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리의 추억追憶
남상기
아주 오랫만에 기장연화리를 찾았다. 집사람이 바람도 쉴겸 바다장어 회로 유명한 연화리를 가보자는 청에 응했다. 5월의 신록이 푸르름을 더해주고 쪽빛바다는 파도도 잔잔한 쾌청의 날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난생처음 연화리 죽도를 찾은 날도 5월이 었다. 그때의 추억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뇌리에 떠 오른다. 당시는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기장에 내려 대변항을 거쳐 연화리까지 걸었다. 우리는 연화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연화리마을 맞은편 죽도의 작은 암자에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아주 작은섬 죽도는 소나무 대나무와 동백숲으로 둘러쌓였고 동쪽해변에는 넓은 청석바위로 덮여 있었다. 인가는 없고 숲속에 작은 암자만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외딴섬에 외롭게 자리잡은 암자였다. 밤에는 스산한 기분도 들었다. 스님도 젊은 스님 한분이 었다. 이 스님이 죽도에서 연화리포구를 왕복하는 나룻배의 사공역활도 겸했다. 배는 10명정도 탈수 있는 작은 배였다.
그 젊은 스님은 짧은 바다길을 노를 저으면서 뱃노래대신 항상 염불을 읊었다. 지금생각해도 그 젊은스님이 뱃노래대신 왜 염불을 읊었을까. 염불목소리가 너무도 맑고 고와 푸른바다 잔잔한 파도소리와 잘 어울린다는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그 스님은 염불잘하는 스님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노를 저을때는 꼭 염불을 했다. 내가 이 작은 죽도암자를 찾은 것은 여름방학을 앞두고 공부하기 위해서 였다. 말하자면 절에하숙을 하러온것이었다. 우리는 3명이 었는데 대학재수생 한명과 고교3학년 한명, 그리고 나였다. 고교재학생은 여름방학때 합류했다. 두학생은 친형제간이었다. 나는 두 학생의 학업관리자신분이 었고 또 내공부도 해야하는 입장이 었다.
이 외딴섬 호젓한 암자를 택한 것은 두학생의 어머니인 시내 모 유명병원의 원장님부인이 었으며 내누님과 교분이 있는 분이었다. 조용하고 공기좋은 이곳에서 여름한철 공부에 열중해 달라는 부탁이 었다. 그러나 깊은뜻은 다른데 있었다. 걸핏하면 공부방을 빠져나가 기원棋院에가서 영감님들하고 바둑판에 앉아 있는 큰놈 때문이었다. 바둑 때문에 속을 썩이는 상황이 었으며 그는 바둑광이 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였으니 공부방 빠져나갈 엄두는 접어라는 방책이 었다. 그는 당시 바둑실력이 아마3단이라 했다. 그의 부친도 바둑을 너무도 좋아해서 당시 충무동에서 인기있는 유명병원을 처분하고 마음편안되로 바둑을 둘수있는 한가한 직장인 보건소 소장을 자원했을 정도의 바둑메니아 었으니 피는 못속이는 부전자전인 셈이다. 동생은 공부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나도 이곳은 처음이라 분위기가 좋고 배를 타지않으면 바깥세상을 갈수도 없는곳이라 학생관리에도 적지라고 생각했다. 내 허락없이는 절대로 배를 태워서는 안된다고 뱃사공 스님과 약속을 단단히 해놓았다. 그런데 며칠지나고 나서 문제가 생겼다. 5월의 어린이날 어버이날등 연휴가 되자 죽도에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젊은 스님은 본업보다 손님을 실어나르는 뱃사공일에 바빳다. 아마 수입도 짭짤했을것으로 짐작이 갔다. 작은 죽도섬에 관광객이 모여드니 섬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당시 암자에는 선풍기도 에어콘도 없었다. 문을 열어놓으면 예쁜여학생들이 머리를 내 밀어 방을 훔쳐보는 상황이 되었으니 공부는커녕 마음이 산만하여 글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하는수 없이 죽도 암자생활은 2주도 안되어 접고 맞은편 연화리마을로 옮겼다. 마을중간쯤에 위치한 마당이 넓고 화초밭도 잘조성되어 있는 매우조용하고 깨끗한 큰 집이었다. 집주인 50대 아줌마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결혼하여 분가했다고 했다. 