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포비가] 정성희
씬1 주택가 골목(밤)
비가 내리는 사간동이나 안암동 쯤의 하숙촌.
한옥들이 쭉 늘어서 있고, 더러 대문에는 ?하숙생 구함?이라는 방이 붙어 있다.
성수, 전봇대를 부여잡고 쭈그리고 앉아 토한다.
괴로운 듯 흔들리는 성수의 등. 그 위로 노래소리 들린다.
(음악) 백설희의 ?물새 우는 강 언덕?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생각에 잠긴 성수, 처음에는 듣지 못하고 걸어가는데 노래 소리 조금씩 가까워 진다. 성수,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뒤돌아본다.
노래 소리 계속 이어지면
성수, 둘러보면서 노래 소리를 찾는다.
저만큼, 창 하나가 어둠 속에 불을 밝히고 있다.
씬2 미순의 집 앞(밤)
(음악) 계속 이어지고
노래가 흘러나오는 불 켜진 작은 창, 그 처마 밑에 성수가 서 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벽에 등을 기대선 성수. 그 자세로 노래를 듣는다.
발 밑으로 떨어지는 낙수.
성수, 주룩주룩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한 손에 받아 얼굴에 문지른다.
성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켠다.
노래 소리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여러번 성냥 긋는 소리가 섞이고,
담배를 깊게 피우는 성수의 모습.
씬3 성수의 자취방 안(아침)
성수, 책상 앞에 앉아 법률 서적 놓고 공부중이다.
성수, 기지개 쫙 펴다가 문득 벽에 걸린 달력을 본다.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씬4 달리는 기차 안
성수,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씬5 성수의 집, 사랑채 마루(밤)
전통적인 양반 가옥이다.
옛 복식 그대로 의관을 정제한 문중어른들 제사를 받들고 있다.
나이든 어른들이 뒷자리에 서 있다.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성수父) 보이고,
나이든 어른들을 제치고, 앞자리에서 술을 올리는 성수 보인다.
성수, 아버지에게 술잔을 건네면 아버지 진설하고.
성수, 절을 한다.
씬6 별채 마당 (아침)
제대로 손보지 않아 잡풀이 무성한 마당.
성수, 중문을 열고 들어온다.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별채를 둘러보다 방 쪽으로 걸어간다.
성수,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어 미닫이문을 드르륵- 연다.
씬7 별채 방 안(회상)
한복차림의 고운 여인(32세, 성수母), 작은 상을 앞에 놓고 혼자 술을 쳐서
마시고 있다.
문이 열리자, 어머니의 시선으로 문 앞에 선 아버지와 큰어머니,
큰어머니의 한복치마 뒤에 꼬리처럼 붙어 수줍은 듯 얼굴을 쓱 내미는 어린 성 수(7세)가 보인다.
씬8 시간경과
술상은 윗목으로 밀쳐져 있고, 그 옆에 유성기가 놓여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 앉아있고, 성수 큰어머니 옆에 바싹 달라붙어 앉아있다.
어머니, 두 사람에게 절을 한다.
어머니: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앉고)
아버지: 음...
큰어머니: 오랫만일세...
잠시 어색한 침묵.
아버지: 그만 가지.(일어선다)
큰어머니: 예.
큰어머니, 일어서면 성수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 일어서려 한다.
아버지, 성수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
아버지: 오늘은 예 있거라.
씬9 방 앞
아버지, 성큼성큼 중문 쪽으로 가고
큰어머니, 이 짝 저 짝 아무렇게나 벗어둔 성수의 고무신을 가지런히 모아주고
방문 쪽을 쳐다본다.
문이 조금 열리고 성수, 빠꼼이 내다보면
큰어머니, 성수에게 들어가라는 뜻의 손사래를 친다.
씬10 방 안
성수의 시선에 중문을 빠져나가는 큰어머니의 뒷모습.
성수,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다.
어머니, 그런 성수를 바라보다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아이를 품에 답싹 싸 안는다. 성수, 숨이 막히는 듯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한다.
어머니: 우리 도련님. 많이도 크셨네.
성수, 어머니를 빤히 쳐다보다 갑자기 왕-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어머니, 아기 안듯 성수를 무릎 위로 올려 안고, 웃으며 성수의 등을 토닥인다.
어머니: 뭐 그리 서러우실까? 그만 울어요. 응?
어머니, 손으로 성수의 눈물을 훔쳐준다.
씬11 시간경과(밤)
(음악) 백설희의 ?물새 우는 강 언덕?
어머니, 상을 앞에 두고 술을 마신다.
성수, 병 뚜껑 뾰족한 면으로 유성기에 글자를 파려고 애를 쓴다.
어머니, 그런 성수를 본다.
성수, 병 뚜껑 주머니에 집어넣고, 쭈빗쭈빗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 앉는다.
어머니: (술을 쭉 마시고) 한 잔 하실래요?
어머니, 성수에게 술잔을 내민다. 성수, 고개를 젓는다.
어머니: 그러지말고 도련님. 어미 술 한 잔 받으셔요.
성수, 술잔을 받으면 어머니 두 손으로 술을 아주 조금 따른다.
성수, 술잔을 보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눈 딱 감고 쭉 마신다.
어머니: 옳지. 옳지.
성수, 몸을 부르르- 떨면
어머니, 후후- 웃고는 저로 안주를 집어 성수의 입에 넣어준다.
지지직 거리며 노래 끝나면
어머니, 유성기를 다시 돌린다. 다시 노래 나오는데,
어머니: (혼잣말 처럼) 예전에 말이다. 저이랑 나. 같은 무대에서 노랠 불렀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지. 천막 안이 꽉 차구, 그 밖에두... 꽉 차구.
정말 많았어. (꿈꾸는 듯한 표정) 이렇게 인사를 하고
어머니, 일어서서 날아갈듯 인사를 하고 손을 모으고 서서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부른다.
성수, 약과를 집어먹으며 멀뚱히 그런 어머니를 본다.
씬12 방 안(현실)
뻥뻥 구멍 뚫린 창호지 문 사이로 햇살이 새어 들어온다.
짐들이 쌓여 창고 같이 변한 방. 먼지 소복한 물건들 위로 빛이 가라 앉는다.
성수, 마치 어머니가 거기에 있는 듯 그리운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본다.
씬13 사랑채 방 안
가방을 옆에 둔 성수. 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절을 드리고 있다.
