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수 이종목 저서 ‘조선의 문화 공간을 인용(P143~144, 휴머니스트 발행)
공주출신 정하언 (鄭夏彦)명필가는 “명덕동의 수옥대”에서 휴양
정하언 명필가는 삼척부사재임시절에 명덕동 수옥대에서 휴양하시던 흔적이 있다.
체제공의 명덕동기에 따르면 명덕동은 매우 으슥하여 나무꾼조차 좀처럼 오지 않는 곳으로 허리가 뻗어내려 가락지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곳인데 한쪽이 확트여 있다. 그곳에서는 수락산과 각심암이라는 절을 바라보고 있다. 명덕동 안에는 밭이 약간 있고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게 한 숲을 이루고 물이 잔잔하게 벼랑을 따라 흐르고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곳이었다.
체제공의 명덕기을 보면
먼곳의 꽃에는 저녁 햇살이 가득하네
정녕 물러나기를 원하는 마음 늙도록 절대 바꾸지 말자.
명덕산은 현 지명상 동대문 바깥 10리쯤에 있다고 하나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가 어렵다.
오늘날 도봉구 번동 서울드림랜드 남쪽의 야산일 가능성이 높다.
번동일 가능성이 높다. 번동에서 미아 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는 오패산 동쪽 골짜기 명덕동이다. 지금은 삼성생명 주택단지로 개발할 때 계곡을 매립하였기 때문에 현재 명덕동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수옥대기에는 체제공이 명덕동의 주인이 된 과정이 기록 되어 있다. 즉 원래 명덕동은 정하언(鄭夏彦) 명필가의 땅이었다.
그러나 체제공이 삼척에 유배 되었을때 정하언 명필가는 삼척부사로 있었다. 정하언의 성품은 얽매임 없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자들은 마치 진흙탕의 돼지 보듯이 하였다.
글씨하면 명필가 이시고 술까지 좋아 하시였다. 술한잔하면 거리낌 없이 말을 하였으며, 시속들의 사람들과 달랐다. 체제공은 정하언과 서로 잘 어울려 산수간에서 시주(詩酒)를 즐기었다.
그후 정하언은 삼척부사의 벼슬을 내놓으시고 한양으로 돌아와서 명덕동 땅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바위를 뚫어 샘을 파고 소나무와 밤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정하언이 돌아가신 후 그들의 후손들은 수옥대를 지키지 못하였다. 이에 체제공은 여러번 바뀐 수옥대의 땅을 구입하고 그 주인이 되었다.
⁂ 이종목 지음 ‘조선의 문화 공간“ 4책 조선후기 내가 좋아하는 삶( P143~144, 휴머니스트 발행)을 참고하여 정리
정하언(鄭夏彦, 1702~1769): 호는 옥호자(玉壺子), 자는 미중이며,1735(영조 11, 을묘)년 증광문과 급제하여 1741년(영조17년, 신유) 경상도사및 1744년(영조20년, 갑자)속대전 찬집랑과 1746년(영조 22년 1월,계유년)에 의주부사, 동년 11월 25일 장계에 임명,1746년(영조 22년 1월,계유년) 울진현감, 청도군수,1747년(영조23년, 정묘) 초산부사, 1748년(영조 24년 1월)의주부윤,1749년(영조25년 8월20일) 승지,1749년 병조, 형조 참의,1750년 ~1753년(영조 26~28년) 삼척부사,1757년(영조33년, 정축) 승지, 鏡城府使,1758년(영조34년, 무인) ,1759년(영조 35년, 기묘) 대사간 공조참의등 역임하였으며 명필글씨로 창경궁 정문의 弘化門액 및 두타산 무릉계곡에 (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란 12자와 하행방서로 옥호거사서 신미중춘(玉壺居士書 辛未仲春) 書와 국동 다라티 마애글에 "延日鄭氏世英地"란 書와 공주 공산성의 공복루에 이괄의 난 시절 인조의 공산성 피난에 대한 중수기원문, 淸風亭과 외손자 임천상이 저술한 大司諫止堂鄭公行壯이 전하고있음. 부여군 옥호동에 청풍정을 건립한터를 부여문화원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서울에 있는 수옥대는 찾을수없음, 공주의 중수기문은 아래와 같음
