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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고전 탐방 스크랩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 토정 이지함
텅빈충만 추천 1 조회 209 14.02.04 20:5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사 전]


1578년 충청남도 아산현. 이 고을의 백성들이 뛰쳐나와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 고을 현감의 죽음 때문이었다. 부임한지 불과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던 고을 현감의 죽음. 그러나 백성들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석 달 남짓에 짧은 기간 동안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 그가 바로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다.


기인(奇人) 개혁을 꿈꾸다 토정 이지함

 

토정 이지함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 책 토정비결일 겁니다. 이 토정비결은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는 책으로 이 토정비결의 저자가 바로 토정 이지함으로 널리 알려져 왔는데요. 때문에 이지함은 미래를 점치고 예언하는 기이한 인물인 것으로 전해져 왔습니다. 이지함이 죽은 후 고을의 모은 백성들은 거리로 나와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이지함은 더없이 훌륭하고 존경해 마지않던 지도자였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이지함의 모습에서 기인의 풍모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토정비결(土亭秘訣)에 저자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토정 이지함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던 것일까요.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들로 종종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부러 관인들의 앞길을 가로 막고 바닥에 드러누운 것이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행동보다 기이했던 것은 그의 행색이었다.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 솥을 뒤집어 쓴 체 매 맞기를 자청하는 그의 행동 기록에 따르면 지함이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은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런 지함을 두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리기도 했지만 지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1) 이지함의 각가지 기이한 행동들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다.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2)

 

 

 

19C 서울지역을 그린 지도인 경감부임진도. 당시 한강변의 마을 한 곳에서 이지함의 토를 따서 붙인 토정이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한강을 따라 아파트 단지가 빼곡히 들어선 마포구 일대 이곳에는 아직도 토정이라는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마포대교 입구에서 상수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토정로라 불리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 살았던 집터 이지함은 바로 이곳 마포 한강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한다.


한상권 아나운서

“당시 토정 선생께서 사실 무렵에 이 땅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승창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이 땅은 아주 지대가 낮고 물이 찬 그런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다가 토정 선생님이 오셔서 가난한 백성들을 모집해서 그걸 흙으로 메우고 거기다가 집을 짓되 흙집을 지었죠. 그리고서 이름을 토정(土亭)이라 했습니다. 바로 흙정자죠.”


기이한 풍모만큼이나 이지함은 사는 모습도 남달랐다. 스스로 척박한 땅에 들어와 보잘 것  없는 흙집 하나에 의지해 살았던 것이다. 1549년 지함의 나이 33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지함은 그의 형을 찾아와 다급하게 말을 전한다. 지함은 처가에 닥칠 불길한 기운을 예감하고 가족들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날 밤 지함은 식솔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 날이 밝으며 분명 위험한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서두른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지함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이른바 이홍난의 고변이라 불리는 역모 사건에 장인을 끌려가 무고한 죽음을 당하고 만다.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훗날 이지함의 행적을 모아 후학들이 남긴 책인 토정유고.3) 이 책에는 이지함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1576년 지함은 제자들을 만나 15년 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전쟁에 대비해 미리부터 준비하고 계획을 세울 것을 당부했다.4) 그리고 예언은 적중했다. 16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이다. 이지함의 기이한 면모들은 많은 야사 집을 통해 더욱 잘 알려져 있는데 주로 도술을 부려 사람을 구했다거나 위험한 일을 예견했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이제껏 기인으로만 알려져 온 이지함. 그런데 그의 관해 전혀 뜻밖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을 담은 대표적인 저서인 북학의. 청나라의 문물수용과 상공업 개발을 주장했던 박제가가 지은 책이다. 바로 이 책에 토정 이지함의 이름이 등장한다. 해외 통상을 통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지함.5)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6)의 저자 이규경 또한 이런 이지함의 선구자적인 면모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도대체 이지함은 어떤 주장을 했던 것일까?


이지함은 포천현감 재직 당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산과 들에 헛되이 버려져 있는 은은 무엇이 아까워서 주조를 못하게 하며 옥은 무엇이 아까워서 채굴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다 속에 무궁무진한 고기는 무엇이 아까워서 잡지 못하게 하며 갯벌에 무궁무진한 소금은 무엇이 아까워서 굽지 못하게 하십니까?”7)


육지와 바다의 자원을 개발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돕자는 것이다.


