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대항축구전
1929년 10월 서울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대결하면서 열렸던 남북축구대회를 말한다. 총 7회에 걸쳐 20차례의 경기를 가진 뒤 중단되었다가,1990년과 2002년에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친선경기를 펼친 바 있다.
1929년부터 조선일보사의 주최로 경성(京城)축구단과 평양(平壤)축구단이 서로 장소를 바꾸어 가며 가졌던 친선경기를 말한다. 총 7회에 걸쳐 20차례의 경기를 가졌는데 경성축구단은 5승 8무 7패, 평양축구단은 7승 8무 5패의 종합전적을 가지고 있다.
1929년 10월 8일 당시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군(당시에는 팀을 군(軍)이라 부름)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군이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경기를 가진 데서 시작됐다. 첫 대회는 '전경성군 대 전평양군 축구 대항전'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3차전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7,000여 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았으며 경기 결과 평양군이 2승1무(1 대 1, 4 대 3, 4 대 2)로 승리하였다. 이 대회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두 도시 간 대항전이라는 점에서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일제 치하에서 민족의 단합과 반일정신을 키우는 데도 기여했다.
1930년 경성운동장(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서는 경성군이 2승1패(3 대 2, 5 대 3, 5 대 1)를 거두어 승리하였다. 그러나 2차 대회를 치른 뒤 대규모 군중집회를 금지시킨 일제의 압력과 주최했던 조선일보의 사정으로 1931년과 1932년 대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축구협회 주선으로 열린 경성군, 평양군 대표자 모임에서 1933년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팀이 창단을 기념하며 경기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대회는 봄, 가을로 나눠 경성과 평양을 오가며 치르는 것으로 합의하였고, 그 결과 1933년 4월 6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제3회 대회가 열렸다.
이후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제4회, 배재운동장에서 제5회 경기가 열렸고, 1935년 4월 서울 경성운동장에서 제6회 대회가 열렸다. 그런데 제6회 대회에서 심판 판정시비가 지역감정으로 비화되면서 양측 응원단 간 충돌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경기가 또다시 중단되었다. 그러다 1946년 자유신문사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제7회 대회가 재개되었으나 38선으로 남북통행이 제한되면서 제7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또다시 중단되었다. 이후 '경평축구대항전'라는 명칭으로 대회를 다시 열지는 못하였지만 남북은 1990년과 2002년에 '남북통일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친선경기를 펼친 바 있다.
한편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에 접어들자, 서울시는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2015년 서울시 남북교류협력 사업 계획’ 중 문화교류사업 활성화 예산으로 55억 원을 편성하고, 이 가운데 18억 원의 예산으로 경평대항축구전의 재개를 추진한 바 있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2022-09-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