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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권 이상국가와 교육의 원리
제1장 국가와 개인의 행복
최선의 삶에 관해서는 일반인들을 위해 출간한 저술들에서 충분하고도 적절하게 논의했다고 생각되는 만큼 여기서는 그것들을 이용하고자 한다. 좋음은 외적인 좋음, 몸의 좋음, 혼의 좋음으로 삼분되며, 행복한 사람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용기, 절제, 정의, 지혜를 전혀 갖지 못해,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 지나가도 놀라고,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풀기 위해 무슨 범죄라도 저지르고, 사소한 이익을 위해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망쳐놓고, 어린애처럼 철없고 미치광이처럼 마음이 비뚤어진 자를 행복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63-364쪽)
*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끌던 뤼케이온(Lykeion) 학원 내부용이 아닌 출간된 저술들. 어느 저술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363쪽 주1)
미덕은 외적인 좋음에 의해 획득되고 보존되지 않지만, 외적인 좋음은 미덕에 의해 획득되고 보존되며, 인간에게 행복한 삶이 쾌락에 있든 미덕에 있든 이 양자 모두에 있든, 외적인 좋음은 필요 이상으로 갖고 있지만 성격과 이성에서는 부족한 데가 많은 사람들보다는 성격과 이성은 아주 잘 계발되어 있지만 외적인 좋음은 적당한 한도 내에서 가진 사람들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364쪽)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의 양은 각자가 가진 미덕과 지혜와 그에 따른 행위의 양에 비례한다는 데 동의해도 좋을 것이다. 신을 그 증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신이 행복하고 축복받은 것은 자신 때문이고 그런 본성을 타고난 까닭이지, 어떤 외적인 좋음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운(eutychia)은 필연적으로 행복(eudaimonia)과 다른 것이다. 혼 바깥의 좋음은 저절로 우연(tyche)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누구도 우연히 또는 우연에 의해 정의롭고 절제 있는 사람이 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365쪽)
이와 관련된, 달리 증명할 필요가 없는 명제는 최선의 국가는 행복하고 잘해나가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잘해나갈 수 없다. 그리고 개인이건 국가건 미덕과 지혜 없이는 훌륭한 행위를 할 수 없다. 국가의 용기, 정의, 지혜, 절제는 개인이 용감하고, 정의롭고, 지혜롭고, 절제 있다고 불릴 때 분유(分有)하는 미덕과 같은 효력, 같은 성격을 갖는다. (365쪽)
개인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나 최선의 삶은 미덕이 요구하는 행위에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외적인 좋음을 충분히 갖춘 미덕의 삶이라고 가정해두자.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논의에서는 그대로 제쳐 두고 다음 기회에 그들의 이의 제기를 살펴볼 것이다. (365-366쪽)
제2장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1
국가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같은 것이냐 아니냐는 문제를 논의하는 일이 남았다. 대답은 명백하다. 두 가지가 같은 것이라는 데 다들 동의할 테니 말이다. (367쪽)
최선의 정체는 분명 누구나 가장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삶은 미덕의 삶이라는 데 동의하는 자들도 정치적·실천적 삶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모든 외적인 사물을 초탈한 삶, 이를테면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삶이라고들 하는 관조적인 삶이 더 바람직한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치열하게 미덕을 추구하는 자들은 대개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이라는 이 두 가지 생활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으냐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지각 있는 자라면 자신의 삶을 더 놓은 목표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368쪽)
정치가가 이웃 나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이웃 나라들을 지배하고 폭군처럼 다스릴 궁리를 하는 것이, 정치가가 할 일이라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듯하다. (...)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처럼 지배하는 것을 정치로 혼동하고 있는 듯하며, 자신에게는 옳지도 유익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에게는 거리낌 없이 행한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정의로운 통치를 추구하면서도, 남들을 대할 때는 정의 같은 것에 아무 관심이 없다. (369-370쪽)