“육지와 바다는 온갖 재물을 간수해 둔 창고입니다. 이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실물이니 이것을 자원으로 이용하지 않고 나라가 다스려진 경우는 없었습니다. 만약 이 자원의 창고를 열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한다.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전라도 만경현에 섬이 하나 있습니다. 소금에 대해서는 황해도 풍천부 근처에 섬도 있습니다. 이 섬들은 국가나 개인에게 소속된 적이 없다고 하니 포천현에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이것들을 팔아 곡식을 마련한다면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자원 개발을 하고 이 자원들을 통상해 이용하자는 이지함의 주장은 농업 이외에 상업을 천시하면서도 그 이득만큼은 독점했던 지배층에게는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이윤규 교수 경기대 회계학과 한국전통상학회 회장

“굉장한 개혁이죠. 개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발상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구조적으로 시스템화 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측면이 있는 거죠. 위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통치자 입장에서는 그래서 그분의 어떤 생각이 선구자적이고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당시 조선 사회는 땅과 바다의 자원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한다는 큰 원칙을 세웠다. 즉 누구든 직접 개발하기만 하면 그것은 생산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분일 뿐이었고 자원개발의 실질적인 혜택은 소수 힘 있는 권력층에 것이었다. 가난한 백성들이 생산해 내면 그 생산물을 각가지 이유를 핑계로 관리들이 착취했다. 이 때문에 자원 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자원이 소금이었다. 당시 막대한 이윤을 냈던 소금도 이런 방식으로 대부분 지배층의 손에 넘어갔다.


이욱 박사 한국국학진흥원

“삼면이 바다기 때문에 소금을 생산을 하게 되면 엄청난 이윤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가가 국가 재정이 만약에 한계에 봉착했을 때에는 소금 전매를 통해서 국가 재정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소금 생산과 판매에 대한 이윤을 상당수 지배층들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지함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하고 소수의 권력층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자원들을 국가가 나서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통상에까지 이용해서 빈민들을 구하자는 선구적인 방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보수적인 전통 성리학자였던 송시열조차 이지함의 이런 선구적인 면모에 대해 감탄과 존경의 뜻을 전한다.8)

 

이것은 무쇠 솥인데 이지함은 이런 솥을 마치 갓처럼 쓰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지함은 전국을 유랑하는 것을 좋아해서 어디서든 밥을 해먹기 좋도록 머리에 이런 솥 갓을 쓰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지함의 이런 기이한 풍모 때문에 지금까지 이지함은 선구적인 경제사상가라기 보다는 기인으로써의 면모만이 부각돼서 알려졌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18C 영국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입니다. 그는 국민들을 잘 살기하기위해서는 먼저 나라의 부를 키워야 한다는 이른바 국부론을 주장한 경제학자입니다. 그런데 서양의 아담 스미스보다도 2백년이나 더 앞서서 조선의 이지함도 이와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백성들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해외 통상과 자원개발 같은 경제정책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명분 중심의 성리학과 봉건적인 질서가 견고했던 조선사회에서 그는 어떻게 이처럼 선진적인 주장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지함이 태어난 곳은 충청남도 보령. 지금은 물에 잠긴 이곳이 바로 이지함이 태어났던 곳이다. 이지함은 사대부의 명문가인 한산 이씨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지함이 죽은 지 백 여 년이 지나 왕이 사액서원을 내렸을 만큼 한산 이씨 가문은 후세에까지 그 명망을 이어 나갔다. 이지함은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의 6대손이며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는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이다.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 출신의 이지함은 그러나 전혀 뜻밖의 길을 걷는다. 그가 집을 떠나 주로 활동했던 곳은 바로 상인들과 천민들이 살았던 저작거리였다. 이곳에서 지함은 상업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며 몸소 장사에 나선다.


