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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삽화적 구성
삽화적 구성은 유기체적 통합 구성을 보이는 극적 구성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산만하고 느슨하게 짜여진 구성을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한 편의 시를 삽화(사건)+삽화(사건)+삽화(사건)…… 방식으로 엮어가며 구성하는 것입니다. 삽화와 삽화 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에 유기적인 통합관계가 매우 느슨한 상태로서 인과적 영속성이 거의 없는 구성방식을 의미합니다. 삽화적 구성방식이 두드러진 것은 여러 가지 모험 내용으로 나열하는 액자소설이며, 우리의 「춘향전」이나 「흥부전」 등 판소리계 소설도 삽화적 방식을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¹⁶¹⁾ 이러한 방법은 시에서도 사용됩니다.
신경림은 당시 전통적 서정시나 난해시 위주의 문단 흐름에서 당대 민중현실을 형상화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서정시의 양식적 혁신을 실험하게 됩니다. 기존 서정시의 전형을 혁신하는 방법으로 삽화적 방법을 사용한 것이지요. 이러한 방법은 이미 1930년대 백석이나 이용악, 오장환, 임화 등에서 발견됩니다. 실제로 신경림은 백석과 이용악의 시를 구해서 읽고 등단기의 시들과는 시적 방향을 바꾸었으며, 특히 백석으로부터 방법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경림이 좋아했던 백석, 이용악, 오장환이 시에 이야기성 즉, 서사요소를 도입하여 식민지하에 사는 민중들의 삶을 시로 형상화하였다면, 신경림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시에 서사요소를 도입하여 개발독재기에 소외된 농민 등 민중의 현실을 시로 형상화하였습니다. 시에 이야기를 도입한 서사지향성¹⁶²⁾의 시들은 작품 속에 인물의 행위를 역동적으로 진술하거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독자에게 정서와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감각적 심상이나 내면풍경의 표현을 통한 주관의 감정적 투영보다 인물의 행위나 사건의 연결을 통해 시적 장면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뱃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니 눈이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신경림, 「겨울밤」 전문
단연 26행의 "자조 자괴적인 허무주의 톤¹⁶³⁾인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자를 포함 7명이나 됩니다.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인물들의 행위와 사건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인물 | 행위 및 사건 |
우리(화자) |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침. 쌀값 비료값 얘기를 함. 면장 딸얘기를 함. 분이가 애기 밴 걱정을 함. 묵을 먹음.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함.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름.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감.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닭이라도 쳐볼거나,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
장꾼들 | 눈을 텀 |
면장딸 | 선생이 됨 |
분이 | 식모살이 갔다가 아기를 뱀 |
술집 색시 | 분 냄새를 풍김 |
이발소집 신랑 | 장가감 |
계집애 | 치마를 둘러쓰고 숨어 있음 |
위 시에서 주목할 것은 첫째, 화자의 문제입니다. 대개의 서정시에서는 화자와 등장인물 사이에 거리가 없는 '나'라는 단수화자가 되지만 이 시의 화자는 '우리'라는 복수화자가 됩니다. 이는 시인이 공동체적 정서를 형상화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꾼들, 면장 딸, 분이, 술집 색시, 이발소집 신랑 등 등장인물의 면면을 봤을 때 소외되고 피폐한 1960년대 농촌의 전형적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입니다.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의 행위는 묵내기 화투를 하거나 쌀값 비료값 얘기, 면장 딸 얘기, 분이에 대한 걱정, 묵 먹기, 술 마시고 물세 시비하기, 젓갈 장단에 유행가 부르기, 신랑 다루러 보리밭 건너가기 등 이야기의 연결을 통해서 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화자인 '우리'를 통한 집단의 행위, 민중적 인물들의 다수 등장, 인물들이 벌이는 여러 개의 이야기 정보 단위들이 서술의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시에서는 어미 ‘~거나’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확신이 서지 않는 행동을 가리킴으로서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상황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김준오는 이 시가 1970년대 「농무」계열의 농민시를 예고하였으며, 이제 민중시가 이미지에 의존하지 않고 민중생활의 행위와 사건의 서술로 시적 긴장을 획득하는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¹⁶⁴⁾
신경림 시의 지리적 공간 이동과 시간의 경과에 따른 삽화적 서술은 현장성과 민중성, 현재성과 사실성을 확인하는 데 좋은 분석의 사례가 됩니다. 우선 그의 인물 행위 표출을 통한 시작 방법은 「농무」에 와서 커다란 시적 성취를 거두는데, 이는 인물들이 행위를 벌이고 있는 지리적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경과가 절묘하게 결합하기 때문입니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에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 「농무」 전문
단연 20행인 이 시는 독재와 고향상실의 1970년대에 발표돼 한국현대문학의 고전이 되었습니다.¹⁶⁶⁾ 제목이 '농무'인 것처럼 동적인 모습이 생동감 있게 나타납니다. 이 시의 화자는 '우리'로 농무를 추는 농민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시의 특징은 사건의 진행이 공연이 끝나고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 정보 단위로 이야기 흐름과 지리적 공간 이동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 흐름 | 공간 이동 |
징이 울리고 막이 내림 → 분이 얼룩진 얼굴로 술을 마심 → 꽹과리를 앞세워 장거리로 나섬→ 쪼무래기들이 따라붙음 → 처녀애들이 킬킬댐→ 보름달이 밝음→울부짖고 해해댐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옴→・점점 신명이 남 | 텅빈 운동장→ 학교 앞 소줏집 → 장거리 → 쇠전 도수장 |
이 시를 살펴보면 4개의 공간에서 행위가 이루어지는데 첫 공간은 1~3행, 두 번째 공간은 4~6행, 세 번째 공간은 7~16행, 네 번째 공간은 그냥 지나치는 17행, 다섯 번째 공간은 17~20행입니다.