아버지: 이번 시험 너무 마음에 두지 마라. 실패를 모르고, 어려 성공하면 교만해 지기 쉬운 법이다. 다 너를 큰그릇으로 다듬고자 그리 됐다 여겨라.
성수: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래. 제사에 오신 어르신들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다. 두 번 걱정은 끼치지 말 아야지. 가일층 정진해서 다음에는 좋은 소식 전해드려야 한다.
성수: 노력하겠습니다.
아버지: 옛말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여자와 향기 있는 술은 반드시 군자를 망친다 했다.
젊어서는 혈기가 방자해 마음을 비우기 쉽지 않다만, 지금은 네가 뜻을 세워 공부하는 중이니 이 두 가지는 삼가도록 해라.
성수: 명심하겠습니다.
성수, 가방 들고 일어난다.
씬14 성수의 자취방(밤)
성수,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법률책들 보이고.
성수, 의자 밑에 찬물이 담긴 세수 대야를 놓고 발을 담근 채 공부한다.
책장을 넘기던 성수,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 보내기 위해 창을 열어보면 어둠이 깊다.
씬15 미순의 집 앞(밤)
성수, 집 앞을 서성거리지만 노래 소리 들리지 않는다.
한참을 서성였는지 시계를 들여다보고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면
작은 창에 불이 켜진다. 잠시 후에,
(음악) 백설희의 ?물새 우는 강 언덕?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그대와 둘이서 부르는 사랑노래...?
성수, 가던 발길을 멈추고 창 앞으로 돌아간다.
선 자세로 노래를 듣다가 성수, 발돋움을 해 창 너머 방을 들여다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씬16 성수의 상상
창안으로 방이 보인다.
한복 차림의 어머니 술상을 앞에 두고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다.
씬17 미순의 집 앞(밤)
성수, 초조한 듯 몇 번 창을 올려다 보다 이윽고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망설이다 대문을 밀어보는 성수.
삐걱- 문이 열린다.
씬18 미순의 방 앞(밤)
(음악) 노래 계속 이어지고
창호지 문에 여인의 그림자가 비친다.
성수, 흠흠하고 인기척을 내지만 방에서는 아무 소리가 없다.
성수, 문을 열려고 손을 뻗는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여는 성수.
성수의 시선에 어머니가 다림질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성수, ?어머니-? 하고 부르려는데.
다림질하던 미순, 얼굴을 돌려 성수를 본다.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그 찰라의 순간 놀란 미순, ?까아-? 비명을 지른다.
씬19 마당(밤)
미순과 성수, 주인여자(30대 중반)와 현준(남, 10살) 서있다.
잠옷가운 차림의 주인여자, 한 손은 가운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에는 불붙은 담배를 끼고 있다.
주인여자: (미순에게) 문단속 잘하라고 했지? 여긴 시골이 아냐.
성수: (미순과 주인여자를 보며)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하는데)
주인여자: 학생은 가만있어요. 친구 집 찾아왔단 얘긴 다 알아들었어. 지금은 (미순에 게) 쟤한테 말하는 거예요.
성수: ...
미순: 죄송해요. 언니.
주인여자: 앞으루 주의해. (성수에게) 학생은 그만 가봐요. 다음부턴 실수하지 말구.
성수: (미순을 바라보다가)저, 아주머니.
주인여자: (보면)
성수: 여기... 방 하나 없습니까? 자취방을 구하는데.
주인여자: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우리집은 사람 안 들여요.
성수: ... (현준을 잠시 보고) 꼬마 공부두 제가 봐 줄 수 있는데요.
주인여자, 성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씬20 미순의 집 앞(다른 날, 낮)
활짝 열려있는 대문.
길에 잡동사니 실려있는 손수레 세워져 있다.
성수, 대문 안에서 나온다. 짐을 나르느라 손에 장갑을 끼고 있다.
성수, 짐 들고 안으로 들어가는.
씬21 성수의 방 앞
성수, 곤로와 양은냄비, 밥그릇... 등등의 살림 정리하기 위해 늘어놓는다.
안채, 마루문 열리고 출근복 차림의 주인여자 구두 신고 나온다.
대문쪽으로 가다 흘깃 성수를 보고.
주인여자: 부엌으로 가져가.
성수: ? (보면)
주인여자: (손짓하며) 그거. 잡동사니들 거기다 주질주질 늘어놓지 말구 부엌으루 응?
성수: 아. 예.
주인여자: 다시 한 번 말해 둘께. 안채에는 일체 들어오면 안돼. 준이 공부두 학생방에 서 가르치는게 좋겠구. 화장실두 물론 바깥 걸 써야겠지.
성수: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인여자, 성수가 짐 정리하는 모습에 무심한 듯 힐끗 시선 주다 대문쪽으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간다.
씬22 부엌(저녁)
넓고 정갈한 실내. 한쪽 구석에 성수의 부엌살림 놓여있고.
미순,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냄비를 들고 들어오는 성수, 씻은 쌀이 들어 있는 냄비를 곤로 위에 얹고,
뚜껑 덮고는 곤로에 불을 지피려고 성냥을 긋는다.
미순: (돌아보고) 밥 앉히지 마세요. 저녁은 준이랑 같이 드세요.
성수: 괜찮습니다. 쌀두 다 씻었는데요. 뭐.
미순: 주인언니가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성수: (주인이라는 말이 걸린다) 주인언니요?
미순: 녜. 준이 어머님요 그렇게 하시래요. 선생님 오신 첫날이라구요.
성수: ....
미순, 등을 돌리고 능숙하게 칼질을 한다.
성수, 뭔가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그런 미순의 모습을 바라본다.
씬23 성수의 방 앞(밤)
성수,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미순의 방에 불이 켜져있지만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성수, 미순의 방을 쳐다보면 불이 꺼진다.
시선을 돌리고, 뭔가 심란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운다.
씬24 우체국 앞(다른날)
소낙비가 세차게 내린다.
미순, 비닐우산을 받쳐 쓰고 한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온다.
문 앞에서 우산을 끄다 손에 쥐고 있던 편지봉투를 떨어트린다.
고인 물구덩이에 떨어지는 편지봉투.
미순, 얼른 봉투를 집어드는데, 그새 겉봉에 얼룩이 져 있다.
씬25 우체국 안
미순, 탁자 앞에서 새 봉투에 편지를 옮겨 넣고,
얼룩진 봉투를 보며 새 봉투에 펜으로 주소를 그리고 있다.
