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한강 교량이 놓인 곳이 예전에는 나루터였다는데
표지석으로만 남은 한강 나루터의 자취
[뉴스포스트 = 강대호 기자] 한강에는 다리가 몇 개 있을까.
다음 달 완공을 앞둔 월드컵대교를 포함하면 서울 권역에만 31개가 있다.
서울시 안에 22개가 놓였고, 경기도에 있거나 서울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곳에는 9개의 다리가 놓였다.
한강에 최초로 놓인 한강철교를 1900년에 완공한 지 120여 년이 지난 지금,
서울을 지나는 한강은 북쪽과 남쪽이 촘촘하게 연결된 듯하다.
한강 다리들은 어떤 곳에 놓였을까. 사람과 물자 이동이 많은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한강 북쪽과 남쪽을 잇는 교통 요지에 다리를 놓았다.
한강철교 다음으로 1917년에 한강대교가 건설되었다.
다리 남쪽에는 ‘흑석진(黑石津)’, 혹은 ‘흑석나루’가 있던 곳이었다.
흑석나루와 가까운 흑석동과 상도동에는 일본인 주거 지역이 들어섰고,
대방동에는 일본군 시설이 들어섰다.
1936년에 건설된 ‘광진교’는 ‘광나루’가 있던 지역이었다.
서울과 영남 지방, 그리고 강원도를 잇는 물길 교통의 요지였다.
광진교 주변으로는 국도 3호선이 지나던 곳이기도 했다.
한강 교량들이 놓인 과정을 살펴보니 많은 곳이 나루터가 있던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요 다리만 해도 삼전도와 송파나루에는 잠실대교가, 뚝섬 나루터에는 영동대교가,
한남 나루터에는 한남대교가, 마포나루에는 마포대교가, 양화진에는 양화대교가 들어섰다.
반포대교, 동작대교, 원효대교, 서강대교 등도 예전에는 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2021. 07. 14) 한강은 물길이기도 하다. 강남구 압구정동의 유람선 선착장.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끊어진 육로를 이어준 나루터
한강은 예로부터 중요한 하천이었다.
어부에게는 물고기를, 농부에게는 농업용수를 공급한 젖줄이기도 했지만 한반도 패권의 향방을 좌우하기도 했다.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낸 고구려는 한강 수로를 따라 남하해 신라를 압박했고,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수로를 이용해 한성까지 빠르게 진군하기도 했다.
한강은 또한 한성이 상업 도시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성은 전국 곳곳을 향하는 간선 도로망이 잘 갖춰진 도시이기도, 서해 연안과 내륙 산간 지역을 연결하는 한강
수로망이 잘 갖춰진 도시이기도 했다. 덕분에 한성은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루’ 혹은 ‘나루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과 물자를 싣고 강을 건너 주는 역할 외에도 일시적으로 끊어진 육로를 다시 잇는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한강 유역에는 나루터가 많았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한강 수역을 따라
100여 곳에 진도(津渡), 즉 나루가 있었다고《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했다.
이러한 나루터들은 하천 때문에 끊어진 육로를 수로를 이용해 연결해 주었다.
서울 권역 한강에서도 보듯이 지금은 나루터 대신 다리가 놓였다. 나루가 있던 곳은 원래 육로와 육로를 잇는 접점이어서
그곳 아니라면 다리 놓을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교통과 물류 수요가 있는 곳에 다리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50년대 후반 한강의 모습. 지금의 한강대교 인근이다.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50년대 후반의 한강대교.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주변에서 한강에 나룻배가 있던 시절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단편적이거나 구체적이지 않은 추억에 그쳤다. 다만 수필 몇 편에서 당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특히 성신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화가 ‘한만영’이 쓴 수필은 구체적이었다. 한강이 보이는 보광동에
자리한 중고교를 다닌 그는 ‘거룻배’를 타고 소풍을 가거나 스케치 여행을 다닌 추억을 수필에서 밝혔다.
한만영은 “거룻배를 타고 잠실벌”, “강 건너 백사장”, “배밭 사이 오솔길을 지나 압구정동 소나무숲”과 같은 표현으로
1960년대 한강 주변 풍광을 회고했다.
곳곳에 들어선 교량들, 그리고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때문에 차량으로 복잡한 오늘날 한강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나루터가 폐쇄된 그곳에 남은 흔적들
다리가 건설되기 전 나루터가 있던 곳들을 답사했다. 먼저 '한남 나루터'가 있던 곳을 가보았다.
경의중앙선 ‘한남역’ 인근이다. 한남역 앞 공원에 ‘한강 나루터’라 쓰인 표지석이 있었다.
공원 바깥 덤불에 있어 일부러 찾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2021. 07. 14) 한강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옛 한남 나루터. 강변북로와 한남대로가 지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곳은 조선 시대에 한강진(漢江津)이 있던 곳이다.
