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08.
제사와 나
오늘은 내 외할머니의 기일이다. 하관하는 날은 감나무에 단감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산이 아니라 감밭 가장자리에 터를 잡으신 외할머니에게 나는 첫 손자였다. 내리사랑은 끝이 없었다. 디딜방아로 쌀과 콩을 찧어 찰떡을 만드는 일부터 아이들 사이에 발생하는 사소한 논쟁거리의 해결사까지 모두를 직접 하셨다. 눈만 감아도 하루 종일토록 추억할 수 있다.
두 번으로 기억한다. 어머니를 모시고 갔었다. 어머니 떠나신 후에 한 번 더 외할머니 기제사에 간 기억이 있다. 외할머니 기일 20일 후에는 어머니 기일이다. 단풍이 짙을수록 두 여인의 그리움도 해마다 반복된다. 벌써 20년째다. 올해도 어머니 기일에 조율이시와 포를 준비하고 탕과 나물, 전, 떡을 제상에 올려 예를 표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에는 제사가 없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천 년 동안 불교가 국교였으며 사찰에서 결혼식을 했다. 장례 의식도 스님들의 주관으로 화장하고 원래로 돌아가 생은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면서 혼을 달랬다. 죽음은 끝이었다.
제사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60~70%가 아직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심지어 제사를 금지하는 개신교도 중 20%가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많은 사람이 제사야말로 우리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사가 일반화된 것은 1,500년대라고 보는 설이 타당하다. 제사는 기껏해야 500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다.
제사는 중국의 것이었다. 불교를 억제하고 송나라의 주자 성리학을 도입한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건국되면서 제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라는 왕명을 내렸다. 태조 이성계가 그랬고 태종 이방원이 그랬다. 조정에서 온갖 역량을 기울이고 많은 홍보를 하였으나 그에 대한 저항이 굉장히 강했다. 불공이 일상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절만 지어왔으니 사당이 무언지 몰랐고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랐다.
개혁의 시대였다. 눈만 뜨면 찾아가던 절은 허물어지고 목탁 소리까지 끊어졌다. 관혼상제를 위탁할 절이 사라졌다. 정신적 지주가 부처에서 조상으로 바뀌는 혼돈의 시대였다. 하물며 성군 세종 때에는 고려말 3,000개가 넘었던 사찰이 36개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태종과 세종 시대 20여 년 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다시 개혁의 시대 한가운데에 서 있다. 고려가 조선과 달랐듯이 한국인은 조선인과 달라야 하지 않을까. 조선의 예법을 계승해야 할 의무도 없지만 무턱대고 배격하지도 못하겠다. 나와 내 주변에 맞게 점진적 변화를 꾀할 뿐이다.
첫댓글 오빠생각이 내 생각이다
전통이란 사라지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하지. 주체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꼭 알아주면 좋고. 더 나아가서 전통을 만들거나 없애는 주체가 나 자신이란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