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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풍지리산둘레길 20구간(방광-산동)
여행일 : ‘22. 6. 18(토)
소재지 : 전남 구례군 광의면과 산동면 일원
여행코스 : 방광마을(4.2km)→난동갈림길(3.7km)→구리재(3.7km)→탑동마을(1.4km)→산동면사무소(거리 및 시간 : 13km/ 실제는 ‘당동마을’부터 11.54km를 3시간 2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20구간(방광-산동)을 걷는다. 6개 코스(68km, 목아재-당재구간은 폐쇄됐다)로 이루어진 구례권역의 다섯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km에 불과하다. 하지만 난이도는 ‘중’으로 분류된다. 중간에 ‘구리재’라는 높다란 고개를 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볼거리는 꽤 많은 편이다. 구리재를 오르내리며 만나는 구례생태숲과 구례수목원에서 지리산의 생태계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가 하면, 당동마을에서는 현대적으로 한껏 멋을 부린 예술인마을에 더해 문화유적(석불입상 및 남악사터)까지 함께 둘러볼 수 있다.
▼ 들머리는 참새미계곡 쉼터(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완주-순천고속도로 구례·화엄사 TG를 빠져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면으로 1km쯤 내려오다 첫 교차로(용방면 용정리)에서 내려 광의면소재지(연파리)로 온다. 광용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 100m쯤 더 가다 좌회전하여 광의초교길로 들어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참새미골 쉼터(자그만 유원지이다)’에 이르게 된다. 내비게이션에 ‘지리산참새미계곡쉼터’를 입력하고 찾아와도 된다.(‘방광-산동’구간의 시점은 방광마을회관이나 ‘둘레길 엠블럼’은 참새미골쉼터 입구에 세워져 있다)
▼ 광의면 방광마을과 산동면 원촌마을을 잇는 13km의 둘레길로 지리산국립공원을 이웃하며 걷는 임도와 마을을 잇는 옛길로 구성된다. 이 구간은 구리재(해발 487m)라는 만만찮은 고개를 넘는다. 때문에 오늘처럼 불볕더위가 내리쬐는 여름철에는 지옥의 행군이 될 수밖에 없다. 생태숲이나 수목원 같은 볼거리도 있긴 했지만 오늘처럼 무더운 날에는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오죽 힘들었으면 탈진해 쓰러진 여성분까지 나왔겠는가.
▼ 실제 출발지는 ‘구례 예술인마을’ 앞 삼거리(구례군 광의면 온당리)
오늘도 코스를 약간 조정해서 걸었다. 집사람의 불편한 무릎을 감안한 내 작은 배려로, 초반부 2.5km 정도를 생략하고 당동마을부터 걸었다. 19구간(오미-난동)의 종점인 난동마을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역사유적지인 ‘대전리 석불입상’과 당동마을의 ‘남악서터’까지 빼먹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난동마을과 당동마을의 중간쯤인 이곳 삼거리에는 ‘지리산 정원’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구례군이 지리산 자락에 조성한 전국 최대 규모의 산림 휴양단지다.
▼ 당동마을 쪽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100m쯤 걷자 ‘예술인마을’로 연결되는 삼거리. 잠시지만 이곳에서 집사람과 헤어지기로 했다. 여기서 대전리의 ‘석불입상’까지는 대략 2km(왕복). 역사유적에 흥미를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예술가의 보금자리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여유를 즐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 100m쯤 더 걷자 이번에는 ‘당동(堂洞)’마을 표지석이 반긴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탑동(塔洞, 또는 남악사당이 있다 해서 ’당몰‘)’. 마을 근처에 ‘미륵탑’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고려 때만 해도 10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지만, 조선시대에 국태민안을 비는 남악사(南岳寺)가 들어섰고, 봄가을 제례 때 남원부사와 인근 수령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피해가 늘자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작아졌단다.
▼ 고샅길을 지나 동네 뒤로 나가니 둘레길 나그네들이 한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둘레길이 당동마을을 피하듯 지나간다는 얘기일 것이다.