양반이 저작저리에 나서 장사는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지함은 양반이라는 신분에 연연하지 않고 상인들 틈에 섞여 물건을 팔았다.9) 이렇게 장사에 뛰어는 지함은 뛰어난 상인이었다. 수완이 좋아 매번 장사를 할 때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한다. 신분구별이 엄격한 조선사회에서 상인은 가장 천한 신분에 속했다.10) 그리고 이렇게 천한 일은 양반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11) 이런 상황에서도 지함은 배를 타고 무인도까지 들어가 장사를 했다.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었고 이것을 내다 팔아 곡식을 거두어 들였다.12)


신병주 박사 건국대 사학과 교수

“사실 그 당시에 이 양반, 특히 양반 명문가의 후손이 상업 활동 한다는 그 자체는 대단한 모험이라고 볼 수 있죠. 당시 농업이 중시되고 상공업을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양반 최고 명문가의 후손이 직접 상업 활동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재산증식 행위를 한다라는 자체는 아주 양반사회에서는 손가락질 거리가 될 정도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함이 장사를 했던 목적은 자신의 부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넘쳐나던 당시 지함은 자신이 번 돈을 모두 곡식으로 바꿨고 이 곡식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준다.13) 그가 상업을 하고 몸소 익혔던 이유가 바로 가난한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토정이 살던 16C 중반 백성들의 생활고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동안에 과전법 제도가 무너지면서 양반들은 마구잡이로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토지에서 내몰렸고 소작농 신세로 전락했다.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는 데에는 왕실도 앞장섰다.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왕실 소유의 토지를 늘려 나갔다.

 

 

 

땅을 농민들은 갈 곳이 없었다. 지주들의 땅을 빌어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제 손에 들어오는 돈으로는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겨웠다. 굶주림과 학정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도적이 되었고 이 도적 떼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갔다. 명종 대 조선을 혼란으로 몰아  넣었던 임꺽정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가난이 일상이 되어 버린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고자 했던 이지함 그는 농사지을 땅에만 의존했던 조선 사회에 상품을 유통시켜 이윤을 남기는 상업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신병주 교수

“농촌 경제만 한정되지 말고 상업이라든가 수공업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통한 전반적인 국가 경제의 부를 창출하고 그 창출된 부의 혜택이 백성들의 생활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바로 그 조선 사회를 이지함은 구상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가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나아가서는 전체적으로 조선 사회를 그런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지함이 상업의 관심을 가지면서 찾아갔던 곳은 바로 화담 서경덕의 문하였다. 서경덕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학문을 수용했던 개방적인 학풍을 견지한 지식인 그룹이었다. 이는 서경덕과 그의 제자들이 개성출신이라는 사실과도 연관되는데 개성지역의 활발한 상업 활동을 통해 이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가치에 주목했었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업중심을 조선 사회에 취약성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로 상업에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이욱 박사 학국국학진흥원

“개성사람들은 양반도 상인을 했고 또 서경덕의 제자들 중에는 실제로 상인들도 많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어떤 사상은 상업에 대해서는 다른 유학자들에게 비해서는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는 농업에 근간을 했고 농업에서 생산된 것으로 국가 재정을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서경덕이나 이지함 등은 농업 이외 특히 상업이라고 하는 것이 갖는 재정적인 효과에 굉장히 주목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얻어지는 이윤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이지함의 고향에는 아직도 지함재라는 고갯길이 있다. 이 고갯길은 바로 그가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한양까지 다녔던 길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지함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해바다를 경유해 한양까지 활동했던 그에게는 가난한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지함이 장사를 하는 동안 흙집인 토정을 짓고 거처를 삼았던 곳이 바로 이곳 마포였다. 당시 마포는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였다. 해상교통에 의존하던 조선시대 한강변의 나루터는 더없이 중요한 교통 요지였다. 그중에서도 마포나루는 수상 교통의 물량이 가장 많은 물류의 중심지였다.

