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6:1-14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에스겔 16장은 예루살렘을 한 여인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아주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마치 결혼을 한 부부 중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이로 인해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고발은 15절부터 시작되며, 오늘 본문은 관계가 망가진 두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철저히 버려진 존재(1-5)
(2) 인자야 예루살렘으로 그 가증한 일을 알게 하여
2절에 나온 ‘가증한’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괘씸한’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단어는 ‘토에바’(תּוֹעֵבָה,toʿevah)’로 ‘역겹고 혐오스러운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오늘 예루살렘의 잘못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크게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상숭배를 하나님이 계셔야할 자리에 다른 것을 놓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믿던 백성이었습니다. 이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만 믿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다신교가 성행했으며, 예루살렘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믿는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결혼생활을 예로 들면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도 믿는 행동은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돈이 나를 안전하게 해준다고 믿고, 어떤 이는 인정받음이 나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으며, 어떤 이는 미신적인 사주와 타로를 보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 현대사회에 만연한 또 다른 우상숭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시작되었던 때를 떠올리게 하십니다.
(3-5)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하나님은 이들의 근본, 즉 이들이 어디 출신인지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전이 있었고, 이들의 역사에는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었으며, 그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올라가 언약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확히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너희의 진짜 출신은 가나안이다. 너희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 어머니는 헷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대단한 출신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방민족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예루살렘을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배꼽 줄’은 탯줄을 의미합니다. 즉 아이가 태어났는데, 탯줄도 처리되지 않았고, 씻겨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유대교 랍비인 라씨(Rashi)의 말에 의하면 당시 사회에서는 신생아에게 소금을 발라 피부를 단단하게 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조차 발라주지 않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를 떠올려보겠습니다. 그는 아무런 생존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크게 울며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뿐입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아무도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탯줄도 그대로 붙어 있고, 몸은 씻겨지지도 않았으며, 파들파들 떨고 있는 연약한 살갗을 싸매어주지도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5절 후반절을 보면 이런 아이를 들에 버렸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온 ‘버려진다’는 말은 성경에서 시체를 밖에 던질 때도 사용되던 단어로 갓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위험한 상태였는지를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처음 상태는 이렇게 무력하고, 위험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말합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전적 타락’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은 본래 온전히 부패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는 이 ‘전적’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인간의 사악함이 맥시멈한 그런 상태로 보지 않았고, 인간의 이성, 감정, 그리고 의지적 모든 범위에서의 타락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즉 인간의 생각, 의지, 감정, 욕망, 판단, 심지어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조차도 인간은 갓 태어나 길가에 버려진 아이처럼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살아날 수 없는, 곧 죽음이 임박한 아이. 이 아이가 이제 살 길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피투성이에게 찾아온 은혜(6)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6절을 보면 이 아이 곁으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두 번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원문으로 좀더 보면 피 가운데 살아라는 뉘앙스이며, 이는 아이의 상태가 위생적이고 건강한 상태와는 거리가 먼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럼에도 이 아이에게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연약하고, 아무 능력이 없고, 죽음 앞에 무력하며, 깨끗하지 않은 상태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살아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교우님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출발점은 나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찾아오심 속에 시작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아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는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았고, 스스로 일어나지도 못했으며,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아이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지저분한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께 나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의 근본은 평범한 사람과 동일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을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고, 내가 믿음이 좋아서 버틴 것도 아니며, 내가 기도를 잘해서 무너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도 여전히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피투성이였던 나를 하나님께서 보셨고,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오늘도 나에게 “살아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는 오늘도 불화살을 우리에게 쏘며, 우리를 무력화시키고 넘어뜨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악한 자는 오늘도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사각으로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때로 우리는 그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기도 하고, 생채기가 나기도 하며, 잠시 쓰러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죄의 잔재와 싸우고 있는 나를 일으키시고, 다시금 내 손에 믿음의 방패를 쥐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성화해나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지속됩니다.
여전히 벌거벗은 상태(7-14)
(7) 내가 너를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더라
7절의 마지막을 보면 여전히 ‘벌거벗은 알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8절부터 1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계속해서 입히시고 돌보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13절의 마지막을 보면 이 아이는 마침내 왕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는 구원받은 자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자라남을 보여줍니다. 전적 타락으로 말미암은 죄의 값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사해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죄의 잔재와 쓴뿌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달려갈 믿음의 경주의 발목을 잡습니다. 악한 자의 불화살은 오늘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삶의 사각으로 날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전적 타락’으로 시작한 5대 교리의 마지막은 ‘성도의 견인’으로 끝납니다. ‘성도의 견인’이란 내가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기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시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동안 넘어질 수 있고, 죄에 다시 흔들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믿음이 너무 약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 피투성이인 우리를 찾아오셨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를 붙드시고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처음에 나를 살리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오늘 나를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마지막까지 나를 붙드실 분도 하나님이시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14절 후반절입니다.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지금의 나는 내가 만든 내가 아닙니다.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씻기시고, 입히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은혜 안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드시고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다는 사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들에 버려진 아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와 주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잘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넘어지고 흔들릴 때에도 우리를 버리지 마옵시고 다시 일으켜 주옵시며,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시고 붙드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믿음의 방패로 오늘도 악한 자의 불화살을 소멸하고, 오늘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붙들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봅시다.
2.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의 구원과 지금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게 됩니까?
3.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라는 구절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습의 나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고 계신 것 같습니까?
4.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고, 씻기시고, 입히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5. 지금 내가 넘어지고 흔들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 내가 붙들어야 할 말씀과 기도는 무엇입니까?
(작성: 김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