아줌마는 인심이 좋은 후덕한 인상이 었고 딸도 어머니를 닮아 복스런 인상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3-4년 아래로 짐작이 갔다. 공부하기에도 분위기가 좋았다. 이집에서 여름한철을 보냈다, 그런데 여름한철이 지나는 동안 여러가지 추억거리가 생겼다. 당시는 연화리 마을앞은 모래사장이 었다. 여름밤은 저녁식사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은 남녀노소 없이 더위를 피해 모두들 모래사장으로 모였다. 모래사장은 여름밤의 멋진 피서지였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좋았고 잔잔한 파도소리와 달빛이 좋았다. 갯마을에서나 있을수 있는 바다내음이 좋았다. 마을사람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호칭이 없으니 그렇게 부른것같다. 모두들 삼삼오오로 둘러앉아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밤을 지세웠다. 특히 연세많은 노인들이 모여앉은 자리에 나는 매일밤 불려가 시국이야기며 역사이야기등 노인들의 요청에 응했다. 비록 투박하고 욕설이 많이 썪인 갯마을 노인들의 말투 였지만 인정이 넘치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어 주는 진지함도 있었다. 특히 그들은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마을 노인들에게 꾀 인기를 얻은셈이다. 그리고 마을 처녀들하고는 말도통해보지 못했지만 나름되로 그녀들에게도 인기가 좀 있었던 것 같았다. 누가 제공했는지는 모르나 여름과일인 참외 수박등의 야참이 나오면 마을처녀들이 선생님을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농담들을 했다. 갯마을사람들의 소박한 인심을 듬뿍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홋이불을 가져와 모래사장에서 잠을 자고 새벽녘에 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해 8월 15일이 다가왔다. 이 마을 청년회가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해마다 해 왔다는 “노래자랑 대회”였다. 모래사장에 배 돛으로 둥글게 가설극장을 만들고 가설무대도 만들었다. 부산에서 5인조 악단을 계약하여 불렀다. 입장료도 받았다. 연화리, 대변항, 기장읍 일대에 홍보안내장을 뿌리며 제법큰 갯마을 노래자랑 행사를 준비했다. 나는 관심밖의 일로 대충 주워 들은 정보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행사 하루전날 마을 청년회 회장과 간부 몇 명이 내 공부방으로 찾아왔다. 첫마디가 ‘선생님께 중요한 청이 있어 왔습니다’ 하고 머뭇거리더니 내일 우리마을에서 개최되는 노래자랑대회에 선생님께서 “심사위원장을 맡아주셔야 되겠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희청년회에서 결의된 일입니다”라고 했다. 단도직업적으로 일방적인 요구였다. 나는 생각도 못한 일이라 황당하여 한마디로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가요도 잘 모르고 그럴 입장이 못됩니다 하고 완강히 거절했다. 그들은 돌아가지 않고 그들의 고충을 호소하며 애걸조로 도움을 청 했다. 내용인적 매년 노래자랑 대회때 시상을 발표하고 나면 부정이다 인맥이다하여 항상 항의가 따르고 말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이번대회는 기장일대 사람들이 아무도 잘 모르는 선생님이 심사위원장을 맡아 발표를 하게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적은 심사위원들이 다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선생님은 최종 발표만 하면됩니다. 선생님은 유명한 가요평론가로 소개될 것입니다. 물론 가명입니다. 항당하고 충격적인 이야기 였다. 고시준비생이 “노래자랑 심사위원장”이라니 코메디 같은 이야기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그들의 입장을 듣고 어쩔수없이 승낙했다. 이 마을에서 여름한철 공부할려면 그들과 반목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나름 되로의 생각이 었다. 8월 15일, 해가 서산에 기울고 바다의 해풍이 더위를 식혀주는 갯마을 해변의 밤은 너무도 낭만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조용한 갯마을 밤이 오늘은 축제의 음악소리와 군중들의 웃음소리가 섞혀 소란스러웠다. 