 했으며, 매년 속죄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기념하는 예배도 드려야 했다. 이러한 예배의 규격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자가 많아지고 좀더 체계적인 예배 모범이 필요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들이 개인차에 의하여 중구난방으로 드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또 다른 의미도 숨겨져 있다.
신앙 공동체의 광범위한 성전 예배 생활
성막이 광야 생활의 종결과 함께 성전으로 대치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광야 생활에서 한 장소에 완전한 건축물을 짓는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성막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분명한 기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거의 그대로 성전에서의 예배와 수평적인 대체를 이루었다.4)
하나님은 정착하고 왕권을 중심으로 강한 나라를 이루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성전 건축을 허락하셨다. 물론 성전이 성막과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유사한 면들이 있는데, 사실상 중요한 신학적 의미나 내용들은 성막과 달라진 부분이 거의 없다. 하지만 광야 생활 속에서의 성막 예배보다 성전에서의 예배는 더 조직화 되었으며 성막에서보다 더 자주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대인의 절기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이행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부터이다.5)
뿐만 아니라 의식적(儀式的)인 면에서도 한층 짜임새 있는 예배로 변모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시편 찬송의 전통은 아마도 성전에서의 예배에서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다윗은 이러한 일들을 미리 준비하였다. 찬양대를 준비하고 아삽을 그 지휘자로 임명하였으며(대상16장), 그 규모는 악기 연주자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합쳐 약 6천여 명의 대규모 조직이었다.6)
실제적인 예배 규모를 위한 회당(Synagogues)에서의 예배
이스라엘 민족들의 가장 쓰라린 추억은 성전의 파괴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의 멸망(포로)과 관련되어 있다. 두 개로 갈라진 민족은 끝내 다른 이민족들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성전도 역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B.C. 586년).
회당이 언제 어떻게 탄생되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포로기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행위를 위한 공간적 개념, 즉 성전을 대체할 매우 지역적이고 규모가 작은 공간이 필요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말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주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 세워진 회당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론이고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이해되었다.
회당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종교와 교육과 사회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으며, 과거 제사를 통한 성막과 성전 예배 의식과는 완전하게 구별되어졌다. 복잡하고 다양한 제사 방식이 회당에서는 매우 간단한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포로기 이후, 더욱 엄밀하게 말한다면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에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전승⋅유지 하는 것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결과로 의식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과정으로 축소되었다. 거룩한 직분이나 예식들은 사라지고 말씀을 읽고 이해하는 것에 매우 중점을 두게 되었으며 찬양(신앙의 확인)과 기도, 가르침(읽고 해석하고 설교하는)의 순서로 회당 예배가 시행되었다.7) 회당 예배는 신약에 와서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정기적으로 회당 예배에 참석하셨으며(눅4:16), 웨버는 이러한 회당에서의 예배가 초대 교회의 기독교 집회에 쉽게 전용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8)
신약 시대의 예배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에서 약 400여 년간의 중간기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이 성경의 역사는 신약의 시대로 들어간다. 중간기의 역사가 마치 중세의 그것처럼 다소 암울한 상황에서 다분히 묵시적인 내용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지만, 웨버의 말처럼 연구자들 스스로가 무능함을 느낄 정도로 부정확한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9) 따라서 신약 시대의 예배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들은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용어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유연성을 가지고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Dr. James F. White) 박사는 정경 자료 외에도 비정경 자료들로서 디다케(Didache, 1세기 후반이나 2세기 초반에 시리아에서 기록된 것으로 여겨지는 문서), 90년대 후반에 로마에서 기록된 듯한 클레멘트 제1서신(Clement's First Letter), 혹은 115년에 순교한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서간들과 112년경 비두니아(Bithynia)의 로마 총독인 플리니(Pliny)와 같은 이방인들의 서간들도 매우 중요하고 유용한 자료들이라고 말한다.10) 그런 면에서 특별히 디다케(Didache)의 경우에는 온전한 예배 형식 자체를 우리에게 제공해주지는 못하지만 성례전이나 혹은 신약 시대의 여러 형태의 예전적인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의 글은 주일에 관한 디다케(Didache)의 교훈이다. 우리는 이 속에서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어떤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했는지 약간의 유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자기 동료와 더불어 분쟁거리를 가진 모든 이는, 그들이 화해할 때까지는, 여러분의 제사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여러분의 모임에 함께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는 깨끗한 제사를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위대한 왕이며, 내 이름은 백성들에게 놀랍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도다."11)
뿐만 아니라 고펠트(Leonhard Goppelt)는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사도시대의 예배와 교회 생활의 정황을 선교와 메시지, 그리고 세례라는 패러다임의 반복으로 설명하였는데 이 역시 신약 시대의 가변적인 상황 속에서 예배의 흔적을 찾은 중요한 모티브(motif) 임에 틀림이 없다.12)
이러한 면들을 종합해 볼 때 신약 시대의 예배와 교회 생활의 전반적인 흐름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회당을 그 장소적인 중심으로 활용하면서 과거 회당의 예배와 유사한 방식의 말씀의 선포들이 행해졌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유대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외면적인 형식에 있어서 유사한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 기간을 통해 기독교의 독특한 영적인 문화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 승천 등은 신약 예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제공해 주었다.
구약이나 중간기에는 찾아볼 수 없는 세례 의식이 정형화 된 것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예배와 모임을 갖는 것 등은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변화들이다. 비록 회당에서의 예배가 신약 시대까지 지속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약에서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기독교 예배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 유대교와는 다른 양상들로 변화와 발전을 해 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자연스럽게 기인한 것이다.
웨버(Robert E. Webber)는 이러한 신약 성경 예배의 기초를 그리스도에게서 찾는다. 예배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와 예수 그리스도 현현 자체가 중요한 신약 성경의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대한 경외(눅19:45~48)나 안식일에 정기적으로 회당에 가신 일(눅4:16), 그리고 이스라엘의 절기들에 참여 하신 일들(요7:2; 10:22)은 과거의 예배 행위를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은 한번도 동물 제사를 드렸다거나 용인하셨다는 어떠한 구절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웨버의 설명이다.13) 또한 이 시기에 아람어 계통의 예배와 헬라적인 기독교 예배, 그리고 이방인들의 기독교 예배들이 존재하며 나름대로 발전해 나갔다는 것도 그의 견해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는 이런 신약의 전통들을 교회 안에서 새롭게 갱신하여 점점 유대교와의 차별성을 두기 시작 하였다.
신약 교회의 예배에 관한 결론적인 접근으로서 웨버는 예배의 내용(content, 그리스도의 전 생애)과 예배의 구조(structure, 말씀과 성례전), 예배의 맥락(context, 예배하도록 부르신 교회 안에서의)으로 구분하여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결론짓는다.14)
초대 교회의 예배
처음 교회의 모습은 유대교와 외면적으로 달라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흡사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가령 유대교의 분파(행24:5; 28:22)나 혹은 유대교 이단(행24:14)으로 생각될 정도로 기독교는 독특성을 나타내 보이지 못하였다. 주변의 시각도 이와 유사했다. 심지어는 로마에서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을 유대교 내부 분파의 갈등으로 보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내면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메시아관이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며, 반대로 기독교 신자들은 이미 메시아가 세상에 오셨다고 믿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그 당시에 단순한 하나의 요인에 불과하였다.15)
또한 바울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도들은 사정이 허락하는 한 회당에서 모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초기의 많은 개종자들의 종교적인 배경은 당연히 유대교이며, 유대교로 개종을 생각하고 있었던 이방인들도 있었다(행10:22; 13:16). 심지어는 제사장의 무리들도 교회로 나아왔다(행6:7). 이러한 과정에서 초대의 교회는 일부러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하는 일에 열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다.16)
3세기의 예배
그러나 일단 교회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선교에 임하면서부터 교회는 조직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다. 초대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조직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신약 교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초기의 신앙을 전파해 나갔다. 장소 뿐 아니라 예배 행위 자체도 회당 예배의 근간을 그대로 차용하였다. 성전과 회당을 통한 여러 부분에서의 유대적인 유산들이 후일에 독특한 기독교적 방식들로 대치되기는 했지만 여러 면에서 초기에는 큰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곧 규모와 조직 면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나가는 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과 신앙 방식을 마련해야만 했다.
