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생각해 보면 어떡하지와 연명하였네. 어떡하지가 어떻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어떡하지가 나를 다독이고 나를 떠밀었지. 당신이 떠난 빈자리도 어떡하지가 떼로 달려들어 채워주었고, 피할 길 없는 억울함이 가득할 때도 어떡하지가 다가와 나를 덜어내 주었네. 지울 수 없는 인연에 온 생을 자책하며 외고 또 왼 어떡하지가 뜨겁게 끓여낸 매생잇국처럼 푸르게 엉겨 있는 것도 겨울을 녹여주는 뜨거운 설움임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은데,
세상의 모든 괴롬이 몰려오는 저녁, 북으로 북으로만 아득하게 차를 몰아 올라가고 싶은 순간, 어떡하지가 슬몃 다가와 마음을 툭툭 치니, 허연 김 무럭무럭 오르는 저녁상이 눈앞을 흐리네. 지금 지는 해도 뜨는 달도 서로를 밀고 당기며 어떡하지, 어떡하지, 영겁을 지탱했을 것 같아, 잠잠히 입을 다무네. 에돈 길 되짚어 애써 돌아가는 길. 어떡하지, 어떡하지, 가 나를 허물고 다시 세워 여기까지 데리고 왔네.
낮달
때를 잘못 만났다
있지만 소용에 닿지 못하는 것
그럼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력을 다해
증명하고 있는 저 희미한 얼굴
내가 전심전력한다는 것은
결국 저 낮달 같은 것
세상은 이미 휘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쓸모없음을 열심으로 증거하는 것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저 빛 가운데
강물처럼 잔잔히 부서져도 좋을 것을
촘촘한 잎새로 눈부시게 부서져도 좋을 것을
밤이 오면 광명할 것인가
그때를 대비해 빛을 머금고 있는가
쓸모없음이 흑암 속에서는 귀한 것이 되는가
창백한 낮달,
한낮의 나를 증거하고
한밤의 나를 기망하네
그것은 어두워져야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
벌레 같은 내가
한밤중에 책상에 앉아
마침내 홀로 환해지는 것
등단 소감
이름을 버리며
한 장르에 대한 순정주의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다른 장르를 넘보는 일은 많은 이들에게 외도로 취급되는 것 같다. 하지만 시적 기운은 내 안에 늘 살아 있었고, 비평을 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시를 위한 자양분으로 가라앉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소설과 비평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내 초라한 문력이 가장 뚜렷한 전향의 근거가 될 테지만. 어쨌든 나는 말련에서 피살당한 비운의 이북 정치인의 이름과 같은 ‘김정남’이라는 내 본명을 버리고 ‘김겸’이란 필명으로 시를 쓰려고 한다. 이는 내 장편소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이름이다.
혼자 더듬더듬 시를 쓰는 일은, 담배를 처음 배울 때처럼 유치하고 한심한 것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시인지 아닌지도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시를 쓰고 있는 한밤중에 누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라치면, 나는 야동을 보다 들킨 십대 아이처럼 모니터 화면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마음을 두드렸다. 그러면 구상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시가 다 씌어졌으니 옮겨 적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열어 주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제 면허를 땄으니 도로로 슬슬 나가보려 한다. “그 나이에 뭘?”, “웬 시?”, “그럼 소설은?”, “논문이나 써.” 따위의 핀잔은 스스로에게 많이 한 말이니, 더는 듣고 싶지 않다. 생을 조금 연장하는데 시가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이미 시는 내 말을 많이 들어주었다. 시는 나에게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따라서 어느 누구의 응원도 격려도 받지 못한, 자학성애자의 관능 같은 거였다. 이 비루한 생이 나에게 가르쳐준 감각이다.
김겸(신인) 2002년『현대문학』(평론), 2007년『매일신문』신춘문예(소설), 2020년『모:든시』(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