어떤 국가가 잘 다스려질 경우 혼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국가가 어딘가에 홀로 떨어져 있어도 잘 다스려지고 훌륭한 법을 가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 따라서 훌륭한 입법자가 할 일은 국가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어떻게 훌륭한 삶과 그들에게 가능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다. (370쪽)
제3장 정치적 삶과 철학적 삶2
활동보다 활동하지 않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행복은 활동이고, 게다가 정의롭고 절제 있는 사람들의 활동은 훌륭한 일을 많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2쪽)
누군가 미덕과 최선의 행위를 실현할 능력에서 걸출하다면, 그를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는 미덕뿐만 아니라 행동할 능력도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이런 주장이 옳다면 그리고 행복이란 '잘해나가는 것(eupragia)'이라고 규정해야 한다면, 국가 전체를 위해서나 개인을 위해서나 활동적인 삶이 최선의 삶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삶이라고 해서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듯 꼭 타인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삶일 필요는 없다. 또한 행위에서 결과를 얻기 위한 우리의 생각만이 활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하고 그 자체가 목적인 고나조와 사색이 더 활동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373쪽)
따로 떨어져 혼자서 살아가기로 작정한 국가들도 반드시 비활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국가의 부분들 사이에도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부분들 사이에는 수많은 상호관계가 성립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 그러므로 개인에게 최선의 삶이 국가와 인류에게도 최선의 삶임이 분명하다. (373쪽)
제4장 이상국가의 규모
국가를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의 수와 질이고, 그 다음이 영토의 크기와 생김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가 행복하려면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 주민의 수가 아니라 주민의 역량이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도 개인처럼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있다. 따라서 이 기능을 잘 수행할 역량 있는 국가가 가장 큰 국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 설사 주민 수로 국가의 크기를 판단하는 것이 옳다 해도 아무나 다 주민에 포함시켜서는 안 되고 - 국가에는 다수의 노예와 재류외인(在留外人, metoikos)과 이방인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 국가의 본래적인 구성원만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374-375쪽)
인구가 너무 많은 국가는 잘 다스리기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알기에, 잘 다스려지기로 이름난 국가치고 인구를 제한하지 않는 국가는 하나도 없다. 이 점은 이론적으로도 입증된다. 법(nomos)는 질서(taxis)이며, 좋은 법(eumomia)은 따라서 좋은 질서(eutaxia)여야 하는데, 너무나 많은 다수는 질서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5쪽)
* 노자의 소국과민론과 상통함. (박희택)
국가도 인구가 너무 적으면 자급자족할 수 없다. 국가는 그 본질상 자급자족해야 하는데도 말이다. 또 인구가 너무 많은 국가는 하나의 민족으로서는 생필품을 자급자족하겠지만 국가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국가는 정체를 갖기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376쪽)
국가의 활동은 치자의 활동과 피치자의 활동으로 나뉘는데, 치자가 할 일은 명령하고 재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재판하고 공적에 따라 공직을 배분하려면 시민들은 서로의 미덕을 잘 알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공직자 선출도 법정의 판결도 잘못되기 마련이다. 이 두 가지 업무는 어림짐작으로 수행하는 것이 옳지 않음에도, 인구가 너무 많다 보면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난다. (377쪽)
따라서 한 국가의 최적 인구수는 자급자족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되 전체를 쉽게 개관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 다수임이 분명하다. (377쪽)
* 참고로, 플라톤은 [법률] 제5권 737e 이하에서 5,040명의 시민 농부와 거기에 딸린 가족과 노예 외에 적정 수의 재류외인이 섞인 것을 이상적인 인구 수로 제안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국가는 오늘날의 국가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그리스의 도시국가다. 제1권 주1 참조. (377쪽 주11)
제5장 이상국가의 영토
영토는 반드시 온갖 곡물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범위와 크기에 관해 말하자면, 영토는 주민들이 절제를 지키며 자유롭게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커야 한다. (...) 국가의 영토는 외적(外敵)은 접근하기 어렵고, 주민들은 나가기 쉬워야 한다. (378-379쪽)
