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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체페슈는 15세기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에 있는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 블라드 3세의 별명으로 ‘가시의 블라드’란 뜻이다. 그는 라틴족에 속하는 루마니아족 출신으로, 그 일생은 평생 싸움으로 점철된, 험난하고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오스만의 편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귀족 계급과 싸웠고, 영주가 된 후에는 아버지의 원수였던 후녀디 야노시와 힘을 합해 오스만과 싸웠다. 또 오스만의 편이 된 동생 라두와 싸웠고, 형은 블라드와는 정반대로 귀족 친화적 노선의 정치를 폈다. 그런 와중에 블라드는 최강이었던 오스만에게도 저항하고, 당시 왈라키아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귀족과 독일인들을 탄압한 인물로서, 동방정교회 신자와 백성들에게는 신앙과 조국을 위해 싸운 영웅으로 숭배된다. 또 1453년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에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불가리아 제2제국과 세르비아 공국마저 무너진(1456) 상황에서 동유럽의 기독교 세계 최후의 보루를 지켰던 인물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본명이나 공식적 이명인 드라쿨레아(용의 아들이란 뜻)보다도 ‘블라드 체페슈’(가시공 블라드라고 번역된다)란 별명으로 더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 ‘드라큘라’라는 흡혈귀의 오명을 덮어쓰게 되었는지,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본다.
그의 아버지 블라드 2세는 헝가리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이었기에, ‘블라드 드라쿨’(용공)이라 불렸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라고 하지만 확실치 않다. 그의 형제로는 큰형 블라드와 작은형 미르체아, 동생 라두가 있었다. 그가 6살 때 아버지는 왈라키아 공이 되었다. 나중에 블라드 3세는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은 왈라키아 공임을 부각시키려고, 스스로 ‘드라쿨레아’(용의 아들이란 뜻)란 별명을 지어 사용했다.
그가 12살 때 아버지는 왈라키아 공의 직위를 차남에게 넘기고 퇴위한다. 그러나 그의 형의 치세는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후원으로 바사랍 2세가 즉위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듬해인 1443년 오스만의 지원을 얻어 왈라키아 공에 복위하기 위해, 13세의 그와 동생 라두를 오스만에 인질로 보낸다. 당시 왈라키아는 혈족 파벌들 간에 수시로 정권 쟁탈이 벌어지고, 두 강대국인 오스만과 헝가리가 서로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인물을 공작으로 즉위시키려 해서, 조금 과장한다면 자고 일어나면 공작이 교체될 정도였다.
아버지는 복위에 성공했지만(1443-47) 그동안 그는 오스만의 황제 무라드 2세와 황태자 메흐메트 2세에게 희롱당하고, 옥에 갇히는 등 수모를 겪었다.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그의 형인 미르체아 2세가 아버지 대신 출전해 큰 손실 없이 퇴각했고, 패해 도망가는 후녀디 야노시를 잡아 감옥에 넣기도 했다.
동생 라두는 철저히 오스만 추종자가 되어 관직까지 얻게 되었고, 그가 17세이던 1447년 헝가리와 반대파 귀족들의 공격을 받은 아버지와 형 미르체아 2세가 참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를 얻어 왈라키아로 진격해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곧 헝가리의 반격으로 자리에서 쫓겨난다.
그는 외숙 보그단이 있던 몰다비아 공국으로 피신했다. 이후 거의 영구적인 동맹 관계가 된 사촌 슈테판 3세와 친교를 쌓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숙부가 암살되고 혼란에 빠져 몰다비아를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원수이기도 한 헝가리의 후녀디 야노시를 찾아갔다. 후녀디는 헝가리의 섭정이자 ‘기독교 세계의 방패’, ‘백색 기사’로 불렸던 사람이다. 후녀디도 그를 환대하고, 자기의 부관으로 삼았다. 그동안 그는 후녀디로부터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
1453년 메흐메트 2세(당시 22세)에게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1456년 후녀디(50세)가 메흐메트 2세와 싸우기 위해 베오그라드 전투에 나섰을 때 그에게 기회가 왔다. 후녀디가 공작으로 세웠지만 오스만 측으로 배신한 블라디슬라프 2세를 토벌하고, 왈라키아 공에 오르라는 명을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다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에 복귀했다. 그러나 후녀디는 베오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염병으로 죽는다.
