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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희(1948-1991)
더 먼저 더 오래 더 먼저 기다리고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기다리는 고통 중에 사라으이 의미를 터득할 것이요 더 먼저 달려가고 더 나중까지 서 있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서 있는 아픔 중에 사랑의 길을 발견할 것이요 더 먼저 문을 두드리고 더 나중까지 묻닫지 못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문닫지 못하는 슬픔 중에 사랑의 문을 열게 될 것이요 더 먼저 그리워하고 더 나중까지 그리워 애통하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그리워 애통하는 눈물 중에 사랑의 삶을 차지할 것이요 더 먼저 외롭고 더 나중까지 외로움에 떠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외로움의 막막궁산 중에 사랑의 땅을 얻게 될 것이요 더 먼저 상처받고 더 나중까지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상처로 얼싸안은 절망 중에 사랑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요 더 먼저 목 마르고 더 나중까지 목말라 주린 사랑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주리고 목마른 무덤 중에서라도 사랑의 궁전을 짓게 되리라 그러므로 사랑으로 씨 뿌리고 열매 맺는 사람들아 사랑의 삼보 ㅡ 상처와 눈물과 외로움 가운데서 솟은 사랑의 일곱가지 무지개 이 세상 끝날까지 그대 이마에 찬란하리라 죄인들과 식사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고 정희 시인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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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해물과 백두산이 원문보기 글쓴이: 아침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