얼룩진 봉투를 자세히 보면 어른 글씨가 아니라 글 모르는 아이의 글씨 같다.
미순, 열심히 주소를 그리는데, 뒤에서
(성수의 소리) 미순씨.
미순: (돌아다보면 성수다) 아! 선생님. 웬일이세요?
성수: 전신환 바꾸러요. 미순씬...?
미순: (팔로 편지봉투를 가리며) 집에 편지 부치러요.
성수: 예에. 그랬군요. 잠깐만요.
성수, 용지를 들고 아가씨 앞으로 간다.
미순, 성수의 뒷모습을 흘깃 보고 빨리빨리 주소를 그리지만 쉽지 않다.
씬26 시간경과
성수, 아가씨에게 돈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는다.
성수, 돌아보면 미순이 아직 탁자 앞에 서 있다.
성수, 미순에게로 걸어온다. 그녀의 옆에 서서 지켜보면
미순, 성수에게 보이기 싫어, 마치 시험보는 아이처럼 한쪽 팔로 가리고
주소를 그린다.
성수, 좀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미순을 본다.
미순, 포기한듯 가린 팔을 치우고...
미순: (올려다 보며) 저... 글 몰라요.
성수: 예? 아! 예... (그제서야 알아듣는)
미순, 쑥스럽다는 듯 성수를 보고 웃는데,
당황하고 미안한 성수는 그런 미순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씬27 우체국 앞
계속해서 내리는 소나기
우산이 없는 성수,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인다.
미순, 우체국에서 나오면서 성수를 본다. 우산을 펴며,
미순: 같이 쓰시겠어요?
성수: (돌아보고) 변덕스럽죠? 여름날씨가? 하루종일 쨍했다 뿌렸다 하네요.
미순: (웃으며) 여우가 시집 가나부다. (우산 받쳐주면)
성수: 이리 주세요. (우산을 잡는다)
두 사람, 가까이 붙어서 우산을 쓰고 걸어간다.
씬28 시장 안
어느새 소나기는 그쳤고 언제 그랬냐는 듯 햇볕이 쨍쨍하다.
미순과 성수, 나란히 걸어온다.
장을 다 보았는지 미순의 장바구니가 가득차 있다.
만두가게 앞을 지나치던 두 사람.
성수, 발길을 멈추고, 김 오르는 찜통을 바라본다.
씬29 만두가게 안
마주 앉아 있는 성수와 미순. 두 사람 앞에 만두가 담긴 접시 놓여 있고.
성수와 미순, 맛있게 만두를 먹는다.
성수: (만두 집어들다) 만둘 서울와서 처음 먹어 봤어요.
미순: 정말요?
성수: 예. 만두, 김치찌개.. 저기 아랫녘 사람들은 그런거 안해먹거든요. 첫 방학때 어 머니한테 내려가서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미순: (고개 흔든다)
성수: 어머니. 서울 사람들 참 이상해요. 김치를 물에 삶아 먹어요.
미순: (소리 내서 웃는다)
성수: 미순씬 고향이 어디에요?
미순: 평창. 강원도 평창요. 북쪽에 가깝긴한데. 만두 같은건 못먹어 봤어요.
성수: 아. 거기두 안하는구나..
미순: (미소) 저희집에선 아마 할 수가 없었을 꺼에요.
성수: (보면)
미순: 열 살 때까지 이 세상에 사람은요, 아버지, 엄마, 나. 이렇게 달랑 세 명만 있는 줄 알았어요.
성수: ...
미순: 산에서 농살 지었거든요. 화전민 아시죠?
성수: 예. (고개를 끄떡인다)
미순: 새벽같이 두 분 일 나가시면 전 방에 갇혀서 지냈어요. 뱀두 많구 멧돼지, 칙범 두 있구... 겁이 나셨던지 제 허리에 끈을 매서는 방문고리에 묶어두셨죠. 제가 뭘 하고 지냈는지 아세요?
성수: 글쎄요? 울었어요?
미순: 삶은 보리알 집어 먹었어요.
성수: 보리알요?
미순: 녜. 두 분 일 나가기 전에 툇마루..방안..손 닿는데 마다 삶은 보릴 한 웅큼씩 뿌려놓구 가세요. 기어다니면서 그거 집어먹구...울다가 먹구...꾸벅꾸벅 졸다가 먹구.. 깨서두 먹구요. 그러면 하루해가 꼴깍 기울거든요.
성수: ... (안쓰러운 마음으로 그녀를 본다)
미순: 그러다 열살 때 화전민 소개가 있었어요. 강릉으루 내려왔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수: 좋았겠군요.
미순: 막 토했어요. 멀미가 나서요. 냄새두 고약하구 아마 그게 사람멀미였던 모양이 죠?
성수: 예... (고개 끄덕인다)
미순: ... 그래서 글 배울 시간이 없었어요.
성수: ....
미순: 부끄러웠던 모양이예요. 우체국에서, 제가 선생님한테 변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 예요. (미소 짓는다)
성수: (그녀의 말에 마음이 아프다) ...
미순, 아무렇지도 않게 만두를 먹고,
성수, 그런 미순을 가만히 지켜본다
씬30 성수의 방(낮)
방 가운데 상 펴져있고
성수, 현준의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책상 위에 펴져있는 국민학생 교과서.
?이건 이렇게 푸는 거야/ 이렇게요? 아니 아니, 이렇게/ 응 제가 해볼께요.?
등의 대사 애드립으로 있고.
현준, 연습장에 끙끙 거리며 산수문제를 푼다.
성수, 그런 현준을 보다 상 위에 쌓아둔 교과서에 눈이 간다. 국어 교과서.
성수, 그 책을 집어들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씬31 미순의 집, 마당(밤)
성수, 불 켜진 부엌 앞에서 오락가락하며 미순을 기다리고 있다.
성수, 미순에게 책을 줄 생각에 흐뭇해 혼자 웃음 짓고 있는데,
부엌불 꺼진다.
미순,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온다.
성수: (미순에게 다가가서 교과서를 내민다) 받으세요.
미순: (보면서) 이게 뭐예요?
성수: (웃는다) 청계천에서 한 권 사왔어요.
미순: ?
성수: 글 가르쳐 드릴께요.
미순: ! (자존심이 상한다) ...
성수: 받으세요.
미순: (차갑게) 선생님. 전 현준이가 아니예요.
성수: 예?
