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20190513)
< 구둣끈을 못 매는 어느 군인간 아들 >
- 文霞 鄭永仁 -
어떤 군인 엄마는 그 아들의 상사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자기 아들이 구두끈을 제대로 매고 다니는지 확인해 달라고……. 그 아들은 군인을 갈 나이가 되어도 구두끈을 잘 매지 못했다고 한다. 보나 안 보나 뻔하다. 그 나이가 되도록 엄마가 노상 매어 주었을 것이다.
구두끈도 잘 못 매니 뭐는 제대로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혹시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해서 허둥거리는 마마보이가 아닐까. 하기야 한국의 대학생 일부는 강의 신청도 엄마가 해준다고 하니…….
자식을 그렇게 키우다간 연의 퇴김처럼 하늘로 치솟던 연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분수가 어려워요” 하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수포자(수학포기자)가 생기기 시작한다고 한다. 자연수에서 분수 개념이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란다. 이건 고등학교의 미적분도 아니고 가장 수의 기초적인 것에서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난다니 한국의 교육이 야단은 야단이다. 결국 조그만 어려움도 못 참거나 뚫고 나가지 못하면 큰 어려움에서는 지레 주저앉고 말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은 인공기계에게 맡기면 되나? 하기사 국가인권위원회가 딸만 설거지를 시키면 인권위원회로 신고하라고 한다니…….
사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 없이 쉽게 태어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떤 이는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는 참을성이 없다고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찮은 민들레의 홀씨가 보도블록 사이에서 뿌리 내리고 싹이 트고 꽃을 피워서 열매를 맺어 씨앗을 날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일제고사가 폐지된 교육현장에서는 학업 성취도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학생의 성취도를 알아야 재지도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고등학교 학생의 기초학력 미달율이 점점 높아진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학생들의 기초학력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좌파 교육감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기초학력검사든 일제고사든 아이들에게 엄청난 부담감을 준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이 도입했던 유도리 교육(軟性敎育) 계속이다. 정작 일본은 연성교육으로 인하여 학력이 자꾸 떨어지니 경성교육(硬性敎育)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인 추세가 그렇다.
이렇게 쉬운 일만 찾는 교육을 받는 초등학생의 꿈은 부모에게 건물을 물려받아 세놓고 편하게 사는 것이란다. 중고생은 한 10억만 생기면 교도소에서 3년 정도 썩어도 좋다고 한다.
무릇 인생사란 쉬운 일,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인류의 발전은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서 출발한다. 인생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의 바다라고 하지 않던가. 사실 쉬운 일만 배운다면 교육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불교의 가르침 방법에 섭수문(攝受門)과 역화문(逆化門)이 있다. 섭수문은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 순서적, 단계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하게 가르치는 방법이고, 역화문은 반대로 개성과 고집에 강한 제자들을 처벌, 욕설, 매질, 추방 등 상대방을 작그하고 흥분하게 몰아치는 지도 방법이라 한다. 그러니 섭수문은 조곤조곤, 역화문은 벼락 치듯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 신발끈을 못 매거나 좌우를 바꾸어 신으면 어마는 안달복달한다. 다른 집 애들은 잘도 하는데, 그때부터 타인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 새를 참지 못하여 엄마는 자기가 해준다. 어찌 보면 엄마는 자식 스스로의 할 일의 과제나 기회를 박탈하는 경우가 된다. 자신의 인생 과제를 자신이 해결하여야 한다는 삶의 자립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그러니 군대 가서도 자신이 신어야 할 군화의 끈을 못 매는 것이다.
한국의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좀 참으며 기다리지 못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반에 보내고,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친다.
특히 한국 부모들은 자식을 자기 소유물이라는 경향이 짙다. 누가 그랬다. 자식에 대하여 타자(他者) 의식이 필요하다고. 또 한국 부모들은 자식과 너무 밀착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책과 눈이 너무 가까이 있어도 잘 안 보이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잘 안 보이게 마련이다. 독서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듯이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집의 기둥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듯이 말이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다.
나비는 자기가 우화(羽化)하여야 살 수 있고, 병아리도 자기가 쪼고 나와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살아주지 못한다. 자식의 인생은 자식의 것이니깐.
아마 현대교육사조로 빗대면 섭수문은 연성교육, 역화문은 경성교육 쪽이 아닌가 한다. 사실, 그 지도방법의 우열을 가린다는 것이 우습지만 다 일장일단이 있다. 대상, 상황 등의 여러 조건에 따라 달라야 할 것이다. 다만 세계 교육사조는 연성교육에서 경성교육으로 유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성교육은 자꾸 학력의 저하, 버릇없는 아이의 양산, 교사에게 폭언이나 폭력, 성희롱까지 세태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