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생활을 하는 선원들에게도 한가하고 유쾌한 시간이 있다. 여건이 좋은 항구에 입항 중일 때는 각자의 볼일을 보러 나가기가 바쁘지만, 상륙이 금지되는 나라에는 입항 중이건 외항에 정박 중이건 땅 위는 그림의 떡이니까 하루의 고된 일과가 끝나고 저녁을 마치면 마땅히 갈 곳은 없고 시원한 선미 갑판(Poop Deck)에 모여 얘기의 꽃을 피운다. 대부분 지난날의 세상살이나 승선했던 얘기들이 펼쳐진다.
내용들도 다양하다. 하룻밤 품은 아가씨를 위해 낸 달러 빚을 마누라 몰래 갚자니 그렇게 오래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얘기부터 시작, 예기치 못한 큰 사고나 0.1초 사이로 죽음을 면한 경험들도 있다. 한 동안은 다리가 떨려서 움직이질 못하겠더란 얘기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닥아오기도 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들으면 한낮 얘깃거리로 웃음 섞어 넘길 수 있지만 막상 그 당시에 직접 맞닥뜨린 그 현장들이야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들이었음은 내 자신도 겪었으니 잘 알고 있다. 분위기에 따라 고급 사관이나 개인의 생일을 맞거나 한 사람이 맥주 한 박스나 위스키 한잔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그날은 낮에 갑판부 선원들이 선상(船上)의 높은 곳이라 손이 가기 어려운 곳의 녹슨 부분을 떨어내고 방청(防錆) 페인트를 칠하느라 노고가 많았기 때문에 내가 죠니워커 한 병을 낸 날의 저녁이었다.
김성동 갑판장과 함께 했던 선박 '히로시마마루'
선내(船內)에서 가장 연장자(年長者)인 김성동 갑판장 어른이 중공(中共 : 당시는 그렇게 불렀다)에 납치(拉致)되어 7년간을 보낸 얘기가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우리의 서해안 어선에서 작업 중 영해침입이란 죄목으로 피납, 7년만에 석방, 귀국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어림잡아 60년대 초‧중엽쯤 되었으리라. 요즘은 작은 어선들에도 GPS(지구위치파악 시스템)를 이용한 작은 계기 판의 스크린 상에 분명하게 바다 위의 경계나 위치가 나타나게 되어 있어 국경을 침범하거나 넘어 가는 경우는 없다.
당시 연안 어선들의 선교에 있는 것이라고는 잘해봐야 성능이 낮은 작은 레이다 한 대와 라디오 그리고 통신장비, 망원경뿐이었을 것이다. 안개라도 끼이면 경험 많은 선장들의 감(感) 밖에 의존 할 것이 없었던 시대였다. 해당국 연안 경비정이 “당신 선박이 월경(越境)했다”고 하면 증명이나 변명의 자료들이 없었다는 짐작이다. 중공 연안에서 어로 작업중 중공 국경선 안에 들어왔다는 혐의로 잡혀 간 것이다. 외교(外交)가 쉽게 통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피납 이후에는 각 가정에서는 생사(生死)조차도 쉽게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수용소(收容所)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료간의 싸움, 3년 동안 계속된 그들의 심문에는 차라리 매질을 해서 자백을 받으라고 말했다는, 그러면서도 묻는 중국인보다 통역하는 같은 한국인이 그냥 죽이고 싶도록 더 미웠다고 했다. 그래도 사상자 없이 7년을 버티었다는 것이었다.
석방, 귀국이 정해지자 입장이 뒤바뀌자 '고기값과 가다마이(양복의 일어) 값' 변상하라고 억지 부린 일, 저들 말대로라면 ‘인민(人民)이 노력한 대가는 인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면 그 고기값만은 마땅히 우리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는냐’고 했단다. 말이 된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라면서 모른다고 하더란다.
7년 만에 귀향했을 때의 동네잔치, 10살 먹었던 딸애가 다 큰 처녀가 되어 ‘아버지’하고 달려들었을 때 가졌던 무감각과 오히려 이상했던 느낌. 피납자 18명 중 자기를 포함한 3명 이외엔 모두 아내들이 개가(改嫁)를 해버렸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또한 대부분 재결합을 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면 인생살이는 불가사의 하다고 했다.