▼ 방광마을 방향으로 50m쯤 걷자 이름표(당동마을)까지 단 벅수(산동 10.3㎞/ 방광2.7㎞)가 길손을 맞는다. 나에겐 마을을 벗어나는 지점이겠지만, 방광마을에서 출발한 이들에게는 이제 당동마을로 들어섰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식이다.
▼ 둘레길은 ‘대전저수지’의 호숫가를 스치듯 지나간다. ‘미륵골’이라고도 불리는 상대마을(대전리)의 북쪽에 있는 평범한 저수지다. 둑에서 바라보는 ‘구례분지’를 볼거리로 친다면 몰라도.
▼ 몇 걸음 더 걷자 울창한 숲속에서 전각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트레킹을 시작한지 13분 만이다. 전각 안에는 전남도 유형문화재(186호)인 ‘대전리 석불입상’이 모셔져 있었다. 지권인(바른손으로 왼손 검지의 윗부분을 감싸는 형태를 취하는데, 이와 반대의 경우도 간혹 있다)을 한 불상과 무릎을 꿇고 차를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로 구성되어 있다.
▼ 석불은 인의(仁義)에 따라 중생을 다스린다는 ‘비로자나불’이다. 눈·코·입이 훼손되긴 했지만 양쪽 볼이 풍만하고, 기교가 없지만 예스러우면 서도 소박한 미소를 띠고 있다.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 아까의 삼거리로 되돌아가 트레킹을 이어간다. 잠시 후 당동마을 뒤 사거리(벅수 : 산동 10㎞/ 방광 3㎞)에 이르니 ‘예술인마을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반긴다. 예술인의 이미지를 살리고 싶었던지 봉황 형상의 조각품이 뒤를 받친다. 구례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예술인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일 것이다.
▼ 그렇다고 예술인마을의 이미지에 너무 혹하지는 말자. 이 근처에 ‘남악사지(南岳寺址, 향토문화유산 제32호)’라는 또 다른 볼거리가 소재하니 말이다. 예술인마을 쪽으로 20m쯤 떨어진 곳에 이를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지리산 남악제례가 열리던 곳인데, 여기서 말하는 남악이란 신라의 오악(五岳)에서 비롯됐다. 중국의 오악 사상을 본떠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중악(팔공산)을 정해 국가차원의 제사를 올렸다.
▼ 비탈을 오르니 지표조사가 한창인 ‘남악사지(옛날에는 ’궁안‘ 또는 ’궁터‘로 불렸단다)’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지리산 신제를 모시던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천왕봉.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세조(2년)까지 노고단에서 지내다가 1456년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폐사되었고, 1969년 화엄사 자장암 옆에 10여 평 규모로 새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만에 예술인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둘레길을 걸어오며 익히 보아오던 전통가옥이 아닌 현대의 건축물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건물 하나하나가 개성이 또렷할 뿐만 아니라 그 모양새까지 예뻐 기념사진의 배경으로 모자람이 없겠다.
▼ 예술과 예술가를 만날 수 있는 이 마을은 화가·조각가·도예가·옻칠공예가 등 은퇴를 앞둔 30여 명의 예술가들이 거주와 작업·전시를 함께하기 위해 모여 살면서 조성됐다. 현재 토요일마다 집을 개방하는 ‘토요오픈스튜디오’를 운영 중인데, ‘Open 예술 In’ 깃발이 걸린 집의 문을 두드리면, 갤러리를 감상하거나 작가와 차 한 잔 나누며 이야기도 할 수 있단다. 하지만 이번 주는 예외인가 보다. 토요일인데도 깃발이 내걸린 집이 눈에 띄지 않으니 말이다.
▼ 사진 찍기 딱 좋은 뜨락도 보인다. 피크닉용 식탁 주변에 그네 등 각종 소품들을 배치해 일류의 포토죤으로 꾸며놓았다. 하지만 문이 닫혀있어 이 또한 화중지병(畵中之餠)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벅수(산동 9.6㎞/ 방광 3.4㎞) 옆 이정표는 ‘구례의 길’에서 만들었다. 구례군 관내에 있는 3개의 둘레길(지리산둘레길·남도이순신길·섬진강둑방길)을 말하는데, 100km쯤 되는 전 구간을 완주하면 인증서와 기념메달, 기념품 등을 받을 수 있단다. 인증용 수첩에다 이정표에 매달려 있는 저 스탬프를 찍어 와야 함은 물론이다.
