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0725 (월)
- 아름다운 길, 가로수 이야기 (3) - 벚나무 ②
- 식물이야기 (64)
지난번에 이어 “벚나무” 이야기 계속입니다.
7. 목재
- 벚나무는 높이 20m, 지름 1m까지 자라며 비중이 0.62 정도이고 잘 썩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벚나무목재는 재질이 탄력이 있고,
조직이 치밀하고, 결이 고와서 각종 조각재(彫刻材), 칠기, 가구, 공예재료로
알맞고 목판 인쇄용 목재로도 널리 쓰입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많은 벚나무 목재를 미국과 캐나다로부터 수입하고
있는데, 꽤나 큰 예산을 벚나무 목재 수입에 쓰고 있는 셈입니다.
⇒ 벚나무가 많이 늘었으니 수입량이 줄어들려는지???
- ( 팔만대장경판의 재료 )
위에서 목판인쇄용 재료로 쓰인다고 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인류의
귀한 정신문화로 길이 남을 합천 해인사의 고려팔만대장경(高麗八萬大藏經)
경판(經板)도 벚나무 목재로 깎았습니다.
즉, 대장경판만을 기준으로 하면 “산벚나무”가 전체 경판 중 135매나 돼 64%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이 32매(14%)의 “돌배나무”인데 이들 두 수종(樹種)이
전체의 79%를 차지하고 있으니 고려팔만대장경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위의 수치는 대장경판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경판 + 마구리 + 나무못 등)을 합친
총 목재의 사용비율을 보면 “산벚나무”가 62%, “돌배나무”가 14%로 합계로는
76%를 점유합니다.
*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때인 옛날, 한 달 동안 무전여행을 하면서 해인사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스님들과 이야기하고, 대장경판을 들고 나와서 밖에서 사진도 찍고 하였는데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도...)그 당시 스님들이 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였고 또 많은 자료에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조사하여보니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 당시 절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스님들과 밤늦게까지 스님들과 이야기하던 곳이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 제주시 관음사 등이었습니다.
* 한참 전부터 “팔만대장경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려고 하였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되어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언젠가는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대장경판에 새겨진 글의 내용인 불경에 대하여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에 얽힌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그 때 위의 내용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하겠습니다. 즉, 어찌해서 “자작나무”로 경판을 새겼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살펴볼 예정입니다.
⇒ 어느 분이 말씀하시기를 “팔만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이다.”이라던데....
- ( 활의 재료 )
길이가 짧아 휴대하기 쉬운 우리나라의 옛 활인 “국궁(國弓)”은 벚나무와 뽕나무
목재로 만들었습니다. 재질이 단단한 벚나무와 탄력 좋은 뽕나무가 만나 국궁이
태어났고 작아서 휴대하기 쉬워 달리는 말 위에서 활시위를 당길 수 있었습니다.
이는 대륙을 평정한 기마민족에게 있어 이보다 더 귀한 나무가 없었을 것입니다.
- 서울 우이동 계곡의 한 마을에는 위에서 소개해드린 가지가 축축 늘어지는
“수양올벚나무”가 많이 있는데, 이는 조선 효종(孝宗) 임금이 병자호란을 겪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치욕을 당하고 돌아와서, 북벌을 계획하면서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목재로는 활을 만들고 껍질은 벗겨 활을 감아 손이 아프지 않게
하려고 이곳에 대규모 벚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전해집니다.
- 화살을 담는 전통(箭筒)은 피나무나 오동나무 속을 파고 겉에 거북껍질
(대모-玳瑁)이나 백두산에서 자라는 벚나무 껍질(화피-樺皮), 토갑상어의 껍질을
민어부레를 녹인 풀로 붙여 멋과 견고성을 살렸다고 합니다.
- 벚나무는 활 이외에도 칼자루를 만들기도 하고 마구(馬具)도 만들었으므로
즉, 국력과 관계있는 나무이었던 까닭에 벚나무 숲을 가꾸는 일이야말로
군비를 축적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 전남 구례의 화엄사 근처의 지장암(地藏庵)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올벚나무”가 있는데 이는 당시 화엄사에 계시던 ”벽암대사(碧巖大師)“가
효종임금의 뜻을 받들어 절 근처에 심었던 많은 벚나무 중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수령(樹齡) 약 310년,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5m 정도입니다.
< 수양올벚나무 >
-------------------------------------------------------------
8. 벚나무를 다룰 때 주의할 점
- 벚나무는 봄에는 아름다운 꽃을, 여름엔 풍성한 잎으로 걷는 사람들에게 그늘을,
가을엔 공해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단풍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따스한
낙엽을, 그리고 겨울엔 잔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을 감상하게 만들어
주기는 합니다만, 다음과 같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 “벚나무를 자르면 바보, 매화나무를 자르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른다.”는 말은 “전정(剪定 = 나무의 생육과 결실 그리고 나무의
모습을 보기 좋게 하기 위하여 가지치기 하는 것)“을 말합니다.