<옥호자가 홍화문액 사진 미수집>
정하언 옥호자가 써준<雙樹城拱北樓重修記>
熊州之雙樹城 在觀察治三里 而近崗巒圍合 如環缺 其北十二大江 當其缺隱然爲湖西之一大關防也 城之肇設自勝國之季我 仁祖甲子賊适稱亂 上避兵南下寔御是城由旬賊平親受馘於枕江之城樓城之取名雙樹則前記載焉及 返蹕一方氓庶爲其 聖䠱之留而想像愛慕歌頌遺澤者至今如一日也城隷譽營使中軍將守之峙糗粮繕器械爲陰雨圖柘江樓爲五楹崇大其制俯臨澄流白沙其外則平郊莽濶穹林掩翳卽走京城大路也 扁之曰拱北者取星拱辰之義也 由甲子迄今百數十年間亦多隨弊而修之修最後者在金觀察礪歲丁未今殆三十年城之雉堞多毁壞樓棟楹榱槙烈椽檻尾磚擧腐朽敗落不免上雨而旁風坡平尹孺文余友也 用文華才藝早顯於世由國子長出按是道正民風敷文化未期月而政淸一日登玆樓曰是不可不改修而不一大用力又將不能久於是鳩貲募工大治其樓凡材尾之用其故者不過十二三而其餘則皆易而新之雖制因其舊而魁麗堅完非座觀焉樓傍一小堂名月波者又以其餘力而新之以至角門曲垣無不畢新雉堞改築者 又殆三之二加丹雘灰粉璀璨照爛旣麗而侈觀又完而圖久也 旣成而落之以書請記于余余於玆州實桑梓之托無歲而不生於者今五十年餘間嘗登眺四望感 聖祖之遺䠱撫一方之形便徘徊而不能去者累矣而第恨其久荒而不治今聞是說而樂爲之言役始於甲申之八月己亥訖 十一月戊申爲日 菫七十役丁夫七百三匠夫八百四十皆募以貲民不知有役焉 用工米以斗計者爲五百二十五錢以文計者爲六萬二千五百九十所費炭鐵之屬不在其中皆以營廩辨焉 中軍將前府使金令永綬寔承令尸其事而始終監蕫者營校徐致遠李爾松云
乙酉四月上澣烏川鄭夏彦美仲記
인조 대왕 소개: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仁祖)는 역대 그 어느 왕보다도 시련이 많았던 임금이었다. 외침이 아닌 내란(1624년 이괄의 난)으로 한양 궁궐을 떠나 공주의 웅산성까지 피난을 떠난 최초의 왕이었으며, 시대착오적인 친명(親明)정책으로 정묘호란(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두 번씩이나 겪게 되면서 삼전도(三田渡)의 치욕과 함께 청(淸)나라와 군신(君臣) 관계를 맺어야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여서인지는 몰라도 유독 인조는 오욕적인 지명을 많이 남긴 임금으로, 공주에도 인조와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서 전해진다.
충남 공주시 우성면은 당진~대전고속도로(30번)와 서천~공주고속도로(151번), 천안~논산고속도로 등의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부각된 곳이다. 우성면(牛城面)은 본래 우정면(牛井面)이라 불리던 곳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당초 우정면과 성두면(城頭面)을 각각 합성해 생겨난 지명이다. 이괄의 난 때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해 공주의 쌍수산성(현재의 공산성)으로 피난할 때 이곳을 지나게 됐다. 이때 인조가 타고 있던 말이 기갈이 몹시 심해 헉헉거리며 이곳의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우물을 임금의 소가 마신 우물이라 하여 소우물(牛井)이라 하였고, 면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고 한다.
