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소설 ‘손님’의 파장과 신천 ‘학살박물관’의 허구 (상)
이 경 남 <한국발전연구원 원장>
황석영 그는 누구인가?
황석영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올해 58세. 출생지는 중국땅 만주 신경(지금의 장춘)이다. 3세 때 8·15 해방을 맞이하여 어버이를 따라 남한으로 귀국했다.
그의 부친은 황해도 신천이 고향이므로 원적은 자연히 그곳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는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부친의 고향인 신천에 가본 적이 없었다.(독자들은 이 ‘신천’을 기억에 담아두기 바란다.)
문학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특이하고 화려하다. 경복고교 재학시절(19세)에 ‘입석부근’이라는 소설이 ‘사상계’신인 문학상에 입선했고, 동국대 철학과를 졸업하기까지 상당기간 공장·공사판 등을 전전하다가 단편소설 ‘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본격 등장했다.
그는 중편소설 ‘객지’와 ‘한씨연대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단편소설 ‘삼포 가는 길’은 뛰어난 문학적 재질을 잘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가 많은 독자대중을 확보한 것은 ‘한국일보’에 연재한 대하소설 ‘장길산’이다. 이어서 ‘무기의 그늘’(월간조선 연재), ‘백두산’(중앙일보 연재) 등을 발표하여 역사·전쟁·민족·노동문제 등 무거운 주제에 도전하는 역량 있는 중견작가의 위치를 굳혔다. 필자도 그의 작품을 좋아했고 한국문학의 질·량을 높이는 데 소중한 존재라고 평가해 왔었다.
황석영 소설가를 이렇게 소개하고 보니 일부 독자께서는 “무슨 문학 강의를 하려는 것인가?”라고 의아하게 느낄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글의 ‘알맹이’는 다음부터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담기게 된다.
진보좌파를 속태우는 소설
황석영씨의 특사 출옥을 가장 반긴 사람은 당연히 가족들이었겠지만 이 땅의 진보좌파 사람들의 반김과 기대감도 뜨겁기 한량없었다. 그가 역량 있는 작가인데다가 ‘김일성 단독회견’으로 상징되는 드라마틱한 ‘친북행각’이 진보좌파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궁금하고 더없이 갸륵하고 더없이 부러운 대상이었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그가 출옥한 1998년부터는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가동되어 진보좌파의 활동무대가 황금시대를 맞이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에게 이념적 동질성과 문학적 성과물을 기대하는 진보좌파는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라고 침을 삼키는 심정 같았다.
황석영씨 자신도 감옥에 있을 때부터 그러려니 하고 예단 했던 듯이 두 편의 소설을 집필하게 된다.
“내가 감옥에서 나오면서 쥐고 나온 주제가 ‘오래된 정원’과 ‘손님’이었어요.”
그가 최근에 진보계 월간잡지 ‘말’과의 인터뷰에서 실토한 말이다.
먼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은 80년대의 민주화운동 격동기로부터 베를린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구조 해소까지 20년간의 우리 민족사와 세계사의 흐름을 총괄한 서사형의 소설이다. 저명한 출판사인 ‘창작과 비평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자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집중적 조명을 받았으며 제12회 ‘이산문학상’ 수상작으로 보답되었다. 진보좌파의 ‘글쟁이들’은 “역시 황석영”이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나온 제2탄이 장편소설 ‘손님’이다. 지난 6월 1일에 곧바로 단행본 초판으로 역시 ‘창작과 비평사’에서 간행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남북한을 넘나든 문제작가 황석영씨의 제2탄 작품이라면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도와 지명도가 어우러져 서점가에서 불티가 날만 하고, 일간신문 서평란에 화려하게 소개돼야 하고, 평단에서도 법석을 떨 조짐이 보여야 마땅한 일인데도 거의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이 글을 쓰는 7월 5일까지는 그런 흐름이라는 말이다.
그보다 더 해괴망측한 일이 있다. 그에게 ‘동지적 애정’을 쏟아오던 진보좌파 사람들이 거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에 자물쇠를 잠그고 있는 풍경이다.
필자가 측문한 바로는 소설 ‘손님’을 읽어본 친북성 진보좌파의 일부 학자·교수·언론인·문인·과격운동꾼·시민단체의 붉은 머리띠파 들은 마치 빈대나 바퀴벌레를 잘못 씹은 듯한 일그러진 표정이라고 한다. 아예 화제로 삼기를 ‘쉬쉬’한다고도 들린다.
왜 그러한가. 소설 ‘손님’이 형편없는 범작이요, 타작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필자는 문학적 성과가 괜찮은 소설이라고 독후감에 적을 만큼 평가하고 싶다. 그러면 ‘손님’에서 보여준 작자(황석영)의 이념적 좌표가 진보좌파 진영을 배신했기 때문인가? 그렇지도 않다. 황석영씨 자신은 이 소설이 “남한의 극우세력에게 치명적일 것”이라고 말하여 정체성의 일단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땅의 진보좌파는 왜 소설 ‘손님’을 못마땅히 여기는가? 작가 황석영이 진보좌파에게 돌멩이라도 던졌단 말인가.
그렇다. 돌멩이치고는 떡판보다 크고 무거운 바윗장을 진보좌파의 편집광적 미망에 내려친 셈이다.
필자가 다루려는 이 글의 테마는 그 미망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며 황석영씨의 소설 ‘손님’이 일으키는 파장을 검증해 보는 것이다.
일부 진보좌파 논객들의 아노미 증상을 파헤치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발악적 반격에 미리 쐐기를 박아두려는 것이다.
북이 말하는 ‘신천학살’
문제의 소설 ‘손님’은 이른바 ‘신천사건’을 소재로 삼아 엮어졌다. 일부 독자들이 낯설게 여길 신천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6·25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서울탈환에 성공한 후 38선을 넘어 북한지역으로 진격하였을 때 자유해방의 수복지가 된 황해도의 서부지역, 특히 신천 일대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만 설명하면 요즈음 진보좌파에서 정력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에 포함될 유사사건 정도로 간주되기 쉬우나 그런 차원이 아니다.
신천사건의 발생배경과 참화의 크기와 상처의 깊이와 그리고 진실 규명에 따라 국내·국제적으로 미치게 될 파장은 여타 ‘양민학살사건’들과 차원을 달리하는 사안인 것이다.
더구나 북한에 밀입북 하여 신천사건의 비극적 흔적이 남아 있는 현지와 여러 전시물들을 직접 살펴본 바 있는 황석영씨가 그 사건을 소재로 삼고 독자적 해석을 주제로 삼아서 소설 ‘손님’을 발표함으로써 ‘신천사건’의 진실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열어 놓았다.
진실규명의 서장으로서 먼저 북한측 얘기부터 살펴본다.
신천군에서만 무려 3만명 이상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은 신천사건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 당시 미제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력사상 일찍이 그 류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대규모적인 인간 살륙 만행을 감행함으로써 20세기 식인종으로서의 야수적 본성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 놓았습니다.
흡혈귀 신천지구 주둔 미군사령관 해리슨 놈의 명령에 따라 감행된 신천 대중학살은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히틀러 도배들이 감행한 오스벤찜의 류혈적 참화를 훨씬 능가하였습니다.
미제침략자들은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52일 동안에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소설 ‘손님’(99쪽)에서 인용한 글이며, 북한당국이 펴낸 기록문서와 선전책자에 똑같이 수록되어 있는 ‘공식적 정의’이다.
어찌 그뿐이랴. 신천만이 아니라 이웃 안악에서는 1만9천여 명, 은율에선 1만3천명, 송화에선 5천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북한당국은 주장한다. 이 4개 군은 유서 깊은 명산인 구월산을 가운데 둔 지역이므로 구월산 주변지역에서만 합계 7만2880명의 양민이 무고하게 학살되었다는 것이다.(북한이 주장하는 별표 지도 참조)-사진2
북한당국은 신천읍에 미군의 만행을 생생히 보여준다면서 《학살박물관》을 세워 수많은 외국인을 그곳에 안내하여 치를 떨고 몸서리치도록 유도했다. 그것이 주효하여 20세기 최고의 화가인 ‘피카소’는 신천사건을 소재로 《조선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그렸다.
