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태(46) 새롬벤처투자 사장을 기자가 수소문하게 된 발단은 지난해 10월 말 어느 저녁 술자리 모임이었다. 공기업 국제팀장, 투자회사 사장, 그리고 기자들이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샐러리맨이 노력해서 부자가 된다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홍기태(46) 새롬벤처투자 사장을 기자가 수소문하게 된 발단은 지난해 10월 말 어느 저녁 술자리 모임이었다. 공기업 국제팀장, 투자회사 사장, 그리고 기자들이 모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누군가 “샐러리맨이 노력해서 부자가 된다면 얼마나 벌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보면 막연한 질문이었는데, 재계에 상당한 인맥을 갖고 있던 모 인사는 즉각 “홍기태 사장이란 사람이 있는데 수천억원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말로 참석자들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엄청난 거부(巨富)네요. 하지만 샐러리맨이 아니라 사장이잖아요”라고 하자 “아니야, 평범한 샐러리맨 시절 벤처기업에 투자해 그렇게 벌었다니까”라고 했다. 그날 술자리는 홍사장이 어떻게 부자가 됐는가에 대해 토론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홍기태 사장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됐다.
베일에 싸인 홍사장은 지난 8월부터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롬기술 지분 11.79%(4백27만주, 당시 매입가 2백30억원)를 장내에서 매입하면서 경영권을 목표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국내에서 적대적 M&A가 이뤄진 사례가 드물다는 측면에서 그의 시도는 금융시장에 적지 않은 파장을 던졌다. 기업인수를 하려는 홍사장과 이를 막으려는 새롬기술 오상수 사장은 지난 11월14일까지 치열한 대결을 벌였고, 결국 오사장이 경영권을 넘겼다. 표 대결(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다투는 세력간에 회사지분을 공개, 이사회를 장악하는 것) 없이 무혈(無血) 입성한 것이다.
홍사장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12월13일 임시 주총장에서 새롬기술 사장이 된다. 그는 10만명의 주주에게 회사의 경영 상황은 물론 본인의 신상 정보를 비롯, 회사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한 마디로 공인이 되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의 변화 때문인지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던 홍사장은 최근 뉴스위크 한국판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홍사장은 평범한 샐러리맨 출신으로 학맥이나 인맥, 그리고 집안 배경 없이 홀로 ‘자기 길’을 개척해 부자가 됐다(홍사장은 대구 계명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기에 입사할 당시 하숙비도 없었다). 그는 어떤 일을 해도 이해될 때까지 공부했다. 마치 금맥을 찾는 사람처럼 줄기차게 한 지점을 파고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한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그가 걸어온 길은 평범한 샐러리맨으로서 거부의 신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꿈을 현실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홍사장은 또 초토화된 코스닥 시장에서 생존한, 그리고 돈 버는 데 성공한 사람 중 한명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99%의 투자자가 코스닥 시장에서 돈을 잃었고 나머지 1%만 생존했다. 그는 이 1%내의 1%에 속했다. 이렇듯 그가 운 좋은 축에 든 것은 매일 자기 부정(否定)을 습관처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99년말 코스닥 붐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미련 없이 시장을 떠났다.
그는 마치 ‘유목민’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았다. 이것도 성공의 비결이다. 공군 구매담당 장교?대기업 자금팀 근무?외국계 은행 외환딜러?개인 투자자?벤처투자회사 대표 등 3∼5년을 주기로 변신했고, 변화된 상황에 적응했다. 이는 과거 80년대 이명박 서울시장(전 현대건설 회장)이 샐러리맨 신화를 이룩했을 때와 요즘 샐러리맨의 신화가 달라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시장은 부동산 시장 격동기에 건설업에 몸담았고 24시간을 뛰어 샐러리맨으로서는 최고봉인 회장 자리에 올랐다.
반면 홍사장은 금융을 중심으로 여러 분야를 떠돌았고 그때 그때마다 변화를 즐겼다. 그리고 그는 샐러리맨 시절부터 마치 1인 기업가처럼 활동했다. 목표를 세우고 실천했으며, 좋은 기업을 발굴하면 적금 통장을 깨서 투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80년대 샐러리맨의 신화가 건설업계의 이명박이라면, 2000년대 샐러리맨의 신화는 금융업계의 홍기태인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에 ‘미쳤다’는 점이다.
