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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Paris>의 도시계획 |
1. 서 론
●개 요
프랑스의 수도. 면적 105.4 ㎢. 인구 약 220만. 교외를 포함한 '대(大)파리'는 면적 1,000 ㎢. 인구 약 1021만(1990). 오랫동안 센현(縣)의 주도(主都)였으나 1964년부터 파리만으로 독립 현이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세계의 다른 나라 수도와 비교하여 몹시 좁은 편에 속하지만 둘레 36 km의 환상도로(옛 성벽 자취)에 둘러싸인 부분이 1860년 이래의 파리 시가지이다. 그러나 프랑스 전체의 0.25 %에 불과한 면적에 전인구의 약 1/6이 집중해 있는 '대(大)파리'는 해마다 10~15만 명씩 인구가 불어나고 있다. 재정지출이나 상업거래량도 전국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수도에의 집중현상'은 프랑스의 특징이며, 파리는 세계 제4위의 인구밀집 지역.
2. 파리 대개조 계획 Paris Grand Rebuilding
1)역사적 대개조계획
파리는 2000년이 넘은 도시로 Gauls종족이 BC 200-250년 여기에 정착해 세느강의 섬 (현재 Cite로 불리는 파리 개발의 중심지)에 어촌 마을을 세우면서 시작됨.
고대에는 Lutetia (Lutece)라고 불리웠고 BC 52년 시저가 정복하여 로마 지배하의 지역이었다. 중세 초기(987) Hugh Capet이 프랑스의 왕이 되면서 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⑴ 중세 시대의 파리
① cite : 최초의 Gauls인의 촌락으로 세느강의 섬에 건설된 부분
② universite : 세느강상부제방에 로마인에의해 luteria 식민도시로 건설되고, 1210년
Abelard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대학이 세워짐
③ ville : 세느강 하부 제방에 있으며 상업 조합과 시당국이 있었음.
이 세 부분은 1370년 찰리 5세가 구축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면적 440ha, 인구 10명
⑵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파리
-1528년 이후: 프랑소아 1세, 우측제방의 옛 루브르 궁 재건→프랑스왕 파리에 거주시작
-16세기 : 성벽을 넘어 확장하여 인구 20-30만
-1589-94 : 종교전쟁&앙리 4세의 파리공격, 정복
-앙리 4세: 1610년 까지 공공사업계획 착수
-공공사업 계획: 수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파리를 중심화 함.
①세느강 우측 제방에 성벽 확대 (튈르리 정원까지의 지구 포함 위해)
②도로와 제반 설비 (상수도, 하수도)의 개조
③몇 개의 새로운 규칙적인 형태의 광장 개설 (ex. Vosges , Dauphine, 프랑스 광장)
④루브르 궁의 확장 ( 뉠르리 정원까지의 축 형성- 나폴레옹3세 때 완성)
⑤St. German 성 건설 (테라스형 정원-이태리 모방)
-17세기 전반: 민간 건설업자들에 의해 St. Louis섬, 좌측 제방 지구 개발
-1700년대 : 파리확장이 계속됨으로 많은 건물들이 난립하고 인구가 증가
-프랑스 혁명(1789)시 파리는 혼잡, 혼돈
-1793년 "Plan des Artistes" 라는 파리를 위한 새로운 계획 수립함.
① 도로, 공공 개발, 위생, 시장 , 다른 실용적 필수 시설을 제공하는 것.
② 이 계획의 중요한 점은 혼잡한 도시에 넓은 순환 도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것 (boulevard 암시)
-1748년 플라자와 1793년 도로에 관한 계획.
① 나폴레옹 1세의 주장에 의한 것.
② 어베뉴의 끝을잇는 샹젤리제 거리와 개선문을 만듦.
③ 프랑스 조경 디자인을 도시로 적용하기 위한 것
2) 파리 대개조 계획 (1853 - 1869 , 17년간)
⑴시대적 배경
17-8세기의 파리의 팽창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팽창되어 도시의 공간질서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나폴레옹 3세가 즉위했던 1853년의 프랑스는 도덕적, 재정적으로 쇠퇴기.
이러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도시의 공간구조를 재정비하려는 계획이 실시되었다.
-당시 증가하는 인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규모 요구
-산업, 교역의 중심지로 만들어 왕권을 상징하는 프랑스의 중심도시화 요구.