미군이 북진했던 52일 동안에 폭격이나 포격이 아니라 총칼과 수류탄과 몽둥이로 북한 전역에서 무려 10여만 명을 학살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잡듯 파리잡듯’ 사람을 죽였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좌파에 던지는 정문 일침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남한의 진보좌파가 조용할 리 없는 일이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삐딱하게 해석하여 ‘반미친북’을 고취하려는 진보좌파 논객들에게는 이 얼마나 ‘신바람나는 호재’인가.
강정구교수는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라는 책에서 신천사건을 형상화한 ‘피카소’의 그림이며 한국판 ‘게르니카’인 《조선에서의 학살》을 표지화로 내걸었다.
김귀옥이라는 젊은 학자는 《한국전쟁과 북한사회주의 건설》 논고에서 북한의 《조선전사》(제26권)에 기술된 ‘신천대학살’ 해당 내용을 그대로 믿는 시각으로 발췌 소개하여 독자들이 몸서리치도록 했다. 그 논고는 한완상씨가 이끌던 한국사회학회 엮음인 《한국전쟁과 한국사회변동》에 수록되었다.
원광대 이재봉 교수가 월간지 ‘말’ 1998년 12월호에 발표한 《반미주의 연구학자의 신천박물관 관람기》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는 북한당국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복창하거나 여과 없이 소개했다.
진보월간지 ‘말’은 이재봉 교수의 관람기를 《“이럴 수가 …” 믿기지 않는 충격의 기록》이라는 표제로 그로테스크한 사진까지 곁들여 편집함으로써 이 땅의 진보좌파에게 신천사건은 ‘미군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대학살’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재봉 교수는 유력한 시민단체인 경실련의 통일협회 통일분과위원장이기에 그 파급효과가 지대하였다.
그러나 강정구·김귀옥·이재봉 교수를 비롯한 진보좌파는 지극히 게으르거나 지극히 우둔하여 치명적 약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신천사건의 진상은 이미 오래전인 1957년에 그 사건의 직접 관련자인 조동환씨가 《항공의 횃불》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진실된 줄기를 밝힌 바 있다. 진보좌파 논객들은 그 책자에 관심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신천사건에 관여한 수천명의 인사들이 1·4후퇴 때 월남하여 시퍼렇게 살아 있는 프레젠스에 대해서도 진보좌파 논객들은 ‘청맹과니’였다. 얼마든지 만나서 ‘참 증언’을 들을 수 있는데도 아예 외면한 것이다.
진보좌파 논객들의 더 치명적 과오는 북한의 주장을 그렇게도 신뢰하는 주제에 북한이 ‘영웅적 투쟁’이라고 추켜 세우는 ‘구월산인민유격대’와 신천사건의 연관성에 관하여 ‘지적 장님’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 생각해 보자. 구월산에서 1개 연대 이상의 인민 유격대가 영웅적 투쟁을 전개했다는 그 기간(52일간)에 바로 구월산 기슭의 신천·안악·은율·송화 일대에서 7만여명의 북한주민이 학살되었다고 한다면 그 공산빨치산은 수수깡대·허수아비의 집합체였단 말인가? 이 땅의 진보좌파 논객들은 이같은 초보적 의아심조차 가져보지 않은 ‘우둔한 족속’에 다름 아닌 셈이다.
황석영씨의 소설 ‘손님’은 그러한 의아심에 날을 세우면서 신천사건의 진실의 한 단면을 조명하고 있다. 그래서 진보좌파는 “황석영아, 네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투정하며 정신적 공항에 빠진 것이다.
(기사 폭주로 다음 호에 계속)
문제소설 ‘손님’의 줄거리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황석영씨의 소설 ‘손님’이 어떤 줄거리인가를 잠시 살피기로 한다.
지면 제한을 고려해야 되므로 좀 엉성하게 간추린 경개(Outline)임을 양해하기 바란다.
<이 소설의 주인공 ‘류요섭’은 북녘땅인 황해도 신천의 찬샘골이 고향이며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38선 이북에 진격했을 때 14세의 소년·중학생이었고, 그의 형 ‘류요한’은 20대 청년으로서 반공·치안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1·4후퇴를 당하여 형제는 함께 월남했다.
그들은 남한에서 살다가 약 2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갔으며 류요섭은 목사가 되었고 형(요한)은 교회 장로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이야기는 류요섭 목사가 재미이산가족의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북한에 가게 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브루클린에 사는 류요섭 목사는 떠나기에 앞서 뉴저지로 형님을 찾아가서 출발 인사를 드렸는데 그 몇일 후에 형이 갑자기 사망한다.
그는 형님 장례식에 참례하여 고인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남은 뼛조각(골편) 하나를 소중히 챙겨 간직한 채 방북길에 오른다. 그동안 류요섭 목사는 그로테스크한 꿈과 환영·환청에 시달리는데 그것은 요한·요섭 형제가 수십년 전에 신천 고향에서 보고 겪었던 처참한 죽음들의 ‘원귀’(원귀)이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도착한 류요섭 목사는 북한당국의 치밀한 사전 조치에 따라 형수님과 조카(단열)를 만난다. 그들은 요한형이 1·4후퇴로 고향을 떠날 때 그 곳에 남겨두었던 이산가족들이다.
류요섭 목사는 고향방문 일정에 따라 신천에 가서 소위 ‘학살박물관’의 끔찍한 전시물을 관람하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요한형이 관련된 당시의 참극들을 떠올리고 새삼 몸서리친다.
그렇지만 류요섭 목사는 신천사건과 ‘학살박물관’이 미군이 저지른 만행의 산물이 아님을 알고 있다.
6·25 전쟁때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자 전선에서 훨씬 북쪽(후방)에 위치한 재녕과 신천에서 기독교세력을 비롯한 반공학생·청년들의 무장의거가 일어났으며 그 전후과정에서 리념을 달리하는 동족·동향인들이 서로 ‘증오의 살육극’을 벌였는데 류요한·요섭 형제는 피바람이 부는 현장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 학살사건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이편과 저편 사람들의 유령이 나타나 류요섭 목사와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전개되며 마침내 해원의 크라이막스로서 류요섭 목사는 고향마을 찬샘골의 언덕바지에 올라가 미국에서 품고온 ‘형님의 뼛조각’을 흙에다 묻음으로써 고향방문 일정을 마치게 된다.>
진보작가의 용기와 슬기
필자는 이 소설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황석영씨가 소설의 소재와 시투에이션으로 삼은 ‘신천사건’의 객관적 진실을 과연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가려보는 시각에서였다.
필자 자신이 그 비극적 사건의 언저리와 한가운데에 몸을 두고 엄청난 ‘민족적 애·환’을 체험으로써 공유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독후감은 부분적 아쉬움이 남기는 해도 황석영씨가 신천사건의 한 역사적 맥락과 진실의 한 단면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흡족감’이었다. 필자의 그 흡족감을 황석영씨 자신이 선험적(?)으로 이서라도 해주듯이 소설의 후기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신천에는 미군의 양민학살을 고발하는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이 있었고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또다른 진상’이 있지 않을까 하며 의심하는 버릇은 작가로서의 천성이기도 했다.
나중에 뉴욕에 체류하면서 류아무개 목사를 만나 그의 소년시절의 목격담을 듣고서야 의문이 풀려갔다.
