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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쟁의 중동전
인류의 문명은 전쟁에서 시작되었다
먹기위해서, 살기 위해서, 종족 보존을 위해, 자국의 안녕과 자원 확보, 기타, 세계질서의 우위를 보존을 위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이는 어느 문명이나, 기복과 명암 그리고 성쇠가 있어 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우리 나라와 비숫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이스라엘의 피와 눈물과 땀이 배어있는 전쟁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앞날을 음미하고져 한다.
현대전쟁의 중동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중동지역은 세계 4대 문명지다.
나일강의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지역이다.
3개 대륙의 접합점인 지역이다.
동시에 기독교 문화와 회교 문화의 꽃을 피웠고, 종교 대립이 상층되는 지역이다.
러시아 남부 국경과 접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수에즈 운하의 군사적, 경제적 가치와 막대한 석유자원의 매장(전 세계의 46%)으로 전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역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중동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정치무대의 관심지역으로 등장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의 세력 하에 있었다.
대전 후 아랍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3대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났다.
미국 및 러시아와 아랍 민족과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해 관계가 상층되는 지역이 되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민족과 종교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었다.
자유진영과 옛 공산진영의 이해득실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구 소련의 무기 체계로 무장된 아랍 제국과 미국 및 자유진영의 무장된 이스라엘간에 4차에 걸쳐 전쟁이 일어났다.
이란과 이라크전쟁, 레바논전쟁, 구소련과 체첸전쟁, 구소련과 아프카니스탄전쟁, 파키스탄과 인도전쟁, 쿠웨이트와 이라크전쟁,미국과 이라크전쟁, 최근에는 인도와 중국전쟁, 파키스탄과 미국전쟁 등 세계는 전쟁의 악의 측에 빠져있다.
또한 아랍 6개국에 접해 있는 크르드족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중동은 오늘날 한시도 잠잠할 날이 없는 세계의 화약고로 변모한 중동은 국제 이해 관계가 얽힌 복잡 미묘한 상태에 있다.
강대국 위주의 시대적 변모 속에 "강자존" 의 원리는 불변이라는 점을 통감하게되었다.
중동 전쟁을 다소나마 심층 분석해보고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볼까 한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부족제로 성장하였다.
기원전 9세기경 다윗왕에 의해 이스라엘 통일국가로 형성되었다.
솔로몬왕 이후 내란에 의한 국력의 쇠퇴로 외침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6세기에는 시리아가 침략 했다.
예루살렘의 유태교 성전을 불태우고 아랍민족의 우상을 세움으로 인해 종교적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후 시리아를 구축하고 다시 독립된 왕국을 재건했다.
기원전 5세기경 로마의 침공으로 다시 패망 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항거에 따른 박해로 기원전 70년부터 세계 각지로 생존을 위한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나라없는 이천년 동안 타민족으로부터 설음과 박해를 받으며 나라없는 게 무었인지 알았던 것이다.
서기 64년경 로마의 쇠퇴기에 아랍인들은 이 곳에 세력을 확장 했다.
예루살렘 중심부에 모하메드 신전을 세우고 성지로 발전시켰다.
11세기경 십자군 원정을 비롯하여 오토만 터키 제국의 통치 등 지배자의 교체가 빈번하였다.
그러나 주로 아랍인들이 그들의 성지로 거주하여 왔다.
중동전쟁의 주요원인은 2000년간 국가없는 유랑생활을 해오던 유태민족이다.
시오니즘 운동으로 1948년 5월 14일 독립국가로 정착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면적은 아랍면적의 0.37% 이며, 인구는 아랍인구의 0.7% 였다.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하던 아랍 토착민이 거주지를 상실 했다.
수천년간 잠재하던 민족감정이 노골화되어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아랍 세계 내에서 주도권 쟁탈을 위한 양민족간의 대립과 지리적으로 3개 대륙이 접해있다.
수문장 역할을 할 수 있는 확보를 위한 쌍방간의 대립등 주된 원인이 되었다.
부가하여 아랍제국의 군사적인 대국으로서 지도자적인 입장에 서려는 국가간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 1차전쟁(팔레스타인 전쟁)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다.
불과 8시간만에 주변국의 6개국의 아랍제국(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이 일제히 선제 공격을 했다.
이스라엘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 전쟁을 " 팔레스타인 전쟁" 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1차 전투가 48. 5. 14~ 6. 11,이다.
2차 전투 48. 7. 8~ 18, 이다.
