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 금강(幻島金剛)-2 통권 131
고학이 주군으로 모신 자는 용호원수부 깊숙한 곳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고학 자신은 잘난 주인을 모신 덕에 상경을 떠난 지 4년 만에 황진성부윤이라는 파격적인 자리에 앉아 주군이 벌여놓은 일의 뒤처리를 하느라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천림왕의 입김이 닿아 있는 자들을 몽땅 솎아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들이 하던 일을 모조리 황진성부윤인 고학이 해야 했으니 일에 치여 환장할 노릇이었다. 상경의 모든 자금 관리를 토금전장에 일임시킨 덕에 상경부의 일 자체는 확 줄었으나 나머지는 고학이 직접 챙겨야 하는데다 가을 추수 후엔 대대적인 모병이 있을 예정이라 그것까지 준비해야 하는 고학은 더욱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로군. 새로 임관한 관리들이 제 몫을 하기 시작하니 두어 달 후 가을 추수가 끝나고 모병이 시작되어도 그럭저럭 꾸려갈 수 있겠어.”
관복을 입은 고학이 서류가 쌓인 서탁에 묻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한 관리가 들어와 크고 두툼한 책자를 서류가 쌓인 서탁에 내려놓고는 말했다.
“고 대인, 부탁하신 상경 호적부입니다.”
“언제 조사한 건가?”
“10년 전에 한 번 했고, 3년 전 징병령이 떨어졌을 때 보완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수고했네. 이제 그만 퇴청하시게.”
“예, 고 대인. 고 대인도 이만 들어가시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제가 한번 뫼시고 싶습니다만….”
“자네가?”
고학은 이번에 새로이 황지성부 이조집정(吏曹執政)에 임명된 묘산인(猫算仁)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본래 백수회에 적을 두었던 사람으로, 이조집무에서 승차하여 문관의 선임과 훈봉, 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이조의 집정이 된 사람이었다. 현재 황지성부에서 가장 업무가 많은 곳으로, 고학이 사실상 집정의 할 일을 하고 이조집정인 묘산인은 부사(副詞)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좋네, 오늘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하지.”
“좋습니다.”
묘산인이 고학을 데리고 간곳은 옥야루(玉夜樓)라는 이름의 기루였다. 기루의 문턱을 넘어서자 진한 화장을 한 여인이 다가와 호들갑을 떨며 아는 체했다.
“어머나! 묘 대인 아니세요? 그간 뜸하시더니 이제야 발걸음을 하시는군요.”
“하하하하, 홍 부인은 안 본 사이 더 예뻐졌구려.”
“호호호, 별말씀을…. 한데 이분은…?”
“아! 인사드리시게. 이번에 새로 황진성부윤이 된 분이시네.”
“예? 그럼 백호나한의….”
“어허!”
“에이구머니나! 합!”
세간에선 천무공이란 정식 호칭보다 백호나한이라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용호원수부 또한 백호나한부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고학의 경우도 황지성부윤보다는 백호나한의 심복 군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백호나한이 백호문의 수문대장이었을 때 강호에 명성이 높은 고수들을 연파한 비무연(比武宴)과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를 아내로 둔 행운의 사내라는 점과 백호나한이 갓난아기인 천상천화를 아내로 삼는 일은 이야기를 팔아 먹고 살아가는 설객(說客)들이 항상 빼놓지 않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거기에 백호나한의 영웅담이 곁들여져 민간에 전해지니 노련한 옥야루의 홍 부인이 실수할 만도 했다.
“아니네. 나한은 아라한을 뜻하고 아라한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를 뜻하는 말이니, 백호나한 또한 존칭이 아닌가?”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귀빈이 저희 옥야루에 찾아와주셨으니 특별히 후원 별채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보게 홍 부인, 오늘은 내가 고 대인을 뫼시기로 한 날인데 내 주머니 사정도 생각해주시게나.”
“호호호호, 설마 제가 돈 받자고 그러겠어요. 드시긴 별채에서 드시더라도 술값은 3층 수준으로 받지요.”