그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친구의 모친에게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황해도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자료와 목격담을 모아나가다가 귀국해서 투옥되면서 작업을 중단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훨씬 다행이었다. 옥방에서 나의 구상이 좀더 무르익을 때까지 이러저러한 형식들을 적용해 볼 수 있었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실들은 ‘우리 내부에서 저질러진 일’이었으므로 북이나 남의 어떤 부류들이 매우 싫어할 내용일지도 모른다.(‘손님’의 261p에서)
황석영씨가 ‘신천사건’에 덧씌워진 왜곡·날조의 딱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벗겨낸 것은 진보성향 작가로서는 보기 드문 양심과 용기의 발로이다. 또한 신천에서의 살육사건이야말로 우리 나라에 뒤늦게 들어온 맑스·레닌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외래 손님’이 가장 예각적으로 맞부딪힌 상징적 사건이라고 해석한 주제 설정은 황석영씨 특유의 영감적 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필자는 ‘손님’을 문학감상하는 시각으로 재차 읽으면서 문학 애호가들이 잘 아는 ‘스티븐스’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카프카’의 ‘변신’, ‘오우웰’의 ‘1984년’, ‘까뮈’의 ‘페스트’, ‘사르트르’의 ‘구토’, 심택칠랑의 ‘나라야마 절고’ 등의 분위기를 연상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이 우리 나라 소설문학의 지형도에 특색있는 돌 하나를 놓은 셈이라고 평가하면서도 그 화두는 필자가 이 글에서 다루는 논제와 별개의 일이므로 더 부연하지는 않겠다.
소설과 실록의 차이
소설 ‘손님’을 이처럼 긍정적으로 감상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흠결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한다.
만약 그 흠결을 간과했다가는 ‘신천사건’의 참다운 진상 규명이 미완성에 그치게 된다. 자칫 잘못하면 소설 ‘손님’이 보여주는 메시지가 마치 ‘결정판’ 인양 오인될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작가가 어느 특정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해도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픽션(허구)형식인 소설과 논픽션형식인 실록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긴다는 것을 잘 안다. 특히 소설 창작에서는 사건의 소재들을 백화점 나열식으로 모조리 제시하지는 않는다.
작자가 의도하는 주제를 떠받치는 일부 소재만을 활용하며, 또한 가공의 이야기들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꾸며대기도 하는 것이다.
황석영씨의 ‘손님’도 신천사건의 일부 소재와 꾸며낸 이야기들로 구성한 소설이므로 문학적 성과(평가)는 어떠하든간에 ‘사건의 실체적 진상’은 규명돼야 마땅하다.
올바른 진상 규명은 곧 북한의 철면피한 낯거죽을 벗겨내게 되고, 이 땅의 진보좌파 논객들이 휘두르는 너절한 붓대를 청소해 버리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신천학살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하여 포위망을 치고 ‘포복전진’ 하듯이 접근해 보기로 한다.
구월산 권역의 지령
먼저 신천을 포함한 구월산 기슭 지역에서 왜 그처럼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지역의 한 자락인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는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처음 상륙하여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운 곳이다.
기독교세는 황해도 서부지역에 밀물처럼 전파되었으며 마침내 재령은 평양, 선천(평안북도)과 더불어 서북지방 기독교의 ‘3대 성지’로 꼽히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던 김익두 목사의 사목 근거지는 신천이었다. 여담이겠지만 우리나라 축구계의 선구자이고 명센터포드에 명감독이던 김용식이 김익두 목사의 아들이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전파도 만만치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 진사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영세를 받은 곳이 신천이다. 안악의 매화동 성당은 공소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안중근·명근 형제가 자주 참례하였다.
기독교·천주교의 영향을 한 줄기로 하고, 국권이 위태로워진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불길처럼 치솟은 항일·구국사상을 또하나의 줄기로 하여 구월산 주변 지역에는 거대한 민족주의 인맥이 형성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해주에서 출생했으나 6세 때에 부친을 따라 신천 청계동으로 이사하여 청소년기에 호연지기를 키웠다.
백범 김구 선생도 해주 출신이지만 20세 장사로서 안악 치하포에서 용맹을 떨친 이후 구월산을 에워싼 고을들인 은율·송화·장연·신천·재령·안악 등지에서 줄곧 활동하다가 상해로 망명했다. 김구 선생의 외가는 은율이고 부인 최준례 여사는 신천 용평동 출신이다.
‘인걸은 지령’이라고 했던가. 구월산의 정기가 흐른 송화에서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군무총장을 역임한 노백린 장군과 일본 황족을 척살한 조명하 의사를, 은율에서는 학생 지사이던 김원벽·백남훈 선생을, 장연에서는 구월산 싸총대 이명서 대장과 임정요인 서병호 선생 그리고 항일 여걸인 김마리아 여사와 김순애 여사(김규식박사의 부인)를, 재령에서는 동척투탄사건의 나석주 열사와 동아일보 장덕수 주필을, 안악에서는 ‘안악사건’의 주역인 김홍량·김용제·최명식 선생을 배출하는 등 항일민족투쟁의 의사·열사·지사들이 마치 연등불 이어지듯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 인맥과 기독교 세력이 항일투쟁이라는 하나의 큰 줄기로 합류한 이 지역은 공산주의 좌익사상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8·15 해방 후 이북5도의 공산당 조직에 있어서 황해도가 가장 더디고 허술하고 약세를 보인 것은 소위 국내파라는 토착 공산세력이 황해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나 8·15 해방 직후나 ‘구월산의 지령’이라고 말하는 것은 좌익·공산주의가 발붙이지 못하고 민족주의 세력의 인맥으로 가득찬 이념지도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였다.
이 ‘구월산 지령’의 꿈틀거림이 서서히 ‘재령·신천의거’라는 대폭발을 잉태하게 된다.
토지개혁에 등 돌린 농심
민족사상과 기독교정신이 어우러진 구월산의 ‘영기’는 압제자에게는 괘씸한 ‘불온의 덩어리’로 비쳐지기 마련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로 그러했고 8·15 해방 후에는 ‘반공’의 숨결로 그러하였다.
더구나 구월산 등줄기의 동쪽편에 위치한 신천·재령·안악 3개 군은 북한 최대 평야지대를 안고 있어 ‘곡창 3각지대’로 불리어 왔으므로 공산당(북조선인민위원회)의 수탈 위주 혁명개혁에 반발하는 기류가 유난히 거세었다.
소위 토지개혁만 하더라도 소작인들이 쌍수로 열광하기 보다는 오히려 얼떨떨하게 곤혹스러워 하는 형편이었다. 일제시대에 남도지방은 가혹한 소작제로 소작쟁의가 빈발했으며 수많은 영세민들이 쪽박차고 북행유랑의 길을 떠났으나 신천의 어루리벌, 재령 나무리벌, 안악 김농장벌 등 비옥한 곡창지대에서는 소작쟁의가 극히 드물었다.
대지주·중농·자작농·소작인들이 지역공동사회의 안온한 법도를 유지해 오다가 8·15해방을 맞이한 다음 공산당의 ‘수탐식 토지개혁’이 강요되는 바람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다. 소위 현물세라는 새로운 수탈은 소작제보다 더 가혹한 것으로 비쳐졌다.
김구·이승만을 흠모하는 민심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일은 북한 공산당국의 악랄한 선전선동에 대하여 생리적 알레르기를 일으킨 사실이다. 당시 공산당국이 주민 세뇌용으로 내걸은 선정적 표어의 하나가 “살인·강도·방화단의 두목 김구·이승만을 타도하자!”였다. 이 선동적 구호는 북한 전역의 모든 고을과 촌락에 현수막으로, 혹은 교량과 건물 담장에 페인트 글씨로, 혹은 직장마다 입구와 실내벽면에 지방문처럼 내걸렸다.
이 땅의 공산혁명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 임시정부 김구주석과 이승만박사라고 단정한 소치였다.
다만, 1948년 4월에 김구 주석이 남북협상차 평양을 다녀가는 동안에는 문제의 그 표어(구호) 게시물에서 ‘김구’라는 두 글자만을 페인트로 덧칠해 지우거나 흰 종이로 덧씌우는 얄팍한 농간을 부렸다.
그런데 이 표어가 구월산 주변지역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반발심을 일으켰다. 김구가 누구인가? 해주 태생인 안중근의사와 동일하게 신천을 비롯한 구월산 지역 주민들이 ‘자존심의 핵심’으로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이승만은 또 누구인가? 같은 황해도의 평산 출신으로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겨레의 스승’이시다.
비록 지역 편애주의를 폐쇄적 배타주의라고 지탄한다 하더라도 자기네 고장에서 배출한 위대한 인물을 특히 존경하고 그러한 지도자의 존재성에서 긍지를 느끼며 애향심을 드높이는 것은 인지상정이요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다.