연화리 대변항 기장읍일대에서 처녀총각들이 많이 모여들어 ‘갯마을 노래자랑축제’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성공리에 끝났다. 심사위원들이 매겨준 점수대로 대상 금상 은상 동상 인기상등 발표만 하는 것이 내 소임이라 짜여진 역할도 차질없이 한셈이다. 연화리 사람들은 그날 이후 내가 정말 가요평론가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코메디같은 추억이다. 또 한번의 충격은 주인집딸 이야기다. 해녀복장을 하고 태왁(해녀들이 물에띄우는 부표)을 둘러메고 머리에는 큰 물안경을 쓰고 바다에서 물일을 하고 돌아오다 골목길에서 나와 마주쳤다. 얼굴이 홍당무가되어 돌아서서 도망치는 장면을 목격하고 내가 몸둘바를 몰랐다. 나는 주인집딸이 해녀일을 하는 것은 전혀 몰랐다. 그녀도 우리에게 몰래 바다에 나가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알고 보니 연하리 마을은 밭농사도 하고 바다에 나가 미역 해삼 소라등을 따는 해녀일을 하며 생활하는 갯마을 농어촌임을 뒤늦게 알았다. 한집에 살면서 밥상만 차려올뿐 한번도 대화를 나눠본적이 없었던 부끄러움이 많은 시골처녀였다. 내고향 시골처녀들도 그 시대는 그랬다. 그날이후로는 밥상을 어머니께서 차려오셨다. 그리고 간혹 밤중에 우리공부방앞에 수박과 참외를 상에 차려놓고 말없이 가 버리는 순수하고 수주움이 많은 갯마을 복스런 처녀의 고운 마음씨의 소박한 연민의 표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둑좋아하는 큰놈은 내게 애를 많이먹였다. 화장실간다며 반소매 반바지 런닝샤츠 스리퍼 차림으로 내눈을 속이고 기장까지 걸어서 기차로 부산으로 도망쳐 기원에 가는가 하면 점심식사후 1시간 휴식시간을 주면 연화리 솔밭그늘에서 노인들과 바둑을 두면서 시간가는줄 모르는 일도 자자했다. 그는 공부보다 바둑이 었다. (결국 그는 2류대학을 어렵게 들어가고 동생은 이후 서울 K 명문대학에 들어갔다)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 어느날 우리는 연화리 생활을 접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비록 여름한철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의 지나간 인생살이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멋진 추억으로 남아있다, 오랫만에 연화리를 찾아보니 옛추억들이 꼬리를 문다. 주인집 아줌마는 살아계시면 100세를 훨씬 넘었겠지. 딸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살고 있을까. 이미 80 가까운 할머니로 변했겠지, 죽도의 젊은 스님은 어느큰절 노老 주지가 되었을까. 연하리 ‘갯마을 노래자랑’ 주역 청년들도 노년에 어디서 장지내고 있을가. 세월따라 변한건 오랫전에 마을앞 모래사장은 주차장으로 변했고 주차장 앞은 선착장으로 변하고 해변따라 포장마차횟집등이 줄지어 섯고, 죽도는 2011년에 ‘연죽교蓮竹橋’라는 다리가 설치되어 육지로 연결되어 나룻배도 없어진지 오래다. 죽도의 암자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섬소유주의 별장이 들어섰다는 소식이다. 섬은 소유주의 반대로 관광객이 들어갈수도 없게되었다고 한다. 나는 집사람과같이 연죽교를 건너 죽도에 들어갔으나 철망이 쳐 있어 섬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섬주위를 멤돌다 되돌아 왔다. 반세기가 넘는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연화리의 소나무숲과 죽도의 청청하고 울창한 숲 뿐이었다. 대변항과 연화리는 어선들의 선착장이 연결되어 하나의 큰어촌항으로 변했고 큰파도를 막아주는 높은 방파제도 먼 동쪽바다에 오래전에 건설되었다. 조용한 어촌이었던 연화리는 늘어난 횟집 오피스텔 모텔등이 듬석듬석 들어서 있었다. 연화리와 죽도의 옛모습을 찾아볼수없는 것이 매우 아쉽다. 내나이 83세가 되었다. 몇년전 기억은 가물거리나 반세기도 훨씬넘은 그 시절 연화리 여름한철 추억은 아직도 생생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남아있다. 2021.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