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략)
.....
프랑스 최초의 살롱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
프랑스에서 최초로 살롱을 개장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랑부이에 후작부인이다. 그녀가 살롱을 개장한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로 그 당시 프랑스는 프롱드 난 등 40년 동안 지속된 내란으로 인해 사회적인 분위기가 몹시 험악한 상태였다. 프랑스인의 격렬한 기질은 좀처럼 순화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세련된 언행에도 진정되지 않은 기질이나 과장된 표현이 나타났고, 행동거지 또한 지나치게 격식에 치우치는가 하면 언어도 지나치게 재치를 부리는 경향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와 같이 격렬한 분위기에서 탈피하여 부드러우며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내면과 품위 있는 분위기 그리고 예절을 갈망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16세기와 17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유행을 생활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기운이 프랑스까지 북상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화된 에스파냐 역시 프랑스인의 사교적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랑부이에 부인은 이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고 궁정을 벗어나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살롱이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파리의 생토마 뒤 루브르 가에 위치한 저택을 새로운 기법의 건축술로 수리하고 단장하여 살롱을 열고 '청실(chambre bleue)' 또는 '규방(reduit)'을 꾸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랑부이에 부인은 완벽하고 순수성을 가진 예법과 고귀하고 건실한 정신에 재치까지 겸한 지적 분위기로 살롱을 만들고자했다. 클레오미르가 설계·개조한 살롱의 건물은 훌륭하고 개성미가 넘쳤으며, 넓은 홀에는 가구가 질서 있게 배열되었고 다양한 램프들이 걸려 있었다. 이 집은 마들렌 드 스퀴데리의 소설 『아르타메네스 또는 키로스 대왕』에서 '클레오미르의 저택(Plaais de Cleomire)'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현대적 건축구조로 저택을 개축한 후작부인은 이른바 사회적·문화적 의식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랑부이에 부인의 건물 개조가 주위에 알려지자 루이 13세의 모후는 곧 있을 뤽상부르 궁의 증축에 앞서 자신의 건축가를 그녀의 저택에 보내기도 하였다.
랑부이에 부인은 건물의 양 구석에 방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계단을 만든 이전까지의 상례를 깨고, 계단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 중앙을 넓은 객실로 만들어 사교와 파티장으로 활용하였다. 살롱은 가죽을 씌운 기둥이 사방에 세워졌으며, 벽은 온갖 색깔의 타피스리로 장식되었다. 따라서 실내는 초록색, 금색, 붉은색 등 신선한 색으로 흘러 넘쳐 사방의 꽃다발과 함께 '꽃의 축제'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산 화병, 중국산 도자기, 고대의 대리석상, 금·은 세공품들이 교묘하게 거울과 크리스탈 샹들리에에 비치도록 배치되었으며 촛불 빛은 살롱의 구석구석까지 부드럽게 비췄다. 또한 침실 벽안으로 침대를 놓을 수 있도록 벽을 우묵하게 파 들어간 '알코브(alcove)'를 만들었다. 이 '알코브'는 침대와 벽 사이의 공간과 함께 수면, 섹스, 기도하는 곳과 같은 은밀한 장소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식장이나 금고를 놓아 종이, 책, 귀중품을 두는 곳이기도 했다. 살롱의 중심이 아닌 벽면에 '알코브'를 만든 것은, 그녀가 '열 과민증'이라는 희귀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불기운이나 태양광선을 피해 주로 '알코브' 안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살롱의 실내는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여러 개의 등이 매달려 있어 밝은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각국에서 수집한 귀중품들이 진열되고 갖가지 꽃을 담은 화사한 꽃바구니들로 언제나 봄을 연상할 수 있는 분위기를 살렸으며, 향수를 짙게 뿌려 매혹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청실'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객실의 벽은 온통 푸른 빛깔의 벽지로 발라져 조용하고 아늑하게 장식되었다. 조용한 이 방에서 살롱의 여주인, 또는 '프레시외즈(재녀, precieuse)'가 특별한 손님을 맞이했다.