그는 지금도 벤처투자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벤처업계에 한파가 몰아쳐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일 손을 놓고 있을 때 그는 마치 벤처활황기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홍사장은 올해만 해도 20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벌써 성공의 조짐이 보이는 곳도 있다. 그가 이렇듯 업계와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은 벤처에 투자할 때 과거의 실적이나 시장 전망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벤처기업 CEO가 신뢰할만한 인물인지, 그리고 원대한 꿈을 갖고 있는지,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열정과 동료들이 있는지를 체크한다. 그뿐이다. 벤처기업의 미래는 인간의 크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가 꼽는 행운은 중학교 때까지 ‘시골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그의 고향은 가야문화의 발원지며 낙동강이 흘러가는 경북 고령이다. 홍사장은 중학교 때까지 공부한 기억은 없고 놀았던 기억만 있다고 말한다. 여름엔 냇가에 가서 수영하고, 겨울이면 눈 싸움을 했다. 계절의 변화에 그저 순응하면서 보낸 경험은 그가 군대에 입대하면서부터 주기적으로 삶의 형태를 바꾸는데 도움이 됐다.
딱히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에게 변화는 대응하고 방어할 것이 아니라 맞아들이는 대상이다. 마치 자연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맞아들이 듯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도심지에서 사는 사람들에겐 자연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끼기엔 한계가 있으며 변화란 대응해야 하는 불편한 것일 수 있다.
그의 삶에서 눈에 띄는 점은 변화를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공군 경리장교로 근무할 때 얘기다. 그의 첫 부임지는 부산 김해공항. 부임하자마자 그에게 구매담당이란 임무가 주어졌다. 공항 비행기 부품부터 콩나물까지 무려 1천여가지의 물품을 구매하는 역할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물품 구입처와 구입 금액까지 알려주는 리스트가 있었고, 자리에 앉아 결재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홍소위는 커피잔 하나도 직접 시장에 가서 가격비교를 했고, 가장 싼 곳을 찾아다녔다. “토요일·일요일에도 시장에 나갔다. 왜 이 가격으로 팔리는지 알아보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1년을 지내고 보니 30년 근무한 선임하사보다 물건 사는 실력이 좋았다. 실력은 결국 시장에서 온다.”
막연하게 입대했던 군대에서 그는 이른바 밸류에이션(Valuation·가치평가)을 훈련했다.
투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을 투자하기 직전 사려고 하는 기업이나 주식의 밸류에이션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군대에서 가치산정하는 것뿐 아니라 조직관리, 기초적인 금융 기법, 건설·군수장비 유통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했다고 전한다. 그가 공군장교로 제대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뒤 겪었던 일도 ‘변화’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보여준다.
홍사장은 1985년 삼성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공군장교 선배의 추천으로 삼성전기 국제자금팀에 들어갔다. 회사에 출근하자 그의 선임 과장은 “외환거래가 뭔지나 알고 이 부서에 들어 왔느냐”며 핀잔을 줬다. 홍사장은 과장에게 “모르겠다. 하지만 3개월 내에 내가 이 부서에 적응하지 못하면 사표를 내겠다”며 맞받아쳤다. 그때부터 그는 외환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외환거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삼성전자의 모 대리를 찾아갔고 둘은 “이왕 공부하는 이상 우리 함께 그룹 전체에 통용될 수 있는 외환관리 시스템을 만들어보자”는 데까지 의기투합을 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외환거래를 연구했고, 결국 환관리세칙을 만들었다. 홍사장은 “그 때 우리가 만든 환관리세칙이 삼성전자·삼성전기·제일모직에서 사용하는 세칙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홍사장이 삼성전기에서 외환딜러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안기훈(98년 삼성코닝 사장 시절 작고) 삼성전기 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환관리세칙을 만들어 상부에 보고할 때 안전무만이 유일하게 보고서의 가치를 알아주었다. 안전무는 입사한 지 3개월 지난 신입사원 홍기태를 불러 외화자산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
그 즈음 그의 실력이 발휘될 기회가 다가왔다. 86년 서방선진 7개국(G7)의 재무장관들이 모여 달러 약세를 논의하고 있었다. 달러 약세는 곧 원화 강세를 뜻했고, 달러 자산의 매도 포지션(어느 시점에서 팔겠다고 약속하는 상태)을 취하면 달러가 하락한 만큼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추세를 간파한 홍사장은 ‘원화 강세에 따른 당사의 대책’이란 보고서를 작성했다.