그러므로 김구·이승만의 존함을 마음깊이 간직한 이 지역 사람들은 공산당의 무지막지하고 난폭한 선전에 역겨운 알레르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고얀 놈들!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에게 ‘살인 강도, 두목’이라구? 공산당 제놈들은 애비도 없고 스승도 없는 후레자식인가?”
이같은 분노의 연장선상에서 현수막·벽보 변조사건이 속출했다. 표어 문구 속에 있는 김구·이승만 이름 위에다 ‘가짜장군 김일성’이라고 쓴 종이를 덧붙인 사건이 여기 저기서 발생한 것이다.
한독당지부 사건이 터졌다. 서북청년회 공작사건도 발생했다. 반공학생사건이 줄을 이었다. 조선민주당(조만식계)사건도 적발되어 많은 민주당원들이 끌려갔다.
작당한 젊은이들이 한밤중에 공산당 사무실에 돌을 던진 다음 구월산 깊숙히 은신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구월산에서 은밀히 내려온 공작원이 학생들 여러 명을 데리고 다시 입산했다 해서 학교와 고을이 술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비극적인 운명의 시기를 맞게 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구월산에 구국동지회
이상이 ‘신천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다. 또한 “왜 하필이면 신천이었느냐?”에 대한 지정학적 배경설명도 된다.
이야기는 ‘신천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붓끝을 댈 차례가 되었다. 필자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체험을 씨줄로 삼겠지만 이것은 ‘주관적 관찰’에 치우치기 쉬우므로 객관적 자료로서 조동환씨(현재 인천거주)가 저술한 ‘항공의 횃불’을 기본 텍스트로 삼기로 하겠다.
조동환씨는 ‘신천사건’의 시작에서 끝까지 한가운데(작전참모도 지내며) 있었고, 많은 증언자들의 기억이 생생한 시기(휴전 직후)에 정력적으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1957년 6월에 신국판 580쪽에 달하는 ‘항공의 횃불’을 상재한 것이다. 그 책자의 부제를 ‘황해 10.13반공학생의거투쟁사’라고 표기한 것도 ‘신천사건’의 본질·성격·규모 등을 잘 시사해 주는 일이다.
필자는 또한 ‘신천사건’ 참여자로서 월남한 인사들의 육성증언과 ‘재령의거 사건’을 생생히 전해주는 권영화, 김창섭씨의 글(‘신동아’, ‘재령군지’ 소재)도 면밀히 살폈다.
아울러 밝혀 둘 것은, 남한의 진보좌파 논객들이 맹신하는 북한측 자료들(‘조선전사’, ‘신천박물관 소개책자’ 등)도 나름대로 입수하여 그것들이 얼마나 허위 날조되고 있는가도 철저히 검증했다는 사실이다.
‘신천사건’의 전주곡은 김일성이 조선인민군에게 기습남침을 명령한 신호에서 막이 오른다.
1950년 6월 25일 공산군이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사흘만에 점령한지 몇 일 안되는 7월 1일, 북한 전역에서는 18세 이상의 청·장년들을 고을마다 모아놓고 궐기대회와 함께 소위 ‘군사동원 서명날인’을 강요했다. 인민군의 징병이건 징용이건 군사동원 부름이 있으면 “기꺼이 응하겠다”고 서약하며 대기하겠다는 서명날인인 것이다.
이 서명날인 강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반항의 무리’를 양산하는 역작용이 된다. 먼저 신천고급중학의 30여 학생이 은밀히 모여 ‘군사동원 보이코트’를 다짐하고 더러는 구월산이나 두라면 산중에 숨어들었으며, 더러는 지하땅굴에 은신했다.
그들은 이미 ‘멸공혈서’로써 결의동지가 되었으며 조직 형태를 모색한 끝에 ‘구국동지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7월 중순에 결성된 구국동지회에는 신천고급중학 뿐만아니라 차츰 신천농전, 신천녀고, 용진중학, 달천중학, 노월중학 등의 반공학생들이 망라되었으며 일부 교사들도 선을 대었다.
김익두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인사들도 비장한 결심으로 반공연대를 모색했으며 천주교인들도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핵으로 하여 20대 이상의 청년들이 ‘군사동원’을 기피하고 구월산을 비롯한 일부 야산에 집결함에 따라 ‘신천광복회’라는 연대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웃 재령과 안악에서도 유사한 지하조직이 꿈틀거렸다.
구월산은 처음에는 반공 학생, 청·장년 등의 은신아지트가 되더니 담찬 젊은이들이 내무서(경찰파출소)의 무기를 훔치거나 탈취하여 무장함에 따라 구월산은 어느덧 ‘반공유격대’의 근거지로 바뀌어 갔다.
그들이 단순한 군사동원 기피자에 머무르지 않고 ‘무장 게릴라’로 탈바꿈하게 된 동인은 반공사상이 확고할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미군을 주축으로 하는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에서 격려되고 ‘최후 승리의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지역의 공산사찰기관(내무서·정치보위부·노동당부 등)은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전진하는 승전보에 도취해 있었으므로 군사동원 기피자 몇 명 정도가 구월산에 숨어들었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먼 산 바라보는’ 정신해이상태에 빠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먼 산’이 그들을 덮쳐버리는 거창한 용암류를 분출하게 될 줄이야….
‘학살’지령한 김일성의 방송
남침한 인민군의 승전보가 울려 퍼지던 전쟁 초기, 북한에서는 8월 15일까지 인민군이 남조선 전역을 석권하여 통일을 완수한다고 장담하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럴수록 지하에 숨고 구월산에 은거한 반공학생·청년들은 비관적 전세에 기가 죽기도 하였으나 북한 상공을 마음대로 비행하는 유엔공군기를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더구나 공산통일을 완수한다고 다짐했던 8월 15일이 지나도 낙동강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전해졌다. 많은 인민군 부상병들이 후송되었고 그 병력보충을 위해 군사동원이 강화되었다. 공산당 간부들이 예전 같지 않게 초조한 기색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구국동지회, 광복회에 망라된 청년·학생·교사·종교인들의 기대감과 투지가 되살아나게 되었다.
마침내 9월 15일에 유엔군의 인천상륙이 감행되었고 서울이 수복되었으며 전선의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국의 보도관제로 공식적으로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이 파천황의 역전사태는 숨길 수 없는 현실로 북한주민들에게 알려졌다.
구국동지회와 광복회 회원들은 특히 일본 동경의 유엔군사령부 방송과 NHK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여 급박한 정세변화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결정적 투쟁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10월 1일에는 동해안에서 한국군부대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해 주었다.
중부전선에서도 38선이 돌파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황해도 지역이 포함되는 서부전선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지역을 담당한 미군 제1군단이 38선 돌파를 주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정부는 38선 이북 진격에는 한국군만이 담당하는 ‘잠정계획’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0월 10일부터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장군)을 포함한 미 제1군단이 북진을 시작했다. 고랑포·시변리·김천지구에서 ‘자유의 십자군’이 마침내 북한땅을 밟은 것이다.
유엔군의 서부전선 북진이 시작된 바로 그 다음날인 10월 11일 김일성의 육성연설이 평양방송을 통해 울려 퍼졌다. 소위 ‘일시적 후퇴’를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방송연설에는 참으로 무서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전략적으로 철수하게 될 지역에서는 간첩·파괴분자들을 적발하여 처단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 불평불만을 일삼는 자, 낙오하는 자, 비겁한 자 등 반동분자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위하여 모든 인민은 견결한 투쟁을 전개하라>(‘조선전사’ 제26권에 수록된 김일성의 연설문에서)김일성은 후퇴하게 될 모든 북한 지역에서 그들의 적성분자와 반동분자들을 미리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단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 ‘대학살 지령’에 따라 신천·재령·안악·해주를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공산당, 내무서, 정치보위부, 민청 열성분자들이 핏발을 세우고 ‘반동분자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대학살의 개막인 것이다.
