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입수한 백산 지청천의 자유일기는 1951년 5월부터 백산이 타계하기 한달 전인 1956년 12월까지의 육필 기록이며,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다. 백산의 외손자인 이준식(55) 전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위원은 “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 만주로 건너가면서부터 일기를 쓰셨는데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가는 과정에서 분실했다.”며 “1951년부터 다시 쓰신 광복 후의 기록으로 총 7권으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자유일기는 백산 사망 이후 막내딸인 지복영 여사가 관리해 왔으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많아 살아 생전 공개를 하지 않다가 지 여사 사망 후 서울신문을 통해 공개됐다.
자유일기에는 당시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인 백산의 모습이 잘 투영돼 있다. 경회루에서 열린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연회에 불참한 이유를 ‘만민이 기아 지경인데 30억원(圓) 비용을 들여서 (연회를) 거행함은 찬성할 수 없으며, 호화롭다(1952년 5월 2일 자유일기).’고 지적했다. 우당(이승만의 호)의 용인술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국정감사 보고를 보면 법망이 해이돼 제2의 장개석 정부를 답습하는 것 같다. 이는 애국자, 혁명가를 기피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용인법 때문(1951년 5월 1일 자유일기)’이라고 질타했다.
제헌의원과 2대 의원을 지낸 백산은 3대 의원 선거에 불참한 이유로 ‘모략과 협잡의 정치에 염증이 났고’ ‘솔직히 고백해 선거비용 조달이 막연하기 때문(19 54년 5월 1일 자유일기)’이라고 털어놓았다. 대표적인 우파 독립운동가였던 백산이 1954년 전면적 자유시장 경제 도입을 위한 헌법 개정에 반대했고, 노동문제·노동자의 복리보호를 세계 평화의 관건이라며 진보적 시각을 보인 점도 눈길을 끈다. 김좌진, 홍범도, 이동녕, 이시영, 김백범 등 함께 독립운동을 한 동지들을 그리워하던 백산은 1956년 12월 11일 조선혁명총사령으로 있을 때 자신의 직계 부하였던 정이형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애국자를 애지중지할 줄 모르는 세태를 한탄했다. 백산은 한달 후인 1957년 1월 15일 숨을 거뒀다. /김동현 2011-02-28
지청천 [池靑天]
독립운동가·정치인. 본관은 충주. 본명은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호는 백산(白山). 일찍이 교동소학교(校洞小學敎)를 졸업하고 배재학당을 거쳐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 2월 정부 유학생으로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東京陸軍中央幼年學校]에 입학했다.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제14사단에 배속되어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독일군과 싸웠으며 중위로 진급했다.
1919년 4월 하순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교성대장(敎成隊長)이 되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운 군사기술과 칭다오에서 얻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전력했다. 1920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교관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훈춘 사건[琿春事件]을 빌미로 출병하여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무차별 살육을 자행하자 서로군정서군 400여 명을 인솔하고 백두산 북록(北麓)의 제2군사기지로 대피했다. 이어 청산리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에 합류해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의 밀림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모인 각 독립군 부대와 협의한 끝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여단장이 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일본군의 추격과 중국 당국의 간섭을 피하고 보다 지속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 달네레첸스크 일대로 이동했다. 이어 레닌 정권의 치타 지방정부와 공동작전 및 협조에 관한 협정을 맺고 치타 정부의 원조하에 이르쿠츠크로 이동해 고려혁명군단을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치했는데 이때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일어난 자유시사변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만주로 돌아갔다.
그뒤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준비되자 김동삼(金東三)·배천택(裵天澤) 등과 함께 서간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해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임시정부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로 분열되어 결렬되자 다시 독립군 양성에 뜻을 두고 만주로 돌아갔다. 1924년 11월 남만주 일대의 독립단체를 통합해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해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대일전을 수행하기 위해 의무 의용병을 징집·편성하여 상비군 8개 중대를 두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7년 정의부·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가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을 전개했으나 각각 내부분열을 일으켜 1928년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분립되자,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자 했던 혁신의회에 참여해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혁신의회의 활동이 실패로 끝난 뒤 1930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창당에 참가해 그 산하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의 재정비와 역량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행동통일을 이룩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 1932년 10월 상하이[上海]에서 대일전선통일동맹이 조직되었다. 1935년 7월에는 임시정부 고수파를 제외한 중국본토지역의 주요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조직했는데, 이때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枓奉)·김규식(金奎植)·윤기섭(尹琦燮)·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창당작업에 참여하고 독립군 병사 훈련에 주력했다. 그러나 좌익경력자들에 대한 김원봉의 유화포용책에 반발해 1937년 4월 탈당하고, 그해 5월 조선혁명당을 부활시켰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조중통일전선(朝中統一戰線)의 중요성이 제기됨으로써 중국정부의 후원하에 1940년 9월 광복군(光復軍)이 조직되자 총사령관이 되어 1945년 귀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뒤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자 1947년 9월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했다. 이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제헌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 무임소장관, 자유당 원내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