미순: 지난번에 그런 말씀 드린 건.... 그래요. 글을 몰라 좀 불편한 건 있지만,
선생님한테 배우고 싶어서 그런건 아녜요.
미순, 돌아서서 자기방으로 간다.
성수, ?미순씨.? 하고 부르려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고 그냥 미순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미순.
미순의 방에 불이 켜지고.
성수, 손에 들고 있는 국어책을 보다가 미순의 방 앞으로 다가간다.
성수, 노크하려고 손을 뻗다 마음을 돌리고 그녀의 방 앞 툇마루에 책을 놓고 돌아선다.
씬32 성수의 방(밤)
성수, 벽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있다.
미순의 방에서 노래가 들려온다.
(음악) 백설희의 ?물새우는 강언덕?
성수, 노래를 듣다 문을 연다. 고개를 내밀고 미순의 방쪽을 내다본다.
그녀의 방 앞에 놓여있던 책이 보이지 않는다.
씬33 미순의 방(밤)
수 놓인 이불보. 유성기, 아주 작고 낡은 앉은뱅이 책상.
초라하지만 정갈한 분위기다.
미순,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웅크리고 앉아 노래를 듣는다.
그러다 손을 뻗어 발 밑에 놓인 교과서를 집어든다.
화르륵- 책장을 넘겨 보는 미순.
씬34 몽타쥬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글을 배우는 미순.
성수, 한자한자 짚어가며 교과서를 읽으면, 미순 따라 읽는다.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을 듯 가깝다.
미순, 안채 마루를 걸레질하고 있다.
엎드려서 한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한손으로는 교과서를 읽고..
시장. 장바구니를 옆에 든 미순.
주머니에서 단어장처럼 생긴 작은 수첩을 보며
야채가게 주인에게 물건을 산다.
수첩을 보며 한자한자 떠듬거리며 끊어서 읽는다. ? 시.금.치. 굵은 파.?
야채가게 주인, 물건을 집다 뜨악하게 미순을 보고.
미순, 그런 가게 주인을 보며 환히 웃는다.
씬35 부엌(이른 아침)
성수와 미순, 저녁을 지으며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도마 옆에 십육절지 시험지 한 장이 있다.
성수, 곤로 위 냄비에 두부를 넣으며.
성수: 두부를 넣었습니다.
미순: (연필을 꼭꼭 눌러 쓰며) 두. 부. 를. 넣 었. 습니다. 다 썼어요.
성수: 보글보글, (하는데)
미순: 잠깐만. 잠깐만요. 저 파 좀 넣고요. (미순, 자신의 법랑냄비에 도마 위에 썰어 넣은 파를 넣고 뚜껑을 닫는다) 됐다. (성수를 보고 웃는다)
성수: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미순: (연필을 꼭꼭 눌러 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 장 찌 개.
(혼잣말 처럼) 거이진 가인지 찌개할때 개자는 맨날 헷갈려.
성수, 열심인 미순의 모습을 바라본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성수: 참 좋은 여자예요.
미순: 아직요, 아직 다 안썼어요. .. 참 좋은..? (쓰다 순간 손을 멈춘다)
성수: 그건 안써도 되요.
미순: (성수를 돌아 본다)
성수: 미순씬 참 좋은 사람이예요.
성수, 가만히 미소 지으며 미순을 바라본다.
미순, 그런 성수의 눈길이 부끄러워 괜히 찌개 간을 보는척 시선을 돌린다.
씬36 거리
성수와 미순 나란히 서있다.
미순: 아녜요. 선생님. 제가 대접해야죠. 수업료도 못 드렸는데.
성수; 그건 안되죠. 원래 상은 선생이 학생한테 주는 거예요.
미순: ...
성수: 자 얼른 말해요. 뭐 먹고 싶은지. 백점 맞은 상으로 오늘은 내가 살께요.
미순: 음....(생각하다,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 흔든다)
씬37 경양식 집(오후)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실내.
성수와 미순 앞에 양식 놓여 있다.
미순, 조금은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인다.
성수: (미순의 어색한 포즈를 보며) 괜히 여길 왔나봐요.
미순: 신경쓰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왜 누구나 다 처음인게 있죠? (손가락 꼽 아가며) 처음 타 보는 기차. 처음 가보는 극장. 처음 먹어보는 음식.
선생님도 그럴 때 있었죠? 김치찌갤 처음 드셨을 때처럼.
성수: (고개 끄떡이고)
미순: 아주 익숙해 졌을 때보다 처음일 때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설레니까요.
아주 나중이 돼서도 그때가 오래오래 생각나구.
미순, 서툴지만 열심히 음식을 썰어 먹는다.
성수, 그런 미순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씬38 덕수궁 돌담길(저녁)
성수와 미순, 어깨를 가까이 하고 걷고 있다.
미순: 친구분은 찾으셨어요?
성수: ? (이게 무슨 소리야 싶은)
미순: 그때 왜 선생님 저희 집에 처음 오셨을때요? 친구분 찾으러오셨다고...
성수: ...
미순: (성수가 아무 대답이 없자 잠시 눈치를 살피고 조용히 걷는다)
성수: 미순씨 잘 듣는 노래 있지요?
미순: ?
성수: (노래로) 물새 우~는
미순: 아아! ...전에요. 제가 첨 남의집살이 할 때. 그때 주인아주머니가 잘 들으셨어 요.
성수: (고개 끄덕이고) 예. 제 친구도 그 노랠 무척 좋아했어요. 처음 집 앞에서 그 노 래 들었는데, 많이 놀랐어요.. 왜 그럴때가 있지요? 이 집, 틀림없어. 친구 집이 맞아. 이런 확신. 근건 없는데...그랬어요.
미순: ... 그래서 저희 집으루 이사 오셨어요?
성수: 예 (고개를 끄떡인다)
미순: ...(묻기가 망설여 진다) 그 분... 선생님이 사랑하는 분이세요?
성수: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런 감정을 느낄 시간이 없었어 요. 생각하면 좋 아했던 것도 같고. 그리워 했던 것도 같고...(서글픈 미소) 잘 모르겠네요.
미순: ...
성수, 멈춰선다. 그 바람에 미순도 멈춰 서고
성수, 미순을 가만히 바라본다.
성수, 미순의 손을 잡는다.
두 사람, 그 자세로 한참을 서 있다.
씬39 집 앞(밤)
성수와 미순 말없이 손을 잡은 채 걸어온다.