그들이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수행하는 비상대책은 다음과 같았다.
1. 각급 당은 직장을 사수하되 부득이한 경우에는 모든 서류 일체를 소각하고 후퇴할 것.
2. 각급 기관에 현재 구류중인 반동분자는 한명 빠짐없이 현지에서 즉결 처단할 것.
3. 적이 침공하면 반동으로 도량(도량)할 위험이 있거나 그 이외의 우익계열은 검거되지 않은 자라도 예방적으로 모두 처단할 것.
4. 장래 반격에 이용할 수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을 북쪽으로 이송할 것.
이 비밀 계획의 핵심은 민족계 우익인사들을 모조리 예비검속하여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구월산의 령기를 받은 구국동지회·광복회 투사들이 수수방관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10.13 반공의거’가 폭발하여 비극의 본막이 열리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피바람 부는 봉기 전야
지난 호(통권 106호)에 이어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황해도의 유서 깊은 고을인 재령과 신천에서 반공 의거대가 봉기한 날은 1950년의 10월 13일이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금요일. 흔히 '13일의 금요일'은 어떤 운수의 날이라고 했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이 '13일과 금요일이 겹친' 날이었다. 그러므로 고대 희랍인과 로마인들은 13일의 금요일을 '흉운의 날'이라고 금기시하였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그 징크스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1950년 10월의 바로 그날, 재령과 신천의 반공투사들은(많은 기독교 신자를 포함하여) 길흉화복 따위를 가려볼 만한 여유가 없었다. 정세가 너무 위급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은 과연 어떤 물살을 타고 있었던가?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돌파한 한국군 제1사단(사단장 백선엽장군)이 교통요충지인 시변리를 장악한 다음 신계를 향하여 쾌속진격 중이라고 유엔군사 방송은 전해 주었다.
개성 북방에서는 미군 제1기병사단과 제24사단 그리고 영국군 제 27여단이 금천지구 38선 진지의 인민군 2개 사단을 포위하고 섬멸작전을 전개 중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전장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해주에서는 퇴각준비를 서두르는 노동당 도당부, 정치보위부, 내무서(경찰서) 등의 핏발 선 요원들이 '반동분자 처단'에 광분하고 있었다. 특히 해주교화소(형무소)에 수감중이던 3백여 우익인사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해주로부터 재령·신천에 이어지는 간선도로에는 남한전선에서 패주해 온 인민군 퇴각부대와 노동당·인민위원회·민청·여맹·직업동맹·교육기관 등의 열성 분자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고 허둥대며 북행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일은 구월산 동쪽편의 3각지대인 신천·재령·안악의 사태였다. 당시 유엔군이 도달한 금천·백천으로부터 2백리나 멀리 후방에 위치한 그 지역에서는 노동당·정치보위부·내무서의 골수당원들이 김일성이 10월 11일의 방송연설에서 강조한 교시를 받들어 읍 내외의 천주교·개신교 성직자들과 민족주의 성향의 명망가·유지들과 성분이 의심스러운 불온분자 등 수백명을 예비검속하여 '살생부' 대조도 생략한 채 마구 처단했다. 그 수법은 우물에 쳐넣거나, 방공호에 밀어 넣고 수류탄을 터뜨리거나, 구덩이에 세워 놓고 따발총을 난사하거나, 휘발유를 끼얹어 불을 지르는 등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지방 공산당국의 살인청부자들은 유엔군이 아직은 2백리 남쪽에 도달했을 뿐이므로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즐기면서 소위 '반동분자 청소'라는 초토작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천·재령·안악은 한마디로 피바람이 부는 '유령의 지역'으로 바뀌어 갔다.
황석영 소설 '손님'에서 그로테스크한 수사법으로 리얼하게 묘사되고 있는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처참한 스토리에는 이 서막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다분히 생략되어 있지만 실은, 퇴각 전야의 공산기관·골수당원들이 자기 고장의 기독교도를 비롯한 우익성향 사람들을 '반동분자 청소'라는 명분 아래 집단학살을 서슴지 않은 만행이야말로 '재령·신천사건'의 비극을 촉발한 도화선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반공의거 첫 봉화는 재령
서막의 무대가 잔악무도한 학살로 연출되었으니 곧 이어질 본막인들 어찌 피바람 부는 격렬한 무대로 연출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본막의 제1장 무대는 신천이 아니라 재령읍, 10월 13일 오후 3시, 마침내 반공 무장봉기의 의로운 횃불이 타오른다.
청년투사 권영화가 이끄는 특공선발대가 남산 꼭대기에 위치한 방공감시초소를 벼락치듯 습격하여 경비병들을 처단하고 전화선을 절단한 다음 대형 태극기를 게양했다. 반공의거대의 봉기를 알리는 역사적 신호였다.
의거에 가담한 단체는 6·25를 전후해서 재령군 일원에 비밀리에 조직된 반공구국동지회, 반적대, 광복동지회, 반공동우회, 반공학생동지회, 반공기독청년회 등이었다.
이 단체들은 처음에는 제각기 별개로 조직된 비밀결사였으나 '13봉기'라는 결정적 고비를 며칠 앞두고 횡적 연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동자는 권영화·박춘성·김화경·안종섭·김세권·박태형을 비롯하여 박원보·김광섭·최문상·오경록·손기준·조영욱·김윤호·박천호·이성화등 일당 백의 청장년 투사들이었고 모두 150명 내외가 죽음을 각오하고 1차 궐기의 선봉을 섰다.
반공의거의 성패를 가르게 될 무기는 신대리 과수원에 거점을 두었던 권영화 형제가 10월 10일 공산군 무기수송트럭 1대를 교묘하게 과수원으로 유인한 다음 운전병과 호송원을 감금하고 트럭에 실려있던 소련제 아카보소총 210정과 실탄 2상자를 노획함으로써 충당할 수 있었다.(노획 무기 중 절반 가량을 신천 반공의거를 준비하는 정자환편에 넘겨주었으며 나머지 1백여정이 재령 봉기에 활용되었다)
남산방공감시초소에 태극기가 게양될 무렵, 교외 오솔길을 따라 덕수고개를 넘은 박춘성조는 공설시장, 문화회관, 우체국, 내무서, 인민위원회 등을 차례로 습격했다. 권영화조도 재빨리 읍내로 틈입하여 악명 높은 정치보위부와 민청본부를 기습 장악했다.
공산관서 골수당원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반공의거대의 기습을 당했으므로 처음에는 이렇다 할 저항을 못하고 거의 사살되었으며 발 빠른 자들만이 혼비백산하여 노동당 군당부쪽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주요관서 습격은 한 시간 정도로 끝났으며 오후 4시쯤 의거대가 장악한 문화회관의 방송시설에서 역사적인 마이크소리가 울려 나갔다. 그 마이크는 읍내 곳곳에 확성기장치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애하는 재령군민 여러분! 마침내 반공의거대가 봉기했습니다. 곧 유엔군 낙하산 부대도 진주합니다. 공산도배를 격멸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 모두 궐기하여 김일성 빨갱이 무리를 우리 손으로 처단하여…"
바로 직전까지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집안에서 문을 잠근 채 몸을 사리고 있던 읍민들이 봇물 터진 듯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어느새 태극기를 찾아들고 나온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서로 얼싸 안고, 눈물을 흘리고, 더덩실 춤을 추고, 만세를 부르고, 의거대원들을 무등 태우고… 그야말로 감격의 물결이 온 거리를 뒤덮었다. 교회당 종소리도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은 5년 전인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의 감격으로 거리를 메웠던 환호의 재현이었다. 멀리는 31년 전의 기미년 3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뒤덮었던 감격적 장면과 너무나 흡사했다.
더구나 해주방면으로부터 영문을 모른채 북상하여 재령읍 교외에 다다른 군용트럭 1대를 의거대가 탈취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며 읍내로 들어오자, 군중들은 유엔군 낙하산부대가 입성하는 것인줄 속단하고 목이 터질 듯 만세로 환영했다.
그러나 자유해방의 환희는 너무 성급했다. '반전의 피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치게 된다.
