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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1
눅 23 : 27-31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성경을 읽다보면 주님의 속마음을 알아 맞추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마16, 21-24에서 ‘주님이 많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스승과 제자간에 따사로운 정이 흘러 넘쳐 보기에 참 좋다. 만일 저와 같은 상황이 지금 시대에도 똑 같이 일어난다면 우리들 역시 베드로처럼 주께서 그 길을 가시면 안 된다며 극구 만류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무엇이라 하실까. 아마 베드로에게 하신 것과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 같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사려가 깊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많은 상념들로 서로 뒤엉켜 반응한 후에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되었는지 마음속 그 동기를 따지지 않고 그저 표면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신에게만 무게를 두려 한다. 하지만 마음의 진실은 그 깊은 속에 자리하여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람들 거의가 속과 겉이 일치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지만 저 세상에서는 그런 위선이 허락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악한 자가 아무리 그 악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싫어 이를 벗어나려 해도 이미 악으로 굳어진 자기 마음에 반하는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징조는 이 세상 삶에서도 이미 맛보고 있는데 우리가 악인 줄 알면서도 그 악을 멈추지 못하며 회개를 하고 싶어도 회개가 되지 않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끔찍이 염려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유익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이다. 그럴 때의 우리 마음의 실체는 선이라는 포장지에 싸여진 탐욕일 뿐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할 때 주님은 그 속에서 빛으로 가장한 사단의 탐욕을 보시고 이를 책하셨다. 그 동안 주님을 곁에서 따라다닌 베드로는 물론 다른 제자들 모두 제 욕심을 채워줄 대상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주님의 안위를 걱정하여 충정으로 간한 듯 보이지만 정작 베드로가 염려한 것은 주님이 아닌 자신의 안위였다. 만일 일이 잘못되어 주님이 저들의 손에 무능력하게 죽으면 그 동안 집과 정든 고향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온 자신들이 얻을 세상 영광은 주님의 죽음과 함께 헛된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되는 이유였고 또한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이 주님을 열렬히 추종해온 동기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이 적어도 그러한 목적 하에 겉으로는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주님이 흥하면 그들도 흥하고 주님이 망하면 그들도 망하는 한 운명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때때로 주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이해 못할 말씀만 빼고는 주님을 따르는 일은 그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며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따라가는데 그들처럼 신이 나지 않을 자가 누구겠는가. 우리 앞에서 그러한 기적들이 행하여져 보라. 모두들 제 목숨 바쳐 주님을 따르겠다고 아우성칠 것이다. 그러한 능력의 주를 향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고백을 드리려는 자 어찌 베드로뿐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한계이다. 주님은 우리를 돌보실 능력이 있어야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사랑과 은혜를 우리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셔야 비로소 우리의 높임을 받으실 수 있다. 그렇기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사랑은 오히려 우리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결과만 낳는다. 주님이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품은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말씀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조금이라도 주님에게서 발견하여 그것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르며 그분을 섬긴다면 그러한 믿음과 사랑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그 목적 어딘가에 흑심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웃 관계에 적용시키는 데는 익숙하지만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적용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도 그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과 은혜 받는 것을 우선시 하는 신앙 풍조 때문이다. 그것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무능력해진 인간에 먼저 은혜가 임해야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다분히 인간의 자율성이 무시된 신학 사상에 은근히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교리가 겉으로는 성경적인 것 같으나 기실 그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먼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영육 간에 은혜와 평강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본 후에야 믿을 수 있다는 생각과 같고 또 그런 대답은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 역시 남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 받을 짓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평소의 자기 중심적 사고 곧 자기를 첫째 자리에 놓은 채 주님 섬김을 소홀히 하던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또 그러한 시각은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세상살이가 힘들 때 위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보면 주님은 은혜나 한량없이 베푸는 분으로 보이고 이와는 반대로 내게 말씀하옵소서 내가 들으리이다 라며 주님의 계명을 우러르는 자세로 성경을 대하면 주님은 죄의 극악함을 깨닫게 하여 이를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폐부에 새겨주시는 분으로 그 속에 나타나신다.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만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그것이 내게 유익한가 그렇지 못한가의 관점으로 대하기에 그들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못한다. 