“허허, 3층도 내겐 고급인데, 뭐 좋아! 기분이다. 갑시다, 고 대인. 기왕 홍 부인이 인심을 쓰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하룻밤 술값이 은 100냥은 쉽게 나간다는 옥야루의 별채에 자리잡은 고학과 묘산인은 기녀들의 춤과 기악을 보며 술을 마셨다. 그러니 고지식한 고학이 이런 술자리를 좋아할 리 없었다. 묘산인은 적당한 때에 기녀들을 물린 후 고학과 독대하며 본심을 드러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저는 백수회에 적을 둔 자입니다.”
“….”
“고 대인, 고 대인은 당금 천하가 돌아가는 것을 어찌 생각하십니까?”
“난세지. 아니, 난세로 접어들려는 천하를 천무공께서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상태지.”
묘산인은 고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중주 십제들의 세력은 더욱 커질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이 천무공의 힘을 넘어서면….”
“후후후, 그래 자네에게 무슨 좋은 해결 방안이라고 있는가?”
“힘이 있는 지금 천하를 움켜쥐어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놀라운 말이었지만 고학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하지 않고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묘산인에게 반문했다.
“그것은 자네의 뜻인가? 아니면 백수회의 뜻인가?”
“…!”
잠시 침묵이 흐르고 묘산인이 뭔가 맥을 놓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수회의 뜻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고, 제 뜻이라 여겨도 됩니다.”
“후후후, 지금 천무공의 적은 누구인가?”
고학은 묘산인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한 귀로 흘리고 다시 물었다.
“그야! 천림왕이 있고, 웅랑교가 있으며, 반적 강무가….”
“강무세가는 천상천화의 외가일세.”
“…!”
“웅랑교와 다툼이 있지만 이는 조정의 문제이고, 그들은 북지성의 험한 산을 넘지 못하네. 그리고 천림왕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지.”
“그렇다면 호황은 어떻습니까?”
“호황?”
묘산인은 이제야 고학이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을 하자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호황이 천녀의 신분을 눈치챈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천림왕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니….”
고학은 뒷말을 흐리는 묘산인을 바라보며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천무공께서 새로운 천하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은 나도 원하는 바이나, 주군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네.”
“…!”
“태상회주께 시간을 끌지 말고 하루 속히 따님을 만나시라 전하시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술자리는 이만 파하세.”
백수회 입장에서 천무공 백호나한과의 관계는 일단 동맹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백수회가 백호나한에게 뭔가 요구할 수 있는 건더기가 없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백호나한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남천원군을 남례성에 보낼 때의 조정이 바란 것은 봉기를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 서남해안 거점들의 안전 확보뿐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선 남례성의 밀림에 숨어 있는 진토인들이 어찌하든 상관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막에서 웅랑교가 거병하고 앙신성에서 천원군이 대패하는 가운데 관심 밖에 있던 하남천원군의 승전은 분위기를 일신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그러니까 딱히 조정에서 주목할 만한 승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일부러 백호나한의 공을 칭송했지만 주목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백호나한이 백호대수영을 꾸리는 데 백수회가 조정의 이목을 흐리는 일을 했지만 원칙적으로 조정은 바다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륙의 물산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장강대하였지 바다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이 백호나한을 제대로 된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겨우 1년 전 백호나한과 천상천화의 혼인식과 출병식 때부터였다. 그 뒤로는 축적된 힘을 일시에 쏟아 부어 반기를 든 남상 서해대수영을 복속시키고, 후에 정립천하군의 발호를 일시에 무너뜨림으로써 역량을 과시하고 원주로 돌아와 어찌 얻었는지 알 수 없으나, 용천검의 주인임을 밝히면서 단숨에 천하의 패자로 등장한 것이다. 백수회가 백호나한에게 도움을 준 것이라곤 조정의 관심을 돌린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경을 장악할 때 누가 천림왕과 선이 닿아 있고 누가 소외되어 있으며 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지만 그건 백수회의 상경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한 일인데다, 고학도 아는 상태에서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백수회는 껍데기만을 얻은 것이었다. 상경의 금군은 백호나한의 수하들이 모조리 장악했고 금전에 관한 일은 토금전장이 도맡아 하기로 하니 황진성부 관리들이 하는 일은 그야말로 잡무뿐이었다. 그러나 백수회를 무엇보다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백호나한의 숨은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