히폴리투스(Hippolytus)의 저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은 그 당시의 예배 의식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예배가 감독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17) 뿐만 아니라 교회 안의 다양한 의식들도 기록하고 있는데, 감독들의 서품과 관련한 것들이나 봉헌에 관한 것, 장로들에 관한 내용과 기도를 드려야 할 때 등 매우 세세한 부분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언급한 대로 교회가 조직화 되고 있는 증거이며 한편으로는 기독교적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필연적인 수단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증가하는 교회를 통일성 있게 이끌어 가는 것과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사한 기독교나 이단들의 증가도 이러한 교회의 조직적인 통일성을 요구한 또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성이라는 것이 모든 부분을 포괄하는 용어는 아니다. 예배의 많은 부분들이 고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혼란을 막기 위한 고정된 부분(성경봉독, 기도, 문안, 수르숨 꼬르다,18) 상투스19) 등)들 외에는 좀더 자유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찬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예식들은 더욱 그런 분위기로 발전해 나갔다.20)
기독교 공인 이후의 예배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80-337) 황제의 기독교 공인은 교회의 모든 면에 변화를 가져왔다. 제국 내에서 공인된 종교는 결국 제국의 종교가 되기에 이르고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였으며, 신조들을 통하여 신학적 규정을 확고히 하는 한편 보다 확고한 예배 형태를 발전시키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성경을 필사하는 일과 교회당 건물을 건축하는 일들이 장려되었다.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Sinatic and Vatican codices) 등의 사본들이 바로 이때를 즈음하여 제작되었으며, 일반 로마의 주택 모양을 한 로마식 교회당인 바실리카(Basilica, 성 베드로 바실리카와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당이 바로 이때 세워졌다)들이 세워졌다.21)
시간이 좀더 경과하면서 교회당의 모습은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과거 초대 교회를 향한 박해를 피하여 은밀하게 가정 중심의 예배를 드리던 모습에서 탈피하여 여러 형태로 고안된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이방 신전이나 혹은 대법정에서 변형적인 모습으로 드리던 예배가 독특한 예배만을 위한 공간으로 대치되었다. 설교단의 모습이 변한 것은 물론이고 찬양대를 위한 구별된 공간이 마련되었고, 세례를 위한 구별된 웅덩이(pool)를 갖춘 독립 건물도 들어서게 되었다.22)
그러나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설교에 있었다. 물론 이전의 예배 의식 속에도 설교는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가장 초기를 제외하곤 거의 대중적인 의미의 설교가 불가능 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에 대한 제국의 핍박 때문이었다. 은밀하게 드려지는 예배에서 오늘날 같은 형태의 설교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공인되고 후기 교부들의 시기가 왔을 때 설교는 매우 발전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교를 위한 일련의 웅변법과 수사학적 연구들이 이어졌으며, 성경을 설교하는 내용의 풍성함을 위한 주해의 발전이 뒤따랐다.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이고 내용까지 풍성했으며, 오늘날의 강해 형태처럼 일년 내내 성경 분문이 설교되어졌다. 어거스틴(Augustin), 암브로스(Ambrose of Milan), 제롬(Jerome), 황금의 입을 가진 자라고 알려진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등의 설교자들은 바로 이 시기의 위대한 설교자들이다.23)
이와 더불어 공인 이후의 예배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예전 의식의 풍부함을 들 수 있다. 특히 동방 교회에서의 예전 의식들은 매우 화려하고 풍부하였으며 고도의 의식적인 면들과 조화를 이루었다. 천상의 예배를 이 땅으로 내려오게 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들은 신비적인 결합을 보여주려는 의도와 함께 회중들에게 시각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를 위하여 상징이나 기호들이 매우 폭넓게 사용되기도 하였다.24)
서방 교회의 예전 의식은 동방에 비해 매우 빈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방의 예전 의식들은 대부분 로마의 그것에 의존했는데, 로마는 특별히 실용적이 사고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이 예배에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으며, 동방교회처럼 지나치게 의식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차분함과 단순함이 로마교회의 예전 의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교회의 단순한 장엄함에서 생기는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렬한 느낌과 경외감은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5)
비록 성례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까지의 예배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설교에 대한 분명한 의식적 접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 의식(특별히 성례전에 대한) 자체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고 하겠다. 교부들을 통한 설교의 연구와 실제 예배를 위한 다양한 의식적 접근들이 예배를 매우 풍부하게 만들었으나 한편으로는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들이 모색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예배 하는 행위들을 신비적인 차원으로, 성직자들만의 전유물로 만든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세 교회의 예배
중세의 예배를 논의 한다는 것은 매우 비판적인 입장으로 우리들을 이끌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배의 전형들과는 너무 괴리가 있는 현상과 의미들이 중세를 이끌어 왔으며, 심지어 라틴 교회의 경우 오늘날(1967년)까지 여전히 그러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사(missa)라고 일컬어지는 일련의 제의(祭儀)는 중세 기간을 걸쳐오면서 매우 정교하게 변화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러한 정교한 변화는 사제와 회중의 거리를 멀게 하는 단절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미사(missa)
흔히 중세의 예전 의식을 두 가지의 경향으로 나누곤 하는데, 하나는 옛 프랑스를 지칭하는 골 방식의 예배 의식(the Gallican rite)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 방식의 예배 의식(the Roman rite)이다. 골 방식의 예배 의식은 로마 방식의 예배 의식보다 훨씬 다채롭고 정교하며 화려하였다.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확산된 이 예배 방식은 7세기를 즈음하여 확장되어 나갔는데 9세기경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나갔다. 특히 로마와는 달리 골의 예배 방식에서는 일반 회중들의 적절한 참여가 있어야 했는데, 회중의 응답이나 음악으로 진행되는 순서 등이 회중의 위치를 중요하게 하였다.26) 하지만 9세기 경부터 페핀(Pepin)과 샬마뉴(Charlemagne)의 간섭으로 골 의식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비해서 로마 방식의 예배 의식은 매우 간단한 것처럼 여겨진다. 골 방식의 그것들보다 현저히 짧은 예전 의식은 매우 간단하여 기도문들도 3~4행을 넘지 않는다. 이런 단순성을 강조하는 예전 의식에서도 사제의 입당이나 복음서 봉독 시의 찬송은 매우 다채롭게 진행되었다.27) 하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로마 교회는 특유의 간결함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골 방식의 예배 의식을 많은 부분에서 본받았기 때문이며 후기로 갈수록 성례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늘어나면서 그것을 미사 안에서 늘 재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미사는 사람들에게 시각적인 참여를 요구하였다. 함께 회중이 동참한다기 보다는 멀리서 관찰하고 바라보며 관람하는 예식으로 변하게 되었다. 소리 없이 시각적인 면으로 치중하며 가시적인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28)
로마 교회의 미사 전문(Canon)은 로마의 예전이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게 신비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미사 전체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만찬 시에 행하신 것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입당에서 마지막 송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만찬에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이적(異蹟)과 신비로 이해되었으며 신비적인 부분을 연출(演出)하게 되었다.29)
신비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배에의 임재를 강조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들 자체가 곧 목적이 되어버림으로써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예배에 대한 올바른 생각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예배 의식 자체를 신비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집례자를 거룩하게 보이도록 하거나 신비롭게 여기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다반사였으며, 의례적인 정결과 범접할 수 없는 상태나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강조 등으로 일반 회중들을 예배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였다.30)
예배의 순서 가운데 찬양을 하는 것에서도 일반 회중들은 소외되어 갔는데, 이것 역시 예전 의식을 정교하게 하면서 교회 음악 분야의 수준을 일부러 높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예배 자체가 거룩하고 경건하기 때문에 실수나 오차가 용납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예배 중에 특히 찬양의 순서들은 기교적인 것으로 대치되었다. 따라서 찬양의 수준은 매우 높아지게 되었고, 예배의 순서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회중의 참여가 줄어들고 기교적인 부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현저하게 감소하게 된 것이다.31)