이웃과 세상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주님까지 또는 진리의 말씀까지 그런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기에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이 홀로 약하여 고민할 때 도와주는 신으로써만 환대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황송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은혜는 죄인에게 거저 내려지는 선물이라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탐욕에 빠진 우리들의 눈에 의해 성경이 잘못 해석되어진 결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 값없이 내려지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죄인이 죄를 버리지 않은 채 그 은혜를 받으면 그것은 영혼을 썩이는 독약과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은혜가 죄인에게 거저 주어진다는 말씀만을 주목하기에 죄를 버리지 않은 채 그 은혜와 사랑을 찾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이 무상으로 내려질지라도 죄를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에게 전달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상태에서는 우리 마음에 탐심만 더욱 쌓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죄를 버리지 않고 은혜만을 탐하려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피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해 당당히 취해지는 성격의 은혜만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못 얻는 자가 믿음 없는 자요 눈앞에 갖다 주어도 제 것조차 찾아 가지지 못하는 자가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죄를 버리지 않고 피 공로의 은혜를 얻는 것 자체가 바로 독약을 먹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각이 이러하기에 은혜와 사랑을 공급하지 못하는 신은 더 이상 신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듯 환호 받지 못한다. 성경에 나타난 주님 역시 영혼이 악을 버리던지 버리지 않던지 그런 것은 관계없이 인간 생활의 어려움을 이모저모로 도와주거나 아니면 피를 흘린 대가로 죄인에게 거저 얻는 은혜나 부어주실 수밖에 없다. 이처럼 죄인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악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 깊숙한 데를 점령하여 더욱 그들의 탐욕만 가중시키고 있다. 게다가 그 은혜와 사랑은 나약하고 게으른 자들의 세상적 염려마저 도맡아 처리해주어야 한다.
흔히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를 할 때 이 세상은 홀로 살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니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어려움은 물러가고 평화가 찾아온다며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당연하게 서두로 꺼낸다. 물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께는 그것이 어떤 면으로는 슬기로운 초대의 방법이리라. 그러나 도움을 주는 신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욕망만을 부추기며 날이 갈수록 더 강하여져 모두들 은혜와 사랑, 그리고 복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만을 영광과 찬송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찬송과 기도의 주된 내용들을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한없는 사랑과 은혜로 살리신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등 은혜와 사랑을 드높이는 찬양 일색이다.
기독인들을 감동시키는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있다. 그 근원으로부터 모든 은혜와 사랑이 파생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십자가를 아주 아름답게 포장하고 높이는 고백을 하게 된다. 물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처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감동을 입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이 가능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거저 얻었는데 어찌 그만한 감동이 없겠는가. 이 세상 주님 외에 그 누가 저를 위해 대신 목숨을 버림으로 죄를 벗겨주고 천국을 품에 안겨줄 수 있겠는가. 그러한 눈이 주님의 십자가에 고정될 때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두들 주님을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십자가 위 대속의 죽음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 고난의 길을 가신 주님이 고마와 머리 조아리며,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을 맞으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에서는 얼마나 아프셨는지를 생각하며 눈물로 가슴아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그 달콤하던 곳을 벗어 나와 냉혹한 현실로 돌아오면 주님을 돌아가시게 한 그 악은 여전히 살아 우리 앞에 활보 치고 있다. 그때의 열정적인 감사와 환호는 허공의 빈 메아리가 될 뿐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의 마음이 이중적일 수 있을까. 어느 것이 우리 마음의 진실인가를 참으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이런 우리의 연약을 짊어지고 주님 홀로 고난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냐고, 그러기에 그분만이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 신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것만은 숨길 수 없는 바 곧 악을 버리지 않으면 그때 그 눈물과 감격이 아무리 가슴 벅찬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것은 진실한 우리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자아 사랑에서 나온 인간적인 감각과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가 주님을 향해 눈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죽음이 내 구원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감각과 감정은 이렇게 우리를 속이기 일쑤여서 이들에 붙잡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유익이 있는 반면 해도 따르기 마련이다.
물론 연약한 육체로 사는 인간이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다. 누구나 고통을 당하는 것에 초연해질 사람은 없다. 심지어 남이 고통을 당하는 것조차 그것을 내 고통인양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믿음이 큰 자들은 십자가 고난의 장면을 생각하면서 그 고통을 자기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려 애를 쓴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씻어 구원을 주기 위해 주님이 그런 고통을 당하셨다고 여기니 더욱 주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나아가 인생에 여러 어려움이 닥칠 때면 우리는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며 이에 힘을 얻어 그 역경을 잘 견뎌내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고통을 사람들이 함께 괴로워하며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시지 않는다. 또 그 사건을 높이기를 원하신 것도 아니며 이 글 처음에 인용한 성경 말씀에도 있듯이 주님을 위해 사람들이 울어주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높이는 이면에는 세상 영광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이 숨어 있어 그 순수성이 흠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죽음으로 사람들 속에 거하는 악의 극악함을 깨닫게 하여 그 악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님의 피 공로에 의한 구원에 도취되어 자신의 죄를 버릴 생각을 하기보다는 저를 위해 해 받으신 주님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높이고 또 높인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을 아니 하실 수 없다.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정이라면 주님의 육체적 고통을 마음 아파하며 그 사건을 높이기보다 계명을 따르지 않는 악을 먼저 끊으리라.