3차전투 48. 15~ 49. 2. 24 이다
3 단계로 구분 실시되었으며 8개월 간의 전투와 휴전이 반복된 중동 전쟁 중 가장 긴 전쟁이었다.
* 시오니즘(zionism):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이 그들 선조의 땅인 팔레스타인(땅)에 조국을 재건하려는 운동.
○ 1차 전쟁의 원인은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이스라엘의 독립에 의한 정착으로 수천년간의 양민족간에 잠재 해있던 적대적 이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에서 파레스타인 분할안이 가결됬다.
아랍인들의 강력한 방해 활동이 전개 됬다.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이 이를 즉각 승인 했다.
아랍제국이 먼저 시도한 이 전쟁 이다.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의 국가적 기반을 견고하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 1차 전쟁의 경과.
1차 전투는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이다
1948년 5월 14일, 동, 남, 북의 3개 방면에서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병력 3만을 동원했으나 40%밖에 무장할 수 없었다.
공군력마져 전무하여 초기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48년 5월 26일 국방군을 창설 분산된 자위 조직을 통합했다.
한편 국외의 용병을 모집하고 대량의 무기를 도입 군사력을 강화 했다.
대공중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세를 만회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1차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 이르는 통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아랍측은 유엔에서 제의한 휴전안을 받아들여 48년 6월 11일 부터 7월 9일까지 휴전에 돌입했다.
기간중 이스라엘은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이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분할 당시의 면적 14,900㎢보다 5,000㎢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다.
유태인도 10만 2천명이 유입되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 내의 아랍인 중 70%에 해당하는 80만의 주민이 주변의 아랍 제국으로 피난했다.
해서 팔레스타인 난민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양대민족의 대립이다.
더욱 격화된 상태에서 아랍 측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말살 정책이 계속 잠재요인으로 남게 되었다.
■ 2차전쟁
이 전쟁은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전개 되었다.
11월 7일 종결된 전쟁이다.
그 원인은 1차 전쟁후 쌍방간의 국경지대에서 분쟁이 계속 되었다.
1952년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나세르 대통령이 공산진영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도입했다.
1956년 7월 26일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여 영불세력을 구축했다.
10월 초에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 3국이 통합사령부를 설치하였다.
군사적 지도권을 장악하고 게릴라 부대로 대 이스라엘 파괴행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통일 아랍제국을 주장, 경제성장과 군사력 증강에 전력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더 강해지기 전에 해안봉쇄를 타개 해야 했다.
그리고 게릴라 근거지를 파괴함으로써 민족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데서 예방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3만여 명의 병력을 시나이 반도에 투입한 이스라엘군이다.
1956년 10월 29일 " 가자". "아부아겔라", "군티라" 등 3개 방면으로 선제공격 했다.
시나이 국경에 배치된 이집트 수비대를 격파 했다.
5일만에 시나이 지역을 대부분 장악함으로써 군사행동은 일단락 되었다.
동년 10월 31일 영, 불 군이 수에즈 운하 일대에 군사적 개입을 했다.
11월 2일 유엔총회에서 정전안이 채택되고 미국과 구 소련이 적극적으로 이를 저지 했다.
11월 7일 전투가 중지되었다.
■ 3차전쟁(6일 전쟁)
스에즈 전쟁시 패전한 아랍측은 구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군비를 강화했다.
1964년 1월 19일 카이로에서 제1차 아랍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이스라엘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요르단강의 수원을 차단하는데 합의 했다.
시리아지역에서 요르단강 강수로 변경공사를 착수 했다.
이스라엘은 보복조치로 1967년 4월 7일 대규모 공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시리아의 지원요청에따라 나세르는 대규모 병력을 시나이 반도에 투입했다.
유엔 비상군의 철수를 요구함으로써 시나이반도에서 양국이 군사적 충돌을 하게되었다.
군사적 우세를 믿고 있던 아랍은 동년 5월 22일 해안및 아카바만을 이스라엘 숨통을 막아버렸다.
이스라엘은 아랍제국의 공중및 시나이 반도의 지상군을 격멸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1967년 6월 5일 선제공격으로 기습공격하여 6일 만에 6월 10일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속전속결이다.
사상 유래 없는 최단시간 내의 군사적인 압도적 우세인 아랍연맹을 쉽게 격파했다.
방대한 지역을 점령 대승을 획득했다.
이스라엘군의 우수한 전략 전술을 포함하여 군사적으로 많은 교훈이 된다.