또한 예배의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전 의식 자체에 사용하는 언어를 라틴어로 고정하였으며, 이 역시 회중들을 예배에서 분리해 내었다. 회중들은 집례자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말의 혼탁한 상황에서는 집례자들 스스로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의 뜻도 모를 정도였다. 언어의 구별이 성직자들에 대한 신비적인 인상을 더해 주기는 했지만 교회는 결국 성직자 계급 자체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교회가 구원을 나누어 주는가 하면 성찬 예식은 구원의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32)
성찬 예식에 대한 지극한 강조점들은 회중들을 극단적으로 성찬에서 멀어지게 하였으며, 신비적인 성찬 예식의 진행은 화체설33)로 발전하게 되었다. 거룩한 성체를 함부로 할 수 없는 까닭에 평범한 회중들은 성찬에 참여 할 수 있는 기회를 일년에 네 차례(성탄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당해 교구의 수호 성인절)로 제약받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나마 부활절에는 성찬에 평신도들이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34)
반면에 미사 자체는 매우 자주 드릴 수 있도록 수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소위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祝日)이 매우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미사의 횟수가 경건의 척도로 여겨졌으며 가능한 한 최대의 미사 집례가 요구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성직자의 수적인 증가도 뒤따랐다. 소위 사적인 미사라고 일컬어지는 미사들은 사람들의 임종을 위한 미사를 비롯하여 사사로운 개인적 일까지 포함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도적의 체포와 잃은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도 미사를 드렸다. 이 같은 사적인 예배의 증가가 교회의 영혼에 심대한 상처를 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35)
성인들에 대한 기념 축일은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는 축일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순교자들이나 지방 교회의 순교자들에 대한 성인화(聖人化)가 뒤따랐으며 이들에 대한 기념절기들은 교회의 달력을 채워나갔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리아에 관련한 축일이 1년 동안 30일 정도까지 있는 경우도 있으며, 성인들에 대한 숭배는 후일에 미사와 교회의 여러 일과들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36)
성사(Sacramentum)
중세 교회의 제도적인 모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사 제도이다. 성사 제도는 오래전부터 계속 되어온 교회의 규범이다. 오늘날 개혁교회에서는 교회의 표지로서 성찬과 세례 의식만을 행하고 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일곱 개의 성사를 상황과 때에 따라서 행한다. 이러한 성사가 오염되고, 성사를 통한 성직자들의 오염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개혁교회에서는 모든 성사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그 가운데 두 가지만을 성경적 근거가 있는 성례(聖禮)로 받아들이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행하던 일곱 개의 성사는 모두 각각의 특성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를 포괄하는 성사의 일반적인 목적은 죄의 치유와 영적인 완전함에 있다.37) 일곱 개의 성사를 여러 형태로 나누기도 하는데 세례(baptismi), 견진(confirmationis), 성체(eucharistiae), 고해(poenitentiae), 병자(extremae unctionis)는 육체적인 개별적 성사이며, 신품(ordinis)과 혼인(matrimonii)은 사회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성사로 구별하기도 한다. 세례성사와 신품성사, 고해성사 등은 수단의 필요성의 요구에 따른 성사이며, 나머지는 규범의 필요성에 의하여 요구되는 성사들이다.38)
이렇게 7개의 성사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어그러진 현상에 대한 일련의 치유(治癒)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는 개별적인 성향에 있어서 죄에 대한 치유는 물론 영적인 생활의 결핍이나 영혼의 연약성, 혹은 그 섬약성(纖弱性), 타락이나 타락의 흔적에 대한 개선 또는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과 또한 사회적인 성향에 있어서 군중의 분열이나 죽음으로 운명지워진 일상의 결핍 등에 있어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39)
세례성사란 오늘날 개혁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세례의식과 같은 것이다. 개혁교회에서 일반적인 중생의 표시로 세례의식을 행하고 한편으로 중생한 자의 거룩한 삶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성령세례가 있는 것처럼 가톨릭에서도 성령의 능력과 작용 하에 이루어지는 원의의 화세(baptismus flaminis)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하고 의미하는 피의 성사(baptismus sanguinis, 血洗)가 있다.40)
견진성사는 건강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성례이다. 이때 집례자는 기름을 이용하는데 흔히 그 기름을 성유(oleum sacrum, 聖油)라고 한다. 견진성사는 이미 세례성사를 받은 자만이 참가할 수 있는 성사로서 성령의 도우심에 의하여 집례된다. 그렇기 때문에 견진성사는 성령에 의하여 힘이 부여되고 성화은총(聖化恩寵)이 부어진다. 이 성사는 싸울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성사로서 영적인 힘과 능력을 공급해 줌으로 그리스도인이 속한 삶의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41)
성체성사는 개혁교회에서 유지하고 있는 성찬(聖餐)을 의미한다. 개혁교회와 다른 측면은 바로 성사에 사용되어지는 빵과 포도주의 재료와 그것의 변화에 있다. 가톨릭에서는 기념이나 상징, 혹은 모형적인 성찬을 거부하고 실제로 빵과 포도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하여 실제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음은 이러한 신앙을 잘 표현한 글이다:
만일 신앙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라면 그리스도 신앙의 완전함은 다만 신성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마저도 감추어져 있어야 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계시지 않고 다만 예를 들어 모형이나 상징만으로 계시다고 말한다면 이단(異端)을 주장하는 것이 된다.42)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를 이용하여 주장되어지고 있으며,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으로는 실제로 알 수 없으며 더구나 이러한 성사를 깨닫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이 있는 신앙인만이 가능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고해성사란 흔히 참회성사라고 불리는 성사로서 개혁교회에서는 이러한 성사가 없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필요한데 이것은 이미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해 어느 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삶 가운데서 계속되어지는 세례 이후의 죄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구원의 필요성을 위하여 세례 이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고해성사제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에 의지한다는 점과 그것이 행위를 통하여 보여 진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고해성사의 질료는 뉘우치는 감각적 행위다. 즉 통회(痛悔), 고백(告白), 보속(補贖) 등의 행위다"라고 말하다.43)
병자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에 근거하여 유지되고 있는 성사이다. 흔히 병을 앓고 있으며, 영적으로 병든 사람, 즉 원죄나 사죄의 후속적 결과에 관련된 사람, 또 그 잔재물인 영적 연약함에 감염된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다. 세례가 영혼과 육체를 씻는 것처럼 이 병자도유(extrema unctio, 病者塗油)는 영혼을 낫게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요 이차적으로는 육체의 질병을 낫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44) 그러나 미친 사람이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병자도유가 허락되지 않으며, 특히 건강한 사람은 물론이고 약간 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도유를 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흔히 병자성사를 '최후의 도유'라고 말한다.45)
신품성사는 오늘날 목회자들을 임직하는 개혁교회의 임직식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가톨릭에서 서품을 받은 자는 다른 사람들을 신적인 것에 인도(引導)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 자로 공적임명을 하는 것이다. 서품은 오늘날 사제직을 준비하는 세 가지만 존재하고 있지만 중세에는 7개의 직무가 있다.46) 이들 직무는 각각 성체 성사에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고 각 직무의 서품마다 고유한 업무가 개별적으로 맡겨져 있다. 신품을 받은 사제들은 영성체를 할 수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신자들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제한된 법적인 판결권을 가지고 있다.47)
혼인성사는 거룩한 표지(sacrae rei signum)로서 하나의 거룩한 행사(聖事)로 생각되었다. 결혼은 흔히 어머니에게 자녀 출산과 교육이라는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의무(matrimonium)라고 불리며, 하나의 결합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하나이며,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자녀의 출산과 교육 그리고 상호간의 협력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혼인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하여 파기될 수 있으며, 이때에는 이혼장을 발행하여야 한다.48)
사실 중세 교회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십자군과 관련하여 시작된 사죄의 방법들이 후일 교회의 재산을 늘리기 위한 면죄부로 연결되었으며, 면죄부의 판매는 교회의 존속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로츠(J. Lortz)가 이단들을 일컬어 "다행한 과실(Felix culpa)"이라고 말한 것처럼 로마 교회의 중세 기간 동안의 치명적인 실수들은 오히려 개혁 교회를 낳게 하는 "다행한 과실"로서의 산파 역할을 하게 되었다.