주님을 좇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십자가 앞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주님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 하기보다 죄를 먼저 끊어야 한다. 죄를 끊치 않는 상태에서 주님의 고난을 가슴 아파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높이는 것은 무언가 불손한 동기가 포함되어 있어 그 마음이 진실하지 못함에 틀림없다. 겉으로는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위하는 듯 슬픈 기색을 하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고 그 고난으로 이루어주신 구원의 감격이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던가. 죄를 버리는 것보다 구원을 누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이기에 가히 은혜 위에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먼저 눈물이 흐른다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조금은 자랑스러이 그런 증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그런 주님의 고난이나 그 고난을 통해 얻은 구원이라는 은혜의 감격보다 우리 죄를 버려야 한다는 회개가 그 진정한 의미이다.
거듭 말하지만 십자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육체적 고통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신앙을 아직 감각과 관능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감각을 의지하여 신앙 생활을 하려 할 때에는 자칫 육체의 교묘한 유혹에 말리기 쉽다. 이는 육체가 거짓을 진실로 꾸며내기를 잘하는 까닭이다. 육체는 그가 고통을 당할 때는 항복하듯 자지러지지만 일단 그 위기를 넘기고 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식으로 예전의 악습을 되풀이하고야 만다. 또 육체가 감동을 입을 때는 앞 뒤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이룰 능력이 속에 있는 양 그저 돌진하다가 작은 어려움만 나타나도 그만 쉽게 포기하고 만다. 결국 감각에 의한 것은 이처럼 믿을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감각적인 눈으로 사물들을 바라볼 때는 자기 육신의 즐거움과 평안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만일 그런 눈으로 주님과 진리의 말씀을 대하면 몸 버리고 피 흘려 우리를 위해 고난을 자초하신 주님께 대한 감사의 격한 감정이 이성을 사로잡아 그것이 마치 신실한 신앙인양 행세를 하게 된다.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신 주님만 생각하면 괜시리 코끝이 매워지며 눈물마저 솟아 나오는 것은 사실 우리 감정의 일시적인 변화일 뿐 그것이 신앙을 형성하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 그 눈물이 참 신앙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 주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삶밖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다. 주님을 향한 인간의 감정이 아무리 간절할지라도 그것이 삶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거짓과 위선으로 판명될 뿐이다. 주님의 따사로운 인격을 좇아가는 신앙은 풍부한 감정을 자극하여 더욱 사랑스럽고 그 친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나 그 감정이 걷히고 현실로 돌아서면 곧바로 주님을 부인하는 삶으로 돌아갈 위험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주님께 보살핌을 받는데는 익숙하지만 계명을 따라 섬기는 데는 전혀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순수한 눈은 선과 진리 그 자체가 좋아 반가워하는 눈이다. 선이 좋아 선을 사랑하고 진리가 좋아 진리를 받아들이기에 이런 신앙은 은혜와 사랑을 먼저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육체의 감각에서 비롯하지 않고 영혼에 쌓여진 선에서 연유하기에 이웃 속에 있는 선을 반기며 자신의 유익을 따지기 전 먼저 이웃을 사랑과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그를 위해 무슨 유용한 일을 행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이러한 눈을 가진 자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엇을 베푸는 분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 전 마음을 드려 섬겨야 할 분으로 하나님을 인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야말로 선과 진리 자체이시며 홀로 생명이시기에 그분에 대한 존귀함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평상시 고백하는 그분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며 그분을 우리의 하나님과 우리의 그리스도로 믿고 사랑한다는 표현 등은 모두 선과 진리로서의 주님을 섬기는 것 곧 계명을 지키고 따른다는 의미 외의 다른 뜻이 될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제일 먼저 갖추어야할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비록 지적인 신앙고백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계명을 받아 그 계명대로 따라 사는 삶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들어와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그의 계명을 따라 사는 이 한 가지이다. 왜냐하면 생활 속에 사랑의 삶을 살지 않은 채 관념으로만 머무는 하나님의 존재는 언제라도 상황이 불리하면 지워버릴 수 있는 상상 속의 형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선과 진리이시고 우리는 그 선과 진리를 받는 그릇에 불과하기에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사실 그분으로부터 온 것이고 그분 자신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진리를 알고 진리에 따른 선한 생활을 하는 자만이 그분의 생명을 받아 부활에 이른 자가 아니겠는가. 또 이로써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약한 시력은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한다. 비록 지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다고 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듯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같이 음탕하여 인간을 구원하고 돌보며 섬기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사랑과 은혜를 베풀기 위한 분이기 이전에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귀하게 섬겨야 할 분이라는 인식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또 주님과 가까이 결합하고 교통하며 임재를 느끼고 동행하는 삶을 살며... 이 모든 신앙의 여러 요소들이 계명을 따르는 삶이 없는 어떤 추상적인 관념 속의 감미로움이나 따스함, 그리고 감각적 신비함을 뜻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 속 생각으로 있기만 하거나 또 입술로 외치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계명을 따라 사는 사랑의 삶 자체에 의해 그 실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한 주님과의 결합이나, 교통, 임재 등이 헛된 공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에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가운데 그 속에 나타나신 주님과 결합하고 교통하며 그분의 임재를 느껴야 한다.