▼ 마을안길을 빠져나온 둘레길은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때 구례분지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노고단(동쪽), 만복대·견두산(북쪽), 천마산·깃대봉·형제봉(서쪽), 봉두산·계족산(남쪽) 등이 사방에서 솟아오르며 한가운데다 널따란 들녘을 만들어놓았다. 지리산지에서 공급된 퇴적물이 쌓여 비옥하기까지 하단다.
▼ 산자락을 빠져나와 2차선 도로(벅수 : 산동 9.3㎞/ 방광 3.7㎞)로 올라선다. 아까 트레킹을 시작했던 삼거리에서 난동마을 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이다. 둘레길 접점을 근처에 두고도 2.26km나 돌아온 셈이 됐다. 새로운 앎(남악사지 및 석불입상)에 대한 내 열망의 정도를 알려주는 척도가 아닐까 싶다.
▼ 사흘 후면 ‘하지(夏至)’이다. 낮이 가장 길며, 일사 시간과 일사량도 가장 많은 날이다.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햇과일은 알차게 여물어가는 건 당연. 붉은 빛을 띄어가는 저 사과가 그걸 증명한다고 하겠다.
▼ 둘레길은 이제 난동마을로 향한다. 그렇다고 난동마을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마을을 감싸듯이 내놓은 도로를 따라간다. 그리고 마을 뒤편에서 토지면 오미마을에서 갈라졌던 19구간(오미-난동)을 다시 만난다. 이렇듯 난동마을은 19구간의 종점이자 20구간(난동-산동)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참고로 예술인마을에서 이곳까지는 14분(트레킹을 시작하고 39분)이 걸렸다.
▼ 두 구간이 만나는 곳답게 ‘지리산둘레길’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86km 길이의 구례구간을 설명하고 있는데, 자신들 손으로 폐쇄시킨 곁가지 구간(목아재-당재)을 아직까지도 품고 있다. 늦장 행정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 다리(벅수 : 산동 8.8㎞/ 방광 4.2㎞)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어서 구리재로 올라가는 임도를 탄다.
▼ 이후 구리재까지 고도를 350m가까이나 높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곳을 쉬운 코스로 꼽는다.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완만하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무더운 여름날에는 남의 집 얘기일 따름이다. 뜨거운 태양열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시멘트 임도가 건식사우나로 변해있는데, 쉬운 코스라니 소도 웃을 노릇이다.
▼ 무덤도 저렇게 변신할 수 있나보다. 억새에 가깝게 웃자란 띠가 하얗게 꽃을 피우면서 작은 꽃동산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 둘레길 도반인 ‘뚜벅이’님은 오늘도 바쁘시다. 80을 넘기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변 풍광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그 풍광들은 동영상으로 변해 ‘팔로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 임도갈림길(이정표 : 생태숲←/ 난동마을↓/ 직진방향은 비었다)에서 왼편으로 들어서자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에서 세운 ‘국가 장기생태연구시스템’ 안내판이 나타난다. 하지만 측정시설(강우량·기온·풍향·풍속·토양호흡측정)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온상 안에서는 작은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 임도로 들어선지 30분쯤 지나 ‘칡대밭골 삼거리’에 이른다. 왼편은 아까 트레킹을 시작할 때 눈에 띄던 ‘지리산 정원’으로 가는 길이다. 둘레길은 벅수(산동 7.4㎞/ 방광 5.6㎞)가 가리키는 오른쪽이다. 참고로 지초봉(해발 601m)의 남서쪽에 조성해놓은 ‘지리산 정원’은 크게 ‘야생화 생태공원’과 ‘산림휴양타운’으로 나뉜다. ‘야생화 생태공원’은 야생화 테마랜드와 지리산자생식물원·구례생태숲·숲속수목가옥, ‘산림휴양타운’은 숲속휴랜드와 유아숲체험원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 더. 국내 최초의 숲정원 조성을 위해 별빛숲정원, 어울림정원, 하늘정원, 와일드정원, 프라이빗정원 등 5개 주제 정원을 만들고 있는 중이란다.
