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역에서 만난 고교동창
강남구청역 중앙광장 붐비는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초로의 여인’을 아이폰에 쓰고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과 느꼈던 감정이 시들기 전에 글로 옮겨 놓기 위해서 였다. 군중들의 소음도 글쓰는 나의 집중력에 묻혀버렸다. 나는 거기 나 혼자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글을 거의 마칠 때쯤 해서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만나기로 한 친구가 싱겁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눈자위가 여위고 힘이 없어 보였다. 작년 겨울부터 임파선 암으로 6개월 동안 항암치료를 받았다고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짐작이 간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머리털은 물론 온몸의 털이란 털은 다 빠져나갔다고 한다. 지금은 어지간히 원래대로 머리카락도 다시 나왔다고 한다. 그래도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코로나 전에 하노이에서 만났으니 삼 년 만이네. “
“세월 빠르네. 벌써 그렇게 되었나. “
눈에 띄는 대로 근처에서 순대국으로 점심을 때우고 스타벅스로 들어섰다. 예전 같으면 점심에 낮술 한 잔씩 했을 텐데 술 끊은 지 몇 년 되었다고 한다. 스타벅스는 젊은 여성들로 가득 차 앉을 자리가 거의 없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으니 친구가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나이 때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 직원이 와서 나가 달라고 할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내년이면 내가 베트남으로 가서 공장을 차린 지 30년이 된다. 또 결혼 50주년이 되는 해야”
묻지도 않은 말을 친구가 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 허긴 네가 나보다 2년 먼저 결혼했지. 내년에는 건강회복해서 세계 일주라도 한 번 해야겠다”
블랙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나서 친구는 말을 이었다.
“임파선 암을 겨우 이기고 나니 이번에는 전립선에 암이 생겼대. 몇 달이 걸려서 별의 별 검사를 다 하더니 주치의 결론은 간단하더라. ‘암이네요! 옆방으로 가서 상담 받으세요’
상담 결과 수술하기로 했다. 수술 날자가 그나마 빨리 잡혀서 다행이다”
한국의 종합병원 명의라는 의사들은 수술 대기자들이 많아서 몇 달 혹은 일 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의료 적체가 여기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첫 직장으로 서울통상에 들어가서 가발파트에서 일 한이래 오늘날까지 무려 50년 동안 한 우물을 팠다. 최근 삼성화재에 다니던 둘째 아들을 후계자로 삼년 전부터 경영 연수를 시키더니 이제는 거의 손을 뗀 상태라고 한다.
“젊은 사람은 시간 나면 여행을 가고 늙은 사람은 병원으로 간다더니 내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여한은 없다. 치료받을 돈은 벌어놨으니 병원 다니는 걸 일 삼아야 할 것 같아. 전립선암은 수술 후에도 30% 재발한다고 하니 마음 놓고 살긴 틀렸어”
친구는 70년대 초 한국의 수출이 막 시작될 때 서울통상에 들어갔다. 가발 아이템 하나를 가지고 매달린 게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다른 분야로는 전연 눈 돌리지 않고 오직 가발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90년대 초 베트남으로 건너가 사이공과 하노이에 공장을 차렸다. 낮선 땅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힘과 노력으로 이룩한 성공은 값진 것이었다.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별 영향 없이 꾸준히 매출이 늘어 안정적인 중소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하니 그의 인내와 끈기,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사업도 가정도 부러울 게 없는데 이제는 마지막 건강과의 싸움이 힘겹게 기다리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 서로 악수를 나누고 친구는 소변이 급하다며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