양측의 전략 개념은 아랍측은 우세한 군사력으로 위력을 과시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 일보전의 궁지로 몰리게 했다.
미, 구소련이 개입 이스라엘이 정치적으로 양보하도록 하는 막연한 지구 전략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선제공격해 오면 준비된 강력한 방어진지에서 저지후 반격작전을 실시한다는 수세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이러한 전략개념에 따라 반격작전이 실시되면 1단계로 이스라엘 공군을 제압한다.
2단계로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지역을 장악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집트와 요르단을 연결 한다.
3단계는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군이 3면에서 공격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전략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고 협소하다.
때문에 아랍측이 선제공격하면 자국영토에서 싸우게 되면 자멸을 초래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토밖에서 싸우는 전략 개념을 채택 했다.
평소 소수의 상비군만 민병에의해 방어 개념이다.
전시에는 상비군을 즉각 동원하여 운용하는 민방위제도를 운용했다.
이를 기초로 공세적인 방어개념을 채택 했다.
선제공격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입지적으로 내선에서 싸워야 하는 불리점을 보완 했다.
우세한 적을 각개격파하였다.
제한된 국력을 고려, 속전속결 전략을 채택 이를 보장하도록 기만 및 기습을 하는 것이었다.
1단계는 공군에 의한 선제 기습공격으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육군의 주력을 시나이 반도에 투입했다.
우세한 이집트 군을 격멸 하였다.
2단계는 요르단 및 시리아 지역으로 공세를 전환 아랍연맹군을 완전격파하는 작전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군사력 비교 면에서는 병력은 1: 1.5, 기갑은 1: 2.2, 항공기는 2: 2.2로 전체적으로 아랍연맹이 우세했다.
각국별로 상이한 지형과 국민성, 상이한 장비, 상이한 국가관 등 이 있다.
그리고 현지에 적응 못한 외국 교리와 모방, 연맹체제의 강력한 지휘체제의 결여에 있다고 본다.
또한 국가별 군사력의 불균형 등의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비록 민방위 체제에 의존하였으나 통합된 체제에 의한 지휘체제의 단일화, 융통성이 있다.
전투부대의 여단규모의 편제는 우수한 기동력을 구비 현지에 적응이 적합했다.
그리고 무기체제의 개발과 우수한 전략전술의 발전 적용 등의 장점을 갖추었다.
공군 작전은 1단계는 이집트의 10개 공군기지 선제 공격으로 무력화 시켰다.
2단계는 잔여 이집트 공군기지 및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의 공격하여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 하였다.
3단계는 지상 및 해상작전을 집중 지원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 항공기 500대 중 12대만 시리아 및 요르단 및 타 방면에 대비했다.
전 공군력을 이집트로 집중 투입했다.
6월 5일 07시 45분에 선제 기습을 감행했다.
10개 편대로 편성된 제1제파가 10개의 이집트 공군기지를 동시 공격 80분간에 이집트 항공기를 지상에서 격파했다.
복귀 직전 제 2제파가 공백없이 계속 공격했다.
불과 2시간 50분만에 300여 대를 지상에서 격파했다.
이집트군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키고 정오부터 2단계 작전에 돌입했다.
잔여 아랍공군기지 15개를 공격하여 개전 1일만에 완전히 장악하였다.
작전 경과는 이스라엘은 공군기 26대를 상실한 반면 아랍측은 416대가 격파되였다.
그것도 23대만 공중전에서 격추되었을 뿐 98%는 지상에서 격파되였다.
본 작전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공군의 선제기습으로 항공기의 숫적 열세를 보완했다.
그리고 출근시간이다.
공군작전에 양호한 가시조건을 제공해주는 07:35분에 공격했다.
기습 달성이 가능했다.
그리고 지중해와 네게브사막지여으로 깊숙히 우회 저공 비행 했다.
이집트 레다망을 피함으로써 10개 비행장을 동시에 강타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기습 효과를 극대화한 이스라엘의 우수성이라 하겠다.
시나이 반도작전은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이집트 군부터 격파하기 위해 공군의 선제 기습공격 이다.
병행해 시나이 반도 작전을 실시 하였다.
쌍방의 전투력은 이스라엘의 3개 사단과 2개 여단이다.
이집트 군은 7개 사단으로 1: 2 정도로 이스라엘이 열세하였다.
양국의 작전 계획중 아랍은 공격 및 방어에 적응할 수 있도록 3 선 배치하였다.