도시의 가장 바람직한 위치는 해로로도 육로로도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조건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즉 영토의 곳곳에 증원 부대를 파견하기 편리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조건은 수확한 곡물 외에도 목재와 국내에서 생산되는 다른 원자재들을 반입하기 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378-379쪽)
제6장 바다의 중요성
인구 증가만 피할 수 있다면, 국가 안보를 위해서나 생필품의 원활한 공급을 위해서나 도시와 영토가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생필품 중에서 국내에 없는 것은 수입하고 국내에 넘쳐나는 것은 수출해야 한다. 국가는 남들이 아니라 자체의 수요를 위해 무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들은 세수를 위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장터로 개방하는데, 국가가 그런 종류의 이익을 탐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런 장터를 가져서는 안 된다. (380-381쪽)
일정 규모의 해군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 매우 유리하다. (...) 주도적 국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려는 국가는 그러한 활동에 걸맞는 해군을 가져야 한다. 노 젓는 선원이 많다고 해서 국가의 인구가 반드시 증가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국가의 구성원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선원들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해군은 보병대에 속하는 자유민이다. (381쪽)
제7장 기후와 성격
한대지방, 특히 에우로페(유럽)의 한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기개(thymos)가 넘치지만, 지능(dianoia)과 재주(techne)는 좀 모자란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 정치조직이 없고 이웃을 지배할 능력이 없다. 반면에 아시아인들은 지능과 재주는 타고났으나 기개가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남에게 예속되어 노예로 살아간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이 양자 사이에 자리잡은 헬라스민족은 두 가지 미덕을 겸비하여 기개도 있고 지능도 있다. 그래서 헬라스민족은 자유민으로 남아 있고, 최선의 정체 아래 살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통일만 될 수 있다면 다른 민족을 모두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383쪽)
입법자에 의해 쉽게 미덕으로 인도될 수 있는 사람들은 분명 지능과 기개를 겸비한 사람들일 것이다. 수호자들은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냥하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상냥함을 낳는 것이 기개다. 우리는 혼의 이 능력에 의해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수호자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 도량이 넓은 사람들도 부당한 짓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아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할 것이다. (...) 배신당했다고 느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형제간의 전쟁은 가혹한 법이다"라는 말과 "지나치게 사랑한 자들이 지나치게 미워하게 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384-385쪽)
* 첫 번째 인용문은 에우리피데스의 것이다. 두 번째 인용문은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385쪽 주17)
제8장 국가의 구성원과 본질적 기능
국가는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이고, 그 목적은 가능한 최선의 삶이다. 그런데 최선의 삶은 행복이고, 행복은 미덕의 구현과 완전한 실천에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행복에 참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참여하거나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여러 유형의 국가와 정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러 부류의 사람이 여러 가지 수단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들을 위해 여러 가지 생활 방식과 정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387쪽)
국가의 기능을 열거해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첫째는 식량(농사)이 있어야 한다. 둘째는 기술이다. 셋째는 무구(武具, 국방)이다. 넷째는 내수용과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일정한 세입(세수)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의식(儀式)이라 부르는 신들에 대한 예배(종교)이다. 여섯째이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지, 무엇이 개인 사이에 옳은지 판단하는 것(사법)이다. (...) 농민, 기술자, 전사, 부유층, 사제들, 올바르고 유익한 것을 결정해줄 자들이 있어야 한다. (387쪽)