⑵ 파리 대개조 계획이 성공적이었던 원인
①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왕권
② 책임자 Baron Georges Eugene Haussmann남작의 강한 추진력과 능력
③매우 진보적인 법률 존재 (1840년의 토지 수용법, 1850년의 위생법)
⑶ 대개조에 따른 파리의 변화
① 새로운도로를 형성(근대 도로망 형성): 기존의 384km(성내)→ 새도로 95km, 50km 폐지
기존의 333마일의 꾸불꾸불한 도로→85마일의 직선도로
②새로운 주요 서비스 시설을 만듦: 수도, 하수도, 가스등, 합승마차의 교통망,가로와 보도의 수 증가
③새로운 부차적 서비스 시설: 학교, 병원, 기숙사, 부대 막사, 형무소, Bois de Boulogue, Bois de Vincennes 삼림공원
④랜드마크 형성 (검은선-새로운 도로,격자 부분-새로 :오페라 극장, 중앙 공공회당 등운 지구, 사선 부분-2개의 교외 공원)
⑤행정조직 개편: 관세용성벽 폐지되고 교외 마을 파리에 합병, 외부 방어용 성벽까지 도시 확장되 어 12지구에서 20지구로 나뉘어짐. (총 8750ha)
⑷ 개조 방법
①3단계로 나누어 이루어짐
-제 1기(1850년대): 중심부에서 교차되는 대로 건설되고, 소공원과 광장이 도처에 조성됨
-제 2기(1860년대 전반): 에뚜알 광장을 중심으로 특히 서부지역 정비
-제 3기(1860년대 후반): 오페라 극장 주변을 대로로 개조 (옆 그림)
도심부분95km, 외곽부분70km1, 780ha면적의공원과 총연장 570km의 하수도 설비
②boulevard(넓은 가로수길)로 도시의 structure 형성(옆 그림)
-대규모 통행량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의 동맥의 역할
-부동산 투기를 조성하는 도로 시스템: 정부가 투자가의 돈을 끌어들이려는목적
-시민의 폭동의 콘트롤 용이 :폭동을 일으키는 복잡한 골목길의 하층 주민들을 제거하기 위한 군대의 이동, 대포의 사용 용이하게 함. (프랑스혁명30-40같은 일이 발생할 경우 콘트롤용이)
-상징성과 권력의 위엄 표현: 직선들이 만나는 곳곳, 직선가로의 시각적 초점에 공공건물과 기념비적인 상징물 배치
-건물과 도로와의 관계성 중요시 됨: 신설도로에 면하는 건물 형태를 철저히 규제 (도로에 따라 늘어선 돌 외장의 아파트)
ㄱ.가로의 넓이에 따라 건물 높이 규제: 폭 20m이상의 도로-건물높이 도로폭 이하
폭 20m이하의 도로-도로폭의 1.5배 이하
ㄴ.지붕의 경사도 45°이하
⑸ Haussmann의 계획에 대한 견해
①긍정적인 견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품위와 견고함, 조화와 질서정연함에 비중을 두는 입장에서 긍정적.
②부정적 견해
-기념비적인 형태보다는 친근함, 다양성, 아름다움이 도시에 존재해야 된다는점에서 부정적
-도시의 확장과 도시 기능의 완결성에만 주력
→ 도시의 중심을 단순화, 집중화 시켜 도시민의 통행에 혼잡 야기 (자동차 교통에도 불리)
-새로 만든 구역: 부유층과 중산층을 위한 것 → 가난한 사람들은 여기에 살 수 없었음.
(세입의 증대를 위한 투기 목적)
⑹ 계획의 영향
①19세기 도시 계획을 대변하는 계획: 이전의 감각에 의존하는 부분적 도시계획이 아닌 미래지향 적이고 합리적인도시 전반에 관한 계획
②신도시의 개발에 모델이 됨: 근대 도시계획에 많은 영향을 줌
③적용사례
-Jacques Francois Blondel의 Strasbourg (1768년)
-Pierre Charles L'Enfant의 워싱톤 (1791년)
-베를린 튜린, 아테네, 멕시코 시티
-Daniel Burnham은 미국 도시에 적용 (28-c)
3. 프랑스파리의 도시계획
3-1 파리혁명프로젝트
1) 파리개발의 도시계획 및 시스템
․대통령중심으로 진행이 되는 강력한 정부주도의 개발계획
․전통적인 도시개선사업과 달리 새로운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바로크 도시의 구조를 보다 강화한것으로서 새로운 도시적 규모의 기념물을 통해서 도시의 구조적인 맥락과의 관계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원근법, 축선의 강조, 기하학, 대칭, 비례등의 미학적 전통을 역사적인 연속선상 위에 다시 구성한다.
