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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부산광역시답사 자료원안 2018.12.26.(수)
*** 부산광역시
* 부산의 유래 ;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 1월 28일 『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 『성종실록』 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 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동국여지승람(1481)』 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 부산의 인물 ; 장영실
조선 세종 때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 봉건신분제도가 철저한 당시 사회에서 동래현 기녀 소생의 관노 출신으로 뛰어난 과학기술적 재능을 발휘하여 정3품인 상호군(上護軍)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최고 과학자중의 한사람이었다. 모든 일에 과학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제련, 축성과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다. 이에 세종대왕은 여러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영실을 발탁해 세종5년(1423년) 정5품 벼슬인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올라 노예의 신분을 벗었으며, 세종14년(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천문의를 제작 감독하였다.
세종15년(1433년)에 호군에 올랐으며, 이 해에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만에 완성하였다. 이듬 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을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에 힘썼다. 한편, 김빈(金殯)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의 자격루를 제작 완성했다. 세종19년(1437년)에 제작 착수 5년만에 천체 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해시계인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다음해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료하고 경상도 채방결감이 되어 동(銅), 철(鐵)의 채광, 제련을 감독했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水標)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세종24년(1442년) 그의 감독으로 제작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부에 투옥, 장형을 받은 뒤에 파면당했다. 장영실의 이러한 과학적 결실은 그의 뛰어난 탐구정신에 기초한 것이지만, 또 하나의 역사적 배경으로 고려 이래 이어온 과학적 결실과 함께 조선왕조 개창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음도 사실이다. 특히 천문역산학의 발전은 조선왕조의 개창이 천명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 부산의 역사
- 구석기시대 ; 부산지역에서도 해운대 청사포와 좌동 신시가지에서 사냥돌,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들이 채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기원전 18,000년경)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부산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주로 신석기시대 이후의 것이 많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살았음은 분명하다.
- 신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
- 부산지역의 삼국시대 문화는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 것이다
현재 삼국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고분군이 동래 부근인 복천동·연산동·반여동 일대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부산지방의 삼국시대 문화가 동래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 신라 – 고려 – 조선 – 일제강점기 – 광복 – 미군정기 – 대한민국
- 1876 개항
- 1949 0815 부산부에서 부산시
- 1963 부산직할시
-1995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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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의 문화재
* * 부산박물관 [ Busan Museum , 釜山博物館 ] -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대연동)에 있는 시립박물관.
설립일 ; 1978년 7월 11일
주요소장품 ; 선사시대 유물, 삼국시대 유물
부산박물관은 1975년에 착공되어 1978년 7월 11일에 개관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개칭되었고 2002년 5월 3일에는 부산광역시립박물관이 부산박물관으로 새단장되어 개관되었다.
분관으로는 1984년 6월 25일에 6·25 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에 임시수도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이곳에서는 피난 당시의 부산의 모습과 전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1996년 10월 5일에는 복천분관(부지 1만 7041평, 건평 2,358평)이 개관되었다. 복천분관은 삼국시대 부산 문화를 규명하는 최대의 고분군인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을 전시하는 고고 박물관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2002년 4월 24일에는 동삼동패총전시관이 분관으로 개관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역사와 문화의 성격과 내용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2003년 7월 3일 부산근대역사관이 개관되었다. 부산근대역사관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수탈로 형성된 부산의 근현대역사를 중심으로 개항기 부산, 일제의 부산수탈, 근대도시 부산, 동양척식주식회사, 근현대 한미관계, 부산의 근대거리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현황 소장유물(所藏遺物)은 1만 1300점에 이른다. 대표적인 전시 유물로는 국보 제200호인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보살입상과 국보 제233호인 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 등 국보 2점 및 보물·기념물 등이 있다. 소장 유물은 주로 부산 및 경상남도 지역의 덕천동·노포동 고분군, 김해읍성 유적 등지에서 발굴한 매장문화재 6,000여 점을 비롯하여 구입품 730여 점, 기증품 3,870여점, 수집품 350여 점 등이다. 전시실에는 부산지역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 이래의 각종 유물 56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외부의 야외전시장에는 탑·불상·비석 등 50여 점의 석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부산광역시립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木造阿彌陀如來坐像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불상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 부산박물관
시대 조선/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5년 7월 15일
문화재 지정 번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1호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부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
개설
부산박물관 소장「목조아미타여래좌상(木造阿彌陀如來坐像)」은 나발의 머리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다리 위에서 살짝 들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맺은 나무 재질의 불상이다. 18세기 전후하여 활동한 조각승 진열(進悅)이 제작한 불상들과 얼굴이나 세부적인 특징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18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부산박물관 소장「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총 높이 53.4㎝, 어깨너비 22.8㎝, 무릎너비 35.7㎝, 무릎높이(좌) 10.7㎝, (우)11.6㎝의 크기이다.이 불상은 결가부좌한 자세에 양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다리 위에서 살짝 들어 아미타여래의 구품인(九品印) 가운데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편이며, 방형(方形)의 상반신과 다리 폭이 이루는 신체비례가 좋아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작은 눈은 수평으로 가늘며, 뭉툭한 코와 입술에 드러나는 얕은 미소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옷차림은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으로 오른쪽 어깨의 대의는 가장 안쪽 옷주름 하나를 펼쳐놓아 두드러져 보인다. 밋밋한 가슴 아래에는 수평으로 군의(裙衣)의 띠를 표현하였으며 배 앞에 편삼과 대의는 서로 대칭으로 교차되어 있다. 발목에서 흘러내린 옷자락은 무릎 밑으로 부채처럼 펼쳐져 있고, 왼쪽 다리위에는 옷주름이 복잡하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하반신 옷주름 특징은 18세기 활동한 조각승 진열(進悅)이 제작한 고양 상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보살상(1713)의 하반신 표현과 매우 유사하다.
특징
부산박물관 소장「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얼굴에 표현된 양감과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 방형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루는 적당한 신체비례, 그리고 다리 위에 늘어진 옷주름 등이 특징으로 18세기를 전후로 활동한 조각승 진열이 제작한 불상과 얼굴이나 세부적인 특징이 매우 흡사하다.
의의와 평가
부산박물관 소장「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18세기 전반에 부산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진열의 작품들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진열은 부산 범어사 관음전 불상 조성과 비로전 불상 중수(1722), 통도사 사천왕상(1718), 함양 도솔암 목조관음보살상(1713) 등의 작품을 남겼다.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예술적·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높은 작품일 뿐만 아니라 18세기 전반기의 불교조각 양식 흐름과 조각승의 계보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목조아미타여래좌상」 [木造阿彌陀如來坐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유엔조각공원
부산시 남구 대연4동779에 있는 유엔기념공원 옆에 조성된 조각공원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21개국의 조각품을 기증 받아 조성되었다.
- 유엔기념공원은 6.25전쟁에 참전하여 산화한 유엔군의 영령이 안치한 곳으로 세계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이 공원을 세계평화와 자유의 상징이 되는 국제적 관광명소로 가꾸기 위해, 공원 옆에 조각공원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한국전쟁50주년 특별기획 유엔기념공원 국제조각 심포지엄에 참여한 6.25참전 21개국의 조각가들이 제작한 34점의 조각품을 기증받아 조성되었다.
