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손석희의 만남이 확정되면서 JTBC의 섭외력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8일 출연한 손연재 선수도 아시안 게임 중계권자들인 공중파 3사를 모두 뒤로 하고 JTBC 뉴스 스튜디오를 찾았고, 경제학자 장하성 교수와 진보진영에 쓴 소리를 던진 전북대 강준만 교수, 그리고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갔던 작가 김훈 씨도 'JTBC 뉴스룸'을 찾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요.
서태지 손석희 관련 기사 이미지
그 이유는 모두가 평소 방송 인터뷰에 거의 응하지 않았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방송가에선 이런 섭외력이 손석희 앵커 개인에 대한 인터뷰이들의 믿음과 함께, 최근 들어 급상승한 JTBC 뉴스에 대한 신뢰도 크게 작용한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한편 서태지 손석희 만남은 오는 15일 수요일 'JTBC 뉴스룸'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JTBC 뉴스룸'은 서태지 측과의 오랜 협의 끝에 결국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를 성사시켰다고 알려진다. 두 사람 모두 언론과 문화계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 왔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습니다.
드레스 디지털 와치라는 독특한 포지션을 점하고 있는 일명 손석희 시계입니다. 과거 전자 시계가 고급 시계로 여겨지던 시대의
산물인데 요즘에도 정장에 매치하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신이.....
누가 뭐라고해도 시계 본연의 시인성과 기계로서의 신뢰성은 쿼츠, 그중에서도 디지털 시계가 월등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단정한 디자인과 착한 가격까지. 요즘도 손석희 사장님이 저 시계 차고 다니실지 궁금하네요.
깔끔하죠?
카시오 A-158WA-1D입니다.
제팬무브먼트에 생활방수되고(물기 조심)
라이트기능, 오토캘린더, 스톱워치, 알람기능 다 됩니다.
크기는 36 X 38MM 케이스 사이즈이고요..
가격은.. 손석희 명품시계
16,810원입니다!
4대 뽐 : 신현숙
1962년생, MBC 아나운서 출신이신 이 분 역시 자료가 별로 없더라.
지금은 손석희씨의 부인으로 더 잘 알려졌다. 같은 방송사 아나운서 커플이라며...
대표적인 방송 활동으로는...90년대 중반 EBS 라디오의 "오후의 음악선물"을 진행했다.
"닭장차를 타고 구치소에 들어가는데, 문이 버스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 만큼 비좁았어요. 창문의 창살 틈새로 내다보니 예전에 용인자연농원 사파리에 아들 구용이(6)하고 놀러 갔던 기억이 나데요. 방에 들어간 건 새벽 4시였습니다. 일단 24시간 동안 불을 켜놓는 게 안심이 됐어요. 외부와 단절된 시공간 속에서 나 자신을 확인할 수 없다는 막막함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1년 반 전에 김철수 선배(KBS 전 노조위원장)를 면회하러 갔던 1호실 그 자리에서 역으로 면회를 당하려니 그것도 좀 묘하데요."
<여성동아>, 1998년 8월호
다행히 우리 애들은 처음부터 잘 적응한 편입니다. 큰애(구용·10)가 처음 학교 간 날 하루종일 걱정했지요. 그런데 갔다와서 하는 말이, 내일도 또 가고 싶다는 거예요. 작은 애(구민·6)는 처음에 적응을 못해 제 엄마 마음을 좀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금방 적응한 편입니다.
손석희 아들 구용 나이 16살 추정
1992년 가을에‘해고자 복직, 공정방송 실현’ 등을 구호로 내건 MBC 노조의 기나긴 파업은 시작되었다.
그들이 내세운 구호들은 당장 실현될 것 같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손석희 교수는 그 파업기간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동료들의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머리띠를 두르고 쉼 없이 손을 흔들어댔던 그는 그 해 10월 불법 파업주동자로 몰려 20일간의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막막하기만 했던 시간이었지만, 20일간의 수감 생활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남겼다.
그는 세면장 갈 때나 면회하러 나갈 때 그에게 따뜻한 안부인사를 건네주고, 또한 그가 출소하던 날 침침한 복도의 철창문 창살 밖으로 손을 흔들어 주던 수인(囚人)들에게서 얻은 것들이 많았다.
그는 그들 덕분으로 자신의 삶의 지평이 이만큼이나 넓혀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구속될 당시‘뽀미언니’로 잘 알려진 그의 아내 신현숙 씨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매일 아침 구치소로 출근하다시피 한 그녀는 첫 면회 때 그에게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강인해진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구속자 부인들과 함께 회사 앞에서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우리가 말하는 법 vs 손석희가 말하는 법
손석희
출생 : 1956년 6월 20일 서울
신장/체중 : 178cm, 75kg
가족관계 : 아들 둘, 매형 주철환PD 겸 교수
학력 : 휘문고등학교 - 국민대학교 국문학과 학사 -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대학원 저널리즘 석사
별명 : 칼, 오염물질
데뷔 : 1984년 문화방송 앵커
수상경력 : 제22회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상(1995), 한국아나운서 대상(2003)
경력 : MBC 아나운서국장, 손석희의 시선집중(MBC 표준FM), 100분 토론(MBC)
2000년~2002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2006년 3월 성신여자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화커뮤니케이션 학부 교수
저서 ‘풀종 다리의 노래’
손석희 부인 사진
뽀미언니 신현숙 아나운서 사진
손석희 아나운서의 부인
이름 : 신현숙
생년월일 : 1962년 12월 11일
가족사항 : 남편인 아나운서 손석희
특이사항 : 전 MBC 아나운서, 제4대 뽀미언니
아나운서에서 교수로 변신한 손석희 성신여대 문화정보학부 교수의 임용을 소개하는 학보공고에 실렸던 사진이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었다고 하는데요.
성신여대에서 발간된 '성신학보'에는 신규교수 임용과 관련해 관련 인물들의 프로필과 얼굴 사진이 게재되었다고 합니다. 손교수 역시 신문 5단 하단 광고 면에 신규 교수 임용 신고식을 하고 있는데, 80~90년대 유행하던 잠자리 안경 같은 뿔테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왼쪽 가리마의 모습이 마치 30대의 모습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학생들도 학보에 실린 손교수의 모습과 현재 모습을 비교해보면서 안경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모습에 놀라워 하는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손교수는 "아나운서라고 해서 특별히 더 사진을 찍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그냥 마지막으로 찍어서 가지고 있던 것이 이번에 제출한 1992년도에 회사앞 사진관에서 찍었던 사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미 2000년 이후 연대 성대 등에서 강의를 해온 손교수에게 새삼 첫 강의 소감을 물었는데요. "이제는 교수로서의 직분에 보다 신경써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손교수는 "이제 원래 하던 방송일과 교수일에 조용히 매진하면서 지낼 것"이라며 거듭 언론의 개인적 관심자제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지각인생 _ 손석희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반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첫댓글 손석희아나운서가 나이가 요로코럼 많은지 오늘에야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