미순, 오가는 사람 없는데도 주위를 의식하며 손을 뺀다.
성수: 먼저 들어가요.
미순, 고개 끄떡이고 대문쪽으로 가 문을 민다.
성수, 그런 미순의 뒷 모습을 바라보다.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성수가 기대 선 담, 미순의 창에 불이 켜진다.
씬40 마당 안(밤)
주인여자, 가운 차림으로 마당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성수, 들어와 문을 잠그다 주인여자를 발견한다.
목례를 하는 성수.
주인여자, 그런 성수의 모습을 무안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다.
성수: ...(무안한)
주인여자: 손님 오셨어.
성수, 불 켜진 자신의 방을 보면, 방 앞에 하얀 남자 고무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씬41 성수의 방 안(밤)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 단정하게 정좌하고 있다. 그 옆에 아버지의 중절모.
성수, 아버지에게 절하고
성수: (앉는다) 어떻게 여긴...
아버지: 지난번 주인댁에 물었다. 남자는 자신이 몸담는 거처를 쉽게 옮기지 않는 법이 다. 왜 그 집이 불편하더냐?
성수: ...
아버지, 일어서서 책상 앞으로 간다.
아버지, 책상 위에 덮어 놓은 책들을 손으로 쓸어본다.
아버지: 서탁을 보면 그 사람의 내일을 알 수 있다 했는데...
이 댁 여주인도 그렇고... 여긴 공부하기 그리 좋은 곳이 아닌것 같구나.
아버지, 염려스러운 눈길을 성수를 바라본다.
씬42 마당, 수도가(밤)
아버지, 세수를 하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앞치마 차림의 미순, 쌀을 씻는다.
아버지,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씻으시다 미순을 꼼꼼히 본다.
씬43 성수의 방 안(아침)
성수와 아버지 상을 마주하고 아침을 먹고 있다.
노크소리 들린다.
(미순의 소리) 선생님.
성수: 네에. (일어나서 문쪽으로)
조심스럽게 문 열리고, 법랑 냄비를 든 미순 보인다.
미순, 성수에게 냄비를 건네며.
미순; 이거. 주인아주머니가 갖다 드리라고...
성수: (받고) 잘 먹겠습니다.
미순, 아버지와 눈길이 마주친다. 가볍게 목례하고 문 닫는 미순.
성수, 냄비를 상 가운데 놓고 뚜껑을 연다. 김 오르는 된장찌개.
아버지: (한 숟가락 떠 먹고) 이번에 같이 내려가자.
성수: 녜?
아버지: 방학 아니냐? 그동안 객지 생활에 몸도 휘졌을터. 집에서 머리도 식히고.
성수: ...저는 학교 도서관이 더 편합니다.
아버지: 수야.
성수: (보면)
아버지: 일전에 문중어른들께서 네 혼사말을 하시더구나.
성수: !
아버지: 아직 학업 중이라 때가 이르다 싶어 뒤로 미루자 말씀드렸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구나. 학업도 중요하다만 종손에겐 혼사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지.
성수: 아버님!
아버지: 식기 전에 들자. 음식 앞에 두고 긴 말 않는 법이다.
두 부자, 어색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는다.
씬44 달리는 기차 안
나란히 앉은 두 부자.
성수, 창 밖을 물끄러미 보며 딴 생각에 빠져 있다.
(성수의 소리) 돌아 올 때 쯤이면 가을이겠군요.
씬45 미순의 집, 부엌
미순, 씬37의 법랑냄비를 열어본다.
말갛게 씻긴 그릇안에 성수가 써 놓은 쪽지가 접혀져 있다.
미순, 손에 물기를 앞치마에 닦고 부뚜막에 걸터 앉는다.
그리고 서둘러 쪽지를 펴본다.
그 위로 성수의 소리 이어진다.
(성수의 소리) 저 없더라도 공부 게을리 하지 마십시요. 올해 말쯤 검정고시 있다는 이 야기 들었습니다. 방학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제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 질 듯 싶습니다. 현준이도, 미순씨도 많이 그리울 것 같군요.
미순, 소중한 듯 쪽지를 다시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는다.
씬46 언덕(석양)
언덕 밑으로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논이 황혼에 물들고 있다.
아버지, 언덕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문다. 그 뒤에 엉거주춤 서있는 성수.
아버지: (성수를 올려다 보고) 앉거라.
성수: (아버지 옆에 앉는다)
아버지: (시선 논으로 주고) 참 좋구나. 봄에 그렇게 가물었는데도...
가을에 실하겠다.
성수: 그러네요.
아버지: (부러운듯) 허긴 인근에 이만한 땅이 없지... (사이 두고) 수야.
성수: 예.
아버지: 저 땅. 전에는 다 네 논이었다. 너, 아냐?
성수: ...처음 들었습니다.
아버지: (회한)저걸 네 어미가 가지고 갔구나.
성수, 아버지를 한번 보고, 펼쳐진 논으로 시선 돌린다.
성수의 시야에 논둑을 뛰어오는 소년이 보인다.
씬47 그 언덕 아래의 논둑(황혼)
장난감을 들고 즐거운듯 활기차게 뛰는 어린 성수(7세).
성수의 시야에 활짝 웃는 어머니, 몸을 굽히고 두 팔을 벌이고 기다 린다.
어린 성수, 어머니의 품에 안긴다. 성수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는.
어머니: 그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구요.
어린 성수: 나, 업어줘.
어머니: (두 손으로 성수의 뺨을 만지며) 업히고 싶으세요?
어린 성수: 응. 발 아파.
어머니: 자요. (등을 댄다)
성수, 어머니의 등에 답싹 업힌다.
어머니, 성수를 업고 일어서서 걷는다.
성수를 재우듯 흔들흔들 천천히 논둑길을 걷는 어머니. 성수를 돌아 보고.
성수, 졸리는지 눈꺼풀이 무겁다.
어머니: 졸리나 보네.
성수: ..응.
어머니: (앞을 보고, 시선 멀리 하고) 우리 도련님.. 어미 좀 도와줄래요? (성수를 돌아 본다)
성수: (고개 끄덕인다) 응.
어머니: 이 어미하구 약속하는 거예요?
성수: 응. 근데 뭐 뭘 도와?
어머니: 나중에. 후에요.. 도련님이 다 크면 아실껍니다.
어머니, 지친듯 서러운듯 회한에 잠겨 먼 곳을 보며 걷는다.