안전무를 제외한 나머지 임원들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과거 원화 강세가 이뤄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전무의 허락하에 홍기태는 3천만달러어치의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결국 1달러 對 8백원대 하던 환율이 6백50원까지 떨어졌다. 그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기는 30억∼40억원의 환차익을 올렸다(당시 회사 순이익은 10억원대).
회사에서는 그에게 그룹에서 주는 특별공로상과 부상으로 5백만원의 상금을 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당시 그의 연봉이 2백50만원대였으니, 무려 연봉의 두 배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막상 시상식에서 그는 12만원 상당의 콤포넌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을 생각하면 환차익을 낸 직원을 포상하기 힘들다’는 것이 회사측에서 밝힌 이유였다. 그는 “여기까지가 내가 클 수 있는 한계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 1987년 무렵이었다.
홍사장은 벤처투자로 돈을 번 사람이다. 주식시장에서 주식거래를 하면서 돈을 번 것이 아니고 증시에 상장되지 않은 벤처회사에 투자해 상장 직후 주식을 팔아 부자가 됐다. 홍사장은 “그렇다고 내가 벤처붐이 일 것이라든지 자본이득을 얻기 위해 벤처기업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외환딜러를 하면서 생긴 고민 때문에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지난 1988년 도이체방크 외환딜러로 스카우트됐고 상당한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것과 달리 외환딜러의 세계는 단조로웠다. 더욱 그를 괴롭히는 화두는 ‘내가 왜 엔화나 마르크화의 움직임을 놓고 매일 고민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비교적 간단하게 얻었다. 엔화의 움직임을 주목하는 이유는 일본이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국내 전자회사 대부분이 주요 전자부품을 일본에서 구입하기 때문에 엔화 강세면 부품 수입단가가 높아지고, 자연히 생산 단가도 상승해 결국 제품 경쟁력이 떨어진다.
“일본이 왜 기술 강대국이 됐는지 거슬러 올라가 보니 기술자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점을 알았다. 최고의 기술자들에게는 명장의 칭호를 주었다. 독일도 그랬다. 굴뚝 청소라도 최고로 잘하면 기사 작위를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고 해서 士만 중시했다. 기술자는 아무리 잘 해도 대접을 받지 못했다.”
이에 홍사장은 ‘그렇다면 내가 기술자들을 대우하자. 세계적으로 으뜸인 분야를 찾아내 적은 돈이지만 투자하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낮에는 딜러 생활을 하고 밤에는 벤처기업을 찾아다녔다. 특히 그는 소프트웨어 업체만 물색했는데 지금 출발해도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분야라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드웨어분야는 웬만해선 선진국을 따라잡기 힘들어 보였다.
지난 95년 그가 알고 있던 유일한 소프트웨어 회사는 한글과컴퓨터였다. “당시 이찬진이라는 사람도 잘 모르고 찾아갔다. 가서 엔지니어들을 사귀다 보니 새롬기술·엔씨소프트·휴맥스(당시 소프트웨어 회사였다)·안철수연구소·휴먼컴 등도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모두 투자했다.”
그는 95년 한글과컴퓨터에 투자한 뒤 돈을 벌어 시드머니(Seed Money, 종잣돈)를 만든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그는 97년부터 새롬기술·엔씨소프트·안철수연구소·휴맥스·휴먼컴 등에 잇따라 투자, 거액을 벌었다.
홍사장은 엔씨소프트에 투자해 거액을 번 2000년 말부터 벤처투자업계에 ‘1조원의 사나이’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투자이력에 대해 알고 있는 투자업체 L사장은 그가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홍사장은 “세상에 알려진 만큼 많은 돈을 벌지는 못했다”며 구체적인 재산 내역을 밝히지 않았다. 세상 이목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나 무조건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투자할 기업의 대표가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신뢰할 만한지,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직원들이 있는지 등 인간적인 요소들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어차피 기술력은 그가 검증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홍사장은 지난 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한 김택진 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꿈이 뭐냐”고 물었다.
