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 5 - 나가노역에서 버스를 타고 사나다 가문의 옛 성인 마츠시로성에 가다!
2019년 4월 13일 쿠사츠온센 草津溫泉(초진온천) 에서 가루이자와 かるいざわ 軽井沢 에
도착해 구경하고 신칸센으로 나가노현 우에다 (上田)에 도착해서 사나다(真田 진전)
3대 가문의 상징인 육문전 (六文銭) 과 유키무라(真田幸村) 의 동상을 보고는
걸어서 우에다번주의 저택 (上田藩主居館跡) 과 우에다조 上田城(상전성) 를 구경합니다.
우에다역 上田駅 으로 돌아와서는 15시 41분에 신칸센 아사마 新幹線 あさま 호를 타고는
북쪽으로 달려서 15시 52분에 나가노 長野(장야) 현의 주도인 나가노시 에 도착해
코인로까에 배낭을 넣고 인포메이션센타로 가서 시내 지도를 얻은후 교통편을 물어 봅니다.
사나다(真田 진전) 가문의 혼을 이어받은 성이라는 '마츠시로성(松代城)' 을 보기 위해
나가노역 3번 승강장 에서 16시 15분에 30번 버스 를 타고 남쪽으로 달립니다.
농촌 들판을 지나 도중에 가와나카지마 川中島古戰場(천중도고전장)을 지나 출발한지 35분
만인 16시 50분에 마츠시로 松代(송대) 마을에 도착하는데 요금은 650엔 나옵니다.
버스 정류소 바로 앞에 있는 목조로 된 오래된 건물 은 옛 마츠시로 기차역 이라고
하는데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이지만 일본도 농촌 인구가 줄고 자가용이
널리 대중화 되는 바람에 기차 승객이 감소하니 마침내 야시로선 철도
노선 자체가 폐선 이 되고..... 이 역사는 추억의 기념물 로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을 지나니 해자였던 강 건너에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지은 옛 성 이
보이니 바로 사나다 가문의 성 인 마츠시로성 松代城(송대성) 입니다.
예전에 16세기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에 가이국(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신겐 이 나가노
를 점령하기 위해 축성 했을 당시 이름은 카이즈성(海津城 해진성) 이었다는데
에도 막부 시대에 와서 마츠시로성 (당시 待城, 松城) 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에도 시대인 1622년에 이르러 우에다(上田)번의 번주 로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도쿠가와의 동군 에 가담했던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가 성주가 됩니다.
사나다 가문의 정남인 노부유키(真田信之) 가 우에다에서 10만석 마쓰시로번 번주
로 이봉되어 들어오면서 마츠시로번의 번청 으로 사용되며 1868년 메이지
시대에 폐번되기 전까지 쭉 사나다 (真田 진전) 가문의 거성 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나다 가문 하면 우에다성 이 먼저 떠오르지만 사나다씨가 가장 오랜 기간
을 지내온 성은 바로 여기 마츠시로성 으로 북시나노 10만석
영지 를 다스렸으며 내부는 깔끔하게 복원된 성문과 석벽 등이 있습니다.
성벽인 석벽의 계단 을 올라 마츠시로의 전경 을 바라보면 마을과 산을 너머
보이는 북알프스의 모습 은 장관으로 6월초에도 만년설 이 보인다고 합니다.
여기 마츠시로 지방의 원 주인은 나가노 나리마사 長野業正(장야업정)이니 센고쿠(戰國)
시대 1530년에 나가노(長野) 가문의 당주 이자 미노와(箕輪)성 성주 로 다케다
신겐의 공격을 막아내었는데 당시 나가노 가문은 동해(일본해)에 자리한 에치코국
(니가타현) 우에스기(上杉) 가문 에 종속돼어 호조(北條), 다케다(武田) 가문과 싸웁니다.
1546년 에치고국 우에스기 노리마사 가 관동연합군 8만명 으로 오다와라의 호조 가문을
공격하지만 호조 우지야스의 기습을 받고 대패 하니 카와고에성 전투 인데 이 패배
후에 노리마사는 관동에서의 지배권을 잃고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도주하지만 나가노
나리마사는 주가(主家)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지 않고 호조와 다케다 가문에 저항 합니다.
이후 호조 가문 은 아키타의 사타케 가문등의 견제를 받았기에 지속적으로나가노 가문을
공격하진 못하였는데 1554년 스루가국(시즈오카현)의 이마가와, 가이국(야마나시현)의
다케다, 사가미국(가나가와현) 호조 가문 의 3국 동맹이 체결되면서 위기가 고조 됩니다.
1557년 가이국(야마나시현)의 다케다(武田) 가문이 시나노(나가노현) 로 침공 해오자
나가노 나리마사 는 소수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과의 전투에서 승리 하는데
1559년에도 다케다씨의 1만 3천여명에 침공에 맞서 2만명의 연합군 을 인솔하여
막았으나 연합군이라 통제가 되지 않아 패퇴 하지만 끝내 미노와(箕輪)성을 수비 합니다.