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위와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순수하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기뻐 반길 때 자아를 위한 어떤 이기적인 동기를 제거하면 할수록 그것은 주님을 향한 참 믿음이요 참 사랑이 된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과 은혜를 공급하였기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태도는 보다 순수하지 못하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지 않았을지라도 또 그분이 우리 생활의 여러 걱정 근심들을 해결해주지 않으셨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따라 경배를 드려야 하는 것은 그분은 그 자체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선과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여 존귀를 드리는데 무슨 이해득실을 따질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주님의 대표적인 말씀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대할 때 영혼이 순수한 사람은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그저 합당하기에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 그가 주님의 말씀을 받드는 이유는 주님이 먼저 저를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었기에 이에 감격하여 이제 저도 돌이켜 주님의 계명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생각이 언뜻 보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주님과 연결된 사랑의 끈이 상대가 내게 행한 유익에 좌우되고 있다면 그 사랑은 언제인가 깨어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간절히 사모하는 까닭은 먼저 은혜와 사랑을 받음으로 이에 감격하여 악한 자신의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자기 생각에 속지 말자. 왜냐하면 먼저 악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받는 은혜와 사랑이 온전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그런 눈으로 대하는 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으로 전락되게 하는 악한 짓인 것이다. 이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그 은혜와 사랑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며 단지 만물을 자신에게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로 바라보는 탐욕에 젖은 인간의 눈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자꾸 선과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어려움과 약함을 보살펴주는 사랑과 은혜의 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 한다. 그만큼 욕망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성경 말씀이 온통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들로만 읽힌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빠진 자는 설령 하나님을 위해 크나큰 일을 할지라도 은연중에 자기가 행한 사랑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한다. 주님이 먼저 죄에 물든 자신을 건지기 위해 생명을 버리셨으니 이번에는 저도 생명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는 또 주님이 그 보상으로 높은 천국을 상급으로 주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이지만 그 속은 은원 관계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모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지음을 받은 사람 사이에는 만일 인간 편에서 스스로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으로부터는 끊임없이 순수한 사랑이 영원히 공급될 뿐 그런 주고받는 식의 은원 관계에 의한 결합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은혜 뿐 아니라 전 섭리의 성격인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 역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은원이나 보상의 차원이 아니다. 그런 식의 심판은 이기적인 사람들간의 일이지 순수한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께는 어울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를 미워하여 그를 지옥에 보내는 신이 아니다. 반대로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산 자를 더 사랑하여 그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천국을 하사하는 신도 아니시다.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선인은 물론 악인도 사랑하시는 차등이 없는 하나님의 본질을 오해한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자신의 눈에 드는 귀여운 아이를 사랑하고 마음이 덜 내키는 아이에게는 친근함도 덜해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만 사랑하는 그런 이기적인 성격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여 도망칠 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인간이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을 맞아들이도록 항시 인간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순수하여 인간의 열악한 상태에 좌우되지 않는다. 만일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기에 그리 되었을 뿐 하나님이 그의 악을 보고 그를 멀리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들도 자신과 같은 순수한 사랑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도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영혼은 하나님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삶은 감격에 겨운 뜨거움이 덜하고 겉으로 드러난 감사할 일들도 그리 크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신앙이 주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여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려는 소위 뜨거운 신앙보다 질 차원에서 열등하다고 판명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영혼의 참 생명은 오랜 시일을 두고 그 영혼이 거치는 여러 시험들을 통하여 조금씩 악이 물러나고 선이 자리하는 과정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받은 은혜를 깨닫고 이에 감격하여 사람이 획 변하여진 삶을 사는 것은 비록 그것이 외적으로는 큰 선의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랑은 평범한 사람이 그 일상의 삶 속에서 나타내던 작지만 순수한 사랑에 비해 질이 훨씬 떨어지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스스로 악을 하나씩 물리치며 형성된 사랑은 그 영혼의 샘에서 절로 솟아나는 물과 같으나 받은 은혜에 의해 급조된 사랑은 외형은 크고 그 열기는 불타오를지라도 대개 그 자신의 영혼에서 비롯되지 않은 외력에 의한 충동적인 것이기에 그 외적인 요소가 사라지면 그러한 사랑도 꺼지게 된다. 