 

 

전국에서 서울로 들여오는 쌀과 곡물, 해산물과 목재 특산물 등이 바로 이 마포나루로 집결되었고 그만큼 상업에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신병주 교수

“해상무역의 어떤 교두보와 같은 바로 거점지역이 마포의 토정이라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지함이 바로 이 지역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했다라는 것은 해양자원의 개발이라든가 수산업 또는 배를 통한 유통경제의 상업 활동 이런 것에 깊은 이해가 있었고 또 이러한 이해를 정말 구체적으로 백성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실천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공간이   이지함이 근거 했던 마포의 토정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지함은 바로 이 마포나루를 근거지로 삼고 상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여기서 쌓은 식견을 다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까지 했다. 땅을 잃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자립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바로 물건을 만들고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답답한 양반 사회의 틀을 깨고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전해주고자 배운 바를 몸소 실천했던 사람이 바로 이지함이었다.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王者以民爲天 民以食爲天)’


이 글은 이지함이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썼던 것입니다. 이지함은 백성이 편안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신분을 낮추고 사회의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가난한 백성의 친구이자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살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백성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이지함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스스럼없이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요. 이지함이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위해서 쓰게 된 책이 바로 토정비결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토정비결의 토정도 이지함의 호를 따서 쓴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토정비결은 당연히 토정 이지함이 쓴 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토정비결의 저자는 사실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의 저작이 맞는 것일까요.


연세대학교 도서관.

이곳에는 현재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진 토정비결로 추정되는 책이 보관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만들어진 연대나 지은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김영원 연세대학교 국학자료 실장

“저희가 가지고 있는 이 책 안에서는 토정 이지함과 관련된 근거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토정비결을 언급한 다른 기록들을 알아보기 위해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에 풍속서들을 찾았다. 18C말 서울 지역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책인 경도잡지(유득공 저). 의복 음식뿐만 아니라 당시 신년에 운세를 점쳤던 유점이나 오행 점에 대한 기록들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신병주 교수

“경도잡지의 기록이라든가 비슷한 시기에 홍석모라는 사람이 쓴 동국세시기14)의 기록에도 오행 점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이 나타나 있는데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토정 이지함의 집에는 항상 사람들로 넘쳐 났다. 건강문제부터 가족 문제 등 일신상의 문제를 이지함에게서 상담받기 위한 것이었다.15) 토정은 역술은 물론 천문 지리 등 다방면에 뛰어났다. 그의 이런 면모 때문에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찾아와 상담을 했고 토정의 조언에 큰 힘을 얻어가곤 했다.


권인호 박사 대진대학교 철학과

“그 학문 범위가 성리학에 더하여 가지고 천문, 지리 또 율서 음악 등 여러 가지 다양하게 나중에 실학자들하고 유사한 형태인 학문 범위에 있다 보니까 백성들 속에서 묘지도 봐주고  집도 봐주고 애기 이름도 지어주고 또 사주도 봐주는 등등 이러니까 백성들과 친숙하죠.”


책 제목 토정비결의 토정 또한 이지함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이지함의 저작인 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한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70% 이상이 행운의 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토정비결은 어떻게든 희망을 주기 위한 역술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의 운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한 역술인을 찾았다. 토정비결을 보기 전에 먼저 사주로 운세를 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토정비결의 운세는 어떻게 나올까? 주역이 사주팔자로 운세를 보는 반면 토정비결은 생시가 빠진 3주 6자로만 본다. 토정비결 또한 주역의 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나 주역보다 훨씬 단순한 방법으로 보기 때문에 토정비결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손쉬운 역술서다. 토정비결을 토정 이지함의 저작이라고 믿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고도 쉽게 자신의 운세를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 책에 특성이 바로 삶의 지친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이지함의 면모와 그대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토정비결이 단순한 역술서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민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곧 토정 이지함의 삶의 태도와 그대로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지함의 애민사상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일까요. 명문사대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관직에 나가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수도 있었을 텐데 놀랍게도 이지함은 스스로 양반의 길을 포기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왜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일까요.


