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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구원의 능력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복음에 대하여 우리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 복음은 인간이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통하여 구약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에 관한 복음입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 곧 복음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마침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더욱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할 사도의 직분을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가서 증거함으로써 그들로 믿어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세우는 일로 지금까지 헌신해왔습니다. 그가 온갖 고생과 조롱과 한 때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하기까지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 복음을 증거하는 데 헌신해왔고 지금 이 로마서 편지를 쓸 당시에도 한번도 가지 아니한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 시에 가서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그 성도들에게 가서 복음 안에서 교제하고 그 너머 서바나에 가서 복음을 전할 불타는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 가서도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더 많은 영혼의 열매들을 거둘 부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있는 힘을 다하여 자랑하며 증거하며 다닐 계획으로 충만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이처럼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부정적인 강조 어법을 써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오늘 읽은 로마서 1장 16절 후반부 말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로 복음이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 성경에 보면 이 점이 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단어 ‘유앙겔리온’ 곁에 바로 이어서 ‘능력’이라고 하는 ‘듀나미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복음은 단지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영어 단어가 바로 이 헬라어 ‘듀나미스’입니다. 즉 복음은 단지 교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단지 멋진 선언이 아닙니다. 복음은 위대한 힘입니다. 폭발력이 강력한 위대한 힘과 권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능력의 출처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입니다. 온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유지시키는 그 위대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능력이 바로 복음 안에 있고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폭발적으로 역사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무엇을 위한 능력입니까? 무슨 열매를 맺는 능력입니까? 그 능력은 허공을 치는 능력이 아닙니다. 방향 없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그 방향이 분명합니다. 복음은 바로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원문 그대로의 느낌을 살리면 ‘구원으로 이끌어들이는 권세와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으로 이끌어들이는 능력인 복음은 어떠한 구원을 베풀어주는 것입니까?
저는 복음이 주는 구원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요 또 하나는 무엇으로의 구원, 이 두 가지입니다. 무엇으로의 구원은 다음번에 설명드리고 오늘은 먼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먼저 복음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는 본래 하나님을 떠난 것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자 한 아담과 하와의 삶의 지향성 자체가 죄입니다. 살인하거나 도둑질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탐욕을 내거나 음행을 저지르는 것만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죄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점점 양심도 약화되고 죄의 사슬에 매여 각종 죄악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거짓말, 위선, 도둑질, 미움, 시기, 질투, 교만, 감사하지 아니함, 원수 맺는 것, 용서치 아니함, 냉혹함, 남을 깔보고 모욕하고 조롱함, 탐욕과 허영, 우상 숭배, 각종 점치는 것, 죽은 자들을 끌어들이는 영매술, 미신 행위, 술취함, 방탕함, 더러운 말, 간음, 음란함 등을 범하며 살아갑니다. 아무리 이러한 죄들을 양심이 옳지 않은 것이요 장차 이러한 일에 대한 분명 쓰라린 대가가 찾아온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으나, 이러한 죄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사람을 끌어당겨서 결국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게 되고, 끊임없이 남을 이간시키며 늘 원망 불평하고 남을 판단하고 편을 갈라 당을 만들어 분열을 일으킵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모욕하고 자기의 가진 것들, 자기의 지식, 자기의 재능, 자기의 소유 등을 인하여 교만해져서 남을 우습게 여깁니다. 남을 깔봅니다. 술과 방탕함과 더러운 정욕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더러운 말과 생각으로 자기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에 불안한 마음을 점과 굿과 부적 등으로 대신 채우면서 살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죄입니다. 이러한 죄는 결국 파멸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죄인 줄 모르고 살아오고 또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한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 곧 죄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바로 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 무엇도 인간을 이 끈질긴 죄의 능력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지은 죄, 두 번 지은 죄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 죄가 영원히 기억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과거에 범한 죄에 대하여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 죄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중에 잊혀지는 것도 있겠지만, 대체로 양심은 살아서 그 죄에 대한 쓰라림을 기억하면서 후회하며 자책합니다. 그러한 죄로부터 양심은 늘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한 죄와 그 죄의 책망으로부터 구원받을 길은 다른 없습니까? 다른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선행으로 안됩니다. 고행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등지고 절속으로 산속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간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전혀 없는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그 피로써 우리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만 우리 죄가 깨끗이 씻어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7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 1:5,6 말씀에도 “또 충성된 증인으로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시록 1:5~6)라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복음의 핵심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가 완전히 영원히 씻어지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아담 이래로 죄로 말미암아 괴통을 겪는 모든 자들에게 가장 큰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 나라 갈 때까지 구원받은 믿는 성도들인 우리가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남은 잔재로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힘, 죄의 유혹을 점점 이길 힘도 바로 이 복음의 능력으로부터 나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온 새 생명의 능력이 우리 안에 죄의 세력을 점점 이겨나가게 됩니다. 로마서 6:14 말씀에,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잇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 뜻입니다. 점점 죄의 현실적인 공격을 이기고 점점 의롭고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역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그의 죽음과 그의 보내신 바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은 복된 열매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의 세력을 이기는 복음의 능력은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깊이 들러붙은 죄, 중독된 죄의 습관까지도 끊어내고 이기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습관적인 거짓말의 중독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둑질하는 도벽에 중독된 사람이 있습니다. 음란물에 중독된 사람이 있습니다. 도박 중독, 게임 중독이 된 사람, 마약 중독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점보는 중독, 타로 점을 보는 것이 중독된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분노의 기질, 의심하는 기질, 남을 비방하는 습관, 절제되지 않는 폭력적 성향에 사로잡힌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매우 강력하여 이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부어진 성령의 강력한 힘이 이러한 죄의 강력한 결박을 끊어버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녀들이 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복음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것들로는 이 죄많고 음란하고 패역한 세상에서 우리 자녀들이 죄를 이기고 살 수 없습니다. 진리의 복음을 우리 자녀들이 자주 접하고 예배를 즐겨 참여하고 기도하고 성령님을 날마다 의지하도록 권면하십시오. 오직 복음의 능력만이 죄사함을 주시고 죄의 세력으로부터 승리를 가져다 줍니다.