2001년 4월 9일부터 공공근로사업으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2001년 10월 24일 준공식을 가졌다. 전체 15,458㎡ 면적에 34점의 조각품을 전시하고 있다. 300㎡의 중앙광장, 3,968㎡의 잔디광장, 500m의 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유엔조각공원 (두산백과)
* * 유엔기념공원
[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 UNMCK , ─記念公園 ]
건립시기·연도 1951년(유엔기념묘지), 2001년(유엔기념공원)
소재지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93(대연4동 779-1)
관리자 유엔기념공원국제관리위원회
문화재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359호
문화재 지정일 2007년 10월 24일
유엔기념공원(UNMCK)은 1951년 유엔군(United Nations Forces:국제연합군) 사령부가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되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안장하기 위하여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조성한 유엔군 묘지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개성, 인천, 대전, 마산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해를 이곳으로 이장하여 안치하였다. 처음에는 미국, 벨기에, 프랑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그리스, 인도, 필리핀, 타이 등의 11,000위가 봉안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국으로 송환되고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터키, 미국, 영국 등 11개국의 2,300여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곳에는 유엔이 1964년에 건축한 기념 예배당과 전시실, 부속건물 등이 있다. 이 중 예배당은 한국 건축가 김중업이 세계 각국 용사들의 종교를 고려하여 현대적이고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하였다. 그밖에 한국에서 전사하였으나 무덤이 없는 영국연방군 386명의 용사를 추모하는 기념탑과 UN군 참전기념탑이 있다. 묘지 내의 초목은 대부분 각국 정부, 각 기관과 개인이 기증한 것이다. 무덤마다 고인의 기록을 담은 묘비가 놓여 있다. - 1955년 유엔총회에서 ‘유엔기념묘지’로 지명한 세계 유일의 묘지로서, 세계평화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정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상징적 의미가 큰 유적이다. 1974년 2월 16일 이후 이곳에 전사자의 유해를 봉안한 11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기념공원 국제관리 위원회(Commission for the UNMCK)가 관리하고 있다. 사무소는 묘지공원 안에 있으며 건물은 UN이 관장하여 1968년에 건축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유엔기념공원 [United Nations Memorial Cemetery in Korea,UNMCK, ─紀念公園] (두산백과)
* * 평화 공원[ 平和公園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77
세계 유일의 재한 유엔 기념 공원은 2005년 APEC 정상 회의 때 주요 인사의 방문지에 포함된 곳이었다. 그러나 공원의 동남쪽 일대는 고철 처리업, 차동차 정비업, 화물차 주차장, 화물 운송업 등 소음, 분진, 토양 오염을 유발하는 혐오 산업 51개 업체가 난립하여,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6·25 전쟁 참전 유엔군 전사자들이 잠들어 있는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인근의 환경 불결지에 평화의 상징 공원을 조성하여 자유 수호의 뜻을 기리고, 주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2004년 6월 평화 공원 조성 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 4월에 착공하여 2005년에 개장하였다.
- 평화 공원의 총면적은 3만 2893㎡이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평화의 광장이 있으며 바닥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그 둘레를 둘러싸고 조경·수경 시설 등을 비롯하여 13종 1,600점의 소나무 등 수목 3만 3620주, 초화 3만 3140포기가 식재되어 있다. 또한 공원에는 생태 연못, 잔디 광장, 파고라, 조깅 코스, 주차장 등 주민의 휴식 및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677번지 일대에 있는 평화 공원은 UN 기념 공원 근처에 있는 근린공원으로 평화 공원이라는 이름도 UN 기념 공원과 연계하여 지어진 것이다. 공원은 24시간 이용이 가능하며, 주변의 부산 문화 회관, 부산광역시박물관, UN 기념 공원, UN 조각 공원 등과 연계되어 문화 공간의 벨트화를 이루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평화공원[平和公園]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유엔평화기념관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홍곡로320번길 106 (대연동)
유엔평화기념관은 전쟁의 실상을 체험하지 못한 후손에게 전쟁의 참상과 정전협정의 무게를 각인시킬 수 있는 교육적 공간으로, 참전자들의 희생을 올 곧게 전달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기념관 내 3개의 상설전시관(UN한국전쟁기념관, UN참전기념관,UN국제평화관)을 통해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고 평화유지를 위한 희생과 의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교육과 문화행사 등 다양한 활동에 주축이 되어 평화의 연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규모 ; 부지 6,810㎡, 연면적 7,999㎡, 지상 5층
[네이버 지식백과]유엔평화기념관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國立日帝强制動員歷史館]
설립일 2015년 12월 10일(국립박물관 등록 2016년 7월 11일)
소재지 부산광역시 남구 홍곡로320번길 100(대연동 산 204-1)
규모 건축 총면적 12,062㎡, 부지면적 75,465㎡
주요소장품 일제 강제동원 수기, 사진, 박물류
부산시 남구 홍곡로에 있는, 일제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국립박물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실상을 규명해 성숙한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강제동원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족을 위무하며, 인권과 세계 평화에 대한 국민 교육의 장을 제공하고자 2015년 12월 10일 개관하였다.
부산항이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주된 출발지였고, 강제동원자의 22%가량이 경상도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부산에 건립되었다.
건물은 지하 4층, 지상 3층, 총면적 12,060㎡ 규모로, 부지면적은 75,465㎡이다. 5천 점 이상의 강제동원 수기, 사진, 박물류 등을 소장하고 있으며, UN 기념공원, UN 평화기념관 등과 함께 UN 평화문화 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 주요 전시시설로는 4, 5층의 상설전시실과 6층의 기획전시실이 있다. 4층의 상설전시실에서는 주로 유물과 사진 자료를 이용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한다. 기억의 터널, 일제 강제동원의 시작, 일제 강제동원의 실체, 광복과 귀환, 끝나지 않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기증자 기념공원의 주제로 이어지며 시간 순으로 일제 강제동원 기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5층의 상설전시실은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재현하고 관련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관람객이 피해자들의 심경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제동원 과정, 조선인 노무자 숙소, 탄광, 중∙서부 태평양 전선, 일본군 위안소, 귀환, 시대의 거울 등의 주제로 이어지며 그 시대의 기억을 공유한다. 6층의 기획전시실은 2017년에 새로이 조성되었으며 사진작가 이재갑의 〈군함도-미쓰비시 쿤칸지마〉 특별전을 시작으로 일제 강제동원에 관련된 다양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 주요 소장품 ; 대일항쟁기에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조선인 청년들의 결의의 징표인 〈결의형제서약서〉, 대일배상청구의 기초 자료로 사용되었던 〈왜정시피징용자명부 倭政時被徵用者名簿〉(1957~1958)를 비롯해 각종 조선인 징용자 명부, 사진, 편지 등 일제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 부대시설 ; 7층에는 추모탑과 함께 작은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멀티미디어실, 도서관, 수유실 등이 건물 내에 마련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國立日帝强制動員歷史館] (두산백과)
* * 부산 오륙도[ 釜山 五六島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龍湖洞)에 딸린 섬.
명승 제24호(2007.10.01.)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936
크기; 면적 0.02㎢
1972년 6월 26일 부산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10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 명승(名勝) 제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0.02㎢, 최고점 68m(굴섬)이다. 예로부터 부산의 상징물이었다. 영도구(影島區)의 조도(朝島)와 마주보며,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2,166㎡)·솔섬(5,505㎡)·수리섬(5,313㎡)·송곳섬(2,073㎡)·굴섬(9,716㎡)·등대섬(3,416㎡)으로 나누어진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이라고 한다. 등대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 섬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山川條)에 따르면,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방패섬과 솔섬의 아랫부분이 거의 붙어 있어 썰물일 때는 1개의 섬으로 보이고, 밀물일 때는 2개의 섬으로 보인다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은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잘못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섬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12만 년 전까지는 육지에 이어진 하나의 소반도(小半島)였다가 유구한 세월 동안 거센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분리되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육지인 승두말과 인접한 방패섬과 솔섬의 지질 구성이 동일하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부산 오륙도 [釜山 五六島] (두산백과)
* * 오륙도 스카이 워크[ 五六島-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있는 관광 조망 시설.
오륙도 스카이 워크는 오륙도와 이기대가 결합된 부산의 해안 관광지에 해안 경관 조망이 결합된 관광 상품으로, 2012년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조성에 들어가 2013년 10월 18일 준공식을 하고 개장하였다.