종교개혁기의 예배
만일 종교 개혁자들의 가장 큰 관심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당연이 예배라고 답하여야 할 것이다. 중세적인 상황에서 교회의 모든 부분들이 개혁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가장 심각하게 혼탁해진 부분은 예배였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1520)"라는 글에서 미사를 일컬어 악습(abuse)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교회의 모든 부분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미사를 통해 표면화 되었는데, 맥스웰(W. D. Maxwell)은 이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미 16세기 초에 서방 교회의 성만찬 의식이 하나이 극적인 구경거리로 전락되고, 그 절정을 영성체의 시간에 두기보다는 화체의 순간에 두었으며, 거양성체에 있어서도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숭배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들리지 않게 말하면서 의식이 진행되고,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된 의식 그리고 정교하고 수준 높은 음악 등은 회중들이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극히 제한하였다. 회중들은 1년에 한 번 이상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웠다. 설교는 무덤 속으로 퇴락하고, 대부분의 교구 신부들은 설교를 하기에는 너무 무식하였다. 성경이 봉독되어져야 할 부분이 성자들의 생활담이나 전설로 채워졌고, 성경은 예배자들의 모국어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사의 헌금과 면죄부의 구입은 성직 매매와 착취의 근원이 되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시급하고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49)
결국 인문주의와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으로 무장한 일련의 개혁자들은 성경 중심의 교회를 원하였으며, 이러한 요구는 로마 교회를 분노하도록 하였다.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유럽을 기점으로 종교의 개혁을 부르짖었으며, 비록 많은 시간이 경과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의 수고와 헌신은 성경적인 교회와 신학을 표방하는 개혁주의적 신학의 틀을 형성하도록 인도하였다.
그러나 개혁 초기부터 모든 변화를 위한 준비가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초기 개혁자들은 예배의 기원과 원리들에 대한 기초적이고 역사적인 원리와 지식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 역시 오랜 시간동안 악습으로 일컬어지는 미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실제로 개혁을 시작하였을 때에는 예배의 분야 말고도 다른 분야들의 개혁도 시급한 과제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1세대들은 가장 불순했던 성찬에 대한 회복을 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개혁 신학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영적인 열정을 다하였다.50)
루터(Luther)의 예배
본인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루터는 종교 개혁의 선봉에 서 있었다. 그가 쓴 95개조에 이르는 일련의 질문들, 혹은 의견들(Anschlag der 95 Thesen)은 기존의 종교적 체계에서는 불경함 그 자체였으며 교회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비춰졌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들은 대부분 로마 교회의 부패와 관련된 것들이며, 또한 그 부패는 그 당시의 미사와 관련한 총체적인 것들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개혁은 중세 천년 동안 하나님과 성경에서 점점 멀어진 잘못된 예배와 부패된 교회를 개혁하도록 부추겼다.
처음에는 변화가 많지 않았다. 루터는 평신도들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차츰 변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520년에 루터는 자국어로 미사를 드려야 할 것과 화체설에 대한 반대,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 반대, 그리고 모든 미사에서 성만찬이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교회의 바벨론 유수).51) 그렇다고 루터의 입장이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칼슈타트(Carlstadt)가 1521년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이러한 시도들을 하여 현실화 하였을 때 루터가 다시 돌아와 원래의 위치로 다시 돌려놓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루터는 신자들이 혼란을 겪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동안의 미사를 개혁하는 새로운 미사 안내서를 발행해야 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예배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1523년 "미사의 형식(Fomula Missae)"을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루터는 이 책에서 대부분의 성찬 기도(canon)를 제거하였다. 하지만 원래 어떤 의미로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던 평신도들은 이러한 변화를 알지 못하였다. 사실 평신도들은 예배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곤 과거의 미사와 별단 다르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였다.52) 뿐만 아니라 미사 전문에 대한 입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었던 반면 일반적인 예배 형식들은 과거 중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53)
이어서 루터는 1526년 "독일어 미사(Deutsche Missae)"를 출간함으로 예배에서 완전한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였다.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약 1년 동안 임상을 거친 뒤에 출간된 이 책은 루터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구체화하였다. 그는 성찬식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성찬 제정의 말씀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종류의 성찬 기도들을 완전하게 없애버렸다. 그는 이전의 미사에 존재하던 성찬 기도(canon)를 "모든 사람의 하수구와 분뇨 통에서 끌어낸 혐오스러운 혼합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54)
하지만 칼뱅주의(Calvinism)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루터의 개혁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견진성사나 결혼성사, 그리고 병자성사와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 등이 거절되기는 했지만 과거의 것들이 무조건 모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여전히 중세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루터의 방식은 아디아포라(adiaphora)로 나타났다.55) 만일 이전까지의 관행이 공공연히 그릇된 점을 보이지 않는다면 루터는 그것을 용인하거나 수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루터파의 교회들에서는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높이 드는 행위(성체거양)나 성직자의 법의, 그리고 성상(聖像)이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는 경우도 많았다.56) 뿐만 아니라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나 고해(告解)를 남겨두기도 하였다. 루터는 "우리는 중도 노선을 취한다.⋯ 우리는 교황파도, 칼스타트파도 아니고 자유로운 그리스도파이다"라고 말하였다.57)
비록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을 중도적인 입장으로, 혹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들의 입장은 훗날의 성공회와 더불어 가장 친(親) 가톨릭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이를 잘 드러내 보여주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 중 일부이 내용이다:
우리 교회들은 그릇되게도 미사를 폐지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중에 미사는 거의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최고의 경외심 속에서 드려지고 있다. 거의 모든 전통적 의식들 역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드리는 미사는 성경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58)
루터의 입장이 다소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많은 개혁적인 일들을 감당했다. 찬송에 대한 루터의 공헌은 매우 특기할만하다. 루터는 찬송을 통하여 신자들이 바른 구원관을 갖도록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찬송의 주제이며, 찬송은 값없이 선물로 얻은 구원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의 고행의 속죄를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59)
또한 그는 세례에 대하여 "세상에 세례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아침마다 세수를 하며 자신의 세례를 상기할 정도로 세례에 대한 깊은 신앙(소위 "세례 신앙")을 유지하였다. 과거의 세례 의식, 특히 유아세례의 경우는 매우 미신적인 행동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령 집례자는 유아의 눈 아래에다가 입김을 불고는 십자가를 긋고 입에다가 소금을 넣어주고는 침과 진흙을 귀와 코에 쑤셔 넣었다. 가슴과 어깨에는 기름을 바르고 정수리에는 성유를 칠했으며 나중에는 세례복을 입혀서 불이 켜진 초를 두 손으로 쥐게 하였으며 이마에다가 재로 십자가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루터는 초기에 "독일어 미사(Deutsche Missae, 1526)"를 출판하기 전에 세례 의식을 올바르게 회복하자는 의미로 예배 의식서 가운데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한 "독일화 된 새 세례식 모범"(Das Taufbuchlein, ver deutscht, aufs neue zugerichtet)을 1523년에 출판하게 된 것이다.60)
루터의 개혁은 후일에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와 아이슬란드 등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 여러 지역에서 개혁이 진행되는 동안 비록 루터의 개혁적 성과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름대로의 특색과 사정에 맞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루터주의는 교과서적인 옹호와 추종보다는 자신들의 처한 상황 속에서 시도할 수 있는 개혁의 정도만큼 개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보다 보수적인 개혁을 원하는 여러 나라들이 이를 선호한 것으로 여겨진다.