또한 복음은 저주로부터 구원을 베풀어줍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한 저주 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범하면 저주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저주들은 매우 현실적이고 그러한 저주는 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됩니다. 질병의 저주가 계속 내려가기도 하고, 반복적인 죄와 그 죄의 대가가 승계되기도 합니다. 저주란 각종 질병, 기근, 전쟁, 괴로움, 갈등, 불안 등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집안은 대대로 정신병이 생깁니다. 몇 살까지는 멀쩡하다가도 이상하게 자녀들이 정신병에 걸려 고생합니다. 어떤 집안은 대대로 무당이 됩니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무당이 되기를 거부하지만 그 잡귀는 그 집안 식구들을 계속하여 괴롭히면서 귀신을 섬길 것을 요구하면서 그 집안 자녀들을 압박합니다. 이러한 저주들을 끊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복음의 능력뿐입니다. 갈라디아서 3:13 말씀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저주가 다 결박이 끊어집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주 의식을 더 이상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저주로부터 자유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죄를 범할 때 그에 따르는 징계는 있습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징계입니다. 그 징계가 때로는 질병이 될 수도 있고, 경제적인 환난이 될 수도 있고, 때로 인간 관계의 실패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징계이며, 그 징계를 통하여 더 의롭고 경건한 자로 주님께서 세워가시는 과정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복음의 능력을 통하여 저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또한 복음의 능력은 마귀와 귀신으로부터 구원을 얻게 해줍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자들은 다 마귀와 귀신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 마귀와 그 졸개인 귀신들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충동시켜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불순종하며 대적하며 죄를 사랑하며 점점 죄에 깊이 빠지게 만들고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가게 만듭니다. 마귀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출세하는 데 두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만들고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게 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자기의 하수인들을 삼아 그 거점을 튼튼히 하곤 하는데, 그러한 하수인들은 이단 사이비 교주와 그 신도들이고 점점 무당집, 절집 등이 이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을 통하여 귀신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자들을 불러 모아서 그들의 마음과 가정을 파괴합니다. 때로는 마귀와 귀신들은 자연 재앙과 전쟁 등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열왕기에 길르앗 라못의 전쟁에 참여하는 아합 왕에 대한 이야기에 거짓말하는 영이 역사하여 전쟁하게 합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한 가정의 재난을 가져오고 질병과 각종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마귀와 귀신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곳에는 파괴와 슬픔과 고통이 가득합니다.
지금 북한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지하에서 신앙 생활하고 있고, 대부분은 점치는 일에 다 빠져 있다고 합니다. 툭하면 점을 본다고 합니다. 북한의 각종 수해, 전염병, 점점 옭죄어가는 경제난 등도 귀신들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만약 전쟁을 이 한반도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마귀와 귀신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할 새도 없이 한꺼번에 지옥문으로 수십만, 수백만명이 굴러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전쟁을 일으키는 악한 영의 세력을 꺾어버리고 성령께서 역사하사 평화롭게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복음의 능력이 임하여 이러한 마귀와 귀신의 역사가 개인에게서, 가정에게서, 가문에게서, 지역 사회로부터, 나라와 민족에게서 떠나가는 역사가 있습니다. 마귀는 죽이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10:10 말씀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은 이러한 마귀와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고 그리하여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모든 악한 것들도 다 함께 사라지고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 대신 우리 주님이 주시는 참 생명의 능력이 충만히 임합니다. 요한일서 5:19 말씀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도 귀신도 진실한 신자는 결코 손을 못댑니다.