-구성 오륙도 스카이 워크는 오륙도 맞은편의 옛 한센인 정착 농원 자리에 조성되었다. 남구 용호동 산197번지 일원의 7만 7,536㎡ 면적에 조성되는 생태 광장에 자리한 시설이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로 오르는 길 입구에는 오륙도 스카이 워크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오를 때 신는 덧신 함이 놓여 있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는 높이 37m의 부산만 북쪽의 해안 절벽 승두말에 설치되었다.- 형태는 9m가량 바다 쪽으로 돌출된 U자형의 되돌아올 수 있는 유리 전망대이다. 전체 폭은 지지대를 포함하여 5m이다. 안전사고 방지를 위하여 오륙도 스카이 워크를 따라 강판 유리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바닥부터 울타리까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어 신발 위에 덧신을 신고 올라가야 하며, 유리 파손의 위험 때문에 등산 스틱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 주변에는 벤치 등이 놓여 있는 1,594㎡의 광장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 현황 오륙도 스카이 워크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이용이 가능하며, 이용료는 없다.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는 강풍·눈·비가 올 때는 개방이 제한되며, 안전을 위하여 반드시 덧신을 신고 입장해야 한다. 입장 인원은 바닥 유리 1면당 5인까지이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에서는 오륙도와 멀리 이기대 해안 산책로가 보이고, 맑은 날에는 해운대까지 육안으로 확인된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 주변은 반딧불이의 서식처이며, 주변에 전국에서 네 곳뿐인 정부 지정 생태 경관 보전 지역인 오륙도와 이기대 도시 자연공원이 있다. 또한 오륙도 스카이 워크가 있는 생태 광장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강원도 고성군 통일 전망대까지 해파랑길이, 남쪽으로 다대포까지 갈맷길이 이어진다. 또한 오륙도의 지질적·역사적 특성을 알리는 해파랑길 관광 안내소가 들어서 있다. 오륙도 선착장과도 인접하여, 선착장 쪽으로 걸어서 내려가면 해녀와 고깃배가 잡은 수산물을 판매하는 작은 장터가 있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는 주변 경관과 어울려 부산 시민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관광객, 해외 관광객까지 찾아드는 부산의 새로운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오륙도 스카이 워크 [五六島-]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청사포[ 靑沙浦 ]
소재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
청사포(靑蛇浦)[푸른 구렁이의 포구]는 골매기 할매의 전설과 관련된 지명이다. 새 신부였던 김씨 부인은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이 난파하여 돌아오지 않자 매일 해안가의 바위에서 두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수십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는 김씨 부인을 애처롭게 여긴 용왕이 청사(靑蛇)[푸른 구렁이]를 보내 용궁에서 남편과 상봉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청사가 출현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1920년경 뱀 ‘사(蛇)’ 자를 모래 ‘사(砂)’ 자로 바꾸어 청사포(靑砂浦)로 개칭했다고 전한다. 김씨가 멀리 수평선을 향하여 눈물지으면서 기다리던 큰 소나무와 그 아래 바위에는 망부송(望夫松)과 망부암(望夫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 구성 청사포는 와우산의 북동쪽, 미포와 구덕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갯바위로 된 해안에 수려한 사빈이 펼쳐지고 배후에 송림이 우거져 보기 드문 해안 경승지이다. 청사포 북쪽의 고두백이[고두말이라고도 한다]까지의 해안선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암석 해안이다. 해안가에는 대밭끝과 문둥이 골짜기, 빰아리끝[선착장 위쪽 배 모양 바위로 1925년에는 이곳 해안에는 8m나 되는 고래가 자갈밭으로 올라온 적이 있다고 함], 예지목[해받이 회 타운 앞 해변에 있으며 영지버섯과 같은 효용이 있다고 함], 엄금 바위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청사포 북쪽인 동해 남부선 철길 건너편 경작지 일대에는 수령 350년의 망부송과 망부암이 있다.
- 현황 청사포에는 일찍부터 작은 어촌 마을인 청사포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지방 어항이 발달해 있다. 이곳에서는 미역이 생산되고,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은 일찍부터 맛 좋기로 이름난 청사포 회 거리가 형성되어 있으며, 횟집 및 장어구이, 조개 구이 집 등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출로도 유명하여 매년 12월 31일이면 일출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해안선을 따라 동해 남부선의 옛 철로가 통과하며, 해운대구에서는 미포에서 청사포, 구덕포까지 연결되는 길을 걷는 해운대 삼포 길 걷기 행사를 3~4월과 11월에 개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청사포 [靑沙浦]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 복천박물관[ 福泉博物館 ]
설립일 ; 1996년 10월 5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로 63에 위치한 가야시대 역사․ 고분박물관.
- 복천동고분군(사적 제273호)에서 출토된 자료를 중심으로 가야권 및 일본을 포함한 인접 국가들의 유물과 비교 전시하고 다양한 사회교육을 통해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복천동고분군 등 부산지역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발굴, 전시, 홍보를 통해 가야역사와 문화의 본질과 고대 부산의 역사적 정체성을 정립하고, 시민들에게 부산의 뿌리와 문화적 성격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다.
- 연원 및 변천 1982년부터 시작된 부산 동래구 복천동 50번지 일대 정화 사업의 결과, 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92년 착공하여 4년 만인 1996년 10월 5일 개관하였다. 1996년 7월 26일 시 직제 규칙의 공포로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 설치되었고, 시립박물관 소속하에 복천분관을 두었다. 2011년 관명을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에서 복천박물관으로 바꾸었다.
- 기능과 역할 복천박물관은 복천동고분군에서 나온 자료를 중심으로 가야지역 및 일본을 포함한 인접국가의 유물을 연구·전시하여 시민에게 부산의 뿌리와 문화적 성격을 바르게 전달하는 역사교육 전시관의 기능과 매장문화재의 연구를 통해 문헌기록이 부족한 우리나라 고대사를 밝히는데 역점을 둔 전문 박물관이다.
축적된 연구성과를 다양한 학술 세미나 및 특별전을 통해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전통문화의 보존과 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써의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다.
- 현황 규모가 대지 17,000여 평에 전시장과 야외전시장 등 연건평 2,358평(지상4층, 지하1층)으로 현 부산시립박물관(대연동 소재)의 1.8배이다. 또 야외전시장은 지상1층 96평 규모의 원·투시형으로 되어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목곽묘, 석곽묘, 횡구식석실묘 등 113기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1996년 현재), 여기서 다양한 형태의 가야토기, 철제무기류, 갑옷, 투구, 가지방물, 금동관, 목걸이 등 10,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박물관에서는 이들 유물을 정리·복원하여 2개의 대형 전시실에 전시하였고, 고분군내에서는 발굴 당시 무덤의 내부 모습을 보여주는 야외 전시관을 마련하여 가야문화를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제작되었다. 전시유물은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부산대학교박물관 등 부산지역 9개 기관에서 소장해 온 유물을 포함하며 대여유물 8백 31점, 복제유물 1,279점 등 총 2,110점이 전시되었다.
- 의의와 평가 복천박물관은 유적이 발굴된 현장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었다. 또한 개관 당시로서는 최첨단 전시기법으로 박물관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박물관이었다.
복천동고분군 및 복천박물관의 특성을 살펴보면, 복천동고분군은 6세기 이전 부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무덤구조와 유물이 다량 매장되어 있어 당시 국제관계 및 문화, 정치, 군사, 경제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福泉博物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시대 고대/삼국/가야, 고대/삼국/신라
성격 무덤, 고분군
건립시기·연도 가야시대, 3∼7세기대
규모(면적) 4만 5,576㎡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
소유자 국유
관리자 부산시립박물관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273호 (1981년 06월 09일)
* * 부산복천동고분군[ 釜山福泉洞古墳群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일대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
- 개설 복천동고분군은 1981년 6월 9일 사적 제273호로 지정되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3세기대에서 7세기대까지 조영되었으며 4∼5세기가 그 중심연대이다. 대규모의 고분군이 복천동 일대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그리 높지 않은 구릉 위에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1969년 9월부터 1994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와 부산대학교박물관 및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 내용 조사 결과 복천동고분군은 복천동 일대 지배집단의 묘역임이 확인되었고 무덤의 형식은 1981년까지 발굴된 40기의 고분 가운데 소형 덧널무덤〔土壙木槨墓〕8기, 딸린덧널〔副槨〕이 있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1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墓〕4기,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 4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18기 등으로 다양하였다.