츠빙글리(Zwingli)의 예배
루터보다 1년 늦게 태어난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종교개혁의 선임자인 루터보다 훨씬 강력하고도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만일 루터를 보수적인 인물로 칭한다면 츠빙글리는 진보적인 개혁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예배의 많은 부분을 과감하게 축소하였으며, 예배 의식을 간소화하였다. 자신 스스로가 음악가이면서도 심지어는 예배 가운데서 찬양대를 통한 예배 음악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중세보다는 평신도들이 성찬에 더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렇다고 다른 개혁자들처럼 매주 마다 성찬을 하도록 권면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일년에 네 차례 정도 정기적인 성찬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시도가 오늘날 개혁주의의 성찬 의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61)
그의 성찬에 대한 사상이 다른 개혁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성만찬 자체를 은혜의 방편(a means of grace)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정규적인 예배의 순서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을 자주 갖는다는 것은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가 이렇게 성만찬에 대한 일련의 자세를 견지한 것은 맥스웰이 지적한 것처럼 그가 스콜라적(Scholastic)이기보다는 인문주의자(Humanist)였기 때문이다.62)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와 서신을 왕래하였으며, 당시의 문학에 정통하였다. 또한 헬라어에 능통하였고 그의 성경연구는 과거의 학문들과 관행들에 비하여 비평적인 사고를 갖게 하였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교황 군대의 군목으로 봉사한 것에 대한 연금과 상을 받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흑사병이 돌 때 계속하여 취리히(Zürich)에 머물기로 결정할 정도로 깊은 헌신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었다.63)
1523년 루터의 "미사의 형식(Fomula Missae)"이 출판되기 몇 달 전에 그는 예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미사 전문에 대한 비판"(An Attack on the Canon of the Mass)을 출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미사 전문(canon)에 대하여 봉헌 기도로서의 이 기도가 얼마나 지지부진 한 것인지, 또 얼마나 모순적이며 희생 제사적인지에 관해 말하며 예배에 부적합한 것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가지고 개혁된 예배 의식(reformed rite)을 소개하는데, 대부분의 말씀에 대한 순서들은 가급적 그대로 보존하면서 성자들을 기념하는 축일들(saints days)에 관련된 순서들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성경봉독과 설교는 자국어로 할 수 있도록 주장하였다.64)
그의 입장은 2년 뒤에 다시 한번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1525년에 발간된 "주의 만찬의 활용법"(Action oder Bruch des Nachtmals)이라는 독일어 예식(German rite)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에서 츠빙글리는 그동안 잘못되어진 예배 의식이 오래 동안 지배해 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길이 열리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마치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유월절 의식의 정화(purified)되어 이후의 예배 의식이 바르게 변한 것처럼 주님의 만찬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집례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결국 취리히(Zürich)에서는 성만찬 때에 입는 특별한 제의(祭衣)나 음악이 사라지게 되었다. 성만찬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였던 것이다.65)
츠빙글리에 의하여 도입된 성찬에서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찬을 앉은 자세에서 받는 것(sitting communion)이며 다른 하나는 성찬의 횟수가 일년에 네 차례로 고정화 되었다는 것이다.66) 물론 그는 성찬을 중세의 미사보다 더 자주 가질 것을 원하였다. 그러나 규정된 횟수는 중세의 때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 네 번의 날짜도 과거와 동일하다(각주 34번 참조). 하지만 실제적으로 중세의 미사는 평신도들이 일년에 한 차례 정도만 참석할 수 있으나 츠빙글리의 경우에는 이 네 차례의 성찬의 집례가 현실적인 실제적 집례의 숫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극단적인 조처는 주일 예배에서 성만찬을 완전하게 분리함으로 성만찬이 비정규적 행사로 밀려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단순한 기념에 불과해 또 다른 극단적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츠빙글리는 예배 의식 속에서 음악적인 요소들을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그 자신이 숙달된 음악인이었으며 종교 합창곡(motets)을 작곡한 장본인이었으나 음악의 위치와 그 힘이 예배의 본질을 막는다면 그것을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영향으로 취리히에서는 1598년까지 음악이 사라지게 되었으며, 심지어 파이프 오르간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19세기까지 이러한 규칙이 존재하게 만들었다. 대신 그는 회중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시편 송가를 부르도록 하였으며 회중 찬송(congregation song)이 소개되었다.67) 이러한 과격한 과정을 거치면서 츠빙글리 자신은 물론 취리히가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많은 논쟁의 중심지가 된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칼뱅(Calvin)의 예배
칼뱅의 개혁은 이미 선임자들에 의하여 진행된 개혁들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일에서 시작하였다. 그는 이미 루터나 츠빙글리, 부처(Martin Bucer, 1491~1551) 등의 영향을 익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혁 결과들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가 선배이자 동료인 부처와 함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사역하였던 시기에는 이미 독일어를 말하는 개신교도들이 훌륭한 예배 의식을 통하여 예배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경험은 자신의 예배 모범을 만드는데 적절하게 참고하였다.68)
그는 1539년 말에서 1540년 초 사이에 첫 예식서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독일어 예배 의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었다.69) 이 예식서에는 회중 찬송을 위한 프랑스어 운율이나 멜로디로 된 몇 개의 시편 찬송을 포함하고 있으며, 나중에 1547년도 제네바에서 발간된 예배 의식까지 서서히 변화하면서 판을 거듭하였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예배 의식들은 과거에 비해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언급한 것처럼 그의 사상은 이미 있었던 종교 개혁의 전임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적당하게 차용하는 것이었으며 특별한 변화가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내면에는 다른 개혁자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형식적인 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칼뱅의 개혁적 특징은 화이트(White)가 지적한 대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련이 있다. 죄로 인한 인간의 구원과 그 구원의 은혜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성례전이라는 것이 칼뱅의 생각이다.70) 그는 하나님이 물질을 이용하시어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들을 주신다는 생각을 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지에 대한 여러 통찰들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교회론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71)
이런 그의 전반적인 사상은 제네바(Geneva) 시에서 현실로 적용된 여러 가지 내용들 가운데 가장 강조된 것들에서 밝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의회 의원들의 반대로 매주일 마다 성찬을 베풀지는 못하였지만 대신 강력한 성경적 적용을 모색하였다. 개혁자들 가운데 십계명의 생활로서의 적용을 그처럼 강조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1542년의 예배 의식서에서 의회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요구들을 표현하였다. 이 예배서의 죄의 고백 순서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을 말하도록 작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거행하는 때에는 죄의 긴 목록들이 낭독되곤 하였는데, 그 죄를 범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제명되곤 하였다.72)
뿐만 아니라 칼뱅은 자신의 예배 신학을 고대 교회로의 회귀를 통해 찾으려고 하였다.73)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경험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사상적인 교훈들에 힘입어 그는 나름대로의 예배의 표준을 만들었으며, 그 표준의 근거는 초대 교회의 예배 표준이었다. 그는 중세의 미사가 가지고 있는 비성경적 오류들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교훈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곧 고대 교회로의 회귀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 바로 "고대 교회의 관습에 따른 기도형식과 성례전 집례법"(The Form of Prayers and Manner of Ministering the Sacraments According to the Use of the Ancient Church, 1545)이었다.