▼ 그래선지 길가에 ‘지리산 구례생태숲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생태계의 교란과 훼손을 방지하고자 조성한 생태친화적 공간으로, 편의시설 말고도 철쭉·소나무·산수유·노각나무·층층나무·신갈나무·구상나무 등 240여 종의 식물자원이 함께 어우러져 자라고 있단다.
▼ 지리산둘레길은 3대 ‘구례의 길’ 중 하나다. 그러니 잘 가꾸었음은 자명한 일. 비탈진 길가에 난간을 둘러 안전을 도모했고, 쉼터도 곳곳에 만들어놓았다.
▼ 쉼터도 쉼터 나름. 여느 쉼터와는 또 다른 멋을 풍긴다. 돌 의자 마다 명심보감용 글귀를 새겨 읽는 재미까지 더했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그 시간 때문이다’, ‘여기에 보이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등등 가슴에 와 닿는 명구들이 줄을 이어 나타난다.
▼ 쉼터도 여러 가지다. 예스런 멋을 퐁퐁 풍기는 요런 정자풍의 쉼터도 들어앉혔다.
▼ 가고 또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임도는 자칫 지루해지기 쉽다. 이럴 때는 주위를 살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다보면 주전부리용 산딸기가 눈에 띌 것이다. 조금 못생겼지만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는가. ‘애걔! 그것도 산딸기야?’ 고개를 내두르며 지나친 집사람도 내가 건네준 산딸기를 맛보고는 조금 더 따오라고 졸랐을 정도다.
▼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야생화도 쉼 없이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나리꽃’. 지나 번 서시천변에서의 내 아쉬움을 둘레길이 눈치라도 챘는지 활짝 핀 나리꽃이 곳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 ‘큰까치수염’도 심심찮게 나타나는 꽃 가운데 하나다. 꽃의 모양이 까치의 흰 목덜미 부분을 닮았다고 해서 큰까치수염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중국에서는 ‘진주채’라 부르며 이뇨제나 월경불순의 치료제로 사용한단다.
▼ 편백나무는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다. 그런 편백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을 지자체에서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가 없다. 벤치 등의 편의시설들을 배치해 일류의 쉼터로 가꾸었다.
▼ 이번에는 전망대를 겸한 쉼터가 반긴다. 이곳에는 ‘누가 수천 수백만 개의 별들 중에서 하나밖에 없는 어떤 꽃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별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거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전망대의 분위기에 딱 맞는 내용이지 싶다. 별들 대신에 구례 들녘을 바라보면 되니까...
▼ 난간으로 다가가자 협곡 사이로 구례분지가 나타난다. 난간에 기대어 서시천변의 너른 전답과 좌측 멀리 구례읍을 가늠해 본다.
▼ 임도로 들어선지 1시간 7분(트레킹을 시작한지 1시간 46분) 만에 ‘구리재(해발 487m)’에 올라섰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서쪽으로 갈래 친 작은 산줄기에 있는 안부인데, 광의면과 산동면을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벤치는 물론이고 팔각정(계단이 낡아 이층으로 오를 수는 없었다)까지 들어앉혀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이정표도 벅수(산동 5.2㎞/ 방광 7.8㎞) 말고도 둘(#1 : 지초봉← 0.72㎞, #2 : 납재삼거리→ 1㎞, 간미봉 1.5㎞)이나 더 있다.
▼ 20구간(방광-산동)의 완주를 인증 받게 해줄 스탬프보관함은 팔각정의 아래층 기둥에 매달아놓았다. 참고로 이곳 구리재는 구렁이를 뜻하는 '구리'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재에 오르는 길의 생김새가 구렁이가 움직이는 것처럼 구불구불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임도로 들어선 뒤 열두세 차례나 휘어지고 꺾어진 뒤에야 고갯마루에 올라섰으니 그럴 만도 하다.
▼ 구리재에서 좌측으로 0.7km쯤 빗겨나 있는 ‘지초봉(芝草峰. 601m)’은 다녀오지 않았다. 대신 둘레길 도반인 ‘몽중루’님의 것을 빌려다 올려본다. 지초봉은 진도 홍주를 빚는 원료로 잘 알려진 지초(芝草)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제의 명을 받은 서불이 불로장생약을 찾기 위해 찾았다는 전설도 지녔다.