소형 덧널무덤은 길이 330∼410㎝, 너비 160∼210㎝ 정도이며, 내부에는 덧널을 설치하였고 바닥에 주검받침〔屍床〕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딸린덧널을 가진 고분은 모두 대형분으로 남쪽에 으뜸덧널이, 북쪽에 딸린덧널이 50∼60㎝ 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으뜸덧널이 대형의 덧널무덤 및 구덩식 돌방무덤인 경우에는 딸린덧널이 모두 대형 덧널무덤이고,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인 경우는 딸린덧널 역시 같은 돌무지덧널무덤이었다.
대개 무덤구덩이〔墓壙〕의 크기는 으뜸덧널은 길이 550∼450㎝ 내외, 깊이 2∼3m 내외이며, 딸린덧널은 길이 4∼6m, 너비 250∼450㎝, 깊이 2∼3m 내외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는 으뜸덧널의 경우 덧널 혹은 돌방을, 모든 딸린덧널에는 덧널을 각각 설치하였다. 구덩이가 깊기 때문에 유구(遺構)가 지하 깊숙히 설치된 것이 특징적이다.
딸린덧널이 없는 대형 구덩식돌방무덤은 길이 약 7m, 너비 150㎝이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은 길이 2∼4m, 너비 1m 내외이다. 이들은 딸린덧널이 있는 돌방무덤에 비해 길이가 아주 길며 뚜껑돌이 거의 지상에 노출될 정도로 무덤구덩이가 얕은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고분들 중에서 큰 것은 구릉의 중심부에, 작은 것은 구릉 주변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중심부의 대형고분은 구릉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정연하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의 장축은 대부분이 구릉의 방향과 일치하는 남북향이고 머리의 방향은 남향이다. 일부 대형고분의 으뜸·딸린덧널 내에는 적어도 3인 이상의 순장자(殉葬者)가 같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군에는 도굴되지 않은 큰 무덤이 많아 2,000여 점 이상의 비교적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굽다리접시〔高杯〕, 긴목항아리〔長頸壺〕, 바리모양그릇받침〔鉢形器臺〕, 원통모양그릇받침〔圓筒形器臺〕, 토제등잔(土製燈盞), 마두식뿔잔〔馬頭飾角杯〕, 소형광구원저장경호(小形廣口圓底長頸壺), 광구소호(廣口小壺), 오리토기, 그릇받침〔器臺〕, 손잡이달린작은항아리〔把手附小壺〕, 손잡이달린굽다리주발〔把手附臺附盌〕, 항아리〔壺〕등이 있다.
철제공구류는 도끼·손칼·끌·낫·철사(鐵絲)·찍개·망치·따비·보습 등이 있다. 무기류로는 화살촉·창·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유자이기(有刺利器)·화살통금구〔胡錄金具〕 등이 있다. 무장구(武裝具)로는 판갑옷〔板甲〕·비늘갑옷〔札甲〕등의 갑옷·투구·말투구 등이 있다. 마구류(馬具類)로는 말안장·발걸이〔鐙子〕·재갈〔銜〕·말띠드리개〔杏葉〕·말종방울·띠고리〔鉸具〕등이 있다.
그밖에 중요 유물로서 ‘출(出)’자형의 금동관·금제귀걸이·곱은옥〔曲玉〕·유리옥제목걸이·은제팔찌 등의 장신구류와 청동제칠두령(靑銅製七頭鈴)·꺾쇠·덩이쇠〔鐵鋌〕 등도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토기류·갑옷과 투구류·마구류, 그리고 덩이쇠이다.
토기류에는 4∼5세기대에 속하는 낙동강 하류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 토기의 세부적인 편년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으며, 또 5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되는 토기에는 경주지역 토기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갑옷과 투구류는 철제판갑옷 2벌, 철제투구〔鐵製胄〕5점, 철제괘갑(鐵製卦甲) 1벌, 철제경갑(鐵製頸甲) 1쌍 외에 괘갑 및 마갑(馬甲)일 것으로 추정되는 미늘〔小札〕등 여러 종류가 많이 발견되었다.
판갑옷은 장방형 철판을 세로로 잇대어 쇠못으로 이어붙인 것(제10호분 출토)과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붙인 것(제4호분 출토)의 두 종류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제10호분 출토 판갑옷은 목가리개가 부착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김해지방에서 1점 발견된 바 있다. 삼각형 철판을 가죽끈으로 이어 붙여 만든 제4호분 판갑옷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투구는 모두 몽고바리모양〔蒙古鉢形〕이다. 1980년 발굴된 복천동 제10·11·21호분에서 각 1점, 1974년 발굴된 복천동 학소대 1구 제3호분에서 2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제10호분 출토 1점만 복발(伏鉢)이 없고 나머지는 모두 투구 꼭대기에 복발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투구는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분에서만 출토되는데, 으뜸덧널의 형식이 모두 재래적인 덧널무덤이 아닌 구덩식돌방무덤 혹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한정되어 있다.
괘갑과 경갑은 소형 덧널무덤에서부터 대형 무덤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제11호분에서 출토된 괘갑은 경갑·견갑(肩甲)·경갑(脛甲) 등의 부속구까지 완전히 갖추어진 1벌이었다. 이와 같이, 괘갑 실물 1벌이 완전히 갖추어진 상태로 발견된 예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말투구는 제11호분의 딸린덧널인 제10호분에서 마구류 1벌과 함께 출토되었다. 얇은 철판을 쇠못으로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얼굴덮개부·챙·볼가리개가 완전히 갖추어진 것으로 크기와 형태로 보아 실전용임이 확실한데, 실물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최근 합천 옥전고분(玉田古墳)에서 2점이 새롭게 조사되었고, 일본에서도 와카야마현〔和歌山縣〕의 오타니고분〔大谷古墳〕에서 출토된 것 1점뿐이다.
이상의 갑옷·투구류 중 판갑옷을 제외한 괘갑·몽고바리모양투구·경갑·말투구 등은 고구려의 여러 고분벽화에 정밀하게 그려져 있는 것과 같은 점으로 보아 모두 고구려계의 무장구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발걸이와 재갈 등의 마구류도 고구려와 관계가 깊은 것들이다.
복천동고분은 출토된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4세기대에서 5세기대까지 계속해서 축조된 유적이다. 그러나 4세기대의 고분은 아직 많이 조사되지 않아 불확실한 점이 많다. 반면, 5세기대의 것은 고분의 종류도 다양하고 유형별 묘제의 변화도 비교적 정연하게 나타나 있다.
대개 4세기에서 5세기 전반까지는 소형 덧널무덤과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이 유행한다. 5세기 중엽경부터 딸린덧널이 있는 대형 덧널무덤의 주광에 덧널 대신 돌방이 설치되는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이 지방의 전통적인 묘제인 덧널무덤과 새로운 묘제인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와 함께 경주계 무덤인 돌무지덧널무덤도 부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덧널무덤적인 요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덧널무덤 혹은 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무덤은 소멸되고, 그 대신에 딸린덧널이 없는 긴 장방형의 크고 작은 돌방 및 돌덧널무덤이 새로운 묘제로서 채용되었다.
이러한 묘제의 변화는 껴묻거리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즉, 널무덤이 주된 묘제로 이용되던 초기단계에는 이 지역의 특징적인 토기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5세기 중엽경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방무덤이 결합된 새로운 형식의 묘제가 등장하면서부터 경주계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이후부터 이 지방 특유의 재래토기가 점점 소멸되어갔다.
또한 이러한 변화와 함께 이곳에서 갑옷과 투구류가 크게 유행하였고 동시에 마구류도 더욱 발달하였다. 그 뒤 5세기 후엽이 되면 구덩식돌방무덤이 일반화되고 토기류도 거의 완전히 경주토기화하였다.
이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덩이쇠가 주로 4세기 전반대에서 6세기대에 걸쳐 축조된 대형묘에서 출토되었는데 으뜸덧널의 바닥에 1∼3열씩 깔아 널받침의 역할을 했음이 확인되었다.