․프랑스 건축문화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인 단일건물은 항상 자연 혹은 도시의 컨텍스트의 한 요소로서 고려하는 면이 추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 파리의 역사문화유산에 관련된 개발방법
파리는 기존의 에펠탑이나 개선문으로 이루어진 거대구조물로서의 도시이미지를 도심 내에서는 보존하면서 역사성을 띤 축선을 설정하여 기념비적인 구조물과 지구를 건설함으로 도심내의 기능의 분산과 도시의 특성화를 실행하였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라데팡스
․신개선문이 입지한 파리의 새로운 부도심 조성사업인 라데팡스 지구 개발사업은 1960년의 파리 수도권계획에 따라 인구의 교외지역 분산과 도심 업무시설의 주변부로의 이동을 목표로 전면매수방법에 의해 추진된 대규모 도시재개발 사업의 하나이다.
․프랑스 건축을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탈피시켜 현대건축의 무대에 올림으 로써 프랑스 건축이 세인에게 회자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신 개선문을 중심으로 하는 라데팡스 지구가 목표하는 개발의 핵심은 '유럽 업무지구의 핵'을 가꾸는 동시에 파리를 중심으로 4개의 텔레포트를 구축하는 것이다.
․파리권에는 약 5만여개의 중소기업이 몰려있으며, 프랑스 산업생산력의 1/4, 노동력의 1/5, 전체 입금 지불액의 약 1/4을 담당하는 곳이다. 기간산업의 집중에 있어서도 파리는 유럽 내 다른 도시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막강한 시설을 보유하고 있어 항공, 고속철도와 고속도로 등으로 얽어진 그물망 속에서 4백여개에 달하는 유럽 및 세계도시와 연계망을 구축하고 있다. 프랑스 국내 의 89개 지방도시와 연결되는 운송망을 구축하고 있다. 또한 파리권에는 17개의 종합대학, 50여개의 에콜, 1300여개의 민간연구기관이 밀집되어 프랑스 산업연구분야의 60%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곳이다.
․라데팡스 개발의 의의 : 파리권의 이같은 강점을 더욱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개발의 기본이념을 충실하게 반영하기 위하여 업무비구의 확충과 기존 산업연구부문의 체계화와 종합화를 정보화라는 흐름에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라데팡스 개발의 역할 : 라데팡스 지구의 개발을 통해 현재는 약 10만명이상의 관리직 종사자가 근무하고 있으며 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900여개의 회사는 프랑스 정부예산과 거의 맞먹는 매축로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최대기업 20개 가운데 14개기업의 본사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2) 루블 박물관 중정 피라밋
․이 건설사업은 리볼리가에 면한 루블박물관의 북측동 일부를 사용하던 프랑스 재무성이 이전함 에 따라 기존의 박물관을 확장하는 사업을 일컫는다.
․이 피라미드에 의해 그동안 닫혀있던 광장이 개방되어 공공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했고, 버려 져있던 쓸모없는 공간을 활력적이고 중심적이 도시 내 시민공간으로 되살렸다.
(3) 바스티유 오페라좌
․이 사업의 개발특성은 도심이전적지에 대한 순기능의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 곳은 프랑스 시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서 수세기를 거치며 역사의 질곡과 각양각색의 건축물이 들어섰다가는 사라지곤 했던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장소이다.
3) 도시기반시설의 재정비
(1) 도로, 공항, 초고속철도, 경전철운송수단등 물류운송수단의 재정비
․ 영불해저터널건설
․ 초고속철도 TGV의 노선확장과 우선구간의 개통
(2) 광통신망이나 네트워크에 관련된 첨단기술분야의 개발
․ 박람회, 전시회, 국제회의장의 개설등 핵심적 관광기초산업을 육성
(3) 문화적 정책을 추구
․ 기념비적 프로젝트를 통한 도시경관의 특성화.
․ 박물관, 화랑, 축제의 장을 마련하는 등의 문화적거점마련.