이지함이 살았던 조선 중기는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집권층인 훈구 척신과 신진세력인 사림들 간에 갈등이 계속 됐고 명종 대까지 무려 네 차례 대규모 사화16)로 수많은 선비들이 숙청을 당했다. 특히 을사사화 이후 권력을 잡은 문정왕후와 척신들의 학정은 극에 달했다. 이런 정치소용돌이 속에서 이지함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지함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관 안명세는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주범들이었던 당시 권력자들의 행태를 비난하는 사료를 작성했다. 하지만 이 사료는 을사사화를 일으킨 장본인들의 손에 들어가고 이를 문제 삼아 안명세를 잡아들인 것이다. 끌려간 안명세17)는 끝까지 을사사화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문 끝에 숨진다. 사관으로서의 양심을 지키며 무고하게 죽은 친구의 죽음은 지함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547년 일어난 양재역 벽서사건 전라도 양재역 벽에 문정왕후를 비방하는 글이 나붙은 것을 계기로 또 한 차례 사림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전국이 들 끊은 가운데 2년 후엔 이홍남 형제의 고변 사건에 이지함의 장인이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절친한 친구와 장인의 무고한 죽음을 목격한 지함은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는다. 이지함에게 있어서 벼슬길은 부당한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권인호 박사

“기묘사화 이후로 제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위해서 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기회가 안 갔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명세 사건이라든지, 4대사화로 인해 바로 선비들이 할 일이 없는 시대였거든요.”


이후 이지함은 기나긴 유랑을 시작한다. 이 유랑 시절에도 지함은 때때로 거짓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돌아다녀야 할 만큼 당시는 어지러운 시대였다.18) 하지만 이지함은 이 유랑기간 동안 백성들의 현실을 목격하며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뜻을 품는다. 그는 재야의 지식인들을 끊임없이 만나며 개혁의 방안을 모색했다. 지함과 두터운 교분을 나눴던 이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남명 조식이다. 그는 재야에 머무르면서도 현실정치의 모순에 적극적으로 비판을 가했던 강직한 학자였다. 이지함과 조식은 둘 다 현실정치가 해결할 수 없는 민생의 곤궁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며 해결방안을 모색해왔던 사람들이다.


조식은 명종 말년에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이 자리에서 조식은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정치제도를 혁신하는 것, 인재를 등용하는 것, 임금 자신에 학문에 힘쓰는 것 등을 강조했다.


신병주 교수

“이지함이 남명 조식이나 화담 서경덕 그리고 정영과 같은 인물들과 활발히 교유하고 있었다라는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결국 조선중기에는 이지함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성리학적인 생각에서 조금은 탈피하고 이런 성리학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던 이런 지식인 그룹들이 상당히 존재 했다라는 것, 이것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지함은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그는 재능 있는 노비나 천민 출신의 제자를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 천민출신의 서기라는 사람이 학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하면19) 노비 출신의 김순종이라는 아이를 데려와 가르치며 그 노비 본역까지 삭제 시켰다.20) 이지함의 도움으로 김순종은 과거에 합격해 사대부까지 되었다. 이지함은 재야에 있었지만 현실정치인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한번은 율곡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관두려 하자 이를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공자는 신병을 핑계로 유비를 만나주지 않았고 맹자 역시 병이 났다는 핑계로 왕의 부름에 아니 나갔잖은가? 그런 탓에 후에의 선비들까지도 아무 병이 없으면서 툭하면 병이 들었다고 엉뚱한 핑계를 대는 자들이 많아진 것일세.”


서경덕 조식과 같은 이들은 당대의 성리학 주류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를 꿈꿨던 지식인 그룹이었습니다. 이지함은 이들과의 교분을 통해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익혔고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서민들과 더불어 장사하고 빈민을 도우며 살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학식과 견문이 바탕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57살이 되던 해 이지함은 마침내 그동안 꿈꿔왔던 현실 개혁의 발판을 마련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명종이후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의 중기는 새로운 정치 국면을 맞는다. 당시 어지러운 정국을 쇄신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유일등용책이라 하여 재야에 묻혀 있는 인사들을 뽑아 관리로 등용하고자 했다.21) 선조 6년 이지함도 율곡의 추천을 받아 관리로 발탁된다. 지함은 종6품직에 포천현감 임명되었다(1574년). 나이 쉰이 넘어 처음으로 얻은 벼슬이었다. 재야에서 학식을 쌓고 백성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며 지함이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 그 오랜 뜻이 이렇게 실현되고 있었다.