이스라엘은 1단계로 1개지점에 강력한 이집트군의 전방 방어선을 돌파한다.
2단계로 형성된 돌파구로 1개 기갑사단이 신속히 초월 스에즈 동쪽에서 적을 추격 및 포위한다.
3단계는 포위된 적을 소탕 격멸하는 것이다.
이 계획에 의하면 08:45분에 1개 여단을 콘트라 방면에 양동을 실시한다.
적을 유인 견제하는 한편 주공은 샤론과 요패 2개 사단으로 공격한다.
조공은 탈사단으로 하여 공격한 결과 1일만에 전방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집트군의 퇴로를 차단 한다.
아카바만을 개통하는 한편 티란 해협의 요충지인 삼웰쉐이크를 공중및 해상강습작전으로 점령하였다.
6월 8일에는 3단계 작전으로 수개의 기갑부대로 수에즈 운하의 교량 및 도선장을 장악했다.
이집트군의 증원과 철수를 차단하였다.
시나이반도 이집트군을 포위하였다.
4일만인 6월 8일에 이집트군이 유엔에 휴전 협정을 수정함으로써 전투는 종결 되었다.
○. 요르단 지역 작전은 이스라엘의 7개 여단 병력과 지역내의 민반위군으로 방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요르단 자체의 11개 여단단과 150대를 수반한 이라크 기갑 원정 여단이 합세했다.
이집트 지원군 1개대대 등으로 구성되있었다.
요르단이 6월 5일 10:00에 예루살렘을 선제 공격했다.
양군의 작전계획은, 요르단군은 제1 방어선에 7개 보병 여단을 배치했다.
예루살렘의 이스라엘군을 부분적으로 포위 점령했다.
협소한 중앙지역으로 공격하여 이스라엘을 양분시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최소의 병령으로 방어하다가 시나이반도의 작전 추세에 따라 일부 전력을 전용하여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쌍방간의 작전계획에 따라 요르단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다.
시나이반도 지역의 이집트군의 전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결정적이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로써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였다.
이스라엘은 개전초기 시나이반도 작전이 유리하게 전개됐다.
이에따라 시나이지역 전력 일부를 전용하여 6월 7일 야간에 공격하였다.
요르단군에 일부 돌파된 예루살렘 지역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요르단군을 구축하고 성도를 재점령하였다.
불리해진 요르단이 휴전에 동의 전개 4일만에 6월 8일 14:00 전투가 종결되었다.
○. 시리아 지역 작전은 주로 고란고원 일대에서 실시된 작전이다.
이스라엘 3개 여단과 민방위 병력 그리고 시나이반도와 요르단 지역작전의 승리가 확정되였다.
따라서 전용된 4개 여단이 추가 투입되었다.
시리아군은 6개 여단을 투입 강력한 축성진지가 구축된 제1 방어선에 배치했다.
이스라엘군은 치단시간 내에 시리아군을 격멸하고 고란고원을 탈취했다.
6일 09:00에 강력한 공군 지원하에 집중공격했다.
시리군의 제1방어선을 돌파했다.
6월 10일 고란고원 후방의 요충지인 쿠네트라를 점령했다.
불리해진 시라군이 휴전에 동의 6일 간의 지속된 전쟁은 이스라엘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은 800여대의 전차와 1,000여 대의 기동장비가 투입됬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20억불 상당의 장비와 보급품을 노획했다.
역발상적으로 군사력 증강에 기여했다.
아랍은 10여 년간 구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군사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요르단 서부지역, 고란고원 등 본토의 3.5배나 되는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아랍측과 완층지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대인 테란해협을 장악했다.
그래서 아카바만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받을 수 있게되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실지 회복의 집념과 복수심이 중대됐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활동과 더불어 양대민족의 더욱 다원화되었다.
■ 중동 4차전쟁(10월 전쟁)
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9일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6일 전쟁 후 쌍방이 동의 하였던 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유엔 안보리에서 채택한 휴전안의 골자다.
아랍측이 이스라엘 생존권을 인정하고 수에즈 운하 및 테란협의 자유항해권을 보장한다.
대신 이스라엘은 점령지에서 철수한다.
팔레스타인 피난민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한다는 방법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승자에 유리한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아랍측은 이스라엘 생존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철수 만을 주장했다.
해결을 보지 못하자 아랍측은 무력행동만이 문제해결의 길이라 판단했다.