성수, 곤하고 행복한 얼굴로 어머니 등에 얼굴 부비며 졸고있다.
씬48 언덕(황혼, 현재)
아버지: 대구, 어느 극장에서 네 어밀 처음 봤다.
성수: ...
아버지: 정 두고 만난 여자는 네 어미가 처음이었지.네큰어머니와 난 그냥 얼굴 한 번 못보고 혼롈 치뤘으니까.
성수: ...
아버지: 네 에미를 집에 들이고, 참 좋았다. 네 할머니, 할아버지, 반대도 만만찮았지 만, 다 이겨낼 수 있었어. ...근데, 아니더구나.
성수: (본다)
아버지: (술 따른다) ..네 에미는 내 옆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어.
성수: ...
아버지: (벌컥 들이키고) 몇번이고 집에 데려다 앉혔지만, 안되는건 안되는게야. 언제나 네 에미 마음은 바깥으로 떠나 있었어. 우리 옆에 있 거 보다 세상을 훨훨 날 아다니는게 더 좋았던 게야.
성수: (앞에 놓인 자신의 깨끗한 술잔을 본다)...
아버지: 세상엔 만나지 않는게 차라리 좋은 연분이 있는 게다. ..수야.
성수: 예.
아버지: 그 처녀하고는 안된다.
성수: (놀란다) !
아버지: 젊어, 혈기에는 좋아하는 마음 하나면 다 인것 갔겠지. 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그 마음은 세월 흐르면 다 사그러지게 마련이지.
그땐 후회밖에 남는게 없어!
성수: 아버지!
아버지: 마땅한 혼처가 있구나. 집안도 그렇고, 교육도 받았고... 좋은 아이다.
성수: ...
씬49 양반 가옥 마당(낮)
방문 열려있고, 안에서 찻상을 마주하고 앉은 성수와 여자(20세)가 보인다.
옆 마루에 아버지와 노신사가 마주앉아 담소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성수, 아랫쪽 마당을 복잡한 시선으로 내다보고.
성수: ...(고개 떨군다)
씬50 고향집, 사랑채 안
성수,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큰어머니 불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있다.
아버지: 그토록 알아듣게 일렀는데...
성수: 죄송합니다.
큰어머니: (아버지에게) 요즘엔 집안 그리 따지지 않는답디다. 대체 어떤 색시길래 그래 요? (성수에게) 어떤 아이냐?
성수: (큰어머니를 한번 보고)...아버지. 한번 만나나 주십시요.
아버지: 이미 봤다.
성수: 그러지마시구 다시 한 번 만 봐주세요.
큰어머니: 그러세요. 성수가 그리 좋다는데... 한 번 보고,
아버지: ... 참한 아이더구나.
성수; (얼굴이 조금 펴진다)
아버지: 허나 남의 집 식모살이 하는 아일 종부로 맞을 순 없는게야.
큰어머니: (놀라서) 식모라니요? 수야! 그게 무슨 소리냐!
성수: ...(고개를 떨군다)
씬51 고향집, 성수의 방(밤)
불 꺼진 방에 누워있는 성수.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인다.
방문 창호지 문살이 달빛을 받아 성수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방문 밖을 보는듯한 성수의 시선.
한순간 벌떡 일어나는 성수, 방문 앞에 둔 웃옷을 집어들어 방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간다.
씬52 미순의 집 앞(새벽)
적막한 미명. 삐꺽 문 열리고, 연탄재 버리러 나오는 미순.
쓰레기통에 연탄을 버린다. 그 위로.
(성수의 소리): 미순씨..
미순: (깜짝 놀라 돌아본다) .., 어머! 선생님!
성수: ...
미순: (반갑게 웃으며) 방학 끝나고 오신다더니, 어쩐 일이세요?.
성수: (부스스한 모습이다. 진지하게) 결혼해 주십시요
미순: 예?
성수: 나하고 결혼해 주세요.
미순: ...(미소 짓는다) 예. 그럴께요.
성수: (환하게 웃는다)
성수, 와락 미순을 끌어안는다.
성수, 미순을 안은채로 빙빙 돌며 웃음을 터뜨린다. 성수의 웃음소리가 집앞 거 리의 새벽을 깨우는 듯 하다.
씬53 미순의 집, 안채마루(낮)
소파에 마주앉은 미순과 주인여자.
주인여자, 담배를 피운다.
주인여자: 그런 일을 왜 하니? 왜 그렇게 끝이 빤히 보이는 일을 해.
미순: ...아는데요.. 저도 다 아는데... 그래도 전 선생님이 좋아요.
주인여자: 다 지나가는거야, 그런건. 나를 보면 알잖아.
미순: ...
주인여자: 모르겠다. 난 피곤한 건 싫다. 알아서 해. 내가 어떡해 줄 수 있는 것두 아니 구.
미순: ...
씬54 고향집(다른날)
미순을 데리고 들어오는 성수.
미순, 깨끗한 차림이지만 어딘지 불안한 표정이다.
씬55 사랑채 방
아버지와 큰어머니, 심란한 얼굴로 앉아있다.
미순, 조심스레 절을 하려하면,
아버지: 처자한테 절 받을 처진 아닌듯 싶네.
미순, 잠시 성수를 보다 다소곳이 앉는다.
앉아 있는 네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아버지: ... (후 한숨 쉬고) 본관은 어딘가?
미순: ...어려선 강원도 평창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 본관은 어딘지 모르는가?
미순: ..예.
아버지: 부모님은 생존해 계시고?
미순: 어머닌,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계세요.
큰어머니: 아버님께선 무슨 일 하시나?
미순: 밭농살 조금...
아버지와 큰어머니, 짐작했었다는 표정이다.
미순, 태연하려 애쓰지만, 힘이 드는 모습이다.
성수, 미순의 얼굴을 본다.
아버지: 그래, 공부는 어디까지 했나?
미순: ...(가장 어려운 물음이다. 고개 떨군다)
성수: 왜 자꾸 그런 말씀만 물으세요?
아버지: (매섭게 성수를 보고, 차갑게) 그럼, 무슨 말을 물으랴? 너라면 이런 자리에서 뭘 묻겠냐! 처자 성품은 어떤가? 처자, 침선 솜씨는 어떤가? 그런 걸 물으랴!
성수: ...
네 사람, 무거운 분위기로 말없이 앉아 있다.
씬56 안채 방(밤)
미순, 한쪽에 앉아 방안을 가만히 둘러본다.