하지만 만일 더러운 귀신과 마귀를 섬기는 자를 가까이 하고 그들에게 마음을 열면 공격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사탄숭배자였던 존 라미레즈라는 젊은이는 마귀에게 쓰임받는 고위급 영매, 우리나라로 말하면 박수무당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도를 받고 영적 갈등을 하는 중에 환상 중에 지옥에 끌려갔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로 자기가 섬기던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 회심하여 지금은 뜨거운 전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마귀에 종노릇하는 영적인 군사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고 구체적으로 교회들에게 들어가서 영적인 방해 역할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의 간증 중에 특이한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고민이 있다고 털어놓으면 그 사람에게 앞으로 이러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얘기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내게 몇 만 달라를 가지고 와서 그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청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고백을 통하여 얻은 정보를 가지고 그 사람 집에 남편이 바람이 나고 가정이 깨어지는 등의 미리 말했던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기도하면서 저주한답니다. 그러면 그 저주 그대로 그 가정에 문제들이 일어난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다시 찾아와서 많은 돈을 주면서 자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를 또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회심한 사탄 숭배자는 말하기를, 점집에 가서 점을 보는 것은 곧 귀신이 따라 붙는 일이요 반드시 화와 재난을 불러들이는 미련한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일들은 결코 터럭만큼도 연루되지 말고 멀리하고 싫어하고 미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날마다 기도하기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라고 간절히 간청해야 합니다. 마귀와 귀신들은 매우 실제적이고 매우 강력한 악의 근원이요 모든 재앙과 저주를 일으키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기도를 매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입니다. 베드로전서 3:22 말씀에,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입니까? 귀신들도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것들이 병과 재앙과 삶의 무질서와 실패와 갈등과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이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강력한 분의 보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은혜가 바로 복음의 능력에서 주어집니다. 우리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또한 복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결국 육신이 죽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 존재합니다. 그러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 구더기의 밥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아름다운 미소도 더 볼 수 없고, 따뜻한 손도 더 이상 잡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스런 말 한마디도 다시 나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흙으로 보낼 때 그토록 서글피 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숙명 앞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이 이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복음은 선포하기를,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를 믿는 자는 장차 그의 재림시에 무덤에서 일어나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은 후일에 반드시 다 함께 무덤에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의 보증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은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네가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6)라고 우리는 당당히 죽음의 권세 앞에서 승리의 선포를 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죽음을 환영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말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구더기가 그 껍질을 벗어야 환한 나비가 창궁을 날아오르듯이, 우리도 이 늙고 병들고 누추해진 몸이 죽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다시금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요 우리가 즐거이 들어갈 수 있는 내세의 문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바꾼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복음의 능력은 심판을 이기고 지옥불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사람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요 또 죽은 뒤에 심판이 반드시 있는 것도 정해진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삶에 대한 결산을 하나님 앞에서 다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자 있습니까? 누구 그 뜻대로 살았노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울 자가 있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입을 열어 따따부타 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 위엄의 광대하심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감히 내지 못하고 변명과 거짓말로 자기를 변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다 심판 아래 떨어져 그의 진노를 피할 자 없으나, 복음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요한복음 5:24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 판결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 믿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진노의 심판까지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이미 우리를 지나간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결과 우리는 당연히 우리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할 그 무서운 진노를 받아 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는데, 그 지옥불에서 건짐받은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7 이하의 말씀에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7~10)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인하여 찬양하고 춤추며 노래할 일입니다. 복음은 참으로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주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를 죄와 그 세력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저주로부터 우리를 건지는 능력입니다. 마귀와 그 하수인인 귀신들의 악한 결박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능력입니다. 또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또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당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그 진노의 결과 영원히 죽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의 죽음을 당하는 지옥불의 형벌에서 구원해주시는 능력이 복음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복음을 선물로 받았고 이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구원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구원의 소식을 다른 어디서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 무엇이 우리를 이 무서운 속박, 이 무서운 파멸, 이 무서운 고통과 저주와 저주받은 영원한 형벌에서 구출해낼 수 있습니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만이 이 놀라운 구원을 이루어줍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우리가 받았으니 어찌 이것을 부끄러워하겠습니까? 깨닫지 못하는 자, 마귀와 귀신들에게 잡힌 자, 세상 것에 매인 자들이 그 아무리 이 복음을 조롱하고 그 복음을 믿고 전하는 우리를 핍박한다고 해서 어찌 우리가 이 복되고 영광스럽고 위대한 복음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우리도 이 위대한 복음과 함께 살고 죽읍시다. 이 복음을 마음 다해, 담대하게 복음을 모든 이들에게 자랑합시다. 그리하여 이 복음의 능력이 그들 중에 택하신 자 곧 그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자들을 그 무서운 죄와 저주와 마귀와 죽음과 둘째 사망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해내는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의 기쁨과 영광도 더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