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수 천억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으며, 일부 비자금은 밝혀지기도 했으나 정확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반체제인사·민주화 운동가·학생운동가 등의 정적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과 삼청교육대 사건에 대한 비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자와 12·12 군사 반란·5·17 쿠데타의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나회를 비롯한 전두환 관련 인사들과 일부 반공주의우익 세력에서는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일컬으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경상남도합천군 율곡면 출신이지만, 5세에 대구광역시로 이사했으므로 정치적 고향이 대구광역시로 간주되기도 한다. 천주교 영세를 받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훗날 백담사에 기거하던 중 불교에 귀의했다.
생애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전두환은 1931년1월 18일경상남도합천율곡면 내천리에서 완산 전씨(完山 全氏) 전상우(全相禹)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점문(金點文)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위로 형 열환(1915년생), 형 규곤(1916년생), 누나 홍렬(1918년생), 명렬(1922년생), 누나 선학(1925년생), 형 기환(1929년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뒤로도 여동생 점학(1935년생), 남동생 석환(1937년생), 경환(1942년생)이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 양반 가계로 13대조인 전제가 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이후 무관이 몇명 배출됐으나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약간의 의학 지식도 갖추고 있던 그는 정식 진료소를 차릴 수준은 아니었으나 마을 주민들을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아버지 전상우는 성격이 괄괄해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는데, 전두환은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다. 전상우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어머니 김점문은 자녀들 중 전두환에 대한 기대가 강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강했는지, 지나가는 승려를 대접해준 뒤, 그 승려로부터 '어머니의 튀어나온 앞니가 아들의 운세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김점문은 부엌으로 달려가 쇠 집게로 생니 3개를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유년기
전두환이 태어날 때 그 위로 세 명의 형이 있었으나, 두 형 중 전열환은 고향 친구들과의 놀이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둘째 형 전규곤은 추락사고로 사망했고, 전두환과 전경환 사이의 동생 전석환은 어렸을 때 병으로 사망하여 셋째형 전기환과 그, 동생 전경환과 누이들만 살아남았다.
유년기에 전두환은 근처 서당에 다니며 한학(漢學)을 수학했다.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합천율곡면에서 대구로 이사했다. 이후 전두환은 8세 되던 해에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했다.[4] 유년기의 전두환은 학업성적이 우수했지만, 4학년때 초등학교를 휴학해야 했다.
*소년기와 학창시절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때려 눕히고 절벽으로 떨어뜨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4]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는 만주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귀국했다. 전상우는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4]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고,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자발적으로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종합학교갑종장교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형 전기환의 군 입대로 인한 부모의 반대로 입교하지 않았다. 이때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한국군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정규 4년제 모집 과정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1951년 입교하였다.
체력이 강하고 운동을 즐기던 전두환은 운동선수이기도 했으며, 축구선수였고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으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축구선수로서 계속 활약했다.[6] 이 전력이 있는 전두환은 대통령이 된 이후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으며, 박종환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불러다 축구국가대표팀의 작전과 선수기용을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6] 전두환이 생도시절에 주최된 전국 대학 축구대회에서 육군사관학교는 당시 골키퍼였던 전두환의 맹활약으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1955년9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사 11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했고,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에 입학해 1959년 1월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을 6기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났다.
형제들 중 경제력이 나았던 그는 형 전기환을 대신해 노부모를 모셨다. 아버지 전상우는 1967년에, 어머니 김점문은 1978년에 사망했다.
군인 복무
*장교 생활
1955년 소위로 임관하여 25사단 소대장에 보임되었다. 1959년 육군 공수특전단에 전입하면서 미국에서 선진 군사교육을 배우기 위해 1959년2월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특수전학교에 입교했다. 특수전학교 재학 중 그는 심리전과목을 주로 이수했으며 야간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해 6월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심리전 교육 과정을 마친뒤 귀국했고,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유학 가서 미국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에 입교하여 차지철, 최세창, 장기오와 함께 레인저 과정(Ranger Tranning Course)과 침투로 개척(Path Finder)과정을 이수하고 7월 비행기편으로 귀국했다.
그 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던 중 1961년 4월에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에 발탁됐다가 곧 서울대 문리대의 ROTC 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5월 16일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가서 육사 생도들의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주도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다. 5·16 군사 정변 과정에서 박정희의 부하 장교들은 육군사관학교를 장악하기 위해 3명의 장교들의 인솔 하에 무장병력들을 육군사관학교에 파견했는데 그 지휘관은 오치성대령(육사 8기), 박창암 대령(육사 8기) 그리고 훗날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될 차지철대위였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육사생도들에게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기 위한 시가행진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생도들은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의 지시로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뒤 상부에 밀고했다. 이후 김종필의 지원하에 전두환은 육사를 장악할 수 있었고 강영훈은 구금되었다.
이 공로로 전두환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처리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농담이나 사적인 잡담은 되도록 줄이고 자기 일에만 몰두하였다.
*5.16 군사 정변 이후
1961년7월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로 찾아와 자신에게 육만환 짜리 수표 두 장을 내놓고 간 노모씨를 경찰에 고발하여 노씨가 중부서에 수감되기도 했다.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해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였다.
1962년12월말에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이후 인재등용의 일환으로 전두환과 차지철등의 부하 장교들을 정치권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차지철 대위는 이에 응해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 대위는 군대에 남겠다며 거부했다. 이에 박정희는 몇번이고 계속 권유했으나 전두환은 이 말로 일축했다.
"각하,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부하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박정희는 전두환의 용도가 이미 정혀져 있음을 깨닫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중단하는 대신 전두환을 군 내부에서 특별히 총애하게 되었다.
