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생의 영원을 위한 미술
2)메소포타미아 미술..
메소포타미아(아랍어: الرافدين,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ία)는 서아시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주변 지역(현재의 이라크)을 일컫는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이래로 역사, 지리학 및 고고학적 명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이 자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비옥한 토지로 인하여 기원전 약 6000년 구석기 시대에 인간이 정착 주거하기 시작한 이래 점차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Μεσοποταμια'에서 온 말로서 '메소'(Μεσο)는 중간이라는 뜻을, '포타'(ποτα)는 강이라는 뜻을 '미아'(μια)는 도시를 의미하는 뜻을 가지고 있어 '두 강 사이에 있는 도시'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이라고 하면 이후의 중세 시대 이슬람 미술이나 오늘날 서아시아 미술과 구분하여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이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만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개 기원전 4천년 수메르 시기부터 신바빌로니아까지를 지칭한다.
당연히 메소포타미아란 하나의 나라가 있던 것은 아니고, 개방된 지형인 메소포타미아의 특성상 여러 왕조들이 들어서고 망하기를 반복했다.
이집트의 역사와 비슷한 기원전 4천년경 수메르에서 부터 역사가 시작되어 아카드제국(기원전 2334~2154), 고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기원전 539년) 정도를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로 보며 후반부에는 로마의 영향으로 이집트와도 교류를 확인할수 있으며 기후변화등 다양한 원인으로 몰락한후 페르시아 문명에 복속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특징으로는 돌과 점토로 된 내구성 있는 조각품들이 많다는 점이며 대표적인 작품이 라마수입니다.
페르쉐폴리스의 라마수 부조..
*라마수
아시리아의 보호신. 흔히 인간 남성의 머리, 황소나 사자의 몸, 새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어떤 기록에서는 여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비교적 덜 사용되는 이름은 셰두(Shedu)인데, 라마수의 수컷을 가리킨다.
수메르 시대에는 여신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아시리아 시대부터 동물의 형상이 혼용된 모습을 하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미술에서 대표되는 신인데 아시리아를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국가들의 거리, 궁전 건축물 등에 라마수 석상이 많이 건설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에서도 라마수의 석상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에 있는 날개 달린 석상이 바로 라마수입니다.
제가 공부하려고 적고 있는 글이지만 솔직히 살짝 미안합니다..
이라크 전쟁의 영향으로 접근하기도 힘든 지역이고 대부분 별 관심도 가지지 못하던 장소의 미술 언급을 하려니..ㅠ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 달리 항상 전쟁을 통한 패권다툼이 있던 장소로 "죽음이나 영생"보다는 현실에 집중하는 작품이 많았으며 기록에 치중하는 문화로 문자와 미술이 접목하여 공존하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 이시기에 만들어졌고 전쟁에서의 승리와 나라를 지키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았습니다..
제반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2024년 국립 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전 관람기도 링크..
https://band.us/band/81278916/post/769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관람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세계 최초의 글과 기록을 남긴 장소로 문자와 미술은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문자에 미적인 측면을 고려함으로 예술로 확장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신앙과 일반적인 삶의 모습을 부조로 표현함으로 동물, 신, 인간의 형상이 다양하게 표현되며 건축은 아케이드 양식이 대표적이며 페르시아까지 이어 졌습니다..
2013년 방문한 이란 쉬라즈의 페르쉐폴리스..
사자의 부조들이 많은데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던지 험악한 열사의 땅에서
계절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는등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 부조입니다!
횡설수설은 이정도로 마감하고 지금은 더 가보기 힘든 이란 쉬라즈의 페르쉐폴리스 사진 몇장으로 마감합니다..
2013년도에 방문했군요..
메소포타미아 미술품 몇점 소개하며 총총~~
마리의 통치자 조각상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국가의 지도자인데 눈 부분은 푸른색 돌을 박아넣었다고 한다. 푸른 돌의 눈이 복원된건지 원본인지 까지는~~
눈을 크게 만들고 색이 있는 돌로 강조했다는 것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고대인들의 종교관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눈을 강조한 흔적이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을 포함 눈을 강조한 고대 유물들이 분포한 장소가 많은것은 시대나 장소가 달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감성이나 습속이 일맥상통하는 영향으로 생각합니다.
<함무리아 법전이 새겨진 석주>
수메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로 이 시대에 형성된 사회라는 종족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생활양식은 지금까지 이룩된 인류문명의 토대라 말한다.
수메르를 멸망시킨 셈계 아카드어족의 일파가 건국한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 6대 왕인 함무라비는 BC 18세기 경에 활동했었는데 주변 지역을
정복전쟁으로 통합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앙집권제도를 확립하였다.