1457년 27세의 그가 즉위할 당시 왈라키아 공국은 내우외환이 절정이었다. 반란이 계속되고 경제 상황 또한 좋지 않았다. 특히 상권을 쥔 잉글랜드와 독일계 상인들의 탐욕과 횡포가 심했다.
그는 보야르(귀족)들을 잔치에 초대해 지금껏 공국을 다스린 공작이 몇 명인지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적게는 7명부터 많게는 50명 사이의 여러 대답을 내놓았다. 아마도 그들은 블라드를 조롱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들 500여 명의 귀족들을 모조리 말뚝에 박아 죽여 버렸다. 관련된 다른 귀족들도 부활절 만찬 도중 모조리 붙잡아 요새를 짓는 강제 노동을 시켰다.
그의 치세는 성채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왕궁을 요새화하고, 수도 타르고비슈테의 방어를 위해 남쪽에 부쿠레슈티 요새를 건설했다. 또 아버지와 형을 죽인 귀족 세력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했다. 잔치에 초대한 뒤 스스로의 무덤을 파게 해 묻어 죽였다고 한다. 나머지는 포에나리 성터로 끌고가 강제 노동을 시켰다.
1457년 슈테판 3세를 도와 몰다비아 공국의 공작에 오르게도 했다.
그는 오스만에서의 가혹한 인질 생활로 인한 성격 파탄 증세와 주변의 더러운 상황이 더해져 전쟁 포로와 범죄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주민들을 항문을 꼬챙이에 끼우고 서서히 죽게 하는 형벌을 도입해 공포 정치를 시작했고, 그 결과 체페슈(가시,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이다.
다만 공정함 또한 지극히 강조했고. 이로 인해 범죄는 줄어들었고, 마을 광장에 황금 컵을 놓아 두어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어떤 상인이 마차에 금화를 가득 싣고 그의 영토를 지나갔다. 밤에 누군가 금화를 훔쳐갔다. 가시공은 도둑을 잡아오라 했지만, 잘 잡히지 않았다. 그는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마을 전체에 벌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범인을 색출했고, 금화도 되돌려졌다. 그런데 이때 그는 금화 한 잎을 슬쩍 더 찔러넣었다. 상인은 되찾은 짐을 확인하고, 금화를 세어 본 다음 가시공에게 감사하며 그의 조치를 칭찬했다. 그리고 금화가 한 잎 더 있다면서 내놓았다. 그러자 가시공은 '그 금화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상인을 범인 다음으로 죽일 작정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나던 세 명의 영국인 수도자들을 구금한 뒤 면담했다. 차례로 ‘내가 죽으면 천당과 지옥 중 어디로 가겠는가?’하고 물었다. 한 사람이 ‘공작께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투르크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셨으니 천국에 가실 것’이라 하자, 바로 죽여버렸다. 다음 사람이 ‘폭군이고 악마다. 네 놈의 영혼은 분명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자, 또한 죽였다. 마지막 사람의 답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았고, 영국으로 돌아가 그의 이야기를 알려 서유럽에까지 그의 전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독실한 동방정교회의 수호자였던 그는 대부분의 정적을 죽인 다음 그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 주고, 곳곳에 성당을 건립하기도 했다. 자신의 악행을 신앙심으로 속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는 자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트란실바니아 브라쇼브, 시비우의 색슨족, 독일계 상인들도 공격했다. 이 싸움은 1458년 헝가리의 마차시 1세의 중재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상인들이 사려던 철을 압수당하는 일이 생기고, 1460년 브라쇼브에서 왈라키아 공국의 공작 자리를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킨 딘 3세와 싸워 그를 처형했다. 그리고 브라쇼브에 대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다.