- 의의와 평가 복천동고분군은 우리나라 고대사 해명에 필요한 여러가지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는 유적이다. 묘제상으로는 국내에서 처음 발견된 새로운 묘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묘제가 확인되어 이 지역 묘제의 변천과 그 계보연구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갑옷·투구류와 마구류는 단일 고분군으로서 가장 많은 출토량을 보였다. 또한 고구려계 영향으로 생각되는 유물과 이 지역 특유의 토기와 함께 신라계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4∼5세기대의 가야와 신라사 복원은 물론, 당시의 국내외 관계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釜山福泉洞古墳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 동래읍성지[ 東萊邑城址 ]
지정번호 부산기념물 제5호 (1972년 06월 26일)
크기 면적 103,647㎡, 둘레 1,962m, 높이 0.5∼3m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안락동·명륜동·칠산동·명장동 일대에 있는 읍성.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 중심 지역인 평탄지 일부를 포함한다.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모두 갖춘 읍성이다. - 성의 둘레는 1,962m, 높이 0.5~3m이며, 넓이는 103,647㎡이다. 삼한시대에 건립되었으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수축(修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위시해 군·관민이 함께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최대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 읍성에는 동·서·남문과 암문(暗門)의 4개 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있었는데, 동문을 지희루(志喜樓), 서문을 심성루(心成樓), 남문을 무우루(無憂樓), 암문을 은일루(隱一樓)라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고 나머지 3개 문에도 옹성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동래읍성지 [東萊邑城址] (두산백과)
* * 동래읍성 역사관[ 東萊邑城歷史館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역사관길 18[복천동 1-2]
- 건립 경위 부산광역시 동래구가 지난 40~50년 동안 무허가 건물, 경작지 등으로 방치되어 온 동래 사적 공원 내 동래읍성지 문화재 보호 구역을 정비하고, 동래읍성의 역사, 형태, 출토물 등을 보존, 전시하기 위해 2007년 3월 동래읍성 역사관을 건립하였다.
- 구성 동래읍성 역사관은 한옥 형태의 단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관 안에는 동래읍성의 모형[형태], 동영상, 각종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 동래읍성 역사관 마당에는 투호·제기차기·윷놀이 등 민속놀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 북문 광장에는 야외 공연장, 다목적 광장, 산책로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 현황 동래읍성 역사관은 동래의 역사, 풍경, 동래읍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전시물을 마련해 놓았다. 특히 조선 후기 동래읍성의 축소 모형은 현재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는 동래읍성의 옛 모습을 짐작케 한다. 역사관의 가운데에는 동래읍성 모형도를 중심으로 동래와 동래읍성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또 벽면에는 동래읍성의 전투 이야기, 동래읍성의 장대(將臺)와 수구(水口)에 대한 설명, 동래읍성 성벽 구조와 문의 구조 등에 대한 설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은 시민들에게 부산시 특히 동래 지역의 역사에 대한 배움의 장으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東萊邑城歷史館]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장영실 과학 동산[ 蔣英實科學- ]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조선 세종 대 과학 기기를 복원·전시하고 있는 과학 체험장.
- 건립 경위 2009년 11월 4일 동래 출신의 조선 세종 대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 구성 장영실 과학 동산의 총면적은 1,177㎡이며, 장영실의 발명품을 포함하여 조선 시대 천문기기 복원품 18종 19점을 전시하고 있다. 장영실 과학 동산은 동래읍성 북문 광장에 있는데, 이곳에는 북두칠성을 주제로 혼상과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혼천의(渾天儀), 앙부일구(仰釜日晷),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현주일구(懸珠日晷), 풍기대(風旗臺), 수표(水標), 선화당, 관상감, 창덕궁 측우기 등 11종을 배치하였고, 혼상 좌·우측에는 동·서양 해시계 2종을 배치하였다. 역사관에서 북문의 통행로 주변에는 세종대왕 기념관 일구대, 평면 해시계, 신법지평일구(新法地平日晷) 등 5종을 현장 조사·제작·설치까지 전 과정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동래구의 위도와 경도에 맞게 설치하였다.
- 현황 장영실 과학 동산은 장영실이 만든 조선 시대 과학 기기의 복원·전시뿐만 아니라 여름밤에는 장영실 천체 과학 축제를 열어 천체 강연과 천체 관측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부산과학기술협의회와 동래구가 협약서를 체결하여 과학 문화 해설사들을 배치하고 있다. 또한 부산 지역 청소년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는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앞으로 2018년에는 미국, 호주와 함께 한국도 참여한 구경 25m급의 세계 최대 망원경이 건립될 예정이어서 당대 최대 천문대를 운영하던 세종 시대의 영광이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정기 휴관은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과 1월 1일, 구청장이 정하는 휴관일에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영실 과학 동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범어사[ 梵魚寺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金井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本寺)이다. (25개본사)
총림 사찰 ;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1996.3)
쌍계사(2012.11.07.) 동화사, 범어사.
삼보사찰 ; 불보 법보 승보
총림 ; 선원, 강원, 율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岩)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물빛은 금색(金色)에다 물 속에 범천(梵天)의 고기가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고 하였다.
범어사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으로는 1700년(숙종 26)에 동계(東溪)가 편찬, 간행한 목판본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이 현존하고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 절은 당나라 문종 태화(太和) 19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당시 왜인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 하였으므로 대왕이 근심하고 있었는데, 문득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의상(義湘)을 청하여 화엄신중기도를 할 것을 권하였다.
신인은 “태백산 속에서 의상이 3,000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법문(華嚴義持法門)을 연설하며, 화엄신중(華嚴神衆)들이 항상 그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수행하고 있다. 또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이나 되는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이 의상을 청하여 함께 금정산 아래로 가서 7일 동안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그대로 하였더니 왜선들끼리 서로 공격하여 모든 병사가 빠져 죽고 살아 남은 자가 없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의상을 예공대사(銳公大師)로 삼고 범어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적기의 창건연대인 흥덕왕 때는 826년에서 835년까지이므로 이미 702년에 죽은 의상의 창건이라고 한 기록은 믿을 수 없다. 따라서 신라화엄십찰(新羅華嚴十刹)의 하나인 범어사의 창건은 의상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670년(문무왕 10)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678년에 창건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상이 창건하고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이 주석했던 범어사는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서, 또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의 하나로서 중요한 가람이 되었다.
신라 당시에 미륵석상과 좌우보처 및 사천왕이 각각 병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여 모셨던 2층의 미륵전(彌勒殿)을 중심으로 서쪽에 3칸의 비로전(毘盧殿)을 세우고 비로자나불상,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병기를 든 향화동자상을 모셨다. 미륵전 동쪽에는 3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세우고 대장경과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 및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이 밖에도 천왕신전(天王神殿)·유성전(流星殿)·종루(鐘樓)·강전(講殿)·식당(食堂)·목욕원(沐浴院) 및 33천(天)을 조성한 철당(鐵堂), 중료(衆寮) 360방사가 양쪽 계곡에 늘어섰으며, 사원의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가 100여 호 있었다고 한다. 사적에는 이러한 사찰의 규모가 창건 당시에 다 갖추어진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이룩된 규모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3년(광해군 5)에 묘전(妙全)·현감(玄鑑)·계환(戒環)·법인(法仁)·천원(天元)·덕균(德均) 등이 법당 및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집기들을 갖추어서 중창하였다.
그 뒤 범어사는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사원의 규모를 넓혔으며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란 이름 아래 현재 경상남도 3대사찰로 발전하였다. 이 절과 인연이 깊은 고승으로는 창건주인 의상과 신라십성(新羅十聖) 중의 한 사람인 표훈, 일생을 남에게 보시하는 것으로 일관한 낙안(樂安), 구렁이가 된 스승을 제도한 영원(靈源), 근대의 고승 경허(鏡虛), 한용운(韓龍雲), 동산(東山) 등이 있다.