대반전, 무자비한 진압
반공의거대가 미처 장악하지 못했던 노동당 재령군당부에서 반격의 모의가 진행되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골수당원들은 형세 불리함을 직감하고 인민군 무력부대에 급보를 알리기 위해 '급사'를 교외로 파견했다. 때마침 해주방면에서 후퇴 이동중이던 인민군 부대를 만나 '재령읍의 대변고'를 숨가쁘게 고하였다. 재령읍에서 먼저 도망쳐 나왔던 인민군 소부대도 거기에 어울려 있었다.
"뭣이? 반동새끼들이 폭동을 일으켜? 좋소, 우리 부대가 진압할 테니 당원동무들은 길 안내하기오!"
마침내 인민군 2개 중대 이상의 병력이 자유해방의 환호성으로 들끓는 재령읍에 일제사격을 가하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순식 간에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반전하는 재령읍.
필자는 '대반전'으로 변해 간 이제부터의 경위를 황석영 소설 '손님'속의 글로 대신 소개하겠다. 이 땅의 많은 진보좌파 논객들이 터부시해 왔던 사건의 진실을 같은 진보파의 작가인 황석영씨가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용기있게' 서술한 내용이 그들에게는 더 객관적일 수 있으리라는 배려 때문이다.
황석영씨는 그 대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미군은 아직 해주에 입성도 하지 않았고 그맘때에 겨우 문산을 지나 임진강을 건널 즈음이었다.
전선은 훨씬 아래쪽에 있었지만 평양방어를 위한 작전에 대비해서 서부전선의 일부 인민군 병력이 철도를 따라서 퇴각 중이었다. 대대병력쯤 되었는데 이들은 무장도 제대로 못하고 복장도 엉망인 내부서원들과 민청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재령이 반동들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은 행군을 멈추고 서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세한 화력도 그렇지만 병사들은 한반도 곳곳에서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른 정규군이었다.
그들은 병력을 나누어 우선 선발대가 재령읍내를 우회하여 신천으로 나가는 도로변의 언덕에 매복하여 퇴로를 끊었다. 그리고 좌우로 공격로를 정하여 재령읍내를 포위하고 중화기와 박격포로 무장한 정예중대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이들 앞에 안내자로 나선 자들은 살육의 밤을 탈출해 나왔던 재령군 당원들이었다.
황주 나가는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초소를 지키던 봉기 청년들은 몇번 총을 쏘다가 읍내 쪽으로 퇴각하고, 건물이나 군청 앞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둔 곳에 배치되었던 봉기 청년들은 제법 오래 버티었다.
서로 총격이 오가는 교전이 이십분쯤이나 이루어졌을까. 그들의 배후와 양옆으로 포위망이 조여들자 일부는 화선을 이탈하여 골목길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압은 간단하게 끝났다.> ('손님'의 200p에서)
인민군 정규부대의 무력 앞에 반공의거대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탄약도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벌어진 참상을 황석영 소설 '손님'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규군(인민군:필자주)은 과감하고 무자비하게 뒷마무리를 했다. 우선 부상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포로도 현지 당원들이 선별하고 나면 간단하게 아무 벽에나 뒤돌려 세워놓고 일제히 사격했다.
재령으로 돌아온 내무서원이나 민청원들은 가족 중의 생존자들과 포로를 통하여 대강의 인맥을 파악하고 군병력을 동원해서 적들(봉기 청년들:필자주)의 색출에 나섰다.
그들은 전부터 반동이라고 파악된 집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 집까지 찾아가 상대방이 그랬던 것처럼 집안에서 온 가족을 처형해 버렸다.
군병력은 이틀 동안 읍내를 장악하고 후속부대가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합류하여 다시 황주방면으로 퇴각했다.
재령에서의 사흘 밤낮이 구월산(구월산) 인근에서의 피의 도화선이 된다.> ('손님'의 200p에서)
재령의 반공의거는 이렇게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거대원과 양민들 320명이 목숨을 잃었다.
13일 밤부터 재령읍은 유엔군이 입성하는 17일까지 공동묘지처럼 을씨년스럽고 피바람에 숨을 죽인 공포의 밤과 낮을 지내게 된다.
작가의 양식과 용기
황석영 소설 '손님'에서 필자가 인용한 앞의 글 중에는 부분적으로 실제상황과 조금 다른 표현이 더러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지엽적 차이에 불과하다. 소설 창작의 기법상 있을 수 있는 일이므로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 기특한(?) 요체는, 진보파 작가로 지칭되는 황씨가 '역사의 진실' 앞에 지적 양식으로 접근하여 밝혀야 할 것은 분명히 밝힌 문학인의 용기이다.
북진 중의 유엔군이 입성하기 4일 전에 재령에서 반공무장봉기가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 인민군 정규부대가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의거대원·기독교인·반동분자·양민들을 수많이 처형했다는 사실, 그러한 재령의 비극이 이웃 고을인 신천의 '대폭발'을 촉매하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사실 등 일련의 맥락과 역사적 진실을 소설 '손님'에서 읽을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황씨의 소설 '손님'은 이 땅의 많은 진보좌파 논객들이 '애꾸눈 시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비열하고 경박한 악습을 대담하게 뛰어 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동안 진보좌파 논객들은 북한에게 불리해지거나 북한 당국의 역린을 건드리기 쉬운 이야기들은(재령·신천에서 대규모 반공 무장의거가 일어났었다는 사실 따위는) 능청스럽게 은폐하고, 남한에게(특히 보수진영이나 미국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어 보이는 '북한제 선전물'은 확대재생산하여 열심히 불어대는 것을 특기로 삼아 왔다.
실제로 진보좌파 논객들이 '재령·신천사건'을 빗대어 '미군의 대량 양민학살'이라고 성토한 글은 수없이 보였으나, 북한 주민들의 '반공의거'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한 글은 여태껏 찾아볼 수 없었다.
황석영씨가 처음으로 진보좌파 논객들의 우렬한 '터부의 벽' 한 모서리를 깨버린 셈이다. 필자가 그의 양식과 용기를 평가하는 소이는 거기에 있다.
하지만 의롭고 비극적이고 민족적 수치이기도 했던 그 사건의 본질과 상황을 소설 '손님'이 완벽하게 형상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 무엇이, 어떻게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가? 그것은 본막 제2장에 해당되는 '신천사건'의 진상을 살피는 데서 해답의 윤곽이 떠오른다.
신천의 '다비데군' 궐기
매서운 서북풍을 막아주는 구월산맥을 병풍처럼 두루고 어로리 대평야를 치마폭처럼 펼쳐 안은 신천군의 지정학적 특성은 이미 전편(상·중)에서 살핀바 있다.
풍운 거치른 근·현대사에서 봉수대 횃불이 이어지듯 달려온 '신천 인맥'의 영기에 관해서도 대충 소개하였다.
그러면 이제 공산통치 5년의 악업을 자유의 제단에서 심판하기로 작심한 신천의 '다비데군'이 건곤일척의 봉기를 감행한 본막 제2장을 조명할 계제가 되었다.
독자들은 여기에서 별표 <유엔군 북진시 황해도지역 수복전황도>에 잠시 눈길을 멈추기 바란다.
각 고을(시·군)의 지명 옆에 표기한 일자는 평양을 향해 북진 중이던 유엔군이 그곳에 도달, 입성한 날짜를 뜻한다.
이 전황도를 보면 재령과 신천에서 반공의거가 일어난 10월 13일 현재 유엔군은 백천∼금천∼시변리 전선에 도달해 있었음을 알게된다. 재령과 신천의 방공의거가 얼마나 일찍, 먼 후방지역에서 감행되었는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신천의 반공의거는 본시 10월 14일 새벽 5시를 기하여 궐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루 앞선 13일 오후 3시에 재령읍에서 먼저 봉기하였고, 원통하게도 인민군 정규부대에 진압되어 엄청난 살륙극이 진행 중이라는 비보를 다급히 전해들은 신천의 '다비데군'은 더 지체하거나 망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단은 의연하고 단호해야 하는 법, 마침내 13일 밤 9시를 기하여 궐기의 봉화를 높이 쳐들게 된다.