이와 같이 받은 은혜에 편승한 사랑이 종국에 일시적 사랑으로 끝나기 쉬운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아 사랑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사랑의 되돌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랑도 잘 가꾸면 질 좋은 순수한 사랑으로 발전될 수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한 채 지나간 과거의 은혜를 간증하는 데만 떠들썩하게 하고 지나간 첫사랑의 여운만을 추억으로 간직케 할 뿐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과 같아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이 그 영혼의 순수한 생명을 이루는데 공헌하기는커녕 오히려 탐욕을 부채질한 격이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제일 우선하는 것이라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은혜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인 것들이다. 따라서 순수하고 좋은 눈은 주님을 먼저 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눈이다.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죄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그분의 피로 베푸는 사랑과 은혜에만 도취되어 감격하는 것이 오늘날의 믿음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죄의 극치를 보여주기에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자기의 마음속에서 악을 버려 영혼의 병을 고침 받아야 하는데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 무슨 영험한 힘이 나와 영혼에 가득하던 죄가 일시에 제거되는 식으로 보혈의 피를 믿고 있다.
한편에서 주님은 우리가 행한 악으로 인해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시는데 그 앞에 선 우리는 그분이 흘리신 피로 인해 구원을 얻었다고 감사하며 찬송한다. 물론 말로는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슬퍼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거짓된 마음인 것은 주님을 죽게 한 죄, 진리를 모독한 그 죄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만 감격하며 기뻐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신랑이 신부에게 있던 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 신부가 진실로 신랑을 사랑한다면 신랑을 죽게 한 자신의 죄를 미워하며 이를 원수로 삼아 몰아내야 함에도 어찌 신부는 신랑의 죽음을 옆에 두고 이제 내가 산 것은 신랑의 죽음 때문이라며 감격에 겨워 신랑의 죽음을 높이고 앉아 기뻐하겠는가. 신랑을 다시 살리는 길은 신부가 이제라도 돌이켜 자신의 죄를 버리는 길이고 그리할 때 신랑은 다시 살아 신랑과 신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신부 속에 있던 악이 물러가야 그 속에 신랑이 자리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부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거짓된 소문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는데 이는 악을 버리는 것은 힘이 들고 고생스러우니 차라리 죽은 신랑의 시신 앞에 언성을 높여 곡하고 그의 업적을 잘 기리면 죽은 신랑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과연 신부의 철썩 같은 믿음에 의해 죽은 신랑은 다시 살아나고 성대히 혼인 잔치를 치루었지만 신부의 마음 한편은 여전히 남아 있는 죄로 인해 심기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것이 지금의 교회와 주님 사이에 이루어진 혼인의 상태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여전히 나타나는 죄를 보며 그 구원이 혹시 엉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살얼음판을 지나는 것과 같은 염려 속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죄를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의 여러 부분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로 그 의심을 잠재우며 또 이미 구원을 얻은 자가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에서의 상급 때문이라는 절묘한 논리를 세워 흔들리는 믿음을 바로 세우려 한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거짓된 교리를 물리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히 붙잡아 주는데 사용될 뿐 그 본래적 기능인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구실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은 신랑의 장례절차에 대한 신부의 지극한 정성으로 신랑이 다시 살아났으나 어리석은 신부가 살려낸 신랑은 참 신랑이 아니다. 참 신랑은 신부가 악을 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랑 되시는 주님을 죽인 악을 버릴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주님을 잘 모시기 위해 계명을 따라 선한 삶을 살 때 주님과 우리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참 신랑이 살아나지도 않았는데 혼인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믿음이다. 성경 말씀을 얕은 인간의 감각에 의해 풀은 결과 입술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 순간부터 그냥 구원을 얻었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일이 너무나 쉬워 가끔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지만 그때마다 그냥 덮어두려 애를 쓴다. 왜냐하면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기에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의 피 공로를 믿고 시인하기만 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어찌 올바른 믿음일 수 있으랴. 