▼ 지초봉에서의 조망은 설명까지 몽중루님의 것을 빌린다. 동쪽은 구리재 건너 갈미봉, 시암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노고단(老姑壇)과 반야봉이 우뚝하고, 북쪽은 지리산 서북능선에 우뚝한 만복대가, 서쪽엔 만복대에서 갈래 친 견두지맥(犬頭支脈)이 밤재를 지나 천마산 깃대봉 천왕봉을 이으며 구례읍을 감싸며 남쪽 오산(鰲山) 앞 섬진강으로 내려선다. 그리고 발치의 남쪽 자락에는 지리산 정원이, 북쪽엔 지리산 자연휴양림이 녹림을 이루고 있다.
▼ 구리재를 지나면서부터 이정표는 뉘앙스를 살짝 바꾼다. ‘지리산 정원’을 의미하는 ‘야생화 테마랜드’ 대신 ‘지리산 수목원’으로 얼굴마담을 바꿨다. 맞다. 두 시설은 지리산줄기인 간미봉(728.4m)과 지초봉(601m)을 잇는 능선을 기준으로 남북의 사면에 위치한다. 이 능선의 안부인 구리재를 넘었으니 북쪽 면에 들어앉은 수목원으로 얼굴마담을 바꾸는 게 정상이지 않겠는가.
▼ 종점인 산동까지는 이제 5km가량 남겨놓았다. 내려가는 길은 임도답지 않게 경사가 무척 가팔랐다. 그러다보니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써가면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어떤 곳에서는 360도에 가까울 정도로 방향을 틀기도 한다. 저렇기에 ‘구리재’라는 이름까지 얻었을 것이다.
▼ 산동면 쪽에도 편백나무 숲이 들어서 있었다. 피톤치드 향으로 가득한 숲속에서 힐링할 수 있도록 쉼터를 만들어두었음은 물론이다.
▼ 임도는 차량통행이 허용되나 보다. 하긴 구례수목원과 지리산정원을 잇는 도로이니 막는 게 더 이상하겠다. 특히 지초봉에는 활공장까지 들어서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내려가는 도중 심심찮게 시야가 트인다. 진행방향 저 멀리로 만복대에서 견두산을 거쳐 천마산으로 흘러내리는 산줄기가 펼쳐진다. 그 산자락을 19번 국도가 꿰뚫고 지나간다. 다음 구간인 21구간(산동-주천)은 저 능선의 안부인 ‘밤재’를 넘는다.
▼ 하산을 시작한지 26분. 또 다른 팔각정을 만났다. 능선은 남북 사면을 대칭이라도 이루려는 듯이 편백나무 쉼터에 팔각정까지 공평하게 들어앉혔다. 하지만 북쪽 사면에서는 돌 의자는 물론 명심보감용 글귀도 찾아볼 수 없었다.
▼ 팔각정은 20구간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다. 둘레길이 임도를 벗어나 왼쪽 숲속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초입을 지키는 벅수(산동 3.4㎞/ 방광 9.6㎞)의 방향표시를 참조하면 되겠다. 참! 숲길이 싫다면 계속해서 임도를 타도 무방하다. 구례수목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울창한 숲속을 헤집으며 내려간다. 1km쯤 되는 숲길은 계곡과 함께 흐른다. 그래선지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바닥에 잔뜩 깔렸다. 하지만 경사가 거의 없어 속도감 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골이 제법 깊건만 계곡은 허옇게 속살을 드러냈다. 가뭄이 그만큼 심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사흘 후면 하지(夏至). 옛날에는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이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라도 나서서 제관이 되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 내려가는 도중 옛 멋을 느끼게 해주는 통나무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구리재를 넘어오면서 흘린 땀이라도 씻을까 해서 다리 아래로 내려갔지만 개울은 바짝 말라있었다.