13일 한밤중에 궐기한 때로부터 18일 오후에 유엔군 수색대가 들어오기까지의 5일 동안, 신천군 전역에서 벌어진 반공의거군(순수 민간무장대) 대 공산무장세력(인민군포함)의 대격전은 한국전쟁사에서 특이한 장절로 기록되어야 할 유별난 '전투'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사에 정통한 독자라면 유럽지역의 동부전선(독소전)에서 발생했던 '바르샤바대봉기'를 기억할 것이다.
나치스독일군이 수세에 몰리고 소련군이 폴란드 국경선을 넘어 진격 중이던 1944년 가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항독 무장봉기가 일어나 한달 이상이나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바르샤바봉기는 소련군의 정략적이며 고의적인 방관과 독일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말미암아 비극적 종말을 고하였다. 폴란드 국민들이 통석지사로 여기는 대목이다.
전쟁학으로 보면 신천의 반공의거는 '바르샤바봉기'에 비견되는 일면의 성격을 지녔었다.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신천의 반공의거대는 진압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력해방'의 깃발을 당당히 내걸었다. 뒤늦게 북상하는 유엔군에게 무혈입성의 길을 터주는 장거였던 것이다.
5일 혈투의 승인
신천 반공의거의 횃불이 점화된 때로부터 승리의 태극기를 게양하기까지의 '5일간 혈투기'는 여기서는 가급적 축약하려고 한다.
황석영 소설 '손님'과 '학살박물관'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이 글의 주제를 산만하게 만들 우려가 있겠기 때문이다. 이미 발표된 많은 문건들에서 그 피어린 전황을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재령 반공의거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므로 앞에서 약간의 지면을 할애하여 그 아쉬움을 덜어보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필자의 이러한 작의는 '하루 의거'로 비극을 맞이한 재령읍에 비하여 신천 봉기가 5일 간의 사투를 이겨낼 수 있었던 승인을 가려보는 징검다리로 삼게도 된다. 그 승인 곧 특징만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신천 반공의거는 읍내 장악과 거의 호흡을 맞춰 북부·노월·산천·용진·문화·궁흥·용문·온천면 등의 지하조직원들도 궐기함으로써 군단위 공산당국의 통제기능과 진압능력을 일거에 마비시켜 버렸다.
반공의거대는 궐기 신호와 함께 읍내 여러곳에 불을 질러 밤하늘을 싯뻘건 '화공'으로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일제히 종을 울렸다. 한밤중에 불기둥이 치솟고 종소리가 진동함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정신적 공황에 빠져 허둥거렸다.
밤 11시쯤, 유엔군 항공기가 봉화불로 물들인 신천읍 상공에 나타나 폭격을 하지 않고 선회하다 돌아갔다. 얼마 후에 다시 비래한 항공기는 몇 발의 조명탄을 터뜨려 밤하늘을 불꽃놀이처럼 수놓았다.
그 무렵에 유엔군사 방송이 "신천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난 것 같다"고 보도하더라는 소리가 전파되었다. 의거대원, 군중들의 사기와 투지는 한껏 고조될 수밖에…
무장봉기대는 혈기지용의 학생, 청장년들이 여러 지하단체 소속으로 망라되었으나 곧 '봉기군사령부'를 구성했다. 신상규 사령관(구국동지회소속)을 추대함으로써 단일 지휘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봉기군의 최초 무장은 경화기 150정 내외, 화염병 200개 정도였으나 기습 전과의 확대로 노획무기가 마침내 1천여 정에 달했다.
특히 면단위 지역에서는 몽둥이·죽창·농기구·도검까지 들고나와 허둥대는 인민군·공산당원들을 도처에서 각개격파할 수 있었다. 공산측 반격도 만만치 않아 내무서·노동당청사에서는 여러번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김익두목사의 서부교회는 거의 몰살을 당하였다.
특히 퇴각 이동 중이던 인민군 정규부대가 (재령에서 있었던 일처럼) 신천읍에 진입하여 격렬한 시가전이 3차례나 벌어졌다. 그러나 봉기군은 자력으로 역전감투하여 적군을 몰아냈다.
북부면 봉기대가 황해도인민위원장 이용진과 교육부장 김문국 등 요인을 생포한 것은 신천봉기의 하일라이트가 되었다. 구월산으로 숨어들려고 이동 중이던 황해도 노동당부 핵심자 일행을 무장봉기대가 생포한 일막은 신천반공의거의 최종 승리를 상징하는 개가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사에 있어서 '이상한 전투'로 기록되어야 할 신천반공의거는 10월 18일 마침내 막을 내렸다.
봉기군사령부와 군내 곳곳에 인공기 아닌 태극기가 떳떳이 게양되었고 교회당에서는 '피로 쟁취한 승리의 종'을 힘차게 타종하였다.
그날 저녁, 그 깃발과 그 종소리의 환영을 받으며 '해리슨'이라는 위관장교가 이끄는 유엔군(미 제1군단 산하부대) 수색대가 신천읍에 들어오게 된다. 무혈입성….
무장봉기 혈전에서 반공의거대가 거둔 전과는 다음과 같다.
◆노획
△자동차 118대 △야포 2문 △반전차포 37문 △중경기 195정 △소총 4,046정 △따발총 312정 △권총 46정 △탄약 6백여 상자 △우마차 300여대
◆포로
△인민군·내무서원·핵심당원 1,478명 적군 살상자는 유감스럽게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전선없는 전투였고, 살상자 중에는 인민군, 내무서원, 노동당원, 민청맹원, 여맹원 등이 혼재했으므로 그 내역을 집계하기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노획장비와 포로가 그만한 규모였으니 군사학적으로 적의 정규군 1개 사단정도를 괴멸시킨 전과였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반공의거에 참여한 '다비데군'의 희생자는 524명. 10·13봉기로부터 1개월이 지난 11월 13일, 신천여자고등학교 교정에서 순의열사 524위의 합동장례식이 엄수되었다.
안장지는 부엉산, 영구행렬이 지나가는 10리 연도에는 수만의 군민이 몰려나와 고개를 떨구었다.
'카인의 후예들'이었는가?
유엔군 수색대는 2∼3시간 정도 머무르면서 신천군 일대의 정세를 확인한 다음 훌쩍 떠나갔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적도 평양 공략이 우선 목표이므로 진격로 후방지역에 병력을 빼내어 주둔시킬 여력이 없었으며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신천·안악·은율·송화·재령 등 구월산 언저리 지역에는 권력의 진공상태가 형성된다.
공산 세력은 줄행랑을 쳤고, 유엔군은 훌쩍 지나가 버린 다음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한국 정부는 행정관할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공권력 부재'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문서상으로는 미 제8군 민사처 관할하에 놓인다고 했으나 군단위 현지까지 관계관을 파견, 주재시킬 형편은 아직 못되었다.
반공의거라는 '민병의 혈투'로 마침내 해방된 이 지역은 과도적인 치안유지와 자치행정이라는 '특수한 지대'로 변모했다. 필연적으로 무장봉기대를 주축으로 하는 반공인사들이 공권력 부재의 빈 공간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제2의 비극이 연출된다. 이데올로기의 상극에서 비롯된 증오, 한풀이, 보복, 발악, 반격, 역반격 등 '동족이 동족을 결딴내는 불상사'가 이어진 것이다. 더욱이 구월산에 도망쳐 들어간 인민군 패잔부대와 무장한 공산당원들이 '구월산빨치산'이라는 기치 아래 인근 부락을 자주 습격하여 살해·약탈·민심교란을 반복한 준동은 이 지역에서의 쌍방간 살륙극을 한층 에스커레이트 시켰다.