강 건너 사평나루(지금의 강남구 신사동)를 잇기도 하고 한성에서 충주로 가는 수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한남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강남 지역에서 재배한 농산물이 강북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한강이라는 이름도 한강진에서 따왔다. 조선 시대에는 한남동 앞을 흐르는 강을 ‘한강’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예전에는 한강을 부르던 이름이 지역마다 달랐다. 마포 근처를 흐르던 강을 마포강, 서강진(西江津) 근처를
흐르던 강을 서강, 송파나루 앞을 흐르던 강을 송파강 등으로 불렀다.
1962년의 한남 나루터. 왼쪽 상단 멀리 삼성산이 보인다.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2021. 07. 14) 위 사진과 비슷한 구도로 찍었다. 왼쪽 교각 아래로 멀리 삼성산이 보인다.
이 자리에 한남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한남역 아래 한강공원으로 가니 머리 위로 강변북로가 동서 방향으로, 한남대교는 남북으로 강 건너까지 뻗어있다.
예전 한남 나루터 사진의 구도로 그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멀리 관악산 옆에 삼성산이 보이고 잠원동 너머 낮은
산등성이가 보이는 곳, 한남역 바로 아래였다.
다음은 양화진(楊花津)이 있던 곳에 가보았다. 지하철 ‘합정역’ 인근, ‘절두산 성지’로 알려진 곳에 자리했다.
양화진 표지석은 ‘잠두봉’ 아래에 있었다.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에서 떨어진 덤불 속이었다.
(2021. 07. 14) 양화진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옛 양화진 근처에 놓인 양화대교.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옛 양화진 근처에 놓인 당산철교.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양화진은 조선 시대에 한성에서 김포와 강화를 이어주던 나루였다. 강 건너 영등포를 이어주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제2한강교였던 양화대교가 나루터 기능을 이어받아 육로와 육로를 이었다.
서울지하철 2호선이 지나는 ‘당산철교’도 놓였다.
양화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잠두봉(蠶頭峯)은 사형장이기도 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그곳에서 1만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다.
그들이 생의 마지막에 본 풍경은 한강이었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을 보며 그들은 어떤 내세를 꿈꾸었을까.
마지막으로 가본 곳은 ‘뚝섬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영동대교 북측 교각 바로 아래에 있다.
이곳은 강남 청숫골, 지금의 청담동을 이어주던 나루였다. 뚝섬유원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2021. 07. 14) 뚝섬 나루터 표지석.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옛 뚝섬 나루터 근처에 놓인 영동대교. 강 건너 청담동이 보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과거 뚝섬은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던 피서지이기도 했다.
뚝섬유원지를 키워드로 2000년 이전 기사를 검색하니 1천 건이 넘는 기사들이 검색되었다.
가장 오래된 기사는 1934년에 나온 거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사들을 보니 ‘수영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뚝섬에 모래사장이 넓었는데 야외 수영장 역할을 한 것이다.
영동대교 아래 자전거 도로 옆 덤불에 ‘뚝섬 나루터’ 표지석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이 나루터였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표지석 외에는 없었다.
사실 한강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개발되며 모습이 많이 변했다.
홍수 대비를 위해 둑을 쌓고 모래밭과 낮은 여울 등을 메웠다. 공유수면을 매립한 땅에 도로를 깔고 택지도 개발했다.
고수부지(高水敷地)가 된 강변에는 공원을 만들었다. 오래전 나루터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혹시나 해서 옛 나루터 답사를 하며 산책객들에게 물어보았다. 옛 한강진과 양화진에서는 그곳이 나루터였음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옛 뚝섬 나루터에서는 여럿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요 앞에서 강 건너로 넘어갈 수 있었지요.
강남이나 잠실 쪽으로요. 유원지였으니 유람선도 많았지요. 모래사장에서 수영도 하고요.”
영동대교 아래 그늘 쉼터에서 만난 노인들 말을 종합했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에 있었던 한강 나루터들을 이제는 일부 노인들만 기억하는 듯했다.
지난 수백 년간, 어쩌면 천 년 넘게 한강의 물길을, 그리고 육로와 육로를 이어주던 한강의 나루터들은
불과 수십 년 만에 교량으로 대체됐다. 나루터들은 폐쇄됐고 사공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이제는 외진 덤불 속 표지석으로, 그나마 글자 색깔마저 바래가는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2021. 07. 14) 한남 나루터 표지석. 공원 밖 덤불에 놓였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뚝섬 나루터 표지석.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덤불에 놓였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7. 14) 양화진 표지석.잠두봉 아래 덤불 속에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첫댓글 역사가 흐르는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기본중에 기본인데
모르고 지나갈뻔 상식에 범위를 넓혀봅니다 ㅎㅎ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걷기를 진행해도 좋을 듯합니다. 초가을에는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