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계천의 추억 - 둑 길 <2005. 11. 20>
청계천이 복개된 후에는 전통적 개념의 다리란 것은 사라졌었다.
다리랄 것도 없이 그저 횡단보도만 그어 놓으면 사람이 건너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계천의 콘크리트가 걷힌 지금은 무교동의 모전교에서부터 고산자교가지 16개의 다리가 남았다.
복개 전의 옛 청계천에 비해 7개 정도의 다리가 더 생긴 모양이다.
50년 전의 청계천에는 지금 황학동의 영도교가 다리다운 다리로는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동쪽 아래로는 다리를 본 기억이 없었다.
우리 가족은 해방 후 월남하여 중구 저동, 지금의 중앙극장 뒤에 살았다. 6.25를 만나 피난을 갔다가 7년 만에 돌아 온 우리 가족에게 서울은 이미 낯선 도시가 되어있었다. 동대문 밖에 터를 잡고 산 후 지금까지 세칭 문안에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지금의 경희궁터에 자리 잡았던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매일 서울 문안을 가로 질러 전차로 통학을 했다. 통학로와 평행선인 청계천은 그래서 늘 생활의 한 옆에 자리했었다.
빨래터, 물놀이터
영도교에서부터는 양 옆의 옹벽이 없었다.
남쪽 둑 위에는 왕십리까지 가는 기동차가 있었고, 북쪽 둑 너머에는 폐쇄 된 채 방치된 경마장이 있었다.
이 옛 경마장은 경비행장으로, 자전거 경주장으로 가끔 쓰였지만 아스팔트 트랙을 제외하고는 채소밭이었다.
양 옆이 시가지가 형성되지 않은 논밭이었기에 청계천 남쪽과 북쪽을 잇는 다리는 그리 필요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소의 잔등과 같이 부드러운 곡선의 둑에는 봄에는 따스한 햇살에 가끔 소나 염소가 풀을 뜯었다.
물가로 내려서면 빽빽이 난 수초 사이로 조용히 물이 흘렀고 그 위에는 소금쟁이가 미동도 않고 올라서 있었다.
나는 이 둑길을 좋아했다.
날씨 좋은 토요일이면 책가방은 던져놓고 이 둑길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걸었다.
걷다 지루하면 앉아서 들판을 바라다보기를 계속하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운 후 돌아와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다.
나무다리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주 없었다고 할 순 없었다.
가끔가다가 얕은 여울에 막돌을 던져 놓은
징검다리가 있었고,
어쩌다가는 가느다란 나무다리가 불안스럽게 걸려 있어
농부들이 지게를 지고 건너기도 했다.
청계천이 복원된 후 일회성 방문객이 뜸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영도교로 달려갔다.
우선 50년 전 내가 살았던 집으로 가보았다.
작년에 가 보았지만 또 보고 싶었다.
바로 옆에 붙여서 롯데캐슬이 위용을 자랑하며 올라가고 있는데도
아직 헐리지 않고 용케 버티고 있다.
골목을 나와 ‘영미네 곱창집’에 들어가 좋아하지도 않는 곱창을 시켰다.
영미다리의 추억 때문이다. 영도교를 그 시절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영미다리라 불렀었다.
무학교를 지나면서부터 청계천은 옛 기억의 청계천으로 남아있었다.
고산자교를 지나면서부터 옛날과 같이 다리는 없었지만
둑 길 양쪽에는 지하철 순환선과 외곽 순환도로가 높직이 걸려 차들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양 옆의 둑길은
예전 같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렸고
넓은 고수부지는 깨끗하게 단장되고
산책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모래톱은 돌로 쌓아 없어졌지만
수초들 너머로는
가창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물 표면이
가을바람에 가늘게 떨리자
물고기 비늘같이,
깨어진 유리조각 같이
눈부시게 햇빛을 반사했다.
나는 포장된 산책로를 버리고 물가의 오솔길로 걸었다.
50년 전과 같이 이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철새 도래지
길은 어느덧
중랑천과 만나는 지점이 이르렀다.
이곳이 철새도래지라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가창오리를 비롯한 이름 모를 철새들이 가맣게 내려앉았다.
이제부터 개천이라기보다는 강물이다.
커다란 강을 이루고 한강으로 흘러든다.
오른쪽으로는 한양대학교 캠퍼스가 자리하고
저 앞에는 살곶이다리가 보인다.
아쉬운 청계천 산책이 끝났다. * 양동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