그 결과 특권을 잃은 독일계 상인들은 가시공을 증오하게 되고, 그의 만행을 과장하고 날조하여 선전했다. 이후 생겨난 그의 잔학한 이미지는 여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한편 그는 헝가리와 우호 관계를 수립하고 아버지가 오스만에게 약속한 연공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1459년 오스만에서 2명의 사절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터번 위에 신발을 올려놓은 채로 머리에 대못을 박아 죽이고, 오스만으로 실어 보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들이 터번을 벗는 것은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다고 말하자, ‘벗기 싫으면 평생 안 벗게 해 줄게’하면서.
분노한 오스만 제국은 2년 후인 1461년 쳐들어왔고. 정면으로 맞붙는다. 그는 함자 파샤의 오스만 군대를 매복 전술로 모두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 대승을 거둔다. 포로들은 모두 꼬챙이에 꽂아 죽였다. 유럽의 군주 중 오스만 제국에 맞서 총기를 사용한 최초의 군주였다.
같은 해 그의 선공으로 불가리아 일대의 오스만 진지를 파괴하고, 불가리아 기독교도들이 왈라키아 공국으로 이탈했다. 이때 23,000의 오스만과 불가리아군이 죽었다고 한다.
왈라키아의 항구를 공격한 오스만의 재상 마무드 파샤도 실패하자, 1462년 메흐메트 2세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친정에 나섰다. 하지만 블라드는 청야 전술을 능란하게 펼치고,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만 진지를 기습해 피해를 입혔다. ‘공포의 밤’이란 이 전투로 15,000 명의 오스만 군이 죽었다. 메흐메트 2세의 목을 노린 작전이었지만, 이것은 실패였다. 그는 오스만 군의 시체를 꼬챙이에 꽂아 적이 진군하는 곳마다 걸어 놓았고, 그 절정은 수도 트르고비슈테 성채를 둘러싼 꼬챙이 무더기였다. 용맹을 자랑하던 예니체리(오스만 정예 보병대), 시파히(오스만 기병대), 실라흐타르(술탄의 용기병대)들도 겁을 먹었다고 한다.
그 결과 오스만 군은 왈라키아 수도를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커지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퇴각하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동생 라두 3세는 왈라키아 영토에 남게 된다.
그러나 그의 분투도 역사의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부녀자까지 긁어 모아도 3만에 불과한 왈라키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왈라키아의 피해도 컸고, 동생 라두를 앞세운 오스만 군이 포에나리를 함락시켰다. 귀족들이 배신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그는 1462년 동생을 앞세운 오스만의 3차 원정군에 무너지고 말았다. 라두 3세가 왈라키아 공작으로 취임했다.
그는 동맹인 헝가리로 피신해 후녀디의 아들인 마티아슈 1세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오히려 포로로 잡혀 1462 – 76년, 그의 나이 32세에서 46세까지 장기간 투옥된다. 당시 헝가리는 신성로마제국과 전쟁 중이어서 양쪽의 전쟁을 치를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둘째 아내 일로나와 결혼한다.
1476년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과 왈라키아 귀족들 일부의 협력을 얻어 당시 공작 바사랍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귀했다. 동생 라두 3세는 이미 바사랍 3세와의 싸움에서 죽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도 1477년 45세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과 싸우다 전사했다. 일설에 의하면 오스만 군은 그의 머리를 꿀에 절여 이스탄불로 가져갔다고 한다.
러시아의 폭군이자 현군인 ‘이반 뇌제’가 그를 존경하여 그 통치 방식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드라큘라 전설은 크게 독일어권, 슬라브어권, 루마니아어권으로 나뉜다. 독일어권의 경우 주로 잔혹한 행동과 공포 정치를 강조하고, 슬라브어권에서는 여기에 말년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에 대한 비난이 더해지며, 루마니아 쪽에서는 잔혹함보다는 공정함과 엄격함, 민족주의가 강조된다.
현재 드라큘라 성으로 유명한 루마니아의 ‘브란 성’은 사실 블라드 3세 본인이 살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곳으로, 그냥 소설에 나오는 드라큘라 성의 모티브가 되었을 뿐이다.
그가 흡혈귀 전설과 연관된 것은 1897년 브램 스토커의 소설이 처음이었다. 그 소설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면서, 흡혈귀의 이미지가 그에게 거꾸로 덧씌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