첫 번째 공간에서는 행위가 없고 정황만 보여줄 뿐입니다. 두 번째 공간에서는 분장을 지우지도 않은 채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시며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함을 토로합니다. 세 번째 공간에서는 장거리에서 농무를 춥니다. 농무에 쪼무래기들도 악을 쓰며 따라붙고, 처녀애들도 기름집 담벼락에 붙어 서서 킬킬댑니다.
농무를 추는 일행은 울부짖기도 하고 해해대기도 하며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거나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 맡”긴다는 표현을 통해 농민의 소외감과 절망감, 자포자기적인 감정과 행위를 드러냅니다. 다섯 번째 공간은 도수장 앞에서 농무가 벌어지는데, 점점 신명이 납니다. 공간과 행위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행 | 공간 | 행위 |
1~3행 | 텅 빈 운동장 가설무대 | |
4~6행 | 학교 앞 소줏집 | 분이 얼룩진 얼굴로 술을 마심 |
7~16행 | 장거리 | 꽹과리를 치고 장거리로 감. 쪼무래기들 이 악을 쓰며 따라붙음. 처녀애들이 담 벼락에 붙어 킬킬댐. 울부짖고 해해댐 |
17행 | 쇠전 | 지나침 |
17~20행 | 도수장 앞 | 점점 신명남. 한 다리 들고 날라리 불고, 고개짓 하고 어깨를 흔듦 |
「농무」가 몇 개의 삽화들이 조합해가는 지리적 공간의 이동이라면, 한참 후기의 시인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은 과거라는 유년에서 몇 개의 삽화들이 조합되면서 순차적으로 현재까지 진행하는 시간적 공간의 이동입니다.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 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사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모두 3연 27행의 이 시는 현재의 화자가 유년 공간으로 되돌아가서 회고하고 고백하는 것을 창작동기로 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경험들을 성장 순서에 따라 과거형 서술어미를 사용하여 순차적으로 진술하는 시간의 이동을 보여줍니다. 유년 시절에는 '램프불 밑에서‘ 자라고, 조금 더 커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으며, 소년 시절에는 '전등불 밑‘에서 보낸 것이 1연의 과거에 포괄된 시간적 공간의 이동 상황입니다. 2연에서는 지리적 현재 공간인 대처로 나온 화자가 '이곳저곳' 떠돌면서 보고 듣는 경험을 했지만 결국 시야가 좁아져 과거로 시점이 이동하는 상황입니다. 불빛의 매개공간에 있는 인물들을 통해 현재의 삶을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이 시는 과거공간(유년 및 소년)에서 현재공간(대처)으로 진행되는 이 동축이 있고, 과거공간 안에서는 어려서 램프불 밑 →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 → 소년 시절 전등불 밑으로 이동하는 한 축이 있습니다. 또 현재에서 과거로 시야가 다시 회귀하기도 합니다. 이 시는 이러한 시간과 지리적 공간의 중층적 이동을 구성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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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 하』, 135쪽 참조.
162) 최두석은 사회적 역사적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사람살이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취급하기 위해서는 시 속에서 이야기를 제대로 구사할 필요가 있다며, 서사지향성의 문제는 시의 현실 대응력의 문제이고 시에서의 리얼리즘의 실현 문제에 연결된다고 하였다.(최두석, 「이야기시론」, 「리얼리즘의 시정신, 실천문학사, 1992, 13~24쪽 참조.)
163) 이동순, 「신경림 론」,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연구》(제19호), 1991.12, 62~63쪽.
164) 김준오, 「순수. 참여와 다극화시」, 김윤식 외,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사, 1989,381쪽 참조.
165) 홍신선은 「농무」가 정황의 절제된 묘사와 진술, 지리적 공간의 이동과 놀이의 신명도 상승유도, '꺽정'과 '서림' 같은 소설 속에 나오는 체제 밖의 인물을 내세운 화자의 감춰진 세계관 암시, 실감이 있는 세부 묘사와 뛰어난 생활말의 구사를 통해 현실주의 시의 여러 미덕을 잘 살리고 있다고 평가하였다.(홍신선, 「우리 근대 자유시의 성립과 내력」, 《현대시》, 1994, 5,162~167쪽 참조)
166) 구중서, 「1970년대와 80년대의 민중시학」, <현대시>, 1994. 5 참조.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5. 1. 21
맹태영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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