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9. 주일예배 설교(사도행전 강해 33)
사도행전 18장 1-28절
예수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 하나님이 사람의 시간에 현현(顯現)하신 이유는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이유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군림(君臨)도 억압(抑壓)도 이유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 때문에 역사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 이것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실 만큼 사람을/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신앙 인생에 자부심이자 자신감이신 하나님은 예수이십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가 하나님/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내 신앙 인생은 자부심과 자신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 바울 일행이 고린도에서 복음 사역을 하는 중에 겪은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여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적(對敵)도 당하고, 비방도 당했습니다.(6절)
하지만 당당했습니다. 5~6절을 보겠습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당당하지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과격한 대적과 비방에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말씀에 붙잡혀 있었느냐 하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유대인들은 예수라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이 죽인 것은 단지 사람이었습니다. 신성모독을 하는 한 정신병자를 죽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은 그 사람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물론 바울도 이전에는 예수를 죽인 자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 자들을 탄압하는 일에 맨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바울의 작업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러 가던 다메섹 길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단지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후 바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예수 핍박자에서 예수 옹호자, 예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아예 전업으로 삼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이러한 모습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처럼 산 것은 예수는 예수일 뿐만 아니라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 바울의 이러한 믿음은 용기 있는 행위, 즉 전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용기 있는 행위에 하늘의 격려가 임합니다. 9~10절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고 있기에 당당함을 보인 그에게 하늘의 격려와 지원은 이처럼 전폭적이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주눅 들고 비굴하지 마십시오. 당당하십시오. 바울처럼 당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격려와 지원이 있게 됩니다.
바울이 하늘의 격력과 지원을 받고 고린도에 머문 기간이 주목됩니다. 1년 6개월입니다. 이전에 다른 도시에 머문 시간들에 비하면 매우 긴 시간이었습니다. 대적자들의 강렬한 비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 6개월을 이 도시에서 지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늘의 격려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격려와 지원이 있다고 해서 대적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집요한 압박과 대적행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머문 1년 6개월 뒤, 갈리오가 총독이 되었을 때, 바울의 대적자 유대인들이 바울을 법정에 고발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갈리오가 상관을 않겠다고 하자 바울 보란 듯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흠씬 때리지 않습니까?
결국 바울 일행은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그곳을 떠나 수리아→겐그레아→에베소→가이사랴→안디옥→갈라디아→브루기아 등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당당하고 담대할 수 있지만, 대적자들의 압박과 핍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일차적으로는 가족이, 친척과 동료가 대적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낮선 이들의 대적이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다양한 양상의 대적행태들이 나타납니다. 간단하게는 빈정거림에서, 심하게는 압박과 협박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각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백이 ‘예수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이런 현실을 직시(直視)하는 것은 옳지만 이런 현실만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지 현실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하나님의 시간이자 공간입니다. 이 시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役事, work)와 역사(歷史, history)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인 현실을 이해하면 압박과 핍박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아볼로도 보이고,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보입니다. 24~28절을 보면, 이들의 활약에 본문이 역동적이 되지 않습니까? 18장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지 않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는 이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 사람들이 서로 알게 되고, 이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고, 이 사람들이 역사를 일으키고, 이 사람들이 이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들고... 이 얼마나 역동적입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는 것은 이 땅, 이 현실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이 있지만 아볼로가 있습니다. 압박자들이 있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모두에게 이지만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것은 대적자와 압박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볼로,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바라볼 때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앉은 자리에서 전후좌우를 보십시오. 아볼로 같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지 않습니까?
■ 예수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하늘의 격려와 지지를 받기에 당당할 수 있어 쉽습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이 있기에 현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분위기가 평생 우리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갈등하고 힘들어할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긴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되 현실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에게는 아볼로,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그리고 바울을 더 오래 머물러 있으라고 애정을 나타낸 에베소 교인들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우리 곁에 두셨습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은 주님과 함께 이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전교회가 여러분 모두에게 그런 곳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