패자의 오명도 씻을 겸 선제공격함으로써 발단이되었다.
또한 그 당시 국제정세가 화해무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이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조기에 실지 회복해야겠다는 집념이 강하게 작용했다.
알제리 비동맹국의 회의 이후 아랍제국의 대동단결이 촉진되였다.
석유무기화 가능성 그리고 6일 전쟁 후 구 소련으로부터 새로운 군사장비를 대폭 지원받아 재정비된 막강한 군사력을 믿었다.
당시 유엔총회가 게최되는 시기었다.
실지를 되찾고자 아랍측에 동정적인 국제여론을 이용했다.
유엔총회에서 유리하게 유도할 수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선제공격을 실시하였다.
양국의 전력과 작전계획을 보면 아랍군은 여러 방면에서 한 곳으로 집중 공격하는 내파전법이다.
이스라엘을 격멸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집트군은 시나이반도 쪽으로, 시리아군은 고란고원 지역으로 기동한다.
요르단군은 동부를 견제하면서 3면에서 이스라엘을 압축 격파함으로써 실지를 회복하는데 있다.
정치적으로 양보를 획득하고 이스라엘을 파멸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지구전 전략을 세웠다.
이스라엘은 유태민족의 전통적 풍습인 금식의 날 행사 중 선제공격 함에있다.
예비군 동원이 기준시간의 72시간의 배나 지연되여 최초방어선이 초기에 유린되었다.
불리한 상황하에서 전략적 요충인 고란고원을 탈환하여 시리아군을 격파했다.
다음은 이집트군과 결전하여 전세를 만회 했다.
계속 공세로 스에즈 운하의 서안 이집트 본토에 광대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는 삼면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전투력을 효과적으로 운용, 속전속결로 상황을 유리하게 전개시켰다.
○.쌍방의 군사력은 병력은 1:3.6, 기갑은 1:3 항공기 1:2.7 아랍군이 전투수행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기타 아랍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적극 지원했다.
또한 구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고성능 신형장비를 지원받으므로써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자유진영 무기체제와 공산진영 무기체제의 비교 면에서 자유진영 무기체제가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무기체제의 시험장이기도 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6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숫적으로 전투력은 열세였다.
반면 전투원의 고도의 훈련수준과 군기면, 정신면에서 우세했다.
또한 고도의 장비, 정비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킬로급콘의 저위력 핵폭탄을 보유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 6일전쟁 후 이스라엘은 스에즈 운하 동안에 강력한 발래브 방어선을 구측했다.
이를 마지노선과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라 과도 선전했으나 실제로 이 발래브선은 전초기지에 불과했다.
1개 여단 규모(8.000여 명)로 경계부대 였다.
주진지는 10~15㎞ 후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이집트군은 발래브 진지를 분쇄하기 위해 개전 9일 전부터 대규모 기동훈련을 빙자하여 공격부대를 스에즈 운하에 집결했다.
10월 6일 14:00에 맹열한 폭격과 공군의 집중 지원하에 최초 5개 지역으로 소규모 특공부대가 투입되었다.
고무보트를 이용 스에즈 운하를 도하하여 15㎞의 발래브진지를 공격했다.
기습 성공 후 특공대의 엄호하에 스에즈 운하 일대에 11개의 단교를 건설하였다.
전차 500대, 병력 50,000명의 주진지를 도하시켜 개전 3시간 만에 발래브 진지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 후 시나이반도 내로 교두보 확보 작전을 전개하였다.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은 수비대를 제2 방어선으로 철수시키고 지연전을 실시했다.
공군작전을 개전 하였으나 6일 전쟁과 같이 지상 30m의 초저공 비행도 이집트군이 보유한 SAM- 6 미사일에 대량 격추되였다.
또한 고공폭격도 대공미사일망을 뚫지 못하고 하루만에 50여 대의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교두보를 확보한 이집트군이 대공미사일이 유효사전 내에서만 소극적인 공세활동을 전개했다.
전선이 고착된 이 점을 이용 이스라엘은 적의 후방에 특공대를 투입했다.
유격전을 병행하면서 고란전선이 호전될 때까지 제2 방어선 일대에서 이집트군을 무난히 저지할 수 있었다.
그 후 고란고원의 전선이 확고해졌다.
주력을 시나이전선으로 전용하여 반격작전을 실시했다.
15일 야간에는 경계소홀한 그레이드 미터호수 북단으로 특공대를 투입시켰다.