▼ 숲속으로 들어선지 19분, ‘구례수목원’이 얼굴을 내민다. 다양한 자생나무와 꽃들이 이색적인 공간을 제공하는 전라남도의 1호 공립수목원이다. 수목원 내에 1148종 13만본의 식물을 심었는데, 특히 목련(39종)·수국(93종)·비비추(69종)·붓꽃(39종)·단풍나무(13종)·층층나무(12종) 등을 특화식물로 식재해 지리산 야생화와 어우러지도록 했단다. 또한 수목원을 봄향기원, 진달래원, 계류생태원, 테라피원(숲속 그늘마당), 서어나무원, 지리산종보존원, 겨울정원 등 11개의 주제정원으로 나누어 놓았단다.
▼ 수목원도 길 찾기에 주의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원래의 둘레길은 저 수목원을 관통한 다음 탑동마을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코스가 변경되었고, 지금은 수목원의 진입로를 따라 ‘탑동교’로 내려간다.
▼ 내려가는 도중 ‘문화예술촌’을 만날 수 있었다. 동화 속 꼬마 요정이 살았을 법한 집이 지어져 있는가 하면,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통나무집도 두 동이나 들어섰다. 예술인들의 작업실이었을 게다. 하지만 인적이 끊긴지 이미 오래인 듯 건물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 둘레길은 호동마을을 마주보며 간다. 구례의 명물인 산수유나무가 무더기로 나그네를 맞는 구간이다. 누군가는 구례를 일러 ‘산수유가 있었기에 구례답고, 산수유답다’고 했다. 그러면서 산수유가 없는 구례는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다고까지 했다. 그만큼 구례와 산수유가 서로 잘 어울린다는 얘기일 것이다. 하긴 구례는 우리나라 산수유 생산의 70%를 차지하며 산수유의 조상 나무인 시목을 모시는 곳이다. 그러니 잘 어울릴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개울 너머에는 ‘탑동마을’이 있다. kakaomap의 20구간(방광-산동)은 저 마을을 관통한다. 먼저 다녀간 이들의 발자취도 저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둘레길은 언제부턴가 수목원 진입로로 옮겨졌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둘레길 나그네들의 쉼터고 되어주는가 하면, 한옥체험을 겸해 하룻밤 묵어가기 딱 좋았다는데, 코스를 옮겨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 구리재 너머 첫 마을인 ‘탑동(塔洞)’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삼층석탑’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현재의 석탑(코스 설명을 위해 다른 분의 사진을 빌려왔다)은 무너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다시 세워놓았다고 한다.
▼ 그렇게 18분쯤 내려왔을까 천주교 산동공소(구례성당 소속)가 나오는가 싶더니 곧이어 ‘지리산온천로’로 내려선다. 길가에는 ‘산동약수탕’이 들어서 있었다. 1호 온천의 감성숙소란다. 먹고 자고 씻고를 한꺼번에 할 수 있다나?
▼ 소나무를 감싸 안고 있는 저 여인의 화두는 무엇일까? 모성애를 발휘해 세상의 모든 고민을 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탑정교를 건너자마자 도로를 횡단하면 ‘효동마을’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둘레길은 맞은편 효동마을을 향해 나아간다. 참고로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지리산 온천랜드’가 나온다. 지리산 만복대와 노고단을 바라보며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노천온천 테마파크, 대온천탕, 찜질방, 호텔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지리산온천수는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이 다량 함유돼 피부병·신경통·관절염 등 성인병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 잠시 후 ‘효동교’를 건너자 ‘지산정(智山亭)’이란 국궁장.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효동(孝洞)’마을이 얼굴을 내민다. 법정 마을인 내산리(內山里)에 속한 3개의 자연부락(수평·삼성·효동) 중 하나로 게르마늄 성분을 듬뿍 품은 샘물(‘산수려’라는 브랜드로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로 유명한 곳이다. 참!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소동굴’이었다고 전해진다. 소의 배를 의미한다나? 이후 마을 뒷산이 ‘청용고지(靑龍高地)’의 지세라서 효자가 많이 나온다며 ‘효동’으로 바꾸었단다.
▼ 효동마을은 다른 전통마을과는 달리 구획이 분명하고 길이 모두 일직선이다. 이는 70-80년대에 시행됐던 주거환경개선사업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런 마을 앞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바우배기들’이란 지명까지 만들어냈을 정도로 유명한 바위인데,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터로만 제몫을 다한단다.