김사장은 “5년내 1억달러어치의 소프트웨어 수출이 꿈”이라고 대답하자, 홍사장은 그 자리에서 투자를 결정했다. 홍사장은 그날 “이런 사람에게 투자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할 것인가. 이 회사는 틀림없이 성공한다”며 일기를 적었다고 한다. 창업 당시 엔씨소프트의 사업목적에 게임사업은 없었다. 향후 게임산업이 뜰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홍사장이 인간을 보고 투자한 사례는 최근에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00년 8월 창업한지 불과 2년만에 1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투스라는 회사다. 이투스는 김문수(25) 대표 등 서울대 창업동아리 학생들이 창업한 회사로 ‘누드교과서’라는 수능참고서를 만들어 최근 1백만권 판매를 돌파한 곳이다. 지난해 17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나, 올해 5배가 넘는 1백억원대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 이익도 많이 나 지난 11월 말에는 40억원대의 회사 사옥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렇듯 김문수 대표가 꿈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창업 초기 홍사장의 도움을 받아서다. 김대표는 2000년 9월 홍사장을 찾아와 “교육사업을 하고 싶다. 사회에 이익을 줄 수 있고, 나와 함께 할 동료도 있다”고 하자 홍사장은 그날로 투자를 결정했다. 김대표는 “당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우리처럼 참고서를 만들겠다는 회사에 선뜻 투자해주겠다는 홍사장의 말에 놀랐다”고 말했다.
“이투스 김문수 대표의 가능성을 굳이 수치로 표현하자면 5천억원쯤은 된다. 5년 뒤면 대교처럼 큰 회사가 될 것이다. 다른 투자자에게 투자를 권유했지만 회사의 실적이 없고, 앞으로 참고서 시장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나는 이런 접근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 막 창업한 기업에 과거 실적이 어디 있나. 기업의 미래는 기업가의 크기에 달려 있다. 인간의 가치를 측정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업가의 열정을 체크하는 데는 그만의 ‘비결’이 있다. 홍사장은 외환딜러 시절 세계 최고의 외환딜러가 되려면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소 엉뚱하지만 그는 전국에 도사란 도사는 다 찾아다니며 ‘미래를 읽는’ 능력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밤이면 수련원에 찾아가 도사들의 강의를 들었다. 1988년부터 8년 동안 그는 여러 도사를 만났다.
그 결과 그는 ‘호흡법’에 따라 도사가 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숨쉬기를 제대로 하면 에너지를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에너지가 높은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도 깨달았다. 에너지는 지식을 습득하는 힘이 되고 지식은 다시 지혜로 변화되며 이는 우리 삶으로 체화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경영자라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어쩌면 그만이 볼 수 있는 상대방의 에너지 정도를 얘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삭막한 금융계에서 그는 나름대로 자기 수양을 통해 자기관리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는 기업가에게 도덕을 외치듯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가정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부인과도 금실이 좋아 올해 둘째 딸을 얻었다. 첫째 딸(5)은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한동안 고생했다. 홍사장은 딸을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고, 산벗나무를 삶은 물로 딸을 목욕시켜 큰 효험을 본 적도 있다.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본인이 직접 체득한 이방법을 바이오 산업으로 연결시키는 것도 구상중이다. 이를 보면 그는 어쩔 수 없는 투자자다.새롬기술은 그에게 상당한 자본 이득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가장 많은 돈을 빼앗기도 했다. 그는 99년 새롬기술 지분을 팔면서 돈을 벌었고, 일부를 새롬기술의 미국 법인인 ‘다이얼 패드’에 투자했으나 지난해 법정관리로 그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됐다.
그는 지난 11월14일 오사장이 분식회계와 지분율 허위공시 등으로 구속된 직후 찾아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그를 평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오사장은 회사로 큰 돈이 들어오면서 생각이 바뀐 것 같다. 주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기업과 돈은 내 것이 아니다. 잠시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사장은 아직 젊다는 얘기로 그를 위로하고 싶다. 앞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
홍사장은 샐러리맨들에게 ‘꿈★은 이뤄진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늘 부국(富國)을 외친다. 이를 위해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발굴한다. 기업가들의 손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의 뒤를 이어 부자가 될 사람들은 누구일까. 분명 어디선가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 없이 뛰고 있는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첫댓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홍기태란 사람 앞으로 관심있게 보아야 겠군요. - 옛날 공대생 -
멋지군요. 박현주,홍기태,손성원.....등등...이 카페에서두 이 사람들에 버금가는 사람이 나올수도......오상수에게 새롬기술과 다이얼패드는 과분한 행운이었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