이집트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대공미사일 망을 유린했다.
다음 공군의 집중 지원하에 17일 공세를 개시 이집트군의 전선을 중앙 돌파하고 특공대와 연결하였다.
이와 같은 반격작전에 주도권을 장악한 이스라엘군은 19일부터 이집트군을 포위하기 위해 배후로 깊숙히 공격했다.
스에즈시 15㎞ 전방까지 육박하자 이집트가 현상 휴전을 받아들였다.
23일 01:49에 1차 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포위에 직면한 이집트 제3군의 전세가 악화되였다.
휴전 14시간 만에 전투가 재개 20시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스라엘군이 전혀 예상 못했던 스에즈 남쪽의 아다비항으로 진출하였다.
이집트 3군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이집트군은 더욱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24일 14:002차 휴전이 성립되었다.
○. 고란고원 전투는 수에즈 일대에 이집트군의 공격개시 시간과 맞추었다.
2.000여 명의 모로코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합세했다.
시리아군이 보병 30.000명, 전차 900여 대를 투입 했다.
기습적으로 휴전선에 연한 이스라엘군의 경계초소를 격파한 후 아마디에, 쿠스리아, 라피드의 3개 방면으로 공격했다.
불과 200여 대의 전차와 보병 1,000여 명의 소규모 정규병으로 수비했다.
이스라엘군은 초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동원된 예비군의 주력을 투입 공군의 집중적인 지원하에 8일 부터 총반격을 개시했다.
초전에 상실했던 대부분의 지역을 탈환했다.
11일에는 휴전선을 돌파하여 다마카스로 진격했다.
14일에는 다마카스 26㎞지점까지 진출 작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는 애꾸눈 모세 다얀 장군이다.
1-4차 중동전에서 그 중심에 있으면서 귀신같은 재주로 기습과 기만, 위계로 군사적 승리에 결정적 역활을 주도 했다.
그는 1929년 독립선언 할때까지(1948년) 자치게릴라조직에 참여했다.
그 후 육군 소령으로 입대, 국방부장관까지 했다.
애꾸눈은 시리아와 작전중 만원경이 적의 총에 맞아, 파편이 눈에 박혀 애꾸눈이 됐다.
당나라 이세민은 150만명의 대군으로 안시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애꾸눈이 되고, 이내 철군했지만 죽었다.
그러나 다얀 장군은 승승장구 했다.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시 울돌목에서 12척의 전함으로 왜군의 함선 300여 척을 대파시키고 조총에 맞아 전사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론멜장군은 북아프리카 군단을 지휘했다.
연합군에 모든면에서 턱없이 부족한 수적 열세와 물자와 장비의 부족에도 神出鬼沒(신출귀몰) 적장의 간담을 서늘켔 했다.
소설 삼국지 제갈공명도 그렇다.
영웅은 난세에 탄생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결론으로 이번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고람고원 지역이 15㎞지역과 폭, 스에즈운하 서안 최대종심 48㎞의 종심이 되는 아마디에와 이스마일을 연해 방대한 지역을 점령했다.
군사적으로 더욱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양측이 소비한 전력은 이스라엘은 1일 3억 달러, 총 50억 달러다
아랍축은 배가 되는 100억 달러라는 엄청난 비용을 소모함으로써 양국의 경제에 극심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로인해 양국민은 승자도 패자도 피패해졌다.
이전쟁이 주는 교훈은 동원체제가 잘 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48시간 내에 동원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10월 전쟁시는 72시간의 배가 소요됨으로써 많은 차질을 초래했다.
또한 불리한 상황에서 기습과 기만은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라엘의 우수한 전술 전략의 응용과 용병술을 비롯한 정신력이다.
일예로, 외국에 유학한 아랍학생은 전쟁이났어도 숨어버리고, 이스라엘 학생은 자진 귀국해 군에입대 전쟁에 참여했다.
해서 필자는 유능한 인재는 육사나 삼사에 보내야 한다.
유능한 지휘관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네 국민과 아들과 딸을 살려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웃이 세계 강대국들이다. 또한 남과 북이 대치 상황이다.
이스라엘처럼 예비군의 운영체제는 평화시대 일수록 건실하게 편제및 훈련을 통해 준비를 게을리 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탈무드(이동민 역)
-중동전의 도전(이이년 역)
-롬멜 보병전술(황규만 역)
-유태인의 의식구조(권문영 역).
- 향토방위지및 일간 신문 기사등 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