- 벚나무는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아서, 즉 한 번 가지를 자르면 좀처럼 아물지를
않아서 그 곳을 통하여 병충해의 침입을 받기도 하는 등으로 나무의 자른 부위가
썩어 들어갑니다. 그래서 방치하면 나무줄기까지 썩고 이어 바람이 불 때
넘어지거나 일찍 고사(枯死)하고 맙니다.
가로수로 심은 왕벚나무가 50년을 채 넘기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 또한 가지치기를 잘못하면 나무의 세력이 약해져서 간혹 나무의 잎이 일찍
떨어지는 조기낙엽(早期落葉)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 따라서 벚나무를 가꿀 때는 가지를 자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벚나무 가로수를 조성할 때는 묘목재배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일반 농가에서 가지치기를 잘못하여 수형(樹形)을 잡지 않은 것이 시중에
유통되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벚나무는 초기 성장 시의 수형이 그 어떤 나무보다 중요한데, 종자 발아(發芽)후
2~3년차에는 묘목을 밀식 재배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 처음부터 간격을 두면 옆으로 가지를 뻗는 성질이 있어서 최소한 2m 높이 이상
되는 곳에서 첫 번째 가지가 뻗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가로수로 심었을 때 보행자의 머리에 가지가 닿지 않고,
차도로 가지가 뻗었을 때도 차량의 지붕에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 가지가 밑으로 뻗은 나무를 심었다 나중에 자르면 줄기가 썩어 들어가
결국 나무의 수명은 짧아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
9. 벚꽃에 얽힌 이야기와 벚꽃을 노래하는 글들
(1) 우리나라의 벚나무
- 창경궁 춘당지(春堂池)는 조선 역대 왕들이 벼농사를 지었던 곳입니다.
궁궐 내에 왕이 직접 심은 벼의 생육상태를 보고 한 해의 풍년을 점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산군은 권좌에 오른 후 정사는 뒷전으로 미룬 채 이곳에서
날마다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있다가 끝내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 그런데 최근 연산군을 과연 나쁜 임금으로만 여길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있는
모양으로 그 내용을 읽게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광해군에 대하여는 벌써부터 승자(勝者)의 입장에서 쓴 기록들을 재검토하는
분위기가 있고,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 일제는 조선왕실의 권위를 누르기 위해 춘당지를 확장하고 동물원을 세웠으며,
수많은 왕벚나무를 일본에서 들여와 심고 가꾸면서 궁궐을 유원지로
만들었습니다. 지난 1970년대만 해도 해마다 봄철이면 서울 시민들이
당시의 창경원에 모여 밤 벚꽃놀이를 즐겼습니다.
- 그 후 지나치게 화려한 왕벚나무가 우리의 민족정서와 맞지 않는다 하여
베어졌으나 아직도 창경궁 내에는 늙은 왕벚나무가 곳곳에 심어져 있습니다.
춘당지 주변의 왕벚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는 우리 자생 벚나무 수종인
"귀룽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귀룽나무
벚나무와 같이 “장미목 장미과”에 속하며 4~5월에 하얀 꽃을 피우고 버찌 비슷한
까만 열매를 맺는데 먹을 수 있습니다.
한자로는 “구룡목(九龍木)”이라하고 영어로는 “European Bird Cherry"라고 하는데
깊은 산골짜기에 흔히 자랍니다.
- 가로수로 심고 있는 벚나무가 일본에서 들여온 왕벚나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울의 창경궁 왕벚나무나 공원에 심어진 많은 왕벚나무가 잘려나갔습니다.
그래서 지난 1997년 환경부에서는 벚나무의 왜색 시비를 가리기 위해 일본에서
들여온 왕벚나무 대신 천연기념물인 제주시 봉개동 왕벚나무 후계목(後繼木)을
보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바 있는데, 봉개동 왕벚나무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흰색이며 화사하긴 하지만, 그러나 종자 발아력이 떨어져 씨를 심어 묘목을
생산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일반 벚나무 종자를 뿌려 대목을 키우고 여기에 왕벚나무 가지를 접붙여
묘목을 생산해 오다가 최근 제주도 서귀포시 남부육종장의 김찬수박사가
조직배양을 통해 왕벚나무 묘목을 생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우수한 유전인자를 가진 왕벚나무를 생산하여 조직배양을 통해
병에 오염되지 않은 묘목을 대량생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이제부터는 무턱대고 왕벚나무만 심을 것이 아니라 출처가 어디냐는 것을
따져 묘목을 생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2) 일본인과 벚나무
- 벚꽃을 나라꽃으로 하고 있는 일본의 조직폭력배 야쿠자 졸개들은 그들의 보스인
오야붕을 위해 사쿠라 처럼 굵고 화끈하게 살겠다고 충성을 맹세한다고 합니다.