“내가 백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敦篤하게 하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려 나라의 堡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22)


부임 첫날 밤 밥상을 받은 지함은 아전들을 꾸짖는다.


“밥상을 보니 먹을 것이 없다.” 


지함의 꾸지람에 놀란 아전들은 더욱 진수성찬을 차려 상을 올린다.


“역시 먹을 것이 없구나.”


백성은 먹을 것이 없이 고통 받는데 벼슬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이런 진수성찬을 먹는 현실에 대해 지함은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함은 앞으로 오곡밥과 나물국 한 그릇만 담아 올리게 했다. 그가 고을 현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문책하는 것이었다. 관리를 벌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관리라 할지라도 잘못이 드러나면 아이처럼 머리를 길게 땋게 했다. 덕이 부족해 아이만 같이 못하니 스스로 느끼고 뉘우치라는 뜻이었다.


이지함이 목격한 포천 사람들의 삶은 참담한 그 자체였다. 포천은 토지가 척박해 기본적으로 농사지을 땅이 부족했다. 땅이 없는 백성들은 먹고 살길이 없어 거리로 나앉기 일쑤였고 굶어죽는 이들도 허다했다. 지함은 죽어가는 백성들을 이대로는 두고 볼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 포천 현에 가난을 구제할 방도를 쓴 것이다. 먼저 은, 옥, 물고기, 소금 등에 산과 바다에 자원을 개발해 이를 빈민구제에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재물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조선사회의 미덕이지만 지함은 재물과 이익도 좋은 마음으로 쓰면 덕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펼쳤다.23)


신병주 교수

“의와 이를 대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국가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는 상당히 어떤 진보적인 정책을 펼 수 있다는 이런 생각들 이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또 현감 직을 맡으면서 실천했다라고 하는 점 이런 면에서는 이지함은 아주 뛰어난 관료 학자였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받아들어 지지 않았다. 더 이상은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지함은 부임 1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3년 후 다시 지함은 아산 현감으로 부임되었다. 아산에 부임한 후 그가 처음으로 한 일도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아산 백성들은 물고기 잡아 왕에게 곡물을 받치고 있었는데 지함은 고기를 기르던 못을 메워버린 것이다.24)


김일희 향토사학자

“공지 내에 숭어지가 있어서 숭어를 잡아서 제사하는 데 백성들이 어려움이 있어서 토정 현감이 그것을 메워 주민들한테 나누어 주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관리가 임금이 먹을 음식을 백성이 괴로워한다는 이유 때문에 마음대로 처분해 버린 행동이었다.


권인호 박사

“백성을 위해서 자기가 죽을 각오로 메워 버린 것입니다. 곡물을 바치는 그런 양어장을 같다가 패쇠했으니까 곡물 양어 자체는 임금 수랏상에서 올라가는 이걸 같다가 못 바치게 했으니까 잘못하면 데모 한다거나 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죠.”

 

 

지함은 이번에도 백성들을 위한 혁신적인 정책들을 펼쳐냈다. 그는 먼저 걸인청을 세웠는데 이곳에 걸인들을 모아 먹고 잘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걸인청은 단순한 보호시설이 아니었다. 걸인들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도록 생업기술을 가르쳤고 각자의 능력에 맞추어 일감을 나누어 주었다. 또 지함이 직접 걸인들을 시장에 데리고 나가 장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지함은 조선중기 봉건사회에 최초의 근대적 재활기간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신병주 교수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서 그들에게 어떤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점 이런 것은 아주 지금 이 관점에서 보아도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지함은 부임 3개월 만에 돌연 세상을 뜬다. 그의 나이 예순 두 살에 역질에 걸려 죽은 것이다.25)


가난한 백성들을 단순히 재우고 먹인 것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과 길을 가르쳤던 21C 복지가 이것이 바로 토정 이지함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2백년 후에 실학자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았을 만큼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경제사상을 펼쳤던 이지함 그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던 기인이었습니다.