칼뱅이 원하였던 것은 단순한 과거로의 시간적 회귀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가감없는 순수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원형이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 미사에 의하여 더럽혀진 예배 의식의 원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원리는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모든 것은 금하는 것으로 매우 강력한 원칙을 세우도록 하였다.74)
개혁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칼뱅은 자신의 의도가 도시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하여 교육에 매우 강조점을 두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개혁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예배의 의식들과는 달리 칼뱅은 오히려 예배가 거룩한 삶으로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예배를 위한 일상의 거룩함을 요구하는 그의 요구는 비록 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거나 혹은 자유를 억압하는 면들이 없지 않았으나 궁극적으로 그는 목적과 수단의 분명한 구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중세의 전통 속에서는 미사를 통하여 거룩해 질 수 있다고 믿었다면 칼뱅은 예배(성찬)를 드리기 위하여 삶을 거룩하게 살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성례전의 횟수보다는 성례전을 위한 준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그는 초기부터 계속하여 회중들이 매주일 성찬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서 무한한 죄인으로서 성찬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죄 때문에 배제되어야 하는 현실들 때문에 매주일 성찬을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성찬의 횟수보다는 성찬을 준비하는 과정에 더 중점을 두었다. 연 4회 치러지는 성찬을 위하여 일정 기간동안 준비 기간을 갖게 한 그의 시도는 결국 성찬에 있어서 성찬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지 되돌아 볼 수 있는 성찰과 회개, 경건한 삶의 모습 등을 촉구하는 개혁주의적인 특징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다.75)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인 면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장애들을 겪으면서 적절한 타협을 하였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그의 실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칼뱅의 속내는 이와 다르다. 가령 칼뱅은 자신의 저작 속에서 성찬을 매주일 한 차례씩 갖기를 희망하였다.76) 그러나 정작 현실적인 면에서는 성찬의 의식이 없는 예배도 허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네바에서는 일년에 네 차례만 성례전을 가져도 된다고 동의하였다. 또한 여러 예배 의식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후일에 삭제되기도 하였는데 1561년의 예배 의식 가운데 삭제된 "용서의 선언"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77)
그렇다면 이런 칼뱅의 유동적인 입장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형식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사람들의 심정적인 동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가 원하던 신학과 신앙의 경향은 예배의 성경적 견실성과 신학적 순전성(integrity), 신학의 명료성(intelligibility)과 단순성 등이다.78) 겉으로 드러나는 허식과 과장된 모든 것들은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79) 초기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상에서 획기적인 변화나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욕심 대신에 칼뱅이 택한 것은 성경적인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회중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신학 사상과 더불어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발견되는데, 사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 것은 신앙이 약한 사람들이나 개종해 오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까 양보한 것이다.80) 그렇다고 칼뱅이 성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것들을 양보한 것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용서의 선언"은 예배의 순서상 없애도 무관한 것들이다. 그가 양보한 것은 이처럼 존재하면 유익하기는 하지만 신자들의 신앙을 위하여 많은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걸림돌로서 작용할 소지가 있는 것들, 그 가운데서 분명한 성경적 원리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낙스(Knox)의 예배
오랜 유랑 생활을 호되게 치른 낙스는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을 위하여 수많은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는데, 심지어는 갤리선(galley)의 노예로 19개월 동안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적 모체는 물론 이미 기존에 존재하던 위클리프파, 루터주의의 유럽 확산, "제일 스위스 신앙고백집"(The First Helvetic Confession, 1536)을 스코틀랜드어로 번역한 조지 위샤트(George Wishart) 등에 의하여 유입된 스위스 쪽의 개혁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낙스는 제네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영국 쪽에서 건너온 많은 개신교도들을 직접 목회하며 얻게 된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의 흐름 뒤에는 칼뱅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낙스의 종교 개혁 이전에 스코틀랜드의 예배 원리와 방법들은 국교회의 전례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된 가장 첫 번째 예배서는 "영국 공동 기도서"(The English Book of Common Prayer, 1552)였다. 공인된 공동 기도서는 에드워드 6세의 두 번째 책으로 알려진 국교회 기도서의 번역판이었다(the Second Prayer Book of Edward Ⅵ). 이 기도서는 규칙이나 내용에 있어서 첫 번째 책과 큰 차이가 있어서 광범위한 변화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칼뱅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에 낙스 역시 이 책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기도서는 후일에 만들어진 "공동 예배 규범"(the Book of Common Order)에 의하여 대체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1562년도에 나온 "공동 예배 규범"은 1554년에 프랑크푸르트로 쫓겨 간 영국 신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추방된 이들 중 소수는 국교회 전례를 사용하기 원했지만 대다수는 이를 원치 않았다. 분리되어 나온 프랑크푸르트 회중은 긴 논쟁 끝에 낙스와 휘팅햄(Whittingham), 존 폭스(John Foxe), 안토니 길비(Anthony Gilby) 등에게 예배의 새로운 규정을 마련하도록 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규정은 정작 그 곳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못했다.81)
낙스와 프랑크푸르트의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첫 번째 예배 규정은 1556년에 "제네바에 있는 영국 회중들이 사용하는 성례 집행 및 기도 양식"(The Forme of Prayers and 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which was used in the English Congregation at Geneva)이라는 제목으로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제네바에서 나온 이 책은 1559년에 스코틀랜드의 일부 개혁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칼뱅의 예식서(La Forme des Prieres)에서 유래한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예식서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곳이 여럿 있다. 일테면 성만찬 의식 가운데 행하는 중보기도나 혹은 성찬 기도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내용이나 신학적인 면을 따진다면 비슷하지만 문장이나 표현 방식은 전혀 새롭게 된 것이다.82)
종교 개혁의 가장 큰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성찬의 횟수는 이상적인 생각과 현실의 괴리를 가져왔다.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러한 괴리가 심각하였는데 이는 순전히 목회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경우 일년에 네 차례를 갖지만 작은 규모의 시골에서는 더 적은 횟수로 집례하도록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종교 개혁의 초기에 시행되어진 것처럼 이미 많은 횟수로 성만찬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유럽의 다른 교회들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스코틀랜드에서 매주 1회씩 성만찬을 실시하는 교회는 없었지만 월 1회 정도는 실시하는 교회들이 더러 있었다.83)
오늘날의 성만찬 방식, 즉 회중들이 자리에 앉아서 성찬을 받는 것은 19세기가 지나가면서 도입되었다. 글래스고(Glasgow)의 성 요한 교회(St. John's Parish Church) 목사인 챨머(Charlmers)가 처음으로 회중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성만찬을 받는 비국교도(Nonconformist)들의 방식을 모방하여 고안하였는데, 그 이전까지는 모든 회중들이 성가대석이나 본당 앞에 특별히 마련된 성찬 테이블에 앉아서 성찬을 하도록 하였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그 이전에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의 말씀의 예전에서 찾을 수 있다. 외면적 방식에서 보면 그들의 말씀의 예전은 과거 말씀이 빈약했던 중세 이전의 순서처럼 초라해 보인다. 종교 개혁 이후로 풍성해진 전반부의 말씀의 예전이 스코틀랜드에서는 빈약해 보이는 것은 잘못된 오해이다. 비록 순서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들의 말씀을 전하는 시간으로 본다면 족히 1시간을 오간다.84) 이러한 예배 모범들은 나중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예배 의식들을 종합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Westminster Directory)이 나오기까지 계속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종교 개혁자들은 유사하면서도 나름대로의 강조점들이 틀리고, 관심의 분야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경우에는 과거의 미사 전통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하지만 츠빙글리와 재세례파의 경우에는 극단적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상이하였다. 이 둘 사이의 가장 중심에 사실상 칼뱅을 비롯한 개혁주의의 노선이 자리하고 있었다.85)
하지만 그들에게는 분명한 공통점들이 있다. 웨버는 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예배와 관련된 공동의 관심사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는데, 첫째 개혁자들은 중세의 예배관이 예배를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반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사를 거부하였으며, 둘째 화체설을 거부하였으며, 셋째 말씀에 대한 회복을 주장 하였으며, 넷째 자국어 예배와 말씀과 성례전의 이중 구조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츠빙글리와 이후 칼뱅주의 계열에서는 성찬을 연 4회 정도만 유지해도 된다고 생각함)에 대체적으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86) 그리고 이러한 공동의 관심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이 오늘날의 개혁주의 예배 노선의 주요한 지침이 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청교도(Puritan)들의 예배
로이드 죤스(D. M. Lloyd Jones) 목사는 1972년도에 행한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s)의 강연에서 낙스(Knox)에 관하여 발표하면서 낙스(Knox)를 청교도의 창시자라고 지칭한바 있다.87) 물론 역사적인 청교도의 시원은 그 역시 1524년의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에서 찾는다.88) 이런 접근은 당연히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과거의 전통과는 다른 영적 특성과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로이드 죤스 목사의 지적이다. 로이드 죤스 목사의 지적처럼 청교도들은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람들과 여러 면에서 뚜렷한 구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 유산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틴데일을 비롯하여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존 후퍼(John Hooper, 1495~1555) 등 수많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초기의 청교도들이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나 굿윈(Thomas Goodwin, 1600~1679) 등에게서 계승한 것이다. 어느 한 시대를 일방적으로 지칭할 수 없지만 영국에서의 청교도들은 처음 세대 종교 개혁가들과 완전하게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일관된 사상, 일테면 성경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인 올곧은 사상으로 점검 가능하며 나중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신앙 유산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예배에 관한 그들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의 예배 의식은 개혁의 전임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낙스가 견지했던 예배 형식과 완전히 동떨어진 또 다른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89) 하지만 청교도 시기를 거치면서 영국에서는 국교회와의 완전한 단절은 물론이고 청교도만의 특성을 가지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가져왔다. 소위 장로교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제도가 이때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보다 독립적인 형태의 회중교회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90) 따라서 과거와 비교할 때 예전 자체에 현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구도 자체가 변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여러 모습으로 나뉘기는 했지만 비국교도들의 예배 의식은 동일한 것이었다. 나중에 회중 교회의 예배 의식이 더 자유롭게 변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에 기초한 예배 의식이라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후일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Westminster Directory)이 나오기 전까지 청교도들은 "기도예식서"(the Forme of Prayers)에 의존하였다. 실제 기도를 하는 데에는 잘 참조하지 않았지만 기도예식서는 분명 예배의 일반적인 기준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예배는 과거에 비해 더 단순해지기 시작하였다.91)
그러나 모든 상황을 그들이 스스로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 소위 왕이 수장으로 있는 교회의 새로운 권위에 저항해야 했다. 이전의 개혁자들이 중세의 미사와 대립하였다면 청교도들은 교묘하게 위장된 국교회(왕권)와 싸워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예배 의식을 고집하거나 신앙의 본질을 유지하기 우해서는 도망을 하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심한 저항과 이들을 꺾으려는 왕권의 대립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영국 국교회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중세의 잔재들, 예를 들자면 성체(wafer bread)의 사용이나 성찬식 때 무릎을 꿇는 것, 가톨릭 신자들을 성찬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나 성직자의 예복 사용의 문제 등이 주된 논쟁거리였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상황이 변하도록 "의회에 대한 권고"(1572)를 제출하였는데 이 권고 속에는 예배 의식 안에 과거 가톨릭의 잔존물들을 예식들과 조직에서 몰아내고 오직 하나님의 교회에 주님께서 직접 권고하신 것들만 도입하여 존재케 하려는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엘리자베스Ⅰ세(ElizabethⅠ) 세에 의하여 허사가 되었다.92)
그리고 영국 국교회는 과거의 잔재들을 계속 용납하게 되었다. 국교회는 내적인 변화는 없이 외적인 부분, 다시 말해 교황에 의하여 통치되던 교회를 왕이 통치하는 변화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내부적인 신앙의 부분들은 성경적이거나 혹은 개혁적이지 않고 훨씬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기간은 약 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신학적인 부분은 어느 정도 개혁적인 사상이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청교도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혁이 완성되려면 훨씬 더 강도 높은 변화가 촉구되어야 했다.93)