이부자리 두 채가 깔려있고, 양반가 안주인의 권위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미순, 자신이 없어지는 얼굴로 고개 떨군다.
밖에서 인기척 나더니, 방문이 열린다.
들어서는 큰어머니. 미순, 몸을 일으킨다.
큰어머니, 앉고, 미순, 따라서 앉는다.
큰어머니: (혼잣말처럼) 피곤할텐데 먼저 눕지 그랬어.
미순: 아니예요.
큰어머니: (미순을 물끄러미 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 우리 애가 끝까지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말이우. 미순이라고 했우?
미순: 예. 어..(어머니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큰어머니: 헤어져요.
미순: ...
큰어머니: 그게 좋아. 모두를 위해서. 우리 애, 지금은 저러지만.. 영 제 아버지 안보고 살 애 못되지. 제 아버진, 또 처잘 당신 며느리로 인정 할 수가 없는 양반이야. 결국, 성수도 힘들고..미순이도 힘들고...
미순: (뭔가 할 말이 있는 눈빛이다) ..
큰어머니: 여잔 자기에게 어울리는 짝을 만나 알토란 살토란 정겹게 사는게 복이라오. 살아보니 정말 그래. 내 딸 같이 여겨 하는 말이라오.(진정이 묻어나는 표정이 다) 짧은 한세상 왜 그렇게 힘든 길을 택하려구... (쯧쯧)
미순: (보다가 고개 떨군다)
큰어머니, 말 마친듯 이부자리를 보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미순, 그런 큰어머니를 가만히 본다.
씬57 동, 마당(새벽)
미순, 어제 들어서던 차림 그대로 안에서 나온다.
열어놓은 대문 밖으로 나가서, 한번 돌아본다.
미순의 눈에 들어오는 집안 이곳저곳.
열린 대문으로 돌아서서 떠나는 미순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씬58 시골 버스 정류장(아침)
미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고개를 떨구고 땅을 파는 듯한 미순의 발끝.
미순의 숙인 얼굴, 눈에 물기가 묻어난다.
순간, 미순의 어깨를 잡고 휙 돌리는 성수.
미순, 잠깐 비틀거리지만, 성수의 두 손이 양 어깨를 잡아준다.
미순, 티셔츠가 후줄근하게 땀에 젖은 화난 표정의 성수를 본다.
미순: ... 뭐하루 나오셨어요?
성수: ...
시골버스가 털털거리며 정류장으로 온다.
버스를 보는 성수와 미순.
버스가 서고, 차장이 문을 연다.
미순, 버스를 타겠다고 성수에게서 몸을 빼려하고.
성수, 그런 미순을 보다가, 돌연 미순의 손목을 끌고 버스에 오른다.
버스 문 닫히고 출발한다. 정류장에 자욱한 먼지가 인다.
씬59 감은사 터 앞(저녁)
성수와 미순을 내려놓고 떠나는 버스.
성수,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미순을 막아서듯 안고있다.
미순, 성수를 보면, 성수, 낯설은듯 주위를 살핀다.
씬60 감은사 터(저녁)
탑돌이하는 자세로 천천히 감은사 탑을 도는 미순.
성수, 조금 떨어져 그런 미순을 본다.
미순, 멈춰서 성수를 본다.
성수: 뭘 빌었어요?
미순: (말하려는듯 표정을 취하다, 그냥 웃고 만다)
성수: (다가와서 미순을 잡으려하며) 뭐예요? 예? 말해봐요.
미순: (웃으며 피하고) 그런건 말하는게 아니래요. 말하면 바라는 게 달아나 버린대 요.
성수: 그럼 말하지 마요. (미소 짓는다)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
씬61 민박집 방안(밤)
조금 사이를 두고, 나란히 벽에 기대 앉은 성수와 미순.
어딘지 겸연쩍으면서도 편안한 두 사람의 표정.
씬62 민박집(밤)
마당에 수도와 평상이 있고, 방에 마루가 딸린 작은 민박집 마당.
씬63 동, 방안(밤)
옆으로 누워 잠들어있는 성수.
문득, 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는 성수. 미순이 없다.
확, 불안한 표정의 성수.
플래쉬, 어머니 품 속에서 잠든 어린 성수.
깨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어린 성수.
마당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성수.
요란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여는 성수.
문 앞에 밥상을 든 미순이 서있다. 울음 소리 뚝 멎는다.
씬64 동, 밖(밤)
마루로 나오는 성수. 그저 미순을 본다.
미순: 이것 줌요...
성수: (시선은 미순에게 한채, 밥상을 받는다)
씬65 동, 방안(밤)
밥과 숟가락 두 개. 된장찌개만 달랑 놓인 초라한 밥상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 은 두사람.
성수, 밥을 먹고 찌개를 떠먹는다.
미순: (부끄러운듯) 아주머니한테 빌려서 밥은 했는데 반찬이 없어요.
성수: (미소 짓는다) 나, 이렇게 맛있는 밥은 처음 먹어요. 이렇게 행복한 밥상도 처 음 받아 보구요.
미순: 정말요?
성수: 그럼요. 미순씨도 먹어요. 어서.
미순: (수저 들고 밥을 먹는다)
성수: ...나만 믿어요.
미순: (본다)
성수: .. 잘 될거예요. 나, 믿죠?
미순: ...예.
성수: 우리 이렇게 세상 끝날까지 같은 상에서 밥먹어요. 오래오래...
미순: (그런 성수를 보고, 행복하게 웃는다)
씬66 방 밖(밤)
불 꺼진 방안. 그 앞에 두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있다.
평상 위에 밥상이 세워져있고. 그 옆에 두 사람이 쓴 밥그릇, 찌개그릇 등이 깨 끗하고 정갈하게 닦여 빛나고 있다.
씬67 민박집 전경(새벽)
잔잔한 바다가 보이고.
녹음이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민박집이 보인다. 그 위로 새 소리가 평화롭다.
씬68 방 밖(새벽)
미순, 쪼그려앉아 성수의 신발을 보고있다.
신을 다시 한번 가지런히 정리하는 미순.
미순: ...
씬69 방 안(낮)
초라한 요 위에서 벗은 몸으로 자고 있는 성수.
성수, 행복한 꿈을 꾸는 표정이다. (DIS)
씬70 고속도로 휴게소
현재의 휴게소 여러 모습들.