죄는 인간이 저지르고 그 뒤치닥거리는 주님께 맡겨 인간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손쉽게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어찌 음탕한 생각이 아니며 허구의 교리가 아니겠는가. 성경을 그렇게 해석한 자들이나 그 교리를 좋아서 받아들인 자들이나 모두 음탕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러하다면 과연 그것이 옳은지 아니면 그른지 모두들 한 번쯤은 돌이켜 의문을 품어봄직도 하건만 그저 남들이 그렇게 믿으니까 자신도 따라 그렇게 믿는 것을 신앙에 고집을 피우지 않는 겸손한 자세로 여기고 있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이기적이면 자신의 죄를 주님으로 감당케 하여 주님은 고난을 받는데 우리는 그 일로 인해 내 죄에서 벗어났다는 터무니없는 교리를 아무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주님이 흘리신 피 공로를 의지하며 이 사실을 믿고 시인하기만 하면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신학자들의 머리 속에서 쓰여진 저주받은 각본이다. 주님을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에 어이 탐욕이 가득하다고 비난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잘 생각해 보라. 나를 사망에 빠뜨린 것이 죄라면 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은 그 죄를 버리면 된다. 너무나 간단한 이 회개의 원리를 성경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으로 구약에서부터 줄곧 가르치고 있는데 탐욕에 젖은 우리들은 성경을 각색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은 힘들고 어렵기에 그저 손쉬운 방법으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니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다는 구절이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들은 자꾸 눈에 들어오지만 계명을 지키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자만이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는 말씀들은 애써 자꾸 외면하게 된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 속에 있는 악이 주님을 배척한 사건일 뿐이어서 그 사실을 믿거나 인정하는 자에게 무슨 특효한 약의 효능처럼 죄를 사하여주는 그런 능력이 있는 신비한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 악의 극치를 보여줌으로 그로 인해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한 삶을 살아 주님의 가르침에 돌아가도록 하려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신 것이다. 사실이 이와 같기에 그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간 자들은 거꾸로 이제 그러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가혹한 훈련이 있어야 자신의 탐욕의 눈을 제거할 수 있겠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합당하지만 죄를 지닌 채 십자가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산을 세우는 것인지, 심판 날에 그렇게 세워진 산으로 도망을 하려한들 그 산이 어린양의 진노에서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 여기 어린양의 진노가 가리키는 뜻은 인간이 그 지닌 악한 상태 그대로 굳어져 도저히 돌이켜지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피 공로에 의한 의의 전가로 구원을 거저 얻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고 그 피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케 하며 그분을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모든 증언들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말씀들의 참의미가 우리의 삶이야 선하든 악하든 이런 것에는 상관없이 구원은 오직 주님의 속죄 피를 믿는 것으로 획득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피는 생명 그 자체로서 주님의 피는 우리 영혼의 생명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키는 말이다. 피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또 주님이 피를 흘리는 것은 진리의 빛으로 세상에 생명을 주려던 주님이 사람들의 악과 거짓에 의해 거부되고 모독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라. 인성을 입으신 상태에서의 주님의 피도 인간의 피와 같은데 거기 무슨 특출난 효험이 있어서 그 피를 믿기만 하면 그것이 인간의 죄를 씻어줄 수 있겠는가. 또 그 피의 의미가 넓은 의미로 주님의 죽으심을 상징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죽으심 그 자체가 우리의 죄를 씻어 도말한다는 것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믿는 것은 공상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주님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그 피가 생명을 주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에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가르침을 받으면 그 진리가 우리의 더러운 영혼을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할 수 있다는 의미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죄 씻음과 죄 사함은 영혼이 실제적으로 죄성이 소멸되어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말할 뿐 그것을 무슨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선언이나 판결과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또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간다는 표현은 단지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오히려 멸시하고 거부하며 때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바라보기도 하면서 줄곧 진리로 오신 주님을 모독하는 악이 주님에게 가해지는 것을 그리 말한 것이다. 이것이 신적 진리이신 주님이 인간의 악에 의해 해를 당하신 일이며 그분이 당하신 고난의 정체인 것이고 주님이 고통스럽게 여기신 주된 이유인 것이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http://cafe.daum.net/talchulha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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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이 너무 길어 죄송~~ 특정한 분께 올려지는 글이 아닌만큼 읽고 싶으신 분들만 읽으시기를... 글이 길면 지루한 감을 주고 시간을 많이 빼앗아가는 측면이 있는 반면 자신의 생각을 보다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 글쓴이의 의중을 잘못 읽는 것을 방지해주는 측면이 있기도 한다네요. ㅎㅎㅎ