1967년서독 시찰 중 아버지 전상우의 부음을 접한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했지만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
*월남 참전과 숙청 위기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에 파병·참전했고, 파병기간 중 한 차례의 패전도 없었으나 예하 군 장병들로부터 인망을 잃었다.(특히 식수가 부족한데도 혼자 진중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거나 암거래 시장에서 무기를 사와 전리품으로 상부에 보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귀국과 함께 훈장을 주려했으나, 월남전에서의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의 훈장수여를 반대하였다.) 1971년 귀국 후 장군 보직인 제1공수특전단 단장에 파격적으로 임명되고, 1974년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육사 11기 최초로 준장에 진급됐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제 1사단장을 지냈다. 또한 1사단장 재직 당시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두환은 윤필용의 비호속에 손영길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 갔지만, 육사 동기이자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준장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13]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강창성에 의해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돼 위기에 몰렸다.
*차지철과의 관계
1979년 3월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이 때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실세였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그 둘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한 이후에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9년10월 26일에 대통령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저격당하는 10·26 사건이 발생했다.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으로 일시 권력을 승계했다. 이 날 전두환은 부하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의 설치 기안을 명령했다. 10월 27일 새벽 비상국무회의에서 박정희 대통령 유고안이 내려졌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자 전두환 소장은 곧 계엄사령부 예하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에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수사 지시 명령을 받았다.
10월 27일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 국내담당차장 전재덕, 검찰청 총장 오탁근, 치안본부장 손달용 등을 보안사 2층 사령관 접견실로 불렀다. 전두환은 이들을 입구에서 삼엄한 몸수색을 했으며, 상석에 앉아 박정희의 서거를 알린 뒤 범인은 중앙정보부라고 지목하고 박준광 육군 소령을 통해서 각 기관의 업무지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곧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에는 ‘앞으로 일체의 예산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합수본부의 허가를 받으면 집행할 수 있다’라며 행동에 제한을 두었다. 그 뒤 “앞으로 모든 정보 보고는 오후 5시, 오전 8시에 합수부에 제출하라”라고 지시했다. “정보부는 전재덕 차장이 당분간 장악하라” 라고 지시했다가 선임자가 해외담당차장임을 알고는 수정했다.
1979년10월 27일 권력 공백에 의한 혼란 중에 전두환은 정승화의 지시를 받아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자격으로 김재규, 박선호 등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으로 체포했고, 언론에 발표했다.
11월 6일 합수부장으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계엄군법회의에서 공개재판할 것을 언론사에 발표했다. 이날 그는 10.26 사건은 김재규 단독계획범행이고 정승화는 무혐의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내외부의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수사 기간 중 협조해준 국민과 관계기관에 감사를 표한다고 발표했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 정호용, 유학성, 허삼수 등 육사 11기 출신 장교들이 주도하는 비밀 사조직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2.12 사태와 군부 장악
12월 6일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이 제안한 수사계획서에 따라 반란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부장으로서 현장에 있던 김계원 및 계엄사령부 사령관 육군 대장정승화 등을 내란방조죄로 체포하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육군소령과 병사 2명이 신군부 병사들이 쏜 총격에 사망하는 등 물리적 교전이 발생했다.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반대하던 수경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곧 체포됐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충역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뒤 강제 예편당했고, 이 과정에서 반발하던 육군 장군과 장교들은 인사 불이익을 받고 강제 퇴역, 예편당했다.
1980년 2월 보안사는 정보처 아래 언론반을 설치했다. 보안사 언론반은 전두환의 지시 아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기 하려는 목적에서 언론을 장악하기 위한 공작인 K-공작계획을 실행했다. 1980년3월 군인사법 위반 논란 속에서 전두환은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앉았다가 이어 4월 14일 헌법이 정한 정보기관의 일인 독점 금지를 위반하고 제10대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취임해 국내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쿠데타에 의한 집권 과정
1980년 5월 초순경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내 정세 불안을 해소한다며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인‘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17]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를 받아, 이학봉은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을 연행할 계획을 세웠다. 전두환은 노태우, 황영시, 정호용, 유학성 등 신군부 핵심 세력과 논의를 하여 '시국수습방안' 실행 동의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5월 10일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한의 남침 준비 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5월 13일주한미군 사령관 위컴과 미국 국무부 대변인는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흘린 정보라고 평가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의 한반도 담당반장과 한국 담당관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고 밝혀, 신군부가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명분이였던 '북괴남침설'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해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서울역 광장에서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운집해 데모를 했다. 5월 12일에는 계엄 해제안이 국회에 상정이 됐고, 여야 총무는 5월 20일 10시 개헌안과 비상계엄 해제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임시국회를 개회하기로 합의했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 , 정호용 등에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 비상기구 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전두환은 사전연행계획에 따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영장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해서 가택연금시키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일시 정지시켰다. 계엄 확대와 동시에 신군부는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금지,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내렸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들은 신군부의 쿠데타적 조치에 항거하는 시위를 했다. 신군부는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했고 이로 인해 사태가 확산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국회에 배치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강제로 저지해, 오전 10시에 개회하기로 예정된 임시국회가 무산됐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했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에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했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됐다. 5월 27일 신군부는 무력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실행해 유혈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지휘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지휘계통에 불법개입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의 완강한 부인으로 인해 5월 21일 13시 전남도청 발포 명령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울의 봄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학생과 시민들은 실권자였던 전두환을 겨낭해 ‘전두환 퇴진’,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등의 격한 구호를 외쳤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대량 사상자를 내고 유혈진압되면서 학생운동권의 반(反) 전두환 기운은 고조됐다.
5월 27일 전두환은 내각을 통제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6월 초 국보위 위원에 피선됐으며, 국보위 상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선출됐다. 이어 7월 1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퇴하고 국보위만을 관할하다가 8월 5일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8월 22일 예비역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