제9장 공동체 내에서의 역할 분담과 연령층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는 최선의 정체, 즉 국가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정체인데, 행복은 앞서 말했듯이(제7권 제1장), 미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구성원이 특정 규범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정의로운 이상적 정체를 가진 국가에서는 시민들은 분명 직공이나 상인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삶은 천하고 미덕에 반하기 때문이다. 시민이 되어야 할 사람들은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된다. 미덕을 계발을 위해서도 정치 활동을 위해서도 여가(schole)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89쪽)
국가에는 또 전사들과 유익한 일에 관해 심의하고 정의에 관해 판결을 내리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국가의 부분들이다. (...) 정체는 이 두 가지 기능을 같은 사람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맡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에 따라 맡겨야 한다. 자연은 젊은이들에게는 힘을 주고, 늙은이들에게는 지혜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연령층에게 기능을 배분하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고 정의롭다. 그것은 가치(axia)에 따른 배분이기 때문이다. (389쪽)
재산도 이들이 가져야 한다. 바로 이들이 시민인 만큼 시민은 부유해야 한다. 직공 집단은 국가에 속하지 않으며, 미덕을 창출하지 못하는 다른 집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상국가의 원칙에서 나온 결론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미덕을 갖춰야 하고, 한 국가를 행복하다고 말할 때는 시민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재산이 시민의 것이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농사일은 노예나 비헬라스인이나 농노들이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389-390쪽)
농민 집단과 직공 집단은 사제로 임명되어서는 안 된다. 신을 경배하는 일은 시민이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민은 전사 집단과 심의 집단으로 양분되고, 연로하여 그런 활동을 그만둔 자들이 신을 경배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므로, 사제직은 이들에게 맡겨져야 한다. (390쪽)
제10장 식량 공급과 농토 분배
공동식사제도도 오래된 것 같은데, 크레테에서는 미노스왕 치세에 도입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더 오래되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탈로스라는 오이노트리아왕이 있었는데, 오이노트리아인들은 그의 이름을 따 이탈리아인들이라 불리고, (...) 이 이탈로스가 전에는 유목민이던 오이노트리아인들을 농민으로 만들고, 그들을 위해 다른 법들에 덧붙여 처음으로 공동식사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의 후손 가운데 일부는 그가 제정한 다른 법들과 더불어 공동식사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391-392쪽)
시민을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아이귑토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세소스트리스의 치세가 미노스의 치세보다 더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다른 제도들도 긴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번 또는 무수히 자주 발명되었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392쪽)
재산은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 공유되어서는 안 되고, 호의적인 동의를 받아 공동으로 사용하되 어떤 시민도 식량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 토지는 공유지와 사유지로 양분되어야 한다. 이들 양분된 토지는 다시 양분되어야 한다. 공유지 가운데 일부는 신들에 대한 예배에 드는 비용을, 다른 일부는 공동식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여야 한다. 그리고 사유지 가운데 일부는 변경에 있어야 하고, 다른 일부는 도시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각자 두 필지를 받되, 두 곳에 한 필지씩 갖도록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평등과 정의에 부합하며, 그래야만 이웃 나라와 전쟁이 발발할 때 시민들이 더 강한 연대감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93-394쪽)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토지를 경작하는 자들은 노예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종족이어서도 안 되고, 용감해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그들은 맡은 일을 잘해내고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을 테니 말이다. (...) 사유지를 경작하는 노예는 사유지 임자의 재산이어야 하고, 공유지에서 일하는 자들은 국가노예여야 한다. (394쪽)
제11장 도시의 위치와 설계
