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결산 1, 3대 세도정치 가문 구조분석 3 한국명문 (2004-09-24 오후 12:40:47) Hit : 221 Vote : 18
3대 세도정치 가문 구조분석 3
풍양조씨 편 -----------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원조는 조만영이다. 그의 딸이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후일 익종]의 빈으로 책봉되 었다. 그 세자[효명세자, 왕세자]가 죽고 어린 세손이 왕위[헌종]에 오르자 임금의 외조부로서 권력을 장 악, 안동김씨 세도 가문과 대적하여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확립하였다.
1,조만영의 선조 조만영의 아버지 조진관은 구현시에 장원하여 홍문관 제학,광주부윤,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와 이 조 등 여러 조의 판서를 지냈다. 조만영의 할아버지 조엄은 문과하여 충청도 암행어사, 경상도 관찰사, 대 사헌, 대사간, 예조참판 등을 거쳐 공조와 이조의 판서를 지냈다. 조만영 큰집 종조부 조돈은 이조판서이 며, 증조부 조상경은 이조판서다.
2,조만영과 풍양조씨 세도정치 본진영 조만영은 1776년[영조52]에 태어나 1846년[헌종12년]에 몰했다. 자는 윤경, 호는 석애다. 문음으로 능원 랑을 거쳐 1813년[순조 13]문과에 급제하고 검열이 된 뒤 지평, 정언 등을 지냈다. 임금은 1816년 3월에 평 안도민에 징병을 감하여 부담을 덜어주고 각 지방에 관리의 포학을 살피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였다.
이때 호서 암행어사로 이우수, 영남 암행어사로 이화, 북도 암행어사로 정기선, 호남 암행어사로 조만영 을 각각 내보냈다. 호남을 두루 둘러 25건의 관리 부정을 조사, 탐관오리를 징치했다. 특히 도내에서 원성 이 높던 각종 세금 징수 등을 면밀히 조사하여 조정에 올려 전라감사 김계온을 파직시켰다.
이 무렵 조만영의 8촌 되는 조득영은 대사헌으로 임금의 외숙인, 반남박씨 세도의 주역 호조판서 박종경 을 탄핵했다. "박종경은 주상의 인척을 기화로 갖은 복을 다 누리면서 뇌물을 탐하며 행패가 심하여 민원 이 심하니 처벌하라"고 외쳤다. 탄핵을 받은 박종경은 양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이것은 곧 풍양조씨의 시대 가 오고 있음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심양사로 중국에 가는 한용구의 서장관으로 직무를 보았으며, 오위도총부 부사직이 되었다. 이 때 그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어 그는 일약 풍은부원군에 봉해졌다. 세자[효명세자, 순조의 아들로 후일 익종으로 추존]의 장인이 된 그는 마흔네살 한창 나이에 풍양조씨 정치 가문의 실력자로 부상했다. 같은해 동생 조 인영이 추사 김정희와 함께 과거를 봐서 장원 급제하여 풍양조씨 쌍두 마차의 등장을 알렸으며 안동김씨 세도 정치에 도전장을 띄운 셈이 되었다.
조만영은 부사직에서 이조참의로 발탁되었다. 세자의 장인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 동생 조인영은 세자의 처삼촌으로 유신 최고의 영광인 홍문관의 응교가 되었다. 조만영이 이조참의로 인사권을 쥐자 풍양조씨 세도 정치의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되었다.
1826년 조만영이 예조판서에 오르고 조인영은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조만영의 8촌 조종영은 6조 판 서 중의 요직인 이조판서를 차지하였다.
그뒤 조만영은 이조판서 겸 어영대장으로 실권을 장악, 앞으로 닥아올 풍양조씨 세도정치 시대를 대비 한 그 기반을 다졌다. 1830년 세자가 죽자 풍양조씨 일파가 안동김씨파에 의해 밀려났지만 조만영만은 세 손의 보호를 위해 호조와 예조의 판서를 지냈고, 조인영도 세손부, 우부빈객으로 세손의 보호에 힘썼다.