4) 도시정책
1960년대 파리대도시권의 도시개발정책은 영국의 신도시개발 이상과는 달리 파리 대도시지역의 대대적이고 계획적인 도시확산 방식에 의하여 오늘날의 파리대도시지역을 발전시켰다. 파리가 남북 2개의 개발축을 구상하고 그기에 따라 8개(나중에 6개)로 자족적인 크다란 신도시를 개발하였다. 이름은 신도시라고 하였지만, 대도시지역의 외연적인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신도시로서 자족적인 기능을 갖고 독자적인 도시 특성을 가질려고 하였다.
1965년에 만들어진 이 기본계획은 파리외곽에 일련의 신도시를 완전히 새로 건설하고 기존의 몇몇 교외지역을 고밀도 개발지역으로 선정하였다. 이계획은 1966년부터 시행되어 1975년경에는 파리로부터 20마일 이내에 5개의 신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중심부에 근접한 세 개의 위성도시(major node)를 La Defense, Creteil, Bobigny에 개발하였는데 그 목적은 파리중심부의 사무실의 개발을 이 외곽으로 분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5) 공공의 토지소유
프랑스가 1958년 이후 적용해 온 토지은행제도 - 프랑스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개인의 재산소유권에 대한 강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으므로 토지은행제도의 도입이 늦다.
프랑스의 토지획득제도는 독특하다. 지방정부는 어떤 특정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일정한지역을 우선도시개발지역(a zone for priority urbanization:ZUP)으로 선정하고 구체적인 개발계획을 작성한다. 이후 지방정부는 이 지역의 일부를 토지수용을 통하여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선정된 지역을 지방정부가 모두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선정된이후 4년동안은 판매를 위하여 나온 토지를 우선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게 된다. 따라서 만약 이 구역내의 토지소유자가 시정부가 계획하는 목적에 어긋나는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팔려고 할 때 시정부는 그 토지를 우선적으로 사게 되는 것이다. 이때 토지가격은 시정부가 ZUP지역으로 선정한 그 시점의 가격으로 지불되므로 다른 개인에게 팔때보다는 낮은 가격에 팔게된다. 이러한 제도는 ZUP지역으로 지정된 지구의 거의 대부분의 토지거래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 지더라도 이 지역에 대한 시당국의 강한 구너한을 가지게 해 주는 것이다.
4.지역중심의 신도시개발
현재 프랑스에서는 총 9개의 신도시에 약 8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파리주변에 5개의 신도시(세르지-퐁뜨와즈, 마른느 라발레, 믈랭 세나르, 에브리, 생깡땡 앙 이브린)가 있으며, 지방(릴 근처 릴에스트, 루앙근처 보드뢰이유, 리용근처 리슬다보, 마르세이유근처 리브 드 레땅 드 베르)에 4개의 신도시가 있다. 그중 65만 명 이상이 파리 근처 신도시에 살고 있으며, 그중 맛세르지-퐁뜨와즈에 약 18만 명이 살고 있다.
1)신도시 망세르지-퐁뜨와즈
(1) 배경 및 목적
세계 제2차 대전 후 50년대의 baby boom으로 인하여 프랑스 파리주변의 도시개발이 가속화되었으나, 대부분 팽창하는 파리의 인구분산에 급급한 나머지 파리주변을 이곳 저곳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새로 작은 마을을 건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완화하기 위하여 프랑스 정부는 급격히 늘어나는 파리의 인구를 효율적으로 분산시키고 수도권의 체계화된 도시개발을 위하여 60년대 중반부터 신도시를 계획했다.