부지(敷地)와 관련하여 이상적인 도시를 설계하려면 다음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건강이다. 건강이야말로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동쪽을 향하고 있어 동풍을 쐬는 도시들이 가장 건강하다. 그다음으로 건강한 것은 북풍을 등지고 있는 도시들이다. 그곳에서는 겨울이 견딜 만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또 고려해야 할 사항은 도시는 정치활동이나 군사활동을 하기에 편리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 밖에 도시 안에는 되도록 샘물과 흐르는 물이 넉넉해야 한다. (395쪽)
주민들의 건강도 고려해야 하는데, 건강은 첫째, 부지의 위치와 방위가 건강에 좋으냐에 달려 있고, 둘째, 건강한 물을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우리가 몸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것이 우리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과 공기야말로 그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395-396쪽)
요새에 관해 말하자면, 모든 정체에 똑 같이 유리한 것은 없다. 과두정체와 독재정체에는 성채가 유리하고, 민주정체에는 평지가 유리하며, 귀족정체에는 그 어느 것도 아니고 다수의 요새가 더 유리하다. (396쪽)
개인주택은 힙포다모스가 도입한 현대적인 방법에 따라 규칙적으로 배열하면 미관상으로도 더 좋고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더 편리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구식 배열이 더 유리하다. 그럴 경우 외적이 침입하기도 어렵고 시가전을 할 때 길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해야 하는데, (...) 말하자면 도시 전체가 아니라 특정 구역에서만 규칙적으로 배열해야 한다. 그러면 안전도 확보하고 미관도 살리게 될 것이다. (396쪽)
성벽에 관해 말하자면, 용감하다고 자부하는 국가는 성벽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생각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 도시에 성벽을 두른 자들은 성벽을 이용할 수도 있고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성벽이 없는 자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결론이 옳다면, 도시는 반드시 성벽을 갖되 성벽은 도시의 미관에 이바지 하고 전쟁 목적에 유용해야 하며, 특히 최근에 발명된 공성 무기를 막아내기에 적합해야 한다. (397쪽)
제12장 도시 설계, 장터와 신전과 공동식사 장소의 위치
전 시민이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공동식사에 참여해야 하고, 성벽에는 군데군데 적당한 곳에 망루와 성탑을 세워야 하는 만큼, 이들 망루에도 공동식사 장소의 일부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 문제는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식을 위한 신전과 공직자들을 위한 주요 공동식사 장소는 적당한 장소에 함께 모여 있어여 한다. (398쪽)
'자유민의 장터(agora)'라고 부르는 그런 종류의 장터가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는 일절 상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직공이나 농민 등은 당국의 호출을 받지 않고는 들어가면 안 된다. (...) 물건을 사고 파는 장터는 그곳(아고라)에서 좀 떨어진 곳에 별도로 있어야 하는데, 해외 수입품과 자국산 물건이 쉽게 반입될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398-399쪽)
앞서 말한 규정은 농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농촌에도 때로는 산림감독관이라 불리고, 때로는 농지감독관이라 불리는 공직자들이 감시활동을 위해 망루를 가져야 하고, 직무와 관련해 공동식사를 해야 하니 말이다. (399쪽)
제13장 정체의 목표로서의 행복
정체 자체로 되돌아가, 국가가 행복하고 잘 통치되려면 누가, 어떤 사람들이 국가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지 논의하기로 하자. (...) 모든 사람은 분명 훌륭한 삶과 행복을 추구한다. (...) 지금 우리의 과제는 최선으 정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최선의 정체란 국가가 가장 잘 다스려지는 정체이고,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국가가 가장 잘 다스려지는 국가이므로 우리는 당연히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 (401-402쪽)
우리는 [윤리학]에서([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7장) - 그곳에서 한 논의가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것이라면 - 행복은 활동이자 미덕의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실현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지금도 그렇게 주장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르는 것을 말하고, '절대적'이란 그 자체로서 선한 것을 말한다. (...) [윤리학]에서도 말했듯이([에우데모스 윤리학] 제8권 제3장) 훌륭한 사람이란 자신의 미덕 때문에 절대적으로 좋은 것만을 좋음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태도도 절대적으로 좋고 고상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외적인 좋음이 행복의 원인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마치 현악기 뤼라의 청아한 연주가 연주자의 솜씨보다 악기 덕택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402-403쪽)