특히 「선찰대본산범어사안내」에는 1613년에 묘전이 중건한 이후의 역대 주지와 그 임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① 주지시대(住持時代) 132년간 87대, ② 승통시대(僧統時代) 166년간 177대, ③ 총섭시대(摠攝時代) 14년간 11대, ④ 섭리시대(攝理時代) 4년간 3대, ⑤ 주지시대 39년간 8대로 구분하여 1947년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지라는 사찰의 책임자에 대한 호칭이 조선시대에 승통·총섭·섭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이 절은 산지가람(山地伽藍)으로 특이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금정산 동쪽의 넓은 산지를 이용하여 그 아래에서부터 일주문(一柱門)·천왕문(天王門)·불이문(不二門) 등을 차례로 배치하고 다시 7m 높이의 축대 위에 보제루(普濟樓)를 배치하였다. 보제루 좌우에는 심검당(尋劍堂)·비로전·미륵전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일반 사찰의 경우에는 심검당과 대칭이 되는 곳에 강원인 강설당(講說堂)과 같은 건물이 놓이는 것이 통례이지만, 이곳에 법당이 있어 특이한 가람배치법을 보이고 있다. 비로전과 미륵전의 뒤쪽에는 선원(禪院)이 배치되어 있으며, 선원 바로 아래 낮은 지역에는 요사채들이 있고 그 옆에는 종무소 건물이 있다. 또 심검당 뒤쪽에는 강당(講堂)이 있고, 강당의 뒷건물들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에 편의를 제공하는 후원(後院)의 건물이 있다.
그리고 이들 건물보다 7∼8m 높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는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爐殿僧)의 거처인 일로향각(一爐香閣)이 위치한다. 대웅전을 향하여 좌측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고 그 뒤쪽에는 서향각(西香閣)과 크고 작은 요사채가 있으며, 그들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비켜서 팔상전(捌相殿)·독성각(獨聖閣)·나한전(羅漢殿)이 늘어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산령각(山靈閣)이 있음도 특색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절의 가람배치는 대체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상단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 중간부분인 보제루 주위의 당우들, 하단의 건물인 보제루 아래쪽의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중심으로 하는 건물들이다. 이와 같이 건물이 세 부분으로 나뉘는 것은 산지가람의 지형에 따르는 배치방법이다.
현존하는 당우를 보면, 절 입구의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이룩된 3칸 건물로서 8건물의 기둥은 아랫부분 3분의 2 정도까지 석주로써 조성하였고, 그 위에 다포(多包)의 맞배지붕을 형성하고 있다. 건물의 우측에는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 좌측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 중앙에는 작은 글씨로 ‘曹溪門(조계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부산 범어사 조계문은 보물 제1461호이다.
천왕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벽에는 신장의 벽화를 그려 천왕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문의 내부 좌우에는 사천왕의 탱화를 안치하였다. 불이문은 전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서 범어사로 통하는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의 기둥에는 근대의 고승 동산(東山)이 쓴 주련이 있다. 보제루는 모든 법요식(法要式)이 행해지는 곳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서 범어사의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보제루 북쪽에는 사방 3칸의 종루(鐘樓)가 있다. 범종과 대북 등의 의식용구가 갖추어진 2층 누각건물이다. 미륵전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항마촉지인(降摩觸地印)을 한 목조불상을, 전면과 좌우에는 영탱(影幀)을 봉안하였다. 비로전의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건물의 초석은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보물 제434호인 부산 범어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602년에 중건, 1613년에 중수한 맞배집으로서 다포식 건물이다. 대웅전 왼쪽의 명부전은 전면과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주존불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이다. 지장보살의 주위에는 판관(判官)·녹사(錄使) 등의 상을 배치하고 있다. 관음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서, 내부에는 관세음보살상과 불경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관음전 옆에는 노전승이 거처하는 일로향각이 있으며, 명부전 뒤쪽에는 서향각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동향하고 있다. 이 건물 내부에는 부처님의 탱화가 있고 그 곁에는 동래 정희조 내외의 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들은 대웅전 옆 칠층석탑의 건립 등 범어사의 대시주였다.
서향각 뒤쪽에는 팔상전·독성각·나한전의 건물이 한 채로 연이어 있다. 팔상전 안에는 삼존상과 팔상탱화를 봉안했고, 독성전에는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과 십육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1칸의 길다란 건물이다. 이 밖에도 조그마한 산령각과 해행당(解行堂) 등 수십 칸의 요사채가 있고 종무소가 현존하고 있다.
이 절의 석조물로는 보제루 앞 뜰에 신라시대 석탑인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제250호)이 있고, 대웅전의 남쪽에는 거대한 칠층석탑이 있다. 이 칠층석탑은 근세 인도승이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한 탑으로서 전통적인 신라 석탑 형식에 다소 변화를 주어 새로 건립한 것이다. 삼층석탑에서 약 20m 남쪽에 위치한 곳에 범어사 유일의 석등(石燈)이 있는데 건립시기는 고려 말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괘불(卦佛)을 시설하는 석조괘불대가 있고, 일주문 밖에 소형 석조폐탑(石造廢塔) 등이 있으며, 일주문 옆 숲속에는 수많은 비석이 있고, 그 비석 아래쪽에 고승 동산의 석조부도(石造浮屠)가 있다. 이 부도는 최근의 작품이지만 고려 이래의 전통적 석조부도의 형태에 각종 장엄을 가미함으로써 매우 아름다운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사중보물(寺中寶物)로는 전의상대사옥인(傳義湘大師玉印)과 구룡병풍(九龍屛風)·삼층석탑·옥와(玉瓦)·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금강저(金剛杵)·목조미륵불(木造彌勒佛)·범종(梵鐘)·어병(御屛)·오동향로(烏銅香爐) 등이 있다.
이 중 옥인은 원효의 작품이라고도 하는데, 산내암자인 원효암(元曉庵) 우물 보수4중 발견한 것이며, 널리 화엄의 그물을 펴서 인간과 천상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張大敎網鹿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梵魚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화재
보물 제434호로 지정된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과 범어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재 중 하나인 보물 제250호인 부산 범어사 삼층 석탑(釜山梵魚寺三層石塔), 보물 제1461호인 부산 범어사 조계문(釜山梵魚寺曹溪門)이 있다. 이밖에 보물 제419-3호인 『삼국유사(三國遺事)』권4~5, 보물 제1526호인 부산 범어사 목조 석가여래 삼존 좌상(釜山梵魚寺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천연기념물 제176호인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釜山梵魚寺등나무群落] 등 국보급 문화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각종 건물과 전적(典籍)을 비롯하여 총 31건이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梵魚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 범어삼기(梵魚三奇)와 금정팔경(金井八景)
금정산과 범어사의 경치를 이르는 말로 범어삼기와 금정팔경이 있다.
범어삼기는 원효석대(元曉石臺)와 자웅석계(雌雄石鷄), 암상금정(岩上金井)으로 원효암 뒤편의 바위 봉우리, 계명암의 암수 한 쌍의 닭모양 바위, 깎아지른 바위봉우리 위에 있는 금샘이 세 개의 기이한 풍경이란 뜻으로 범어삼기라 불렸다.
팔정팔경은 어산노송(魚山老松, 절 입구 어산교 근처의 소나무 숲), 계명추월(鷄鳴秋月, 계명암의 가을 달밤), 청련야우(靑蓮夜雨, 청련암에 내리는 밤비), 내원모종(內院暮鐘, 내원암에서 듣는 범어사의 저녁 종소리), 대성은수(大聖隱水, 대성암의 계곡물소리), 금강만풍(金剛晩楓, 금강암의 늦가을 단풍), 의상망해(義湘望海, 의상봉에서 바라보는 바다), 고당귀운(姑堂歸雲, 정상인 고당봉을 돌아가는 구름)을 말한다.
범어삼기든 금정팔경이든 내용을 살펴보면 금정산과 범어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한 몸처럼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 * 범어사 등나무군락
천연기념물 제176호(1966년 1월 13일) 지정
범어사 입구 계곡에 있는 등나무 군락.
- 생물학적 특성 등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낙엽 덩굴성 식물로 줄기는 오른쪽으로 꼬여 감으며 10m 이상 자란다. 보통 참등, 자등(紫藤)이라고도 한다. 5월에 보랏빛 꽃을 피우고 열매는 9월에 익는다. 작은 가지는 밤색 또는 회색의 얇은 막으로 덮여 있다. 우리나라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자라는 애기등과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등나무 등 2종이 자생하고 있다. 정원수, 환경 미화용 등 조경 소재로 많이 심는다. 부산 범어사 등나무군락은 각종 나무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 20m 이상 성장하였으며, 수령은 100년 정도이다.