나가노 나리마사 는 1560년 에치고(니가타현)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이 간토(關東)
를 침공했을 때 의리를 지켜 출진해 호조군을 격퇴 하는 공을 세워 호조 가문을
멸망 직전 까지 몰아붙이지만.... 호조 우지야스의 요청을 받은 다케다 신겐이
우에스기 가문의 배후를 공격하자 우에스기 가문이 철수하니 얻은 영토는 다시 뺏깁니다!
1561년, 항년 70세로 사망 하니 가독은 나리마사의 3남인 나가노 나리모리 (業盛) 가
잇자 신겐은 크게 기뻐하여 '드디어 코즈케를 손에 넣을 수 있겠구나'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나리마사가 죽은 4년후 1566년에 다케다 신겐(信玄) 은
나리모리가 지키는 미노와(箕輪) 성을 침공하여 결국 병탄(倂呑) 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센고쿠 시대가 정략결혼의 시대 였다고는 하나... 나가노 나리마사는 더욱 철저해 자신의
딸 12명을 중요한 지성의 성주의 아내로 시집 보내었으니 이를 연계하여 자신의
주성인 미노와성과 타카토메성을 주거점 으로 한쪽이 공격 받으면 다른쪽이
돕는 방식을 취했다고 하는데 이런 전략으로 신겐의 6번에 걸친 침공을 모두 막아 냅니다.
나가노 나리마사 는 자타가 공인한 코슈(甲州)의 황반이라고 불리는 맹장 이었으나 이와는
다르게 매우 온화한 성격이였다고 하며 나가노 십육창 이라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 중에 필두가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로 검성으로 추앙받는 검술가 라고 합니다.
후계자가 된 아들인 나리모리가 미노와성을 잃은 때문에 무능하다고 평하는 사람이 존재
하는데.... 나리마사가 유능한거지 나리모리가 무능한 것이 아니니 나리모리도
신겐의 군대를 한번 격파한 적이 있으나 나가마사 사후에 주변 호족들이 통제가
안되었고 심지어 다케다 가문과 내통을 하는 호족 까지 생기자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본 제일의 영웅이라고 존경받는 사나다 유키무라 의 조부 유키타카 는 나가노 나리마사
의 가신 이였지만 나가노 가문이 쇠퇴하자 다케다 가문으로 도주해 탈출에 성공한
유키타카는 나리마사의 편지를 받는데 유키타카의 몸을 걱정하는 내용이 담겨있었고,
유키타카의 아내와 가신들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그럼 나가마사는 대인배라?
1600년 히데요시 사후 일본의 주인자리를 놓고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우에다 성주
사나다 마사유키와 차남으로 일본 최고의 지장이자 맹장 유키무라가 서군 에 선
반면에 장남인 노부유키는 동군인 도쿠가와측에 가담해 부자와 형제간에
적으로 싸웠는데 동군이 승리하니 우에다성(上田城)은 사나다 노부유키가 차지 합니다.
마츠시로성 은 1622년에 우에다(上田)번 번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동군에
가담했던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10만석 마쓰시로
(松代 송대)번 번주로 이봉되어 오면서 마츠시로번의 번청으로 사용되었으며 1868년
메이지 시대에 폐번되기 전 까지 사나다 (真田 진전) 가문의 거성 으로 사용 되었습니다.
오늘은 한창인 벚꽃철 인지라 여기 마츠시로성(松代城 송대성) 에서는 야간에 마츠리
행사가 열리는지 조명과 무대장치가 한창 인 것을 뒤로 하고 성을 나와
길을 따라 걸어서 마을 안쪽에 자리한 사나다 보물관 (真田宝物間) 을 찾아 갑니다.
보물관 에는 초대 번주 사나다 노부유키의 초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니 93세 까지 장수한
인물로 아버지, 동생과 갈라져서 세키가하라 전투 때 많은 맘 고생을 했던
인물인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부장인 혼다 타다카츠의 딸 이나(稲)
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며 전국무쌍 4 에서 등장한 신캐릭터로 우리에게 익숙 합니다.
보물관 내부는 대부분이 촬영 금지 구역이지만 와쿠와쿠룸(わくわくルーム)
이라는 곳에는 기념 촬영 스폿 이 있으며 마츠시로성의
타이코몬(太鼓門)을 배경으로 복장 체험 과 함께 사진을 찍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오모테몬(表門) 을 지나 사나다 가문의 저택 들을 둘러보는데 1864년
9대 번주 사나다 유키노리 가 지은 저택으로 메이지 유신후 영주 가
거처했다고 하며 무사주택인 히구치가 가 아직까지도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