국가가 훌륭해지는 것은 행운의 소관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훌륭한 국가가 되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 사람은 세 가지를 통해 좋은 사람이 되고 훌륭해지는데, 그 세 가지란 본성과 습관과 이성이다. (...) 다른 동물들은 대개 본성대로 살고, 그 가운데 소수는 습관에 따라서도 산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에 의해서도 살아간다. 사람만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으면, 이성 때문에 습관과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도 많으니 말이다. 입법자가 쉽게 다룰 수 있으려면 사람들의 본성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괂내서는 앞에서(제7권 제7장) 규정한 바 있다. 남은 과제는 교육의 소관이다. 사람은 어떤 것은 습관에 의해 배우고, 어떤 것은 들어서 배우기 때문이다. (403-404쪽)
제14장 최선의 정체에서의 시민교육
모든 국가 공동체는 치자와 피치자로 구성되는 만큼, 이 양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평생 동안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지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치자가 피치자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어떻게 양자가 서로 다르면서도 똑같이 국정에 참여하느냐는 문제는 입법자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제7권 제9장) 설명한 바 있다. 자연 자체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연령에 따라 청년층과 노장층으로 나누어 전자는 지배받기에, 후자는 지배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양자를 구분해 주었으니 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치자와 피치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다르다고 말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교육도 어떤 의미에서는 같고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 달라야 한다. (405-406쪽)
혼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중 한 부분은 스스로 이성을 갖고 있고, 다른 부분은 이성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성에 복종할 능력을 갖고 있다. (...) 자연의 세계에서나 기술의 세계에서나 열등한 것은 늘 우월한 것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진 것이 더 우월한 법이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가 늘 해온 대로 구분한다면 실천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으로 양분된다. 그렇다면 혼의 이성을 가진 이 부분도 같은 방법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부분들의 행위도 똑같이 구분되어야 한다. 이 행위를 모두 또는 그중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자들은 혼의 더 나은 부분의 행위를 선택해야 하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보다도 자기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407-408쪽)
삶 전체도 노동과 여가, 전쟁과 평화로 양분된다. 행위 역시 필요하고 유용한 것과 고상한 것으로 나뉜다. (...) 평화를 위해 전쟁을, 여가를 위해 노동을, 고상한 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나 유용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정치가는 입법할 때 이런 모든 점이 혼의 부분 및 그 부분의 행위와 조화를 이루도록 고려하되 열등한 것보다는 우월한 것을, 수단보다는 목적을 중시해야 한다. (...) 필요하거나 유용한 것도 할 수 있어야겠지만 더더욱 고상한 것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08쪽)
* 여기서 '모두'란 (1) 이론적 이성의 행위 (2) 실천적 이성의 행위 (3) 이성에 복종하는 행위를 말하며, '두 가지'란 (2)와 (3)을 말하는 것 같다. (408쪽 주41)
그러나 오늘날 최선의 정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헬라스국가들과 그런 정체를 구성한 입법자들은 분명 이런 최선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정체를 정돈하지도 않았고, 법과 교육제도를 정비할 때 모든 미덕을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비열하게도 유용하고 더 유익해 보이는 미덕을 계발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 (...) 한 국가가 행복하다고 간주되고 입법자가 칭찬받는 것은, 전쟁에 승리하여 이웃 나라들을 지배하도록 그가 시민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정책은 큰 손해만 가져다준다. 그럴 경우 가능하다면 모든 시민이 자기 나라를 지배하려고 할 테니 말이다. (409쪽)