황석영씨가 소설 '손님'에서 리얼하게 묘사한 살륙극은 실재했던 소재에다 문학이라는 허구의 옷을 입힌 것이지만, 이념적 가치기준을 일단 접어두는 경우 '카인의 후예들'이 연출한 '민족의 상처'였음에 필자는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특히 황석영씨가 소설 '손님'의 <8 시왕-심판마당>에서, 인민군 연예대원으로 나갔다 낙오된 두 어린 소녀를 이 소설의 주인공(류요섭:당시 중학생)이 남몰래 숨겨두고 극진히 보호했으나 그의 형(류요한:당시 20대 치안대원)이 이 비밀을 알아내고 동생 모르게 두 소녀를 죽여버리는 이야기는 그 '눈물겨운 지역'의 당시 정황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압권이다.
필자의 사사로운 소견이지만, 황석영씨가 그 이야기만을 독립된 소재로 따로 떼어 단편소설로 엮었더라면 6·25 전쟁문학에서 백미편으로 평가되는 '명품'이 되었을텐데 라는 망외의 아쉬움도 남는다.
유혈은 '민족의 객혈'
구월산 언저리 수복지역의 자치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청천강 너머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 인해전술을 견디지 못하고 38선 이남으로 썰물처럼 후퇴함에 따라 경의가도 서쪽편에 멀리 외진 구월산 언저리는 순식간에 '방기지대'로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주전선의 역전으로 크게 고무된 구월산적색 빨치산과 지하에 잠복중이던 공산당원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수의 주객이 뒤바뀌는 새 국면이 도래한 셈이다.
필연적으로 쌍방간의 살륙전이 전개된다. 향토를 사수할 것이냐, 남쪽으로 피란할 것이냐의 기로에 놓인 반공의거세력과 권토중래의 호기를 맞이한 구월산빨치산·지하공산세력 사이의 최후결전이었다.
눈보라 속에서의 그 혈전이 구월산 언저리 반공의거의 에필로그가 되는 것이며 '카인의 후예들'이 연출하는 비극의 제3막이 되기도 한다.
유난히 추웠던 그 해 12월, 설원에 뿌려진 유혈은 짙고 흥건했다. 그 유혈은 이데올로기라는 당의제로도 혁명이라는 랑만성으로도 분식될 수 없는 '민족의 객혈'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현장에 있었던 필자는 반세기 전의 이 민족적 상흔을 새삼 헤집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반추할 생각이 없다.
신천의 반공의거대는 안악반공무장대와 어울려 구월산빨치산의 내습에 단호히 맞섰다. 유엔군의 지원이 전무한 고립무원 상태에서 신천읍을 세 번이나 빼앗겼다 도로 빼앗는 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산군 정규부대가 사리원·재령을 점령하고 신천에 대한 압박을 가해옴에 따라 '신천읍 사수'는 불가능해졌다.
1950년 12월 22일이었던가.
신천·안악반공의거대(본대) 최후의 날이 왔다. 눈물을 머금고 고향을 버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 '최후'는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랑스러운 '13봉기'의 깃발을 거둔 다음 반공유격대로 거듭나는 전신의 새출발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휴전이 성립된 1953년 7월까지 구월산 언저리 4개군(신천·안악·은률·송화)의 반공무장대는 '동키(Donkey)부대'라는 기치 아래 반공빨치산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필자도 그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 반공빨치산 활동은 이 글의 테마 밖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필자는 앞의 글에서 반공무장봉기의 의로움과 함께 '살륙전' '처형' '카인의 후예' 같은 살벌한 단어를 여러번 등장시켰다. 황석영씨 소설 '손님'은 그같은 단어에 함의된 '학살 이야기'를 주요 소재로 삼고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더구나 이 땅의 일부 진보좌파 논객들이 '신천사건=양민학살사건'이라는 등식을 되뇌이기 때문에 신천의거의 본질이 왜곡되거나 묻혀버린 아쉬움을 통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구월산 언저리 고을에서 '학살'이 없었는가? 그 회답은 "있었다"이다. 또다시 "학살은 북한 주민에 대한 미군의 만행을 말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가 정답이 된다.
필자가 현장에서 견문한 체험과 반공의거 가담자들의 증언과 제3의 자료들을 아우르는 경우 그 불행한 시기에 구월산 언저리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한국사람, 조선사람'의 사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옳다.
A형 : 반공 우익계의 희생자
1. 공산기관에 예비 검속되어 학살된 사람들.
2. 반공봉기에 가담하여 교전 중 산화한 의거대원들.
3. 퇴각·이동 중이던 인민군·공산기관원에 살해된 양민들.
4. 구월산 공비의 습격으로 살해된 치안대원과 부락민들.
5. 1·4후퇴 철수작전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
6. 공산군의 복귀 후 치안사업 협력자로 색출되어 처형된 사람들.
B형 : 공산 좌익계의 사망자
1. 방공의거대 습격으로 사살된 공산기관 요원들.
2. 퇴각 이동 중 반공의거대의 습격으로 사살된 인민군과 공산당원들.
3. 의거 성공 후 치안사업 과정에서 색출 처형된 공산분자들.
4. 구월산 공비 토벌작전으로 사살된 인민군과 공산분자들.
5. 구월산 공비와 내통하다 적발되어 처형된 사람들.
6. 치안대가 공산군에 밀려 철수하면서 처단한 공산분자들.
희대의 역사 날조 '신천박물관'
수많은 주검들의 사인은 이렇게 분류되어도 사항별 실수를 가려낼 수 있는 자료는 우리에게 없다. 반공의거대는 월남했고, 현장은 북한 통치하에 있으므로 개산이나마 해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북한은 1952년 3월에 국제민간법률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라는 좌파단체의 조사단을 끌어들여 신천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학살사건 보고서를 작성, 국제적 반미·반한 여론조성에 활용했다.
세계적 화가 '피카소'가 그 보고서에 깜박 속고(당시 프랑스공산당원, 후에 탈당) <조선에서의 학살>을 그리는 모티브가 된다. 결과적으로 그 일은 한국전쟁사의 낙수첩에서 최고 코미디로 치부되지만….
북한의 날조 장난질은 대담해져서 1957년에는 신천읍에 지옥도같은 '박물관'을 설치했다. 그 소개책자와 전시판에는 미군에 의한 신천의 피학살자가 무려 3만5,384명, 안악이 1만9,072명, 은율 1만3천명, 송화 5,545명, 재령 1,400명이라고 적어놓았다. 한마디로 '백발3천장'식이지만, 합계 7만여명을 살해한 범죄상을 고발한다는 것이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이다.
하지만 필자는 지극히 간명한 두 가지 반증만으로 '신천박물관'의 황당무계한 허구성을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다.
첫째는 미군과 한국군의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이다.
실제로 신천·안악·은율·송화·재령 등지에서 미군이나 한국군의 주둔부대라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이 세상엔 없다. 그 지역에서 작전·주둔한 유엔군 부대가 없었는데도 무슨 도깨비 요술로 학살을 자행했단 말인가.
둘째는 정황론리의 모순덩어리이다. 당시 구월산맥에는 련대규모의 공산빨치산이 있었으며, 김일성은 그들이 영웅적으로 싸웠다 해서 훈장까지 수여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 아닌가? 정규군도 아닌 반공민병대(의거대와 치안대)에게 공산계(자기네) 주민 7만4천여 명이나 도살되는 50일 동안, 구월산빨치산은 산속 깊은 동굴에 숨어서 부들부들 떨며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실토해야 이치에 맞는다. 김일성이 수여한 훈장과 김일성이 주장하는 피학살자 7만여 명은 성립되지 않는 방정식이 아니고 무엇이냐.
허구의 가면을 이렇게 벗겨내고 보면 '신천박물관'의 나상은 곧바로 드러난다. 북한은 다음과 같은 '논지'로 허깨비사당을 꾸민 것이다.
"우리 공화국에서 반공의거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다. 아예 없던 일로 말소해 버린다. 그래도 살육은 있었으니까 미군에게 '학살자 모자'를 덮어 씌운다. 월남자 수만 명도 공화국의 수치다. 그놈들을 피살자 집계에 넣어 물타기하면 학살규모가 커질 것 아닌가…."
'신천박물관'은 이같은 허구의 논지로 꾸며낸 희대의 역사 날조 조영물이다.
황석영씨 소설 '손님'은 필자의 이러한 논단까지에는 아직 미치지 않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