'프레시외즈'는 자신의 침실에서 휴식하고 침대에 앉거나 비스듬하게 기대서 혹은 누워서 손님을 접대했다. 여기에서 '규방(ruelle)' '은밀한 작은방(reduit)''내실(alcove)' 등의 말들이 유래되었다. 이처럼 주인 위주의 편안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 했는데도 살롱은 성황을 이루었다. 그것은 돈을 받지 않아 부담이 없었던 면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취향이 거의 유사하여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으며 대화를 통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정서를 함양하면서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긴 얼굴에 매부리코와 주걱턱을 가지고 있었던 랑부이에 부인은 예쁘지는 않았지만 '재녀'다운 면이 많은 딸, 즉 후일 몽토지에 공작부인이 된 쥘리와 앙젤리크의 도움 덕분으로 그녀의 살롱에는 단골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초기 문학 살롱의 특징과 손님들
이 당시 살롱에 드나드는 남성을 '재사(gens d'esprit)'라고 했다. '재사'는 세련된 취미와 교양을 갖춘 예의바른 '사교인' 즉 '오네트 옴(honnete homme)'이었다. 이들은 남을 즐겁게 하는 화술, 문장을 잘 쓰는 기술 그리고 태도, 교양, 재치가 뛰어난 사람들로서 '오네트 장(honnetes gens)'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들이 바로 계몽사상을 창출하고 전파하는 주역이 되었다. 장 데스프리(gens d'esprit)도 '오네트 옴'과 같은 의미의 '재사'이며 프랑스 17~18세기 살롱에 출입하던 문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시인 브와튀르가 말한 것처럼 당시 프랑스에는 정해진 시간에 발코니에 나타나는 방법 말고는 여성들이 남성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살롱이 생갸면서 상황은 달라졌고, 특히 그곳에서는 가정, 학교, 수도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사교문화와 토론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처름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자유롭게 즐거움을 찾았다. 그들은 무용, 만찬, 관극 등과 같이 궁중에서 즐기는 오락을 도외시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대화를 통해 교제하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생각을 내놓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므로 살롱은 일종의 '사교장'이자 지성인들이 모인 '사상의 거래소'였다.
피자니와 그의 아들, 몽토지에 후작, 사교계를 묘사한 다작의 여류작가 스퀴데리 양은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에서 주착을 이룬 핵심인물이었으며, 그 밖에도 이곳에서는 '오네트 옴'으로 이름난 브와튀르, 빨간 머리의 미모와 재치를 겸비해 귀족의 대우를 받았던 평민 출신 '멋쟁이' 폴레 양을 비롯해 왕족, 성직자, 법관, 작가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작가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재사'와 '재녀'의 자격으로 초대되었다.
한 번 살롱의 문객이 된 사람들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타계하는 등의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거의 바뀌지 않았다. 특히 처름 개장할 때의 문객들과 함께 아르모 드 코베르빌, 생 에브르몽, 라 로슈푸코, 자크 에스프리, 사라생, 장 샤플랭, 보위에 등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은 점점 인기가 높아졌다.
사람들은 식사 후 '소화시키는 시간'에 살롱에 갔다. 살롱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폴레 양의 훌륭한 비파소리뿐만 아니라 대단한 노래와 춤 솜씨를 감상했다. 또한 사람들은 '롱도(rondeaux)', 즉 수수께끼와 같은 단편 문학적 즉흥시에 심취되었다.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이 새로웠던 것은 종종 남자들과 여자들이 모여 그때만은 푱등하고 자유롭게 조금도 격식을 차리지 않고 즐거움을 위해서 각자 가지고 있는 지혜를 내놓고자 소박한 대화의 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후에는 그녀의 살롱에 생 에브르몽, 코르네이유, 말레르브, 라 로슈푸코, 세비네 부인, 라 파이예트 부인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작품의 낭독과 비평을 통해 우아한 예절과 세련된 취미를 길렀다, 따라서 이 모임은 조금도 학술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사교계 사람들을 지배하고 이끌어 갔다.