- 또한 일본제국주의는 벚꽃을 보며 집단전사(集團戰死)를 부추겼습니다.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 때 자신이 모는 애기(愛機)와 함께 미군 함정을 향해
돌진하는 자살 특공대를, 조국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散華)한 영웅으로
칭송합니다. 천황이 내린 일본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꽃잎이 지는 것에 빗대어 산화(散華)라는 말로 미화했습니다.
또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대량학살한 일을 구슬이 부서지듯
깨끗하게 사라진다는 뜻으로 옥쇄(玉碎)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 일본의 무사도 >
위에 말씀드린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일본의 “무사도(武士道)”를 세계에 알린 대표적인 저서인 “일본의 무사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 지금 일본의 화폐 중 “5천 엔 권”은 2004년부터 새롭게 발행되었는데, 여기에는
메이지(明治)시대의 여류소설가인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 통구일엽 :
1872~1896)”의 얼굴이 있는 화폐가 통용되고 있는데, 그 이전에는 교육가이자
외교관인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 신도호도조 : 1862~1933)”의 얼굴이
있는 화폐가 통용되었습니다.
- “니토베 이나조”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도 가까웠다고 하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일본의 무사도”라는 저서를 냈습니다.
그는 여기서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라는 말을 소개하며, 벚꽃을 무사의 죽음과
연관시켰습니다.
- 그는 또한 영국의 장미와 일본의 벚꽃을 대비시키며, “장미는 감미로운 꽃 아래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어 마치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고 비판하면서, 반면 벚꽃에 대하여는 “아름다우면서도 덧없이 져버리고,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면서도 한줄기 향기를 흩뿌리며 영원히 사라지는...”
비장미(悲壯美)를 강조하였습니다.
- 이러한 죽음의 미학은 조만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변용 되는데, 일시에 지는
벚꽃을 군국주의 이념으로 찬미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즈음이라고 합니다.
- 그리하여 이제 바람결에 많은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는 것이 전쟁에서
산화(散華)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본남아로 태어났다면 산병전(散兵戰)의 벚꽃처럼 지거라.” 그리고
“천황을 위해 사쿠라가 되어 야스쿠니(靖國-정국)에서 만나자”라는 군가를
부르며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 나갔습니다.
- 꽃이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 이데올로기가 꽃이 되었는지....
(3) 영국시인의 벚나무 노래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이 하우스만-Alfred E. Housman(1859-1936)”은
벚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고전학자인데 낭만적 염세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 Loveliest of Trees -
나무들 중 가장 사랑스런
Loveliest of Trees, the cherry now
나무들 중 가장 사랑스런 벚나무가 지금
Is hung with bloom along the bough,
가지 따라 만발한 꽃들을 걸치고
And stands about the woodland ride
수풀 속 승마길 옆에 늘어서 있네.
Wearing white for Eastertide.
부활절을 맞아 하얀 옷을 입고서
Now, of my threescore years and ten,
이제 내 일생 일흔 해 중
Twenty will not come again,
스무 해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And take from seventy springs a score,
그러니 일흔 봄에서 스무 봄을 빼면
It only leaves me fifty more.
내게 남은 건 오로지 쉰 봄 뿐
And since to look at things in bloom
만개한 꽃들을 구경하기엔
Fifty springs are little room,
쉰 봄이 너무도 짧으니
About the woodland I will go
수풀 우거진 곳으로 나는 가야지
To see the cherry hung with snow.
눈처럼 피어 있는 벚꽃을 보러
⇒⇒⇒ (한마디)
시의 내용을 보면 이제 갓 스무 살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즉 70살 인생 중
이제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고, 아직도 50년이나 남은 것을 가지고, 남아있는
50년이 너무도 짧다고 표현했으니, 달려가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밖에.....
- 유럽에서는 “신곡(神曲)”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시인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시대부터 “인생은 70”이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
* 참고로 여기서 당나라 시인 “유희이(劉希夷)” 또는 “송지문(宋之問)”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를 한 수 소개합니다.
지은이를 헷갈리는 것과 같이 시의 제목도 좀 헷갈리고 내용도 일부 글자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서 많이들 헷갈려 하는데 그래도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다고 합니다.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 또는 유소사(有所思)
- 유희이(劉希夷) 또는 송지문(宋之問)
낙양성동도리화, 비래비거락수가.
洛陽城東桃李花, 飛來飛去落誰家.
유규아녀석안색, 좌견낙화장탄식.
幽閨兒女惜顔色, 坐見落花長歎息.
금년화락안색개, 명년화개부수재.
今年花落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이견송백최위신, 갱문상전변성해.