 

 

 

 

※ 저작권은 KBS <한국사전>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을 금합니다. 참고로 이 작업을 지금하게 된 것은 신병주 교수의 책이 발간되었기 때문에 하게 된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고 자료로 사용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이지함 평전 - 은둔과 변혁의 변증법적 실천가>(글항아리, 2008)과  <한국사전 2>(한겨레출판, 2008)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민중들을 위해 살다간 이지함. 바로 지금 이 시대에 이지함과 같은 이런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1) “나막신을 신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나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傳 : 선조수정실록


2) 선조수정실록.


3)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를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이지함(李之? : 1517~78)의 시문집.

    2권 1책. 목판본. 권두에 정호(鄭澔)의 서(序)가 있다. 1660년(현종 1) 현손(玄孫) 정익(楨翊) 등이 간행했다. 시·사(辭)·설(說)·소(疏)와 부록으로 유사(遺事)·제문·묘갈명·시장(諡狀) 등이 실려 있고, 권말에는 송시열(宋時烈)의 발문과 권상하(權尙夏)의 후제(後題), 이정익(李楨翊)의 의(議)가 있다. 〈차도정절귀거래사 次陶靖節歸去來辭〉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歸去來辭〉를 본떠 낙천적인 심경을 터득하고 인간심성의 끝없는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인성(人性)의 영원성을 포착해보려는 심경을 담고 있다. 〈대인설 大人說〉에는 이지함의 인생관이 함축되어 있고, 〈피지음설 避知音說〉에서는 재용(財用)과 권세의 소리를 피하고 전야(田野)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함을 지적했다. 또한 〈과욕설 寡欲說〉에서 과욕이 무과(無寡)의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허(虛)하고 영(靈)해서 결국 중화(中和)를 이룰 수 있다고 논한 글이다. 〈이포천시상소 ?抱川時上疏〉는 그가 포천현감으로 있을 때 그곳의 빈민구제책을 논하면서 탕평책을 제시한 것이고, 〈이아산시진폐상소 ?牙山時陳弊上疏〉는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그곳 군정의 폐해와 그 시정책을 촉구한 것이다. 〈유사〉는 이이(李珥)·조헌(趙憲) 등과 교류하면서 나눈 이야기, 일화 등을 수록한 것이다. 그가 지었다고 하는 〈토정비결〉은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기담(奇談)이나 술수(術數)에 밝았다는 그의 면모가 이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상당부분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4) “15년 안에 옛날 성현들의 글을 많이 읽고 임금에게 덕을 권장하여 난리가 사라지고 앙화가 없어지게 해야 한다.”


5) “토정 이지함이 일찍이 외국 상선 수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6) 조선 후기의 학자 이규경(李圭景 : 1788~?)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60권 60책. 필사본. 우리나라와 중국, 기타 외방의 문물·제도를 망라하여 연혁과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본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서광계(徐光啓)·왕징(王徵)의 저술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밝혔다. 저자는 스스로 사물의 크고 작음, 사욕의 구별없이 의의(疑義)가 필요한 것이나 고증이 요구된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보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다고 했다. 본서에 실린 내용을 보면 천문·역법·수리·시령(時令)·부족·역사·지리·붕당·경서·문학·문자·음운·금석·고기(古器)·전적(典籍)·서학(西學)·서교(西敎)·도교·불교·서화·의학·음양·기후·오행·재이(災異)·제도·습속·예제·복식·유희(遊?)·주거(舟車)·야금(冶金)·고총(古塚)·병학·무기·양전(量田)·양조(釀造)·종축(種畜)·외래물종·초목·어류·조수(鳥獸)·금속 등으로 백과사전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총 항목만도 1400여 개 이상이 된다. 이 책의 부록으로 각종 군사기술을 저술한 〈오주서종 五洲書種〉과 박물지인 〈오주서종박물고변 五洲書種博物考辨〉이 있어 저자의 박식과 관심분야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저자가 평생동안 저술한 것이지만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고 원고의 형태로 남아 있다. 때문에 편차와 내용의 배열이 잘못된 곳도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일부 잘못된 서술이나 세상에 유전되는 이야기가 그대로 실린 것이 있다. 그러나 개인의 저술로는 기념비적인 방대한 저술이며, 이 책의 저변에 깔린 사상사적 의미는 더욱 중요한 저술이라고 하겠다. 원본은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때 없어지고, 이를 필사한 것만 규장각에 남이 있다. 애초에 원본도 권1·2는 유실된 상태였으며, 필사본도 손실이 있어 권1~4가 없고 현재는 56권만 남아 있다. 〈오주서종〉 등은 8·15해방 후에 따로 발견되었다. 1959년에 고전간행회에서 이를 영인했다.