감사히 잘 읽었습니더. 2편은 나중에 다시 읽어야겠습니더. 오늘과 내일은 바빠서 댓글을 달 수 없을 것 같구 시간 날때마다 짬짬이 댓글을 달아보더록 하겠습니더.^^;;
저는 냄푠과 동침하여 두 아이를 낳습니더. 근디 울 아이들이 저의 가르침을 안따른다고 하여 지 아이가 아닐까유? <===요로콤 생각이 떠오른 것들이 있으면 댓글들을 달겠습니더. 지금은 마음이 바쁘니께 댓글도 안써지네유.^^;;
그람 동침하여 낳은 자식과 동침하지 않고 낳은 자식과 차이가 있을런가유? 아무튼 글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더..^^;;
그람 마리아가 간통??? 쿠쿠쿠^^*
J_카타리나 님께서<저는 냄푠과 동침하여 두 아이를 낳습니더. 근디 울 아이들이 저의 가르침을 안따른다고 하여 지 아이가 아닐까유?> 이렇게 쓰셨는데 제가 올린 글 어느 부분과 연관하여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정작 글이 길고 내용도 많아 어느 부분을 배경으로 쓰신 것인지 글을 쓴 저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평화~
엄기욱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계명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저는 계명을 떠나 씨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와 "사람에게서 난 자" 이게 우선 되어야 계명도 있고 악의 버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엄기욱님이 이 글을 쓰셨을 때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에 포커스를 두었다 생각합니다. 저 역시 글을 쓸 때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을 포커스를 두고 쓰거든요.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 중에는 막 태어난 아이도 있을테고 (육은 어른일 수도 있지만) 걸음마 하는 아이도 있을 테고 어린아이, 청년, 장년, 노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잘 지키지 않는다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혹여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아버지께 꼭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제일 먼저 갖추어야할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비록 지적인 신앙고백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계명을 받아 그 계명대로 따라 사는 삶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은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요 글 ^^*
네,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댓글 중 두 가지 설명을 듣고픈 것이 있는데... <물론 저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혹여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아버지께 꼭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만일 어떤 이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분명하다면 그는 혹 잘못된 삶을 살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어있다라는 뜻인가요?
또 하나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 중에는 막 태어난 아이도 있을테고 (육은 어른일 수도 있지만) 걸음마 하는 아이도 있을 테고 어린아이, 청년, 장년, 노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잘 지키지 않는다하여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내용과 요일 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는 구절과는 서로 상반되는 뜻으로 제게 받아들여지는데 이에 대해 카타리나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어쩌면 여기서도 <하나님에게서 난 자>가 과연 어떤 상태의 사람을 지칭하는지가 먼저 밝혀져야할 것 같네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제일 먼저 갖추어야할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저 역시 이렇게 생각하지만 갓난 아이부터 어른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계명이 우선이 되면 하나님에게서 난 자와 사람에게서 난 자의 차이점이 없지 않을까요? 물론 사람에 대해 차이를 두어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에게서 난 자와 사람에게서 난 자와는 다름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막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일견 보기에도 이 말씀을 따라지키기는 정말 힘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말씀은 영적으로 어리든 성숙하든 상관없이 듣는 이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닌지요?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 제일 먼저 갖추어야할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라는 제 주장도 마찬가지라 생각되어지고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사랑과 은혜를 베풀기 위한 분이기 이전에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따라 삶으로 그분의 이름을 귀하게 섬겨야 할 분이라는 인식이 우위에 있어야 한다."<==== 이 글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계명이 있었는가? 하고요...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부모가 자신들을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다 압니다. 심지어 갓난아이조차도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저 사람이 날 이뻐하는지 안하는지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계명이 우선이 아닐 거라 생각하지요.
아주 오래 전 예전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 간에는 성품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지금의 사람들은 예전 사람들과는 달리 선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지 아니하고 먼저 진리를 듣고 배움으로부터 선한 애정을 형성하게 됩니다. 물론 아이들에게는 주께서 주신 순진무구의 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순진은 무지의 순진이기에 완전한 순진은 아닙니다. 때문에 그들은 점차 자라며 주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눈을 뜨고 지식을 배워 점차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어서는 그들이 배우고 경험하며 기억에 저장해둔 지식들을 통해 무지의 순진 대신 지혜의 순진을 형성해야 하는 것이고요.
