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요 12:20-50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시다 찬송: 250, 251장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행적 가운데 월요일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고 있다. 월요일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에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시고, 가르침을 주신 후에 성 밖 베다니에 가셔서 유하셨다(마 21:17). 이때 주신 가르침의 일부가 본문의 내용이다.
공관복음서는 이 부분에 대하여 기록을 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은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날인 목요일에 있을 것에 대하여 앞서서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함으로써 1-12장을 읽은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지금 어느 방향으로 그 사역을 정하고 계신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3장으로 넘어가서 보게 되면 바로 목요일 저녁 마지막 만찬 때 있었던 사건으로 연결하고 있으며, 이때 가룟 유다가 배반한 것에 대해 연결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12장에서 요한이 말한 바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고,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통하여 말씀이시며, 생명이시며, 빛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배척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본문을 보면 헬라인의 면담 요청이 있었다. 이 헬라인들은 경건한 자들로서 유대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이들의 질문을 듣지 아니하시고 바로 대답하신다. 물론 요한이 그들의 질문을 기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추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23절에서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여기에서 인자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영광은 이후의 설명에서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31)이다.
첫째,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죽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목적이기도 한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하고, 아버지는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는 요 11:4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죽은 나사로 앞에서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믿는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이다. 즉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28절에서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의 의미이며, 뒤의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이제 며칠 후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렇게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며, 부활은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선택하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이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신다는 것이다.
둘째, 31절의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는 말씀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던 사탄이 예수님의 성육신 이후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이 땅으로 쫓겨내려왔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로 완전히 결박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눅 10:18을 보면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이후, 즉 죽음과 부활 이후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음 가운데에서 건져 내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탄이 붙잡고 있던 세력들을 놓치게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권세를 빼앗기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사탄은 붙잡혀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완성이 되려면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지나셔야만 한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괴롭다고 27절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32절에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 청결 후 면담을 요청한 헬라인들과 많은 무리들에게 당신의 죽음을 가르치셨고, 그 죽음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각 자체에 갇혀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34절이다.
요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여기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오해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생각에 갇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구약성경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윗 왕권의 영원한 존속과 보존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다윗 왕권은 분명히 예수님을 지시하고 가리키고 있는데, 그들은 인간 왕을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집어넣어서 독창적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그 사역을 감당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이사야에서 언급한 대로 여호와의 종으로 오셔서 고난을 통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네 번째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인 종의 고난의 노래(사 52:13-53:12) 가운데 사 53:1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이 믿지 않음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으며, 또 사 6:10의 말씀을 한 번 더 인용함으로써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믿는 것을 금지하셨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들의 믿지 않음에 대하여 심판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권고에도 그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런 심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래서 37-43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계속되어온 불신과 불신앙에 대해 요한이 고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42절을 보면 더러 믿는 관리들, 즉 바리새인들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좋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43절에서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랑을 놓지 아니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는데, 바로 이러한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믿음 없음, 불신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실 것을 확고히 하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46-47절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요 12:46-47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며, 그분을 믿는 자는 어둠에서 나와 빛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물론 끝까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마지막 날, 예수님 재림하실 때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것이지만, 창세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이 구원의 자리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과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주신 내용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마음에 새기면서도 유대인들이 추구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영광을 위하여 온 힘을 다 쏟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였고, 잘못 해석하여 완전히 다른 길로 가버린 것이고, 구약에서 예언한 여호와의 종인 메시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만든 율법으로 잘못된 메시아상을 만들어냄으로써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예수님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전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추구한 표적인가, 아니면 헬라인들이 추구한 지혜인가? 이 두 가지는 모두 세상이 제공하는 것으로 예수를 믿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의 노력에 불과한 것들이다.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십자가의 방법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선한 인간이 표적을 찾고 지혜를 찾는다 할지라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그 십자가 앞에 설 때에라야 우리의 구원을 확증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길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허락하는 길임을 성도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나누신 후 예수님은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신다(마 21:17). 이렇게 월요일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끝이 난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이 월요일을 지나 삼일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 화요일이 되면 많은 가르침과 논쟁이 있을 것이고, 공관복음서 세 권은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가르침을 따라가며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이 어떠한가를 더욱 깨달아가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