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가 어린 관계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정권을 잡은 후 좌의정 심환지를 영의정 으로 삼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는 등 벽파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또한 함께 권력을 잡은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 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죽이거나 쫒아내고 노론 벽파 정권 을 수립하였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설치했던 장용영을 혁파하고, 규장각의 기능을 축소하는 한편, 정조도 사대부의 반발을 우려해 하지 못했던 내노비와 시노비, 즉 각 궁방, 종묘, 종친, 의정부 등에 소속된 6만 6천여명의 노비들을 선왕 정조의 뜻이라며 해방시키는 큰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종종 정순왕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되곤 합니다. - 노론 벽파의 수장, 권력의 화신으로서 정조와 반대편에 서서 정조의 개혁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심환지 등과 더불어 정조를 암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순왕후의 구체적 정책을 살펴볼 때, 그녀는 노론 벽파에 기운 인사를 하기는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명분을 중시하고 절제를 알았던 여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뜻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난 점이나, 다시 수렴을 치고 등장했다가 시파 이시수의 반론을 그대로 수용해 조용히 물러난 것은 그녀의 이런 면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순왕후가 죽자 그녀를 따르던 노론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습니다. -------------------
순조 즉위 이후인 19세기 조선은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이앙법의 보급 등으로 농업생산력이 발전하고 화폐경제,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신분제의 근본적 변화가 왔습니다.
자영농 중심의 농촌사회는 급격히 양극화의 길로 나아갔고, 자영농에서 부농으로 성장한 일부 평민들은 공명첩, 납속책 등을 통해 양반의 족보를 사 양반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즈음에는 이미 양반이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양반이 아닌 백성들은 소작농, 광산 등의 임노동자 등으로 몰락해 살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일부는 화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이르러 죽도록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관아에 대항하는 일이 발생했고, 조정은 백성들의 죽지못할 사정을 헤아리기는 커녕 앞장선 사람들을 사정없이 효수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 때 단순한 폭동 수준을 넘어 민란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니, 이것이 홍경래의 난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132)> 순조 3 - 홍경래의 난
1811년 12월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평안도 가산에서 일군 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평서대원수라 불리던 나이 마흔의 홍경래가 있었습니다.
홍경래는 일찍이 평양 향시에 합격한 뒤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했습니다. - 내 그럴줄 알았다. 합격자는 죄다 한양 권세가의 자제들. 썩어빠진 세상이다.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를 구했는데, 제일 먼저 가산 땅에서 서자 출신의 인텔리인 우군칙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이어 대부호인 이희저를 끌어들이고, 인근의 부자, 지식인 장사들을 규합해 무기를 마련하고 가산의 다복동에 지휘부 를 차려 은밀히 준비하더니, 이윽고 일어났습니다. - 3년째 흉작인데다 역병까지 겹쳐 유랑자가 산천에 가득 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히 하늘에 닿아있다.
이들이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니 굶주린 많은 유랑민들이 찾아 왔고, 그렇게 모인 이들이 초기 봉기의 주력이 되었습니다.
1811년(순조 11년) 12월 18일, 봉기군은 홍경래를 대원수로 삼고 평안도에 대한 차별과 안동 김씨, 반남 박씨 등 척족들의 득세를 규탄하면서 기치를 올렸습니다.
봉기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봉기 초반 봉기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일부가 한양으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관아의 창고를 열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하고 무기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 이후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박천 등지를 접수 하였으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조정에서 대규모의 관군을 파견하였고, 여기 저기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 으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정주성에 집결한 홍경래의 봉기군은 이후 3개월 동안 처절 하고도 거칠게 저항했지만, 역량을 총집결시킨 정규 관군 을 끝내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정주성은 함락 되었고 홍경래는 전사하였으며 악에 받친 관군은 닥치는 대로 봉기군을 학살하였습니다.
학살을 면하고 체포된 약 2,938명의 군민 중 여자와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뺀 1,917명의 목이 그 자리에서 잘렸습니다.
홍경래의 난, 비록 궁극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봉기 였지만, 19세기 대격변의 바람이 조선 안에서도 불고 있음 을 실감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民을 무시하고 권력투쟁과 일신의 평안에만 힘을 쓰는 권력.지배층 그리고 밖에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이 서서히 조선을 옥죄기 시작하는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