개인에게나 공동체에게나 최선의 것은 같으며, 입법자는 그것을 마땅히 인간의 혼에 각인해야 한다. 군사훈련은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실시되어는 안 되고, 첫째, 자신이 남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둘째, 모든 사람들 위에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피치자들에게 이익이 되게끔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셋째, 본성적으로 노예가 되기에 마땅한 자들에게 주인으로 군림하기 위해 실시 되어야 한다. (410쪽)
입법자는 마땅히 전쟁과 그 밖에 다른 일에 관한 자신의 입법이 무엇보다도 평화와 여가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경험이 이를 입증해준다. 전쟁을 목적으로 삼는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안전하지만, 지배권을 획득한 뒤에는 멸망하고 만다. 그들은 평화 시 무쇠처럼 날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가를 선용하도록 그들을 교육하지 않은 입법자 탓이다. (410쪽)
제15장 여가 선용을 위한 적절한 교육
인간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나 개인으로서나 분명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따라서 최선의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선의 정체가 추구하는 목표와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차 말했듯이(제7권 제14장), 전쟁의 목표는 평호이고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므로, 개인이나 국가나 여가 선용에 필요한 미덕을 갖고 있어야 한다. (...) 그래서 국가는 절제 있고, 용감하고, 끈기가 있어야 한다. (411쪽)
용기나 끈기는 노동에, 철학(philosophia)은 여가에, 절제와 정의감은 노동과 여가 모두에 필요한데, 여가를 즐기며 평화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전쟁은 정의감과 절제를 강요하지만, 번영을 구가하고 평화를 수반한 여가를 즐기게 되면 사람들은 교만해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412쪽)
* philosophia는 원래 '지혜 사랑'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지적인 활동' 정도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412쪽 주44)
삶의 좋음을 제대로 이용할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여가가 났을 때 이 좋음을 이용할 줄 몰라 노동과 전쟁에서는 유능해 보이지만 평화와 여가를 즐길 때는 노예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은 훨씬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덕을 계발하되 라케다이몬인들의 국가처럼 해서는 안 된다. 라케다이몬인들도 최고선에 관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견해가 똑같지만, 그들이 여느 사람들과 다른 점은 최고선은 어떤 특정 미덕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412-413쪽)
따라서 이번에는 어떻게, 어떤 수단에 의해 미덕이 계발될 수 있는지 고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서 거기에는 본성과 습관과 이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제7권 제13장). 이 중 인간의 본성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설명했다(제7권 제7장). 이제 남은 문제는 이성에 의한 교육과 습관에 의한 교육 가운데 어느 쪽이 선행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최고의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413쪽)
인간에게 이성과 지성은 본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다. 따라서 시민들이 태어날 때나 습관을 들일 때는 처음부터 이성과 지성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둘째, 혼과 몸이 둘이듯이, 혼도 이성을 갖지 못한 부분(alogon)고 이성을 가진 부분(logon echon)으로 나뉜다. 이 둘의 행동방식(hexis)은 각각 욕구(orexis)와 지성(nous)이다. 그리고 생성의 순서에서 몸이 혼보다 먼저이듯, 혼의 경우에도 이성을 갖지 못한 부분이 이성을 가진 부분보다 먼저다. (413-414쪽)
몸을 돌보는 일이 혼을 돌보는 일에 선행해야 하고, 그다음에 욕구를 돌봐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욕구를 돌보는 일은 지성을 돌보기 위한 것이어야 하고, 몸을 돌보는 일은 혼을 돌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414쪽)
제16장 결혼과 출산
입법자는 양육될 유아들의 몸이 어떻게 해야 되도록 건강할 수 있을지 맨 먼저 고려해야 하는 만큼, 어떤 시민들이 몇 살에 결혼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결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때 배우자 쌍방과 그들의 수명을 고려해야 한다. (...) 다음으로 입법자는 자식이 언제 부모의 뒤를 이를 것인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부모와 자식 간에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자식은 노부모에게 길러준 은공을 갚지 못할 것이고, 부모는 자식을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이 차이가 너무 안 나도 안 된다. 그럴 경우 자식은 부모를 동년배쯤으로 여기게 되어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덜할 것이고, 가사 운영을 두고 걸핏하면 부모와 다툴 것이다. (415쪽)