땅을 파먹고 살망정 다시는 승선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새카맣게 잊어 먹고, 귀국 후 3개월이 못 되어 다시 배를 타려고 부산으로 와서 헤맸고 기어이 이렇게 타고 있단다. 50평생 마누라하고 산 것은 2년이 될까말까, 그런데도 애들 다섯은 입항 때마다. 용하게 생기더라고-. 어쩌면 한국 선원의 한 전형적인 모습을 보는 듯도 했다.
그러면서도 본선에서는 1년 계약인데, 2년을 계속 버틴다. 육상에 있을 때면 당국에 의해서 늘 Check 당하는 그 씁쓸함. 지금도 입출국시에는 반드시 관활 관서에 신고해야 하는 불편함. 그것은 분명히 우리 민족의 불운한 역사의 한 끝이기도 하다.
송환된 후 관계기관 및 미군당국에서 행한 그의 진실한 답변으로 남 보담 좀 더 일찍 가족의 품안으로 보내줬을 때의 그 감사함과 고국의 따뜻함. 그리고 자신의 양심이 통했을 때의 기쁨이 7년간의 고생을 잊게 해주기도 했단다.
전선원이 해상에서 잠시 쉴때, 맨 좌측 헬멧을 쓴 분이 김성동 갑판장(사진을 찍느라 나는 빠짐)
인생의 길이란 시작하기 어렵고 바꾸기 어렵고 또한 물러서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재승선하기 위한 그 절차상의 고충 또한 컸었다고 -. 당연했겠지. 중공에 7년을 있었으니 어떤 면에서든 공산주의자로 세뇌(洗腦)되었을 거라고 믿는 당국 또한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에 염체나 체면은 아예 생각하질 않고 오직 사실 자체만으로 일관했다고 했다. 그 결과 뜻은 이루었으나 아직도 그 꼬리를 달고 멍에는 짊어진 체 지금 이곳에까지 흘러왔고 흘러가고 있다고 끝을 맺는다.
그 자신의 일인 것만 같지 않다. 듣는 이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도 숙연해진다.
“고기값 안 주고 가다마이값 안 주면 안 간다고 버티어 보지 그랬오?”
피납 당시 실려 있었던 어획물과 입고 간 양복이 압수당한 것이다. 농담으로 끝을 마무리는 했으나, 당시 52세로 내 백형보다 5살이나 연상이었고 선내에서도 가장 연장자(年長者)였다. 그의 앞날에 다시는 그런 불운이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전남 완도 사람이어었다. 키도 크고 얼굴이 길쑴하며 몸이 마치 씨름꾼 같은 스타일로 힘도 장사였고 인성도 좋은 분이었다.
마침 다시 시작된 새달, 5월의 첫날이었다. 서서히 녹음이 다가서는 초하의 부산일 게다. 앞마당의 줄장미는 피었을까? 개나리와 황매화은 벌써 꽃잎을 지우고 파란 잎을 꽤나 무성히 돋았을 게다.
그렇다. 사람의 일생은 아무도 모른다. 문화와 문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념상의 주의는 다소 누그러졌다곤 하지만 종교적, 민족적, 역사적인 끈으로 이어지고 있는 풀지 못한 원한들로 으르렁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선원들의 삶을 떠 받치고 있는 바닷물과 그 위를 노니는 바람 조차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우선은 각자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옭아매고 주의와 조심으로 최상의 안전을 도모해야만 한다. 그날 밤 이상하게도 쉬이 잠이 들지 않아 뒤척인 날이 되었다.
첫댓글 제 나라 제 땅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겹다고 아우성입니다.
그간 많은 직, 간접 체험을 겪은 늑점이님의 이야기를 듣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하기엔 마음 아픕니다.
님의 삶을 통해서 바람새가 더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남은 시간들 자기자신을 사랑하면서 땅 위에서 삶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위에 말씀하신 김성동 선생님은 "바다이야기"로 해양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반가운 이름이라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