청교도들의 예배 의식 자체의 완성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물론이고 스코틀랜드의 개혁 교회들도 역시 전체 틀에서 본다면 영국의 예배 의식을 비롯한 개혁적 작업들이 파급하게 될 영향력의 아래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통합적인 예배 의식이 필요한 것이며 이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의 완성이나 혹은 청교도들의 개혁 작업들이 동시에 어느 정도 충족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작성일 것이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왕, 그리고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의회와 교회 등에 대항하여야 했는데 핵심적인 사안은 사실 복장에 관한 것이다. 미사를 집례할 때 입게 되는 사제의 복장을 폐지할 것을 원하는 청교도들과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교회 사이의 지리한 논쟁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한 세기를 넘기고서야 종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외면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청교도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예배에 관한 영적 갱신이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때문에 청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들의 예배 의식이 성경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루터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소 허용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원칙은 성경이 금하지 않는다면 허락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교도들이 따르는 신학 전통은 칼뱅의 사상이었는데, 칼뱅은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Quod non jubet, vetat)는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94) 그렇기 때문에 청교도들의 신학적 원리들은 당연히 칼뱅처럼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는 금하는 방식을 뒤따르게 되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이 허용하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95)
이러한 규칙에 대하여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1576~1633)는 매우 강력한 어조로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예배 의식에 대한 가감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방편들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이든 개별적이든 이들을 주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예배로 경배해야 한다. 어떠한 것도 첨삭되거나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신12:32). 혹자가 예배에 대한 자신들이 부과시킨 것에 대해 변명하면서 "보존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첨가만이 금지되었다"고 구분 짓는 것은 헛된 일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첨가 혹은 삭제도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고 이를 지키는 것에서 일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6)
패커(Packer) 박사는 청교도들의 예배를 "단순하고 성경적인" 것으로 평가하면서 오웬(John Owen, 1616~1683)을 인용한다. 오웬은 "외적인 것이나 부수적인 원조나 도움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단순한 복음적인 영적 예배가 가장 질서 있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배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성경의 성령께서 심판자가 되심으로 우리가 다른 곳에서 겉치레로 발견되는 이런 것들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97)
패커가 인용한 것처럼 청교도들은 외면적 의식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인공적으로 조장된 가식적 미(美)를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단순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할 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예배의 의전적인 부분을 오히려 단순화시켰고 대신 예배가 잃어서는 안 되는 영적 의미들을 되살리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Westminster Directory)
교회의 일치가 없고서는 영국의 미래는 불투명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의 왕이었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은 여러 선임 왕들이 경험한 결과를 놓고 보아도 이러한 생각은 당연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 결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임스 1세에게 물려진 왕위는 도리어 스코틀랜드 국민이나 청교도들에게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흠정역의 새로운 성경번역을 제외하곤 도리어 제임스 왕은 청교도들에게 부담이 되는 사람이었다.98) 제임스의 뒤를 이어 찰스 1세(CharlesⅠ)가 왕이 되었지만 상황이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제임스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교회를 자신의 완전한 수중에 넣으려고 하였다. 심지어는 "오락의 책"을 재발행하여 백성들을 현혹하며 이를 따르도록 강압하였고 종교적인 상황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국교회 중심(미사에 더 가깝게)으로 회귀하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등지고 미국을 향하게 되었다.99)
찰스 왕은 더 나아가 기존의 스코틀랜드에 존재하던 "기도 예식서"를 대신하고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합할 수 있는 예배 의식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왕은 완강한 국가 주권론을 가지고 스코틀랜드를 왕국에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왕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종교적 통일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영국 국교회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적 교회와의 교리적 연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이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의견을 무시한 채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강제적인 추진을 하였다. 이때 영국에서 스코틀랜드로 보내진 것이 소위 "예배서"(Service Book)이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교회가 본인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찰스 왕은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스코틀랜드 공동 기도서"(Scottish Book of Common Prayer, 1637)이다.100)
그러나 단순한 실패에서 이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고 스코틀랜드 국민들의 국가적 반향으로 말미암아 더 큰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종교 자유를 주장하는 "국가 규약"(the Nation Covenant)이 서명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1638년에 있었던 글래스고우 대성당에서 열린 총회(the General Assembly)에서 감독들이 면직되고 장로 제도가 재확립되었으며 왕의 예식서는 당연히 거절 되었고 이전에 사용되던 "기도 예식서"가 다시 사용되어지기 시작하였다.101)
결국 왕은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영국 자체에서 찰스 왕에 대한 반란으로 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 왕은 스코틀랜드와의 평화를 위하여 글래스고우 총회 결의를 인준하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끝내 스코틀랜드 국민들과 영국 혁명 세력과의 연계 투쟁으로 왕위는 전복되었으며 의회는 웨스트민스터에서 교회 정치와 신조, 예배 형식에 관한 내용을 토의하기 위한 종교위원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102)
비록 영국 의회에 의하여 총회를 개최하도록 지시를 받았지만 이때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총회를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하였으며, 1643년 7월 1일 소집된 총회는 5년 6개월 동안 진해되어 오늘날 우리가 접하게 된 웨스트민스터 문답서를 비롯한 완성된 형태의 장로교 신조를 만들어 냈다. 121명의 신학자들, 30명의 평신도 입회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예배 모범을 비롯하여 완성된 형태의 신조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 가운데 오직 3명 정도만 엄격한 장로교인이 아니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의 신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배 모범은 약 70여 회의 회의를 거쳐 수정되면서 후일에 인준되었는데, 다행히도 대부분의 내용들은 이미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되어지는 것들을 중심으로 수정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상황(영국에서 스코틀랜드를 종교적인 방식으로라도 통일해야 한다는 상황)이 고려되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은 이 회의를 통하여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 개혁적인 작업들의 최종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물론 회의에서 가결되었다고 모든 것들이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회의에서 가결된 모든 사항들은 대부분의 개혁적인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았지만 실제로 영국 국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오직 스코틀랜드의 개혁 세력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을 비롯한 장로교 체계의 사람들에게만 유지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은 이후 개혁 교회 예배의 근간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이 속에는 칼뱅의 개혁적 사상이 낙스를 통하여 스코틀랜드의 주장으로 되살아났다. 종교 개혁 이후의 가장 큰 특징은 중세기의 암울한 기억들이 급속한 예배의 변화를 촉구하였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과 종교회의에서 받아들여진 문답서는 이후 개혁 교회의 중요한 의식과 정신을 온전하게 전수하였다. 하지만 예배 전통은 한 순간에 확고하게 세워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른 예배에 대한 바람 또한 순간적인 억압에 의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예배의 모범과 형식이 완전하게 정착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의 불완전하고 인위적인 요소들이 성경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예배의 모범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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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예식서 (Common Ord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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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모범 (Directory)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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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Pray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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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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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자가 인도하는 예배 (Reader's Servic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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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봉독 (Lessons from both Testamen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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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경봉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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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Psa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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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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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Pray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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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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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및 조도 (Psalm and Prayer in morn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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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Ser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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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인도하는 예배 (Minister's Service) |
설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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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Pray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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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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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Lord's Pray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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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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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Cre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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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Psa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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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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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Benedi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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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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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자들의 시대 이후의 예배 형식이나 그 내용적인 면들을 살피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해지다시피 되었다. 개혁자들 스스로가 중요한 교파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교파마다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들이 제공되었다. 중세의 막강한 교권 중심의 예배 형식의 폐해가 예배의 개혁을 부추기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과도할 정도의 변화를 촉구하게 되었다. 좌 편향적인 형태의 초기 침례교 형태의 예배들과 퀘이커(Quaker) 교도들의 예배 형태는 반예전(antiliturgical)적 형태의 예배 운동을 이끌게 되었으며,104) 한편에서는 매우 자유로운 형태의 예배 의식들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오순절 계통의 예배 운동으로 변형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예배의 자유와 은혜는 바로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전수되어져 온 것이다.