중형차에 기대 담배를 피워무는 성수(30대 후반).
무표정한 얼굴로 연기를 뿜는다. 그 위로 여자의 소리 들린다. "여보!"
성수,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본다.
캔음료 두 개를 들고 오는 아내(30대 중반), 미순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다.
씬71 달리는 차안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하는 성수.
조수석의 아내, 핸드폰을 들고 다소 수다스레 통화하고 있다.
아내: 얘는..결혼 십년만에 겨우 집 한번 떠난거야. 것두 내가 몇달을 조르고, 협박해 서! ..낭마안? 흥! (사이) 아직 못정했어. 어디 좋은 데, 아는 데 없니? (사이) 잠깐. (밖을 본다) 경주 50키로..여보세요? 여보세요?(통화 끊겼는지 휴대폰을 끈다)
성수: (아내의 전화에는 전혀 관심없는듯 무표정하게 운전하는)
아내: 얼굴 펴요, 좀. 누가 봄 이혼수속 밟으러 가는줄 알겠네.
성수: 응? 응.. 라디오 좀 켜봐.
아내: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듯 한번 흘기고, 라디오 켠다)
라디오 스위치를 돌리는 아내.
몇번 다른 채널에 맞춰지다가 양희은의 '물새 우는 강언덕'이 흘러 나온다.
무심코 라디오를 돌리려는 아내.
성수: 거기, 거기 그냥 둬.
아내: 노래 한 번 촌스럽네.
성수: ....
무덤덤한 성수 위로 노래 계속 흐른다.
씬72 바닷가
차 세워져있고. 나와있는 성수와 아내.
아내, 먼 바다를 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 즐거운 표정이다.
성수, 차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워문다.
아내: 좋네. 당신, 여기 와본 적 있어요?
성수: ..아니
아내: 근데, 길 잘 찾네?
성수: 옛날에 그냥 한번 왔었어. 한번..
아내: (고개 끄덕이고) 응. 아...배고파라. 우리 점심 뭐 먹을까?
성수: 당신 좋을 데로 하지.
아내: (이미 익숙해 있다) 뭘 먹을까..매운탕 어때요? 이런 데 오면, 그런게 좋죠? 그 죠?
씬73 길
걸어오는 성수와 아내.
멀리 민박집이 보인다.
성수의 시야에 점점 뚜렷히 들어오는 민박집. 현대적으로 보수했지만, 옛 자취 가 남아있다. 성수, 잠시 멈칫 서서, 그 집을 바라본다.
씬74 민박집 마당
들어서는 성수와 아내.
아내: 아무도 안계세요?
성수: ...
부엌에서 한 여자가 나온다.
성수와 눈이 마주치는 여자, 미순(30대 중반)이다.
성수: (놀라서 할말을 잃은 표정이다)...
미순: ...(서서히 반가운 미소가 번진다) 어서..오세요.
씬75 동, 평상
평상 위에서 매운탕을 먹는 성수와 아내.
소반에 찬 등을 가져와 얹어주는 미순.
아내: (맛있게 먹으며) 아줌마 정말 양념 잘하신다. 맵지 않으면서, 얼큰하네.
성수: ...
미순: ...
아내: 이거 양념 어떻게 했나 좀 가르쳐줄래요? 다데기로 했죠?
미순: (웃고) 별거 없어요. 재료가 좋아서 그렇죠.(문 쪽 보면)
낚싯대와 광주리를 들고 들어오는 남자(40대 초반).
미순, 그리로 가서 남자 손에 들린 것을 받는다.
?이제 오세요? / 어. 몇 놈 안걸렸어.? 등의 대화.
남자,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성수, 미순의 남자를 바라다 본다.
씬76 민박집 앞
나와 서있는 성수.
안에서 밥값을 치러는 아내와 미순이 보인다.
미순, 성수에게로 다가온다.
성수, 발걸음을 옮기는데,
미순: 저.. 저 좀 보세요.
성수: (고개 돌린다)
미순: (손에 유성기가 들려있다) 이거, 가지실래요?
아내: 우리 이런거 필요 없는데.. 안 살래요.
미순: 아뇨. 그냥 가져가시라구요. 저흰 안쓰는 거라서요.
아내: 어머, 정말요? (반색한다)
미순: (아내에게 건네준다)
아내: 이거, 그냥 가져도 되요? 비싸지 않나?
미순: 아녜요. 저도 그냥 얻은 거예요. 그냥 가져가세요.
아내: 그래도 되나, 정말..
성수: ...
미순: (성수에게)예전에 제가 일하던 집 아주머니가 쓰시던 거에요. 젊어 가수였다구 하셨는데...무척 애지중지 하다 돌아가시면서.. 저한테 주신 거 예요.
상수: ! (눈빛이 흔들린다)
씬77 승용차 앞
차문을 여는 성수.
아내, 유성기를 가지고 조수석에 탄다.
성수, 민박집 쪽을 본다.
그 앞에 미순이 서있다. 고개를 끄덕이는듯한, 웃는듯한 미순.
성수: ...(차에 올라 탄다)
씬78 길(석양)
달리던 성수의 차, 한순간 급정거 한다.
운전대를 꽉 잡고 앞을 보는 성수.
의아하게 성수를 보는 아내가 창 안으로 보인다.
뒤에서 클랙션을 울리는 차. 창문을 열고 선글라스의 남자가 내다본다.
씬79 성수의 집, 부엌(다른날)
잘 꾸며진 실내.
성수,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거실에서 가구들을 닦는 아내가 보인다.
성수: (밥 먹으며) ..민이는?
아내: (보고) 과외 갔잖아요.
성수: ... 아..그래.
아내, 거실에 어울리게 자리 잡은 유성기를 닦으며.
아내: 이래 놓으니까 멋있네. 장식효과도 있고. 그죠?
성수: ...
아내: 어머, 누가 갖고오다 긁혔나. 손톱자국이 있네.
(인서트) 유성기에 어린 성수가 파놓은 홈이 있다.
아내: 흠..(닦으며) 락카칠 해야하나.. 근데 (혼잣말로) 이거, 손 좀 보면 소리두 나올 까? 보기엔 괜찮은거 같은데..
성수, 묵묵히 수저를 놀린다. 그 위로 '물새 우는 강언덕' 노래가 흐른다.
쿡, 울음을 터뜨리는 성수.
여전히 가구 닦는 아내.
소리를 삼키며 우는 성수의 모습에서. (끝)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