파리 주변의 신도시 개발은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공공개발공사(EPA)를 설립하고 토지수용기반시설 구축에 착수하였다. EPA는 프랑스 수상실 산하 도시계획부 소속 기구로 신도시개발의 전권을 갖고 있었다. EPA는 맛세르지-퐁뜨와즈맜의 개발에 있어서 두 가지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살고 싶은 자족도시’로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역 밀착형 도시개발’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계획방식은 마스터 플랜에 의한 전지역에 대한 단일한 계획이 아니라 1965년 계획 당시부터 현재까지 약 35년에 걸쳐 부분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부분적으로 건설하는 단계별 개발방식(piecemeal development)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획일화, 단일화를 피할 수 있으며, 각 지구별로 하나의 시스템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2) 교통체계
파리시내에서 망세르지-퐁뜨와즈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이다. 하나는 고속철도(RER) A선을 이용하는 방법인데 이는 맛세르지-퐁뜨와즈에 총 4개의 역이 있어서 편리하며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또하나의 방법은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15번 고속도로와 184번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약 30분 안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공항(퐁뜨와즈-코메이유 공항)까지도 약 10분이면 도달 할 수 있어서 훌륭한 교통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3) 녹지와 함께 하는 도시
기존의 커뮤니티와 넓은 농지를 보존하여 실제 도시화 구역은 1천2백10만평으로 전체의 37%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녹지와 수상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녹지는 공장지역을 주거지역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하며, 레저시설로는 30만평의 호수를 끼고 있는 대규모 세르지뇌빌 레저단지를 비롯하여 골프장, 해상 스포츠시설 등 다양하다
2) 프랑스 파리의 벡시(Bercy)
도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생명체와 같다. 파리의 센 강에 인접한 벡시(Bercy)도 마찬가지. 이곳의 설계 의도는 ‘뤼 페다고지크’(lieu pedagogique), 즉 ‘역사의 켜가 읽혀지는 장소’다. 집합주거단지가 공원과 연결되고 그 공원은 포도주의 이동로로 이용되었던 지역의 역사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미래에 대한 꿈을 제시해 주는, 마치 살아 숨쉬는 동시대 박물관 같은 곳이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파리 시는 시 외곽지대와 중심부 양쪽에서 개발의 문제점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도시 기본계획에 있어서도 중대한 개념변화가 일어났다. 전후 성급히 시작됐던 외곽지대의 개발정책이 도시 인구증가와 경제논리에 편승하여 무분별하게 진행돼 가고 있어 정비가 시급했던 것이다. 또한 파리 시는 유럽의 다른 수도들에 비해 시내의 면적이 작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부로서의 역할을 강화하려면 산업시설이 산재해 있던 시 경계의 마지막 언저리까지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껏 버려졌던 파리시의 동쪽 지역은 비로소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도시 중심권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벡시 구획정리지구는 Apur(Atelier parisien d’urbanisme: 파리 시 도시계획실)가 1987년에 계획한 프로젝트로 파리 동쪽 지역의 센 강 오른쪽에 접해 있는 6만여 평의 동서로 ‘긴 덩어리’ 땅이다. 북동쪽은 리용 역으로 연결되는 기차 선로로, 남서쪽은 센 강과 강변도로로, 시내 쪽은 새로 지어진 거대한 재무성 건물로, 그리고 외곽순환도로에 의해 경계가 지어진다. 이 지역은 경관이 좋을 뿐 아니라 역사적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 박물관식 정원을 조성하기로 결정되었다. 도시 계획실은 오랜 연구 끝에 세 개의 중요 개발방침을 정했다. 이 지역의 역사적 흔적을 간직하되, 이 지역과 다른 도시구역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며, 주거와 시민활동과 자연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공원을 관통하는 산책로. 그에 직교하는 여러 스크린은 무료하기 쉬운 기하학적 구성에 변화를 준다. ‘로맨틱 정원’이라는 이름의 이곳에는 옛 폐허와 흔적들을 의도적으로 남겨놓았다. 뽀잠빡의 타워형 주거동이 전체적인 통일감을 주기 위해 설치된 내어 달린 발코니에 의해 옆의 건물들과 연결되어 있다.
벡시 구획정리지구는 세 개의 중심지역으로 나뉜다 센 강을 따라 길게 펼쳐진 공원, 남동쪽의 농업 그리고 식료품 관련 비즈니스센터, 공원에 접한 북단의 1천2백 세대 규모의 주거단지가 그것이다. 단지전체의 정비는 파리 시가 대주주로 있는 SEMAEST사에서 담당했고 총 20팀의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주거단지를 총지휘했던 책임건축가 장 피에르 뷔피는 무려 4백 미터에 이르는 길이의 주거단지를 맡아 기본 모듈의 제한된 변화만으로 전체적으로 균일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각 건물의 높이, 폭, 재질과 발코니의 형태에 이르는 아주 세밀하고도 까다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또 파리 시내의 전통적 집합주거단지 형식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들이 고안해 낸 주거형식을 적당히 절충함으로써 벡시가 지닌 독특함을 더 많이 공유할 수 있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첫댓글 참고 그림이 있으면 좋겠네요
그림올리는 방법을 몰라서요ㅠ_ㅠ 알게되면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