엄기욱님,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는 엄기욱님의 글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다만 글을 읽고 떠오르는 저의 생각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스스로 악을 하나씩 물리치며 형성된 사랑은 그 영혼의 샘에서 절로 솟아나는 물과 같으나 받은 은혜에 의해 급조된 사랑은 외형은 크고 그 열기는 불타오를지라도 대개 그 자신의 영혼에서 비롯되지 않은 외력에 의한 충동적인 것이기에 그 외적인 요소가 사라지면 그러한 사랑도 꺼지게 된다. 이와 같이 받은 은혜에 편승한 사랑이 종국에 일시적 사랑으로 끝나기 쉬운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자아 사랑에서 비롯된 이기적인 사랑의 되돌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콩깍지 사랑은 곰방 식어 버리거든요.^^*
헉~댓글하나가 날아가 버렸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라시나 봅니다.^^* 또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댓글을 달겠습니다. 오늘도 주님과 동행하시어 건필하소서!^^*
그저 각자의 생각을 기쁨으로 나눌 뿐 오해는 없습니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을 나눌지라도 표현이 거칠지 않고 상대를 공격하며 일방적으로 꾸짖는 분위기만 형성하지 않는다면 오해살 것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설령 서로 상대의 생각에 설득당하기를 원치 않을지라도 양측은 기분좋은 대화로 끝마치게 되지요. 평화~
엄기욱님, 제가 님께 말씀드림은 저의 생각이 확고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읽고 내려가면서 문득 스치는 생각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오니 제가 드리는 말씀에 마음 쓰지는 말아주세요...저 역시 말씀드리고 나면 또 그것에 대해 묵상하고 성경말씀 드려다보고 하나님께 여쭤보기도 하고 그런답니다.... 하오니 제게 어떤 답을 듣고자 하지는 마시와요.^^* 물론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은 답을 드릴 것이오나 제가 시간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답을 드리지 못할 때도 있음을 양해바랍니다.^^*
저도 J_카타리나 님의 카페에 드나든지 여러 날이 되기에 카페지기님의 성품이나 특성, 처지 등을 웬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 염려하지 마시기를...
네,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댓글 중 두 가지 설명을 듣고픈 것이 있는데... <물론 저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면 반드시 하나님 뜻대로 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혹여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아버지께 꼭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만일 어떤 이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분명하다면 그는 혹 잘못된 삶을 살아도 언젠가는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어있다라는 뜻인가요? <== 사실 이 것에 대해서는 저 역시 "네"라고 답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믿다가도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어진 부모님께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잘못된 길로 빠질 확륙이 적을 거라고. 하지만 어진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도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친구를 잘못 사귄다거나 세상적인 쾌락에 빠진다거나 주변 환경적인 요인으로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을테니까요..하지만 어진 부모에게 가르침을 잘 받았다면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부모의 인도함을 받고 부모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서 낳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라면 잘못된 길로 확률은 적을 것이며 설혹 미혹에 넘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육신의 부모처럼 자녀를 인내롭게 인도하실테니까요....물론 아직 이 것에 대한 생각도 확실하게 얻어진 건 아닙니다...^^;;
마 4:5-6을 보면 "마귀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구원할 수 없을진대 하물며 인간이 가진 어떤 조건이 그 영혼의 안전보장이 될 수 있으리요? 오직 그 자신이 주님의 힘 주심을 의지하여 항시 죄와 싸워 그것을 물리치고자 노력하는 것 외에... 이런 주님은 너무 삭막한가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우리 인간편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는 지적인 자만심이 어느새 마음을 사로잡아 성전 꼭대기에 자신을 올려 세우고 설령 거기서 떨어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리라는 거짓된 확신에 유혹당하는 것입니다. 이를 인성을 입으심으로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편에서 생각해보자면 당신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아래로 뛰어내릴 경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물론 그 외에 그에게 속한 어느 특별한 의로도 그분을 구원해낼 수 없음에도
마귀는 거짓 설득으로 주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원인을 찾아 스스로 돌이키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지금까지 지녀온 훌륭한 배경이든, 그가 세운 의로움이든, 아니면 그가 누구보다도 기질이 더 연약한 자이든... 여하튼 그에게 속해있는 그 모든 여건이 아래로 추락하는 그의 영혼의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요일 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이 말씀은 어느 정도 장성한 자녀들에게 전한 말씀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목사, 신부, 수도자, 장로, 등등) 계명을 지키지 아니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가르침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를 아노라 하고' 라는 표현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저는 저 말씀이 영적으로 어린 자를 한정하여 씌어진 것이 아니라는 추측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