........ (중략)
사교문화의 장, 살롱
살롱은 원래부터 도시문화의 산물이다. 정치와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 생활의 중심지인 도시에서부터 살롱이 점차적으로 개장되었다. 17세기 후에 이르면 프랑스에서는 살롱의 수가 급증하게 되는데, 그것은 유행과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지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롱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선택된 지식인들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교제하는 지식의 아성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지성의 바람이 언제나 똑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곧 과학의 진보가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 1662년 초에 보쉬에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세계의 모습을 거의 모두 바꿔버렸다. 물론 이러한 진보는 주로 갈릴레이나 케플러 같은 천문학자, 수학자인 데카르트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대학은 여전히 교조주의와 자부심에 집착했고 따라서 자신들이 신성시하고 있던 고대인의 가르침과 모순 되는 것, 즉 최근에 발견된 것들을 적대시했다. 반면에 탐구정신은 새로운 이론을 논의하고 이들 이론의 저술가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주는 사적 모임에서 자라났다. 여성들에게는 과학적인 학문이 거의 배제되어 있었으므로, 그녀들의 호기심은 더욱 가중되어 물리학자, 천문학자, 의사, 기하학자들을 살롱에 초대하기 시작했다.
살롱이 처음 개장되었을 때는 젊은 여성들에게 진지한 학문이 금지되었던 시대로 주로 소설작품이 낭독되었다. 그러나 살롱에서 다루어진 소설작품들은 대부분 금서목록에 오른 것들이 많았다. 따라서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과 동떨어진 것, 불가사의한 것, 공상적인 것들이 가정에서부터 거론되어 공적 영역에까지 확산되었다.
18세기까지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여상들이 공적 영역에 있는 남성들과 함께 살롱과 카페를 통하여 대화와 토론의 광장을 활성화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문자 그대로 백화가 요란하고 문물이 융성하였으며, 파리만 ㅎ도 철학자임을 자처하는 인사들이 무려 2천 명을 헤아렸고 살롱의 수도 800개가 넘었다.
18세기 살롱은 1750년을 기점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개장한 랑부이에 부인의 문예 살롱이 18세기 초반에도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했으며, 화제의 주된 테마는 교화와 종교였다. 마리노는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에 드나들던 가장 중요한 단골손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라돈느(L'Adone)는 1623년 이탈리아에서 통용되는 시의 리듬을 살롱에서 발표하기 위해 장 샤플랭의 매우 논쟁적이고 서문을 가지고 이 살롱에 나타난 손님이었다. 당시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은 품위 있는 대중의 탄생과 판단력의 합리성을 격찬하고 선포하는 문학 이론에 대해 토론하는 장소들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랑부이에 부인의 살롱은 처음부터 귀족적이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도 데팡 부인의 살롱과 함께 여전히 프랑스의 귀족적 품위와 지성을 지키고 있었다.
로코코 문학의 특성도 교양 있고 재치 있는 귀부인들이 참석한 살롱에서 형성되었다. 살롱의 여주인들이 모두 문장가는 아니었으나, 그녀들의 대다수는 남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만한 지식과 예술에 대한 감각을 가진 교양인들이었다. 이탈리아 문학은 예술적이며, 스페인 문학은 기사도적이고, 영국문학은 개인주의적이었으며, 독일 문학은 관념적인 반면 프랑스 문학은 '귀족적이며 사교적'이다. 이 '사교적'인 문학이 살롱에서 '오네트 옴'과 '프레시외즈'들 사이에 흥미 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그 속에서 프랑스 근대 사상과 문화를 특징짓는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다.
한편 코저가 말한 것처럼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레스피나스 양의 살롱, 조프랭 부인의 살롱, 네케르 부인의 살롱에서는 귀족 출신에 대한 존경심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이들 살롱에서는 제3신분의 계몽사상가들이나 외국에서 건너온 저명한 중간계층의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 중 월폴, 흄, 기번, 프리스틀리 등은 살롱을 국제적 문화세계의 공간으로 형성하였다. 또한 이른바 아카데미라고 주장하는 도쉬 자작부인의 살롱에서는 그로티우스가 2류 급의 시인과 산문작가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대화의 계층이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버마스의 말과 같이 프랑스의 살롱은 지위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지위 전체를 도외시하는 일종의 사회적 교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한 코생의 말과 같이 프랑스의 살롱 출입자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 18세기 초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적·인도주의적 우애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회원들처럼 당시 집단적으로 발생한 진리의 신개념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들이었다.
........ (후략) 살롱문화 - 서정복 작. <살림 지식총서>
롤플레잉 시 종종 등장하는 살롱에 대한 괜찮은 내용이 있어서 발췌해서 올려놓습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