- 자연 환경 등나무는 수분이 많은 점질 양토에서 생육이 빠르고 수명도 길며, 공해에 대한 내성은 보통이다. 범어사 주변 지역은 이러한 생장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등나무 군락지가 형성되었다. 등나무는 다른 생물보다 생장이 빠른 편이며, 어릴 때는 이식이 용이하나 성목이 되면 쉽지 않다.
- 현황 범어사 등나무군락은 금정산 중턱에 있는 범어사 앞 계곡에 있다. 개천에는 집채 같은 큰 바위가 곳곳에 널려 있고 그러한 바위 밭에 등나무가 나서 소나무, 팽나무 등의 큰 나무의 줄기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 등나무가 무리를 지어 자라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부산 범어사 등나무군락은 학술적 가치가 높아 1966년 1월 13일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면적은 6만 5502㎡이고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관리하고 있다. 등나무 꽃이 한창 필 때면 그 꽃이 구름처럼 보인다고 하여 등운곡(藤雲谷)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금정산 절경의 하나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釜山梵魚寺藤-群落](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대웅전 (梵魚寺 大雄殿)
보물 제434호(1966년 2월 28일)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석가모니불상만을 모시는 일반 대웅전과는 달리 이곳 범어사 대웅전에는 미륵보살과 가라보살을 각각 석가모니의 왼쪽과 오른쪽에 함께 모시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이 대웅전은 조선 선조 35년(1602)에 다시 지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는 한 차례 보수 공사가 있었다.
앞면·옆면 3칸 크기를 가진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또한 건물 안쪽에 불상을 올려놓는 자리인 불단과 불상을 장식하는 지붕 모형의 닫집에서 보이는 조각의 정교함과 섬세함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아름다움과 조선시대 목조공예의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 梵魚寺義湘大師影幀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9월 16일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소장된 조선 후기 의상 대사(義湘大師)의 영정.
개설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梵魚寺義湘大師影幀)」은 신라 시대의 승려인 의상 대사[625~702]의 초상화이다. 화면 향좌측 아랫부분에 있는 기록에 의하면 건륭 32년, 즉 1767년(영조 43)에 양공(良工) 수일(守一)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은 세로 116.3㎝, 가로 81㎝의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것으로, 화면은 3폭 병풍을 배경으로 중앙에 의상 대사가 향우측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전신 교의 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오른손은 용머리 장식이 있는 불장자를 쥐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얹은 채 불장자의 수술을 가볍게 쥐고 있다. 화면 향우측 상단에는 주색(朱色) 바탕에 백색으로 ‘신라국사 화엄종주 의상대사 진(新羅國師華嚴宗主義湘大師眞)’이라는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그리고 향좌측 하단에는 묵서로 ‘건륭 삼십이년 봉안우금정산범어사 화주 산중대덕 약량양공 수일(乾隆三十二年奉安于金井山梵魚寺化主山中大德若兩良工守一)’이라는 화기(畵記)가 기술되어 있다.
특징
얼굴은 약간 찌푸리면서 응시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승복을 입은 인물상의 머리 부분 표현과 얼굴의 윤곽이 마치 석가 설법도 혹은 석가 영산회상도에 석가의 제자로 등장하는 아난(阿難) 존자의 모습을 보는 듯 매우 인상적이다. 이 점은 바로 조선 후기 진영 작품들이 실제 인물들의 생존기에 그려졌다고 한다면, 의상 대사는 신라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범어사의 창건주로 전해지는 의상 대사의 모델을 석가의 뛰어난 불제자인 아난의 이미지에서 모색했을 가능성이 있다.승복은 군청색 장삼에 가사를 걸쳤는데, 가사의 표면은 주색과 군청색이 함께 나타나고 이면은 녹청색을 사용하여 조화를 이루며 인물상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의상 대사가 앉아 있는 의자 등받이의 좌우 끝에는 용머리 장식이 있고, 등받이 부분은 붉은 천이 드리워져 있어, 전반적으로 고려 시대 양식을 기본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바닥에 돗자리 문양이 생략된 것 역시 고식을 따르는 요소이다. 의자 아래쪽에는 신발이 놓여있는 족좌대가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신발이 놓여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의상대사 영정」은 표현 방식이 고려 및 조선 전기 양식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작품으로, 부산 범어사에 소장된 진영 가운데 가장 조성 시기가 이른 작품이다.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 회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의상대사 영정」 [梵魚寺義湘大師影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비천
분류
미술/공예 >행복 >인물 >비천
• 유 물 명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비천• 소 장 처 :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시 대 : 1602년• 재 료 : 나무에 채색• 크 기 :
일러스트정보
• 작 품 명 : 비천• 작품출처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비천• 작품종류 : 2D일러스트
상징형 설명
극락왕생비천(飛天)이란 천의(天衣)를 걸치고 공중을 나는 천인(天人)을 말한다. 서양의 천사가 날개를 단 나체의 모습이라면 동양의 비천은 날개가 없고 장식적인 천의를 걸친 것이 특징적이다.우리나라에 비천상은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유입되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에 비천무늬를 그리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때에는 매우 사실적이며 화려하고 세련된 양식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비천을 그려 넣거나 조각한 것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찬탄하기 위한 불교적 길상 의미를 가짐과 더불어 그 곳이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佛國土), 즉 극락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특히 무덤에 장식된 비천상은 죽은자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비천은 고분벽화를 비롯해, 사찰 범종, 탑, 석등, 불단 등 주로 불교적인 조형물에 장식되었으며, 현존 비천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오대산 상원사 범종의 비천, 남원 실상사 범종의 비천을 들 수 있고 목조각품으로는 화성 용주사 대웅전 천장과 완주 송광사 대웅전 천장의 비천상이 유명하다.<참고문헌>『한국문화 상징사전』1 · 2, 두산동아, 1995 / 김길성,『민간전통 刺繡베갯모』, 삼성문화인쇄(주), 2001. / 임영주,『한국전통문양』1~3, 예원, 1998. / 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27권 / 노자키 세이킨,『中國吉祥圖案』, 예경, 1992. / 정민,『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1 · 2, 효형출판, 2003. / 이상희,『꽃으로 보는 한국문화』1~3, 넥서스, 1998. / 김종대,『우리문화의 상징세계』, 다른세상, 2001. / 조용진,『동양화 읽는 법』, 집문당, 2002. / 허균,『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1. / 허균,『전통문양』, 대원사, 1995. 허균,『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 이성미 · 김정희, 『한국회화사용어집』, 다할미디어, 2003.