함무라비 법전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다. 쐐기문자로 석주에 새겨진 282조의 법전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아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일 것이다. 이 법칙을 매우 잔인한 것이라 오해하는데 이는 오히려 보복의 범위를 한정시킴으로써 힘없는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길로틴의 단두대도 인도적인 사형 방식을 위해 고안되었으며 그림 동화의 원형이나 중세 이전의 법전 등을 토대로 유추해볼 때 근대 이전까지 인류가 집단 질서를 위해 또는 개인적인 원한 해결을 위해 동족을 처벌하는 방식은 매우 잔인했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는 금지된 수많은 끔찍한 고문과 잔인한 처형 방식들의 원형은 이미 과거에 완성된 것들이다.
사람은 속성은 유감스럽지만 잔인하다고 생각..
함무라비 법전은 수메르 법과 아카드 법을 절충하여 보완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개가 사법 규정들이고 종교적 색채가 적은 실체법이어서 고대 사회의 법들 중에서는 가장 완성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과실과 악의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점과 계급에 따른 차별대우 등이 존재한다하더라도 현대사회 법리의 상당 부분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어 인류 관념체계의 기원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함무라비 법전의 서판을 포함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많은 유물들이 있었는데 세계 경찰임을 자처하는 미군의 점령과정에서 경비가 허술해졌고 이때 많은 것들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한다.
망구 혼자 생각이지만 스미스 소니언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에는 비밀 보관실이 있고 실종된 유적들은 거기 다 모여있지 않을까 생각들기도~~
<이슈타르 문>
위 사진에 보여지는 이슈타르 문은 당연히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독일 발굴단이 해체해서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가져갔다고 하지만 실물은 전시되고 있지 않다.
유물과 문헌 등을 토대로 네브카드네자르 2세 때 건축되었던 오리지널에 근접하게 복원한 것이다.
보이는 것처럼 이 문은 벽돌로 된 건축물이다. 벽돌은 유약을 발라 구워서 선명한 색채를 띤 벽돌이라고 한다. 푸른색을 띤 벽돌을 베이스로 하고 황색의 벽돌로는 시루슈 또는 무수루슈라 불리는 신화 속의 짐승을 묘사하고 백색의 벽돌로는 소 같은 가축을 장식해 놓았다.
위 사진은 전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사진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시루슈와 동물들의 묘사는 대강 형태만 드러낸 것이 아니고 매우 섬세한 모습이다.
부연해서 조금 더~~
이슈타르의 문( Ishtar Gate) 또는 통칭 바빌론의 문(Gate of Babylon)은 고대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인 바빌론(현 이라크 바빌 주)을 둘러싼 내성의 8번째 성곽 출입구였다.
기원전 6세기 신바빌로니아의 국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왕궁 동쪽에 건설되었으며, 성문 가운데서도 가장 거대하며, 상징적인 푸른 벽돌로 축조되었다.
이 문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했다. 문에 새겨진 소와 마르두크 신을 상징하는 용(무슈후슈)의 이미지도 아름다움의 극치여서, 튼튼한 요새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앞의 개선로였던 행진의 거리 역시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복원중인 바그다드의 행진의 거리~~
이슈타르문 복원조감도~~
전술적 중요도는 만리장성의 산해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금각만에 필적할 정도였다. 성벽 덕에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바빌론이었으나,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 도하 가능할 정도로 수위를 낮춘 후 진격, 이 문을 통해 군사를 침투시켜 손쉽게 정복해 버리고 말았다. 바빌론의 수호의 상징인 신성한 문이 오히려 멸망을 부른 셈. 이후 바빌론이 폐허가 되면서 바빌론 유적은 전설처럼 전해지다 근대에 들어서 독일의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발굴(1902년)한 뒤 재조명받았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의 복원
베를린 최대의 박물관인 페르가몬 박물관에 현존하는 이슈타르의 문은 오스만 제국과 독일 제국이 관계가 좋을 때 발굴한 유적을 통째로 실어와 1930년까지 10여 년간 모사하여 복원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당대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박물관 규모에 맞춰서 복원하다 보니 실제 높이보다 훨씬 작다고 한다. 게다가 원래는 후문까지 있는 이중문이었지만 박물관 크기의 한계상 후문은 전시되지 못하고 창고에 남아 있다.
이것이 현존하는 유일한 바빌론의 문이다.
놀이공원 미니어처 같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지만 고증을 따른 복원이다. 수호의 의미를 가진 푸른색을 내기 위해 도기 기술을 이용하여 짙푸른 색으로 구워낸 벽돌로 지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아름다운 푸른색을 내려면 가마에서 매우 높은 온도를 낼 필요가 있는데, 일반 목재로는 안 나오는 온도라 어떻게 했느냐가 사학자들 사이에서 미스터리였다.
오늘날에 연구된 바로는 역청, 즉 지면에 노출된 원유로 구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역청은 성경 시대까지 다용도로 광범위하게 쓰였으며 바빌론도 해자나 건물 등에 방수 용도로 발랐다. 푸른 벽돌들은 바빌론에서도 매우 귀해서 이 외에는 바벨탑으로 알려진 에테멘앙키 대신전의 꼭대기에나 사용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본고장인 이라크의 바빌론에도 재현한 물건이 있는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문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재현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이라크에서 독일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 원본 반환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럽 박물관이 그렇듯이 무시로 일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