已見松栢催爲薪, 更聞桑田變成海.
고인무부낙성동, 금인환대낙화풍.
故人無復洛城東, 今人還對落花風.
연년세세화상사, 세세연년인부동.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기언전성홍안자, 수련반사백두옹.
寄言全盛紅顔子, 須憐半死白頭翁.
차옹백두진가련, 이석홍안미소년.
此翁白頭眞可憐, 伊昔紅顔美少年.
공자왕손방수하, 청가묘무낙화전.
公子王孫芳樹下, 淸歌妙舞落花前.
광록지대개금수, 장군누각화신선.
光祿池臺開錦繡, 將軍樓閣畵神仙.
일조와병무상식, 삼춘행락재수변.
一朝臥病無相識, 三春行樂在誰邊.
완전아미능기시, 수유학발난여사.
宛轉蛾眉能幾時, 須臾鶴髮亂如絲.
단간고래가무지, 유유황혼조작비.
但看古來歌舞地, 惟有黃昏鳥雀飛.
낙양성 동쪽 도리화는,
날아오고 날아가서 뉘 집에 떨어 지노.
유규의 아가씨는 고운 얼굴 아껴,
무심히 낙화를 보며 긴 한숨을 쉰다.
올해도 꽃이 지면 안색이 달라지니,
명년 꽃이 필 때 다시 뉘 그 얼굴 그대로 있겠는가.
이미 송백은 섶을 위하여 땔나무가 되었는데,
다시 상전이 변하여 창해 된다는 말을 들었노라.
고인은 낙양성 동쪽으로 다시 오는 이 없는데,
지금 사람은 바람에 지는 꽃을 대하누나.
해마다 피는 꽃 모양은 비슷한데,
해마다 사람의 얼굴은 같지 않도다.
그대 젊은이에게 한마디 이르노라,
모름지기 반생을 넘은 백발노인을 불쌍타 하여라.
이 늙은이의 백발은 참으로 가련하나,
이래도 옛날엔 홍안 미소년이었노라.
공자 왕손과 꽃 피는 나무 그늘 아래서 노닐었고,
청아로운 노래와 춤을 낙화 앞에서 추었노라.
광록지대 같은 곳에서 비단 방석 깔고 잔치도 베풀고,
장군 누각에 신선도를 그렸듯이 호사도 누렸다네.
이제 일조에 와병하니 아는 이도 없고,
삼춘의 행락도 누구의 곁으로 갔는고.
젊고 아름다운 미인도 그 얼마나 젊으련가,
얼마 후면 학 털 같은 흰 머리되어 흩어지리라.
고래로 노래와 춤이 연다는 가무의 땅에,
지금은 다만 황혼에 새들만 외로이 날고 있음을.
-------------------------------------------------------------
다음에도 “벚나무”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저도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자작나무로 되어있어 병충해에도 강하다는 다큐를 본적이 있는데 산 벚꼬ㅊ이 주라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저도 왜 그런 오류가 생겼는지 궁금하군요. 밝혀주세요. 벚꽃은 제가 어렸을적 부산 구덕산이 유명했는데, 삼월에 멀리서 보이는 산 허리 모두가 화려한 분홍색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리고 우에노 공원의 오 하나미 갔을때 그 벚꽃과, 미국 웨스트 포인트 인근의 화려한 벚꽃이 지금도 ... 물론 대학 때 여학생과 저녁에 벚꽃 밑에서 보트 타던... ㅎㅎ
혹시 밤벚꽃놀이하던 여학생은 아직도 눈물울 흘리고 계신 것은 아닌지..... 아무리 뭐라해도 벚꽃은 아름답습니다. 꽃을 가지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지요... 말씀하신 팔만대장경판의 자작나무설에 대하여는 아주 한참 전부터 게획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너무나 방대한 내용의 팔만대장경 이야기를 어떤 구성으로 만들 것인가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올리겠습니다.
학장님, 내용에 없는 것이 없어 공부 잘하고 있습니다. 백두대비옹은 한대의 유소사란 악장에 비견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원저자는 유희이(정지)라고 합니다. 송지문은 그의 외숙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시를 지은 후 외숙에 보여 줬더니 년년세세 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 이라는 부분을 랄라고 해서 유정지도 대충 승락했는데 그 이튿날 발표해 버렸다고 합니다.이를 괘씸히 여긴 외숙은 그를 땅에 묻어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싯귀 하나로 20대 젊은 조카를 죽이다니 중국이라는 나라 웃기기도 합니다.
본 시를 올리면서 이 사장님이 아시는 내용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 나오는 중국의 이 사람들과 비슷하게 또 우리나라의 고려때 삼국사기의 김부식도 정지상과의 사이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칼을 쓰는 사람이나 모두 감정은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벚나무 이외에도 사연이 있는 꽃이나 나무들이 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