7) 포천현감 재직 당시 왕에게 올렸던 상소문. 1574년.


8)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서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모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9) “몸소 장사를 하고 생업을 경영하여 2~3년 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傳 : 토정유고


10) “사농공상에는 그 본분이 있으니 뒤섞일 수 없다.”  傳 : 성종실록


11) “귀하고 천한 것은 길이 달라서 서로 섞일 수도 없고 뒤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명백하다.”  傳 : 성종실록


12) 토정유고.


13)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아다가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준 다음 옷자락을 털고 떠나곤 했다.” 傳 : 토정유고


14)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洪錫謨 : ?~?)가 우리나라 연중행사와 풍속 등을 정리하여 설명한 세시풍속지. 1책. 필사본. 책 맨 앞의 이자유(李子有)의 서문이 1849년(헌종 15) 9월 13일에 씌어진 것으로 보아 1849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에서는 정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의 행사·풍속을 23항목(광문회본은 22항목)으로 분류하여 월별로 정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정월에는 문안비(問安婢)·세함(歲銜)·떡국 등 여러 가지 새해행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설빔을 세장(歲粧)이라고 하는 등 순수한 우리말을 구태여 한자어로 고쳐 쓰려 한 흔적이 보인다. 각 지방의 풍속으로는 양서(兩西)의 용의 알 뜨기, 충청도의 횃불싸움, 관동지방의 새 쫓기, 영남의 칡줄다리기 등이 소개되어 있고, 특히 제주도의 풍습은 본토와 다른 것이 많아 많은 기사가 실려 있다. 또한 각 시기마다의 별식인 시식(時食)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종래 민속을 해설한 책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 세밀하며, 당시 이미 없어진 민속도 〈동국여지승람〉에서 전제하여 실어놓았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 차이가 있는 풍속들도 많이 기술되어 있는 자료집으로서, 우리나라 세시풍속 연구의 중요한 기본문헌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시원과 유래를 억지로 중국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중국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시대적 한계성이다.


15) “토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점), 율려(음악), 산수, 소리에 능했다. 관상, 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傳 : 토정유고


16) 무오사화(1498년), 갑자사화(1504년), 기묘사화(1519년), 을사사화(1545년).


17) 1518(중종 13)~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 아버지는 부호군 안담(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 예문관검열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이기(李?),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으며, 사관으로서의 노고를 인정받아 가자(加資)되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승정원주서에 올랐다. 그러나 1548년(명종 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 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붙잡혀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 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1570년에 신원(伸寃)되어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받았다.


18) “이지함은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바닷가를 돌아다니면서 거짓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하였다”  傳:선조수정실록


19) 토정유고.


20) 토정유고.


21) “유일지사(재야에서 벼슬을 하지 않는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는 것은 새로 정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다.”  傳 : 선조실록(1567년)


22) 선조수정실록.


23) “義(의)와 利(이)는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나쁜 사람이 악용을 하면 욕심을 채우는 것이 되지만 선한 사람이 사용한다면 재물과 이익도 모두 덕이 될 것입니다.”  傳 : 1578년 상소문


24) 토정유고.


25) “그의 정치는 백성 사랑을 위주로 하고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했다. 한창 기반을 갖추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傳 : 선주수정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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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11.06 10:55

    첫댓글 서화담,남명선생과의 교분이 두터웠던 모양입니다. 모두 비슷한 삶의 궤적을 가진 분들이라 여깁니다.힘든 세상에서의 새세상을 꿈꾼다는 게 선비의 도리라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어려움과 무거운 책임이 있었으리라 여깁니다.누구에 의해 저작되었든 선생의 호로 토정비결이 남아 우둔한 백성들의 위로가 되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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