▼ 효동마을의 ‘무더위 쉼터’는 둘레길 순례자들에게도 최고의 쉼터가 되어준다.
▼ 마을 앞을 지나다보면 노고단이 서쪽으로 갈래 쳐놓은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동약수탕의 뒤 움푹 파인 곳은 아까 넘어왔던 ‘구리재’이다. 그 오른편에 지초봉이 불끈 솟아올랐고...
▼ 효동마을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저 건물은 ‘화충법단(和衷法壇)’이란 편액을 달았다. 간판은 ‘재단법인 국제도덕협회 일관도 산동지부’로 걸었다. ‘일관도(一貫道)’란 유불선(儒佛仙)을 융합하여 ‘일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건너온 종교로 신앙 대상은 명명상제(明明上帝)와 미륵불이다. 명명상제는 우주의 최고 주재자로 만령(萬靈)을 낳는 모체이고, 미륵불은 석가의 뒤를 이어 앞으로 올 부처(미래불)다. 그 밖에도 유교·불교·도교·기독교·이슬람교의 제불제성(諸佛諸聖)을 공경한단다. ‘다 모아 교’라고나 할까?
▼ 화충법단 앞 ‘Y’자 갈림길에서는 오른편이다. 잠시 후 ‘원효교(벅수 : 산동 0.2㎞)’를 건너 ‘원촌(院村)’마을로 들어섰다. 산동면의 소재지로 산동원(山洞院)이란 관청이 있었기 때문에 ‘원굴’ 또는 ‘원동’이라 불리었다. 그러므로 원촌은 산동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원효교에서 날머리인 산동면사무소까지는 100m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둘레길은 면사무소로 곧장 가지를 않고 서시천의 개울가를 따라 마을을 에둘러서 간다.
▼ 길을 걷다 범상치 않은 풍광을 만났다. 서시천이 몸집을 부풀리는 두물머리 한가운데서 거대한 정자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장마철 큰물 때마다 물에 잠길까 걱정이겠건만, 나무 그늘에 예쁜 정자까지 들어앉혔다. 그나저나 큰물 걱정은 주민 몫일 테고, 지나가는 나그네로서는 눈을 즐겁게 해주는 멋진 풍경이었다.
▼ ‘원촌교’에 이르니 이름표(원촌마을)까지 단 벅수가 이제 그만 시가지로 들어가란다. 지시대로 방향을 트니 산동농협. 무더위에 땀 깨나 흘린 나그네에게는 구세주일 수밖에 없는 ‘하나로마트’가 반긴다. 뛰다시피 들어가 맥주와 아이스크림부터 챙겨드니 이 아니 행복할 손가.
▼ ‘코코빈 다방’은 별관에다 문을 열었다. 대신 본관은 70-80년대의 다방 풍경을 그려 넣어 홍보용으로 활용했다. 뮤직 박스나 차 배달만으로도 옛 추억을 되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의자에 앉은 청춘남녀는 사랑까지 속삭인다.
▼ 날머리는 산동면사무소(구례군 산동면 원촌리)
100m쯤 더 걸어 산동면사무소에 도착하면 20구간(방광-산동)은 종료된다. 오늘은 11.54km를 3시간 20분에 걸었다. 구리재라는 만만찮은 고개를 넘었다고는 하지만 꽤나 더딘 속도다. 무더위에 속도를 낼 수 없었던 게 원인이었다. 참! 산동면은 백제시대에는 ‘구차례현’에 속한 고을이었다. 신라시대(통삼이후)에는 곡성군, 고려시대에는 남원부에 속했다. 조선시대인 1906년(광무10년) 구례군에 편입되면서 내산면과 외산면으로 분할되었으나 1932년에 다시 ‘산동면’으로 합병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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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첫댓글 어쩌다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제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구간은 같이 못해 아쉬움이 많기도 했습니다.
무박 섬산행 때문에 체력 조절상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후기로 실컷 즐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지리산둘레길도 21구간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군요.
또 다른 둘레길이 시작되니 그리운 얼굴들을 계속해서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