천안시 성환읍의 왕림리(旺林里)는 대부분이 농촌지역이지만, 최근 인근에 산업단지가 조성 중에 있어 개발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지역이다. 왕림리는 직산군 이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왕지리(旺池里)의 ‘왕’자와 임리(林里)의 ‘임’자를 따서 왕림리라 하여 성환면에 편입됐다가 읍으로 승격된 후 성환읍 왕림리가 됐다. 이 왕림리 한 가운데에 왕지(旺池)마을이 있다. 왕지란 우물이 있어 왕지마을인데, 이 우물은 물이 대단히 차고 수량이 많아서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물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왕지라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파천할 때 왕지산에서 쉬면서 우물을 길어다 마시고 크게 칭찬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 아래 부분에 왕지저수지, 왕지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이 지명들도 인조가 이곳으로 피난 와서 붙여진 지명으로 보인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에는 인차리란 지명이 있다. 이곳의 지명은 인조가 이곳으로 행차했다 해 유래된 지명인데, 인조관련 지명이 대부분 인조의 무능을 비꼬는 지명인데 반해 이곳 지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지명이 아닌가 한다. 인조가 보은을 가기 위해 이 곳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加德面)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비록 좋은 이불과 베개는 아니었으나 잠자리가 매우 편해 인조는 여정에 따른 피로를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다음날 인조가 그 까닭을 알아보니 이곳 산세가 매우 부드럽고 백성들의 덕이 후(厚)한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인조는 이곳 백성들이 지닌 덕에 더욱 덕을 더하도록 하라고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 명이 ‘덕(德)을 더하다(加)’란 뜻의 ‘가덕’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료: 충청투데이
인절미 연역:
찹쌀이나 찹쌀가루를 시루에 쪄 내어 떡메로 친 다음, 성냥갑만 하게 썰어 고물을 묻힌 떡을 인절미라 하는데 한자어로는 인절병引絶餠이라고도 표기한다.
여기 한자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인절미는 찹쌀을 원료로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찰지어서 약간 잡아당겨서 썰은 떡이라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이 인절미의 내력에 대하여 공주지역에는 인조대왕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①조선조 17대 임금 인조대왕은 당시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피하기 위하여 공주로 피난을 하였다. 인조대왕은 피난길에 초라한 민간복장으로 공주군 유구를 거쳐 우성 땅에 이르러 어느 동네에 들러 노씨 성을 가진 집에 묵게 되었는데 마침 그 집은 가세가 넉넉하였다.
주인 노씨가 보니 그 평복의 나그네는 비록 행색은 초라하지만, 예사 어른이 아닌 듯싶어 따뜻한 방에다 편안히 모시고 풍성한 음식으로 극진히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조대왕께서 공주로 가기 위해 금강을 건널 때도 배편을 제공하는 등 정성껏 모셔드렸다. 후한 대접을 받은 왕은 그 뒤 그 노씨네가 사는 마을을 임금을 도운 마을이라 하여 ‘도울 조助자와 임금 왕王자를 써서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군 우성면 조왕동은 그래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②인조대왕이 공주의 공산성 안의 쌍수정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인지라 몹시 추웠을 뿐 아니라 배마저 고팠다. 그때 한 신하가 민가에서 진상한 별식을 한 쟁반 가져다 상감께 바쳤다. 임금은 시장한 김에 맛을 보니 콩고물을 묻힌 떡인데 맛이 쫄깃쫄깃하고 보들보들하여 단숨에 거의 한 쟁반을 다 들었다.
떡을 맛있게 드시고 난 뒤 인조대왕은 그것을 가져온 신하에게 “도대체 이렇게 맛있는 떡의 이름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신하는 자세히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 떡을 진상한 백성이 누구냐고 왕이 재차 물었다. 신하는 그 진상한 사람의 이름은 모르고 다만 인근에 사는 성이 임가라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은 그렇다면 이처럼 맛있는 떡의 이름을 지금부터 임씨네가 썰어서 만든 떡이니 ‘임절미’라고 부르자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임절미로 명명된 떡의 이름이 뒤에 차츰 변하여 지금처럼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