입법자는 어떻게 해야 신생아의 체질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조치만 취하면 이런 의도들이 거의 전부 달성될 수 있다. 생식 가능 시기는 대개 남자의 경우 70살에 끝나고, 여자의 경우 50살에 끝나므로, 남녀가 동시에 이 시기에 도달할 수 있는 나이에 교합하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416쪽)
조혼 관습이 있는 모든 국가의 주민들의 발육이 부진하고 체격이 왜소하다. (...) 따라서 여자는 18살쯤에, 남자는 37살쯤에 결혼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나이가 되면 남녀 모두 육체적으로 한창때에 교합하기 시작하고, 남녀의 생식능력이 훗날 같은 시기에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식들도 제때에 부모 뒤를 잇게 된다. (...) 겨울에 남녀가 신접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다. (416-417쪽)
부모의 어떤 체질이 신생아에게 가장 유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이들의 양육에 관한 논의에서 상세히 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간단히 윤곽만 논하겠다. 운동선수의 체질은 정치활동에도, 건강에도, 출산에도 좋지 못하다. 그 점에서는 병약하거나 무기력한 자들의 체질도 마찬가지다. 가장 좋은 것은 그 중간 체질이다. (...)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이런 체질이 필요하다. 임신부들은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적절한 영양분을 섭취하는 등 몸을 돌보아야 한다. 이 문제는 입법자가 임신부들로 하여금 출산을 관장하는 신들의 신전을 날마다 찾아가 예배드리게 함으로써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단련하는 것과는 달리 마음은 편히 쉬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17-418쪽)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양육은 법으로 금해야 한다. 그러나 자녀 수가 너무 많아서 행해지는 유기를 사회적 관습이 금한다면 산아제한을 실시해야 한다. 부부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교합하여 아이를 가지면, 태아가 감각과 생명을 갖기 전에 낙태해야 한다. (...) 남자와 여자가 몇 살에 결혼생활을 시작해야 하는지 정해졌으니, 언제까지 출산을 통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적합한지 정하기로 하자. (...) 인생을 7년 주기로 나누는 몇몇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대개 50살 전후라고 한다. 따라서 이 나이에서 4~5살이 지난 남자들은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 (...) 간통에 관해 말하자면, 남녀가 결혼하여 부부라고 불리는 동안에는 언제 어떻게 불륜이 발각되든 불미스런 일로 간주되어야 한다. 특히 아이를 낳는 기간에 그런 짓을 하다가 적발되는 자는 그 죄과에 걸맞게 치욕스러운 벌을 받아야 한다. (418쪽)
제17장 유소년 교육
일단 아이들이 태어난 다음에는 어떤 음식물을 섭취하느냐에 따라 체력에 큰 차이가 난다. (...) 아이들에게는 나이가 허용하는 한 운동을 많이 시키는 것이 좋다. (...) 아이들은 추위에도 어릴 적부터 익숙해져야 한다. (...) 인생의 첫 단계에는 이런 조치나 이와 비슷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5살까지 이어지는 다음에는 성장을 저해할 염려가 있으니 학습이나 힘든 일을 시키지 말고 몸이 무기력해지지 않을 만큼 운동을 시켜야 한다. (419-420쪽)
아이들이 울고불고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아이들이 노예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능하면 적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 나이의 아이들은 7살까지는 집에서 교육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 나이에도 듣고 보는 것을 통해 자유민답지 못한 습관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입법자는 무엇보다도 상스런 말을 국가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 (...) 부적절한 말을 국가에서 추방했으니, 부적절한 그림과 공연을 보는 것도 당연히 금해야 한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조각이나 그림이 그런 상스런 행위를 묘사하지 못하도록 유념해야 한다. (...) 젊은이들은 공동 식사에 참여하여 술을 마실 나이가 될 때까지는 약강격 운각(iambos)을 사용한 풍자시 낭송대회나 희극 공연에 입장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420-421쪽)
아이들은 열등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특히 악의와 적의를 품은 것이면 무엇이든 멀리해야 한다. 아이들은 5살이 지나면 7살이 될 때까지 2년 동안 나중에 배워야 할 과목들을 다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견학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교육 기간이 7살부터 사춘기(14살)까지와 사춘기에서 21살까지로 나눠어야 한다. (422쪽)
따라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첫째, 아이들과 관련하여 어떤 규정이 있어야 하는가. 둘째, 아이들에게 공교육이 유리한가 아니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교육이 유리한가. 셋째, 어떤 종류의 교육이어야 하는가이다. (4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