오늘날 예배에 대한 비평적 평가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에 대한 예배들을 조절해 오셨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수많은 시대가 흐르면서 예배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었으며 그 형식과 내용적인 면들이 변화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예배 정신은 첫 예배자로 생각되는 아담에게서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혹은 오늘날의 많은 성경적 개혁자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예배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구약의 패역했던 시대나 혹은 중세기의 미사가 가지는 형식적인 공통점들, 일테면 순서와 짜임새는 매우 정갈하고 숙련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리가 없으며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가 아니었다. 겉모양은 있으되 그 알맹이가 없는 그릇된 예배였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조금이라도 세밀하게 관찰했다면 첫 번째 살인자였던 가인의 범죄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예배의 오염에서 비롯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배의 오염은 자신은 물론이고 형제와 이웃을 사지로 몰아넣으며 육신뿐 아니라 영(靈)까지도 사멸케 하는 두려운 결과를 가져온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불행한 일들의 근원이 예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런 심각한 예배의 오염이 목격되고 있다. 예배를 위해 모인 백성들이 모임을 위해 예배를 변조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과거 이스라엘의 부패한 제사나 중세의 미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눈여겨 볼 여러 가지 내용 가운데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성장지상주의에 편승해 예배를 왜곡시키려는 사단의 간교한 전략이다.
과거보다 더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소위 열린 예배(Seeker Service)라든지 문화적 시류에 편승해서 시도되고 있는 불경건한 예배들이 사람들의 구미를 맞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평신도의 중요성을 말하여 가정교회로의 회귀를 역설하는 또 다른 극단적인 예배 형식들이 오늘날의 회중들을 거룩하고 경건한 예배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105)
이러한 양극단적인 모습들은 우리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열린 예배는 현대 문화를 적절하게(혹은 교묘하게) 예배 의식 안으로 들여와 교회의 고유하고 거룩한 근간을 훼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가로막는 문화적 장치들이 우리의 경건한 기도와 설교를 대신하고 있으며 감정적인 조절 없이 "성령과 은혜를 빌미로" 성도들에게 집중적으로 감정이입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행위들의 이면에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로운 예배 방식의 수용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예배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그릇된 예배들의 전형인 것이다.
열린 예배의 순서만 보더라도 이러한 염려들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배의 순서와 예전은 사람들의 필요와 시대적 상황에 맞게 아무렇게나 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거나 혹은 심한 핍박이 뒤따를 때(예를 들면 중국이나 북한에서의 예배) 드려지는 예배를 예전 의식에 맞추어 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보편적이면서도 정상적이라면 그동안 전통으로 자리한 예배 의식이나 순서들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별히 열린 예배의 경우는 예배의 순서뿐만 아니라 예배의 신학에서 철저하게 전통 예배를 벗어나 있다. 이미 열린 예배는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 중심의 예배(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을 예배라고 말해야 할지도 의문이지만)로 변질된 것이다. 열린 예배의 가장 큰 특징은 형식의 파괴와 외면적 변화에 있다. 열린 예배의 형식에 대하여 말하는 대부분의 저서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말 것(informal)과 현대적일 것(contemporary), 강요하지 말 것(no pressure), 외형적 호감을 줄 것(visually appealing) 등을 권고하고 있다.106)
그러나 성경에서 권하는 예배의 형식들은 매우 정련되어 있고, 순서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배자가 취할 마음의 자세나 예배 형식의 내용들은 정교할 뿐만 아니라 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들이 담겨져 있다. 구약의 시대로부터 매우 오랜 시간이 경과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예배의 정신은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과도한 문화 흡수적인 예배 형식의 변화와 파괴는 당연히 비성경적 행위들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온 성도들이 모여 드리고 있는 기존의 예배 형식, 또는 교회의 구성에 관해 식상한 사람들이 시도하고 있는 가정 중심의 교회(home church) 운동도 또 다른 극단적인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우려를 낳고 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일면 올바른 면들이 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른 또 다른 부작용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교회의 모든 형식적인 면들을 무시하며 가정 중심의 교회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모든 교회의 기능들이 가정에 이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는 예배도 가정에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신도들이 충분히 그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이 선포한바 "만인 제사장"의 이론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미래적인 교회의 표상으로서 과거 초대 교회의 전형이라는 것(성경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라고 말한다.
이와 관련하여 뱅크스(Robert Banks)는 매우 복음적인 어조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는 예배와 관련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 모임을 재현하기 위하여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Going to Church in the First Century). 하지만 이러한 시도 역시 오늘날 가정의 붕괴로 말미암은 서구 문화의 변형적인 예배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으며, 좀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대형교회 추세 속에서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교회상의 왜곡에 대한 또 다른 변화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교회론에 대한 균형을 깨뜨리게 될 것이며 또 다른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평신도들의 수준이 그렇고 그 속에서 행해지는 비형식화 된 자유로운 의식들이 경건성을 잃게 할 수 있다. 가정에서 구성원들의 긴밀한 교제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예배와 교회에 대한 신학적 혼란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온전한 교회관과 그 신학에서 출발한 가정과 가정 예배의 중요성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으며, 회복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가정에서 드려지는 온전한 예배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개혁주의자들은 가정 예배를 강조하는 것이다.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는 가정을 온전케 할 것이며,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배출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무시된 상황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한 잘못된 접근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는 잃게 될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가정 교회들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교회의 폭발적 성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원 전체를 수용할 만한 공간이 충분하지 못하였으며, 조직이나 상황 자체가 온전한 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분화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초대 시대의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압박과 박해, 계속적인 파괴의 손길을 피해야만 했다. 그들이 만일 가정을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를 모였다면 그것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이나 북한에서 비밀스럽게 지하에서 가정 예배로 드리는 것과 같은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변형적인 가정 교회 형식에 대한 고집은 자칫 유형적 교회를 혐오하게 만들고, 성장한 교회들이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교회들을 성경적 교회관에서 벗어난 교회들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든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찬양하는 가정 예배가 회복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성경적 가정의 회복과 가정 교회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접근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개혁이란 단순한 시간적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만일 개혁이 회귀를 의미한다면 더 원시적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마땅할 것이다. 회당이나 성전, 혹은 성막을 회복해야 하지 않는가? 시간적인 측면에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볼 때 교회가 단지 구약을 무시하고 신약 시대에 급조된 모임이라면 초대교회가 오늘날 개혁 교회의 원형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구약적 맥락에서 말씀하신 수많은 전거들이 남아 있으며,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예배의 회복이나 갱신이 과거의 어느 때로 거슬러 올라가 그 모습을 재현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개혁교회의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배의 질서를 위해서 의식이 필요하나 의식이 신령과 진정의 대용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요한다. 심정 없는 의식, 의식 없는 무질서는 둘 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외식에 대한 경고는 옛날 바리새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다(사1:11. 29:13; 마 23:23).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