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금(堅金)은 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사람으로, 그 고을의 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었다.
태조가 즉위한 후, 청주 사람들은 변심을 잘하므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 하여, 그 고을 출신 능달(能達)·문식(文植)·명길(明吉) 등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였다. 능달은 돌아와 그들이 다른 뜻이 없으므로 충분히 믿을 만하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문식과 명길은 고을 사람인 김근겸(金勤謙)과 관준(寬駿)에게 개인적으로, “능달은 비록 다른 뜻이 없다고 아뢰었으나 추수기가 되면 변란이 있을까 걱정된다.”고 하였다. 견금이 부장(副將) 연익(連翌) 및 흥현(興鉉)과 함께 와서 태조를 뵈니, 각기 말과 비단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그들이,
“저희 신들은 충성을 다하기만 원하지, 다른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이 고을은 김근겸·김관준·김언규(金言規) 등 개경(지금의 개성직할시) 사람들과는 서로 마음이 부합되지 않으니, 이들 몇 사람이 없다면 우리 고을에 대해 근심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태조가,
“짐의 마음은 살육을 그치게 하는데 있으니, 죄 지은 사람도 오히려 용서하고자 하거늘 하물며 그들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짐을 도운 공로가 있는 사람들이오. 짐은 고을 하나를 얻으려고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겠소.”라고 하니, 견금 등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김근겸·김언규 등이 이 말을 듣고,
“과거에는 능달이 복명하기를 청주 사람들이 배반할 마음이 없다고 했으나, 저희들은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견금 등이 말한 것을 들으니 다른 뜻이 없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억류하고서 변란의 기미를 살펴보소서.”라고 아뢰니 그 의견을 따랐다.
일이 일단락된 후 태조는 견금 등에게,
“지금 비록 그대의 말대로 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충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소. 빨리 돌아가서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니 견금 등이 이렇게
청했다.
“신들은 충정을 드러내고자 하여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씀드렸으나 도리어 남을 모함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주상께서 죄로 여기지 않으시니 은혜가 막대하와, 저희들은 진심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맹세하나이다.
그러나 한 고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마다 마음이 다르니, 만약 반란이 일어나면 제어하기 어려울까 근심되옵니다. 바라건대 관군을 보내어 응원군으로 삼으소서.”
태조가 옳은 말이라 여겨, 마군 장군(馬軍將軍) 홍유(洪儒)와 유금필(庾黔弼) 등으로 하여금 군사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鎭州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군)에 주둔하여 반란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 도안군(道安郡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도안면)에서, 청주가 은밀히 후백제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알려왔으므로, 태조가 마군장군 능식(能植)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압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청주에서는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