1834년 세손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니 이이가 바로 헌종이다. 헌종이 등극하자 조만영이 이끄는 풍 양조씨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즉위 초에는 헌종의 할머니 순조비 안동 김씨가 수렴청정하므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끝나지 않아 좀 기다려야만 했다. 드디어 헌종 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비로서 본격적 인 풍양조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시어머니 대왕대비[순조비,헌종의 할머니] 안동김씨의 그늘에서 지내던 서른 네살의 왕대비 조씨, 신 정왕후[헌종의 어머니]가 임금의 뒤에서 그 힘을 발휘하였다.
임금의 외할아버지 조만영은 호위대장,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지내면서 화려한 직책은 사양하고 임금의 보호에만 진력했다. 이조판서, 대제학, 호조,형조의 판서 등을 지내면서 권력의 기반을 다지던 동생 조인 영은 예순 살로서 영의정이 되었다. 이로써 조만영이 이끄는 풍양조씨 세도정치 제1세대 쌍두마차 시대의 융성기를 맞았다.
조만영의 아들 조병구는 총융사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였고 이조판서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이 또다시 이 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쥐었다. 조병구와 조병현이 이끄는 제2세대 쌍두마차 합류에 의해 풍양조씨가 안 동김씨를 누르고 풍양조씨 독무대를 이루므로써 풍양조씨 세도정치가 그 황금기를 맞았던 것이다.
"권불10년"이라더니 풍양조씨 세도정치가 홀연히 그 종막을 고하기 시작했다. 조만영의 외아들 병구는 세도정치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규탄을 받아 1845년[헌종11] 49세로 죽었다.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진 조만영도 눈이 멀어 1846년[헌종12] 71세로 죽었다. 이래 저래 합친 10년의 풍양조씨 세도 정치가 그 막 을 내렸다.
3, 풍양조씨 세도 가문의 후속 진영 풍양조씨 세도정치 1,2세대가 정치 무대에서 물러나고 다시 안동김씨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 때 왕위를 자기 아들로 계승시키려는 흥선군과 손을 잡은 조성하가 풍양조씨 세도정치 제3세대 기수로 깃발을 들었 다. 조성하는 조만영의 손자이며, 조병구의 아들이고, 조대비의 조카로서 풍양조씨 세도가문의 적장자 답 게 안동김씨에 빼앗긴 실지 회복에 앞장을 섰다. 조성하는 안동김씨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조대비로 하 여금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재황[아명, 명복]을 철종이 승하할 시 그 후계자로 지명하는 일을 성사시키므 로써 안동김씨 세력을 격퇴시켰다.
또한 민승호와 손을 잡은 조영하는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힘을 등에 없고 흥선대원군 정권 을 무너뜨렸다. 이로써 조성하,조영하가 이끄는 풍양조씨 제3세대 쌍두마차가 옛세도정치의 저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4, 맺는말 안동김씨 김조순 세도 왕국은 무적함대가 3척이다. 제1호 함선은 제1편대에 친위대장 김좌근과 김병주, 제2편대에 김홍근, 김흥근, 김병시, 김병덕과 같은 유능한 장군들이 탑승했다. 제2호 함장은 김조근, 제3호 함장은 김문근이 버티고 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병력은 대군단급이다.
여흥민씨는 1조 4인방 3진의 12명 장군이 이끄는 정예부대지만 그 병력은 대대급이다.
풍양조씨는 3쌍의 쌍두마차 부대다. 그 병력은 소총 중대급이다. 세도정치의 무적함대 안동김씨 대군단 이 1차로 조만영과 조인영이 이끄는 풍양조씨 제1세대 쌍두마차와 조병구와 조병현이 이끄는 제2세대 쌍 두마차 두 쌍에 참패를 당했다. 그 대군단이 2차로 조대비, 흥선군, 조성하 3인의 계략에 의해 싸워보지도 못하고 풍양조씨의 절대적인 힘 앞에 결국 영원히 괴멸돼 버렸다.
풍양조씨는 안동김씨나 여흥민씨에 비해 보유 병력이 적은 정치 집단이지만 그 위력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대단했다.
권력 투쟁의 승패는 병력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병법에 달렸다는 사실을 풍양조씨 가문이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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