원천유물 설명
범어사(梵魚寺) 대웅전의 불단 중앙에 새겨진 비천. 범어사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 보물 제434호. 1717년(숙종 43) 중창된 것으로 방형평면을 이루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내부를 보면, 가구(架構)는 전면 평주(平柱)와 후면 내진(內陣)에 세운 두개의 고주(高柱)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종보[中宗樑]를 걸고 다시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건 삼중량(三重樑) 구조이다. 종보 밑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양측면의 기둥과 앞뒤 공포 끝부터 빗천장을 가설하여 중앙의 천장이 한층 높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불단은 조선 후기 불단의 일반 형식과 같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불단 정면의 중앙에 있는 비천은 왼손으로 생황을 붙잡고 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는 연봉오리를 들고 있다. 머리에 두른 고깔형의 모자와 몸에 두른 천의 등은 금산사 대장전의 불단에 보이는 비천상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금산사 불단의 비천상에 보이는 눈동자는 이 비천상에는 표현되지 않았다. 비천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길상적 의미를 가지고 많이 사용된 소재 중의 하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비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길상 이미지), 2003., 한국콘텐츠진흥원)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기린
분류
미술/공예 >행복 >인물 >비천
• 유 물 명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기린• 소 장 처 :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시 대 : 1602년• 재 료 : 나무에 채색• 크 기 :
일러스트정보
• 작 품 명 : 비천• 작품출처 : 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기린• 작품종류 : 2D일러스트
상징형 설명
극락왕생비천(飛天)이란 천의(天衣)를 걸치고 공중을 나는 천인(天人)을 말한다. 서양의 천사가 날개를 단 나체의 모습이라면 동양의 비천은 날개가 없고 장식적인 천의를 걸친 것이 특징적이다.우리나라에 비천상은 삼국시대에 불교와 함께 유입되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에 비천무늬를 그리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때에는 매우 사실적이며 화려하고 세련된 양식적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비천을 그려 넣거나 조각한 것은 부처님을 공양하고 찬탄하기 위한 불교적 길상 의미를 가짐과 더불어 그 곳이 부처님이 계신 불국토(佛國土), 즉 극락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 할 수 있다. 특히 무덤에 장식된 비천상은 죽은자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비천은 고분벽화를 비롯해, 사찰 범종, 탑, 석등, 불단 등 주로 불교적인 조형물에 장식되었으며, 현존 비천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오대산 상원사 범종의 비천, 남원 실상사 범종의 비천을 들 수 있고 목조각품으로는 화성 용주사 대웅전 천장과 완주 송광사 대웅전 천장의 비천상이 유명하다.<참고문헌>『한국문화 상징사전』1 · 2, 두산동아, 1995 / 김길성,『민간전통 刺繡베갯모』, 삼성문화인쇄(주), 2001. / 임영주,『한국전통문양』1~3, 예원, 1998. / 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27권 / 노자키 세이킨,『中國吉祥圖案』, 예경, 1992. / 정민,『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1 · 2, 효형출판, 2003. / 이상희,『꽃으로 보는 한국문화』1~3, 넥서스, 1998. / 김종대,『우리문화의 상징세계』, 다른세상, 2001. / 조용진,『동양화 읽는 법』, 집문당, 2002. / 허균,『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1. / 허균,『전통문양』, 대원사, 1995. 허균,『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 이성미 · 김정희, 『한국회화사용어집』, 다할미디어, 2003.
원천유물 설명
범어사(梵魚寺) 대웅전의 불단 중앙에 새겨진 비천(飛天). 범어사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 보물 제434호. 1717년(숙종 43) 중창된 것으로 방형평면을 이루고 있다. 범어사 대웅전 내부를 보면, 가구(架構)는 전면 평주(平柱)와 후면 내진(內陣)에 세운 두개의 고주(高柱)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종보[中宗樑]를 걸고 다시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건 삼중량(三重樑) 구조이다. 종보 밑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양측면의 기둥과 앞뒤 공포 끝부터 빗천장을 가설하여 중앙의 천장이 한 층 높게 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불단은 조선 후기 불단의 일반 형식과 같이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불단 정면의 중앙에 있는 비천은 왼손으로는 연잎의 줄기를 길게 붙잡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연잎의 바로 밑둥을 잡고 있으며,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있다. 이러한 비천은 금산사 대장전의 불단에서도 볼 수 있는데, 금산사 대장전 불단의 정면 중앙에도 악기를 부는 비천과 연잎 줄기를 잡은 비천이 한쌍을 이루고 있다. 악기를 불고 있는 비천은 고깔형 모자를 쓰고 있는 반면, 이 비천은 관모를 쓰고 옷도 악기를 부는 비천과는 다르다. 비천 역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길상적 의미를 지닌 인물로 상징되어 상서로운 동식물과 더불어 많이 사용된 소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대웅전 수미단: 기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길상 이미지), 2003., 한국콘텐츠진흥원)
*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梵魚寺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중앙의 본존불은 항마상의 석가여래이며,
좌우에는 양손으로 연꽃 가지를 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모셔져 있다.
시대 조선/조선후기
제작시기·일시 1661년
수량 3구
재질 목조
크기 (높이,길이,두께,너비) 높이: 본존상 1.3m,
좌협시보살상 1.2m, 우협시보살상 1.2m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526호 (2007년 9월 18일)
보물 제1526호. 범어사 대웅전의 주존불로 전각 내의 거대한 수미단 위에 봉안된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이다. 중앙의 본존불은 항마상의 석가여래이며, 좌우협시상은 보관과 영락을 착용하고 양손에 연꽃 가지를 대칭으로 각각 쥔 보살상이다. 사찰 측의 전언에 의하면 목조삼존상의 개금불사시 복장물을 개봉하였으나, 당시 불상기문(佛像記文)을 비롯한 복장물은 다시 복장하였다고 한다. 이때 출토된 불상기문은 따로 복사하여 사내(寺內)에 보관 중이다. 불상기문에는 대웅전 삼존상의 조성 시기가 “순치십팔년(順治十八年)”(1661)이며, 조각승은 희장(熙莊)을 비롯하여 보해(寶海), 경신(敬信), 쌍묵(雙黙), 뇌영(雷影), 신학(神學), 청언(淸彦) 등이었음을 밝히고 있고, 좌우협시 보살상의 존명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로 지칭하고 있다.
- 특징 ; 불․보살상 3구 모두 여래와 보살이라는 도상의 차이를 제외하면 신체의 비례나 제작 기법이 동일하다. 규모는 본존상의 높이가 130cm이고, 좌우의 협시 보살상은 그보다 약간 작은 125cm 정도여서 그리 크지 않은 상이나 화려한 불단과 보개 등과 어우러져 단정하고 기품이 드러나는 상이다. 삼존상은 머리 뒷면에 한두 개의 나발이 떨어져 나간 것이나 협시보살상의 보관 장식물의 교체, 혹은 팔찌의 일부가 결손된 것 외에는 도금의 박락이나 나무의 결흔없이 양호한 상태이다.
본존 석가상은 항마인 상으로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덮은 편단우견이며 속에 편삼을 입고 있지 않아서 팔이 드러나 보인다. 얼굴은 작은 편이나 상호가 단정하여 아름답고 귓불은 두툼하다. 머리는 나발로 육계의 표현이 완만하고 반원형의 중간계주와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불신은 균형이 있고 몸의 굴곡이 단순하나 양감이 풍만하며, 대의도 이에 어울리게 정돈되어 있어서 전체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 대의는 앞자락이 배 부분까지 깊게 벌어지고 속에 승각기를 수평으로 입었는데 사선으로 접혀서 장식되어 있다. 다리를 감싼 대의자락은 양 다리 사이에서 펼쳐지듯 넓은 주름이 있고 오른발 아래로 흘러내린 소매 자락은 나뭇잎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좌우협시보살상은 거의 같은 형상으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연화가지를 좌우대칭으로 높게 들고 있다. 원통형 보관의 가장자리는 화염보주(火焰寶珠)로 장식되어 있고 서운(瑞雲), 화문이 붙어 있다. 보관 아래로 노출된 앞쪽의 보발은 음각선으로 모발을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보발은 높게 묶었으며 귀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머리가닥은 어깨 위에서 합쳐져서 이중 원형을 이루고 다시 세 갈래로 나누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착의 형식은 본존상과 달라서 편단우견 안에 다시 편삼을 입고 있어서 팔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오른발 아래에 놓인 왼쪽 소매 자락은 군의 주름과 나란하게 왼쪽 무릎 쪽으로 길게 늘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대웅전의 주불인 목조삼존불상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고격의 법당 건물, 그리고 아름다운 불단 등과 함께 그 격조를 같이 하고 있는 불상으로 판단된다. 불신은 비례가 적당한 가운데 양감도 풍만한 편이어서 균형잡힌 형태를 보이며 엷은 미소에서 풍기는 부드럽고 자비스러운 인상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 단정 우아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복장 발원문을 통해서 1661년에 수두(首頭) 희장을 비롯하여 보해, 경신, 쌍묵, 뇌영, 신학, 청언 등이 관여하여 조성한 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범어사 대웅전의 삼존불상은 원래의 봉안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또한 제작연대와 조각승 등 조성 내용을 알 수 있는 17세기 중반의 귀중한 불상이다.
[釜山梵魚寺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 釜山梵魚寺大雄殿三藏菩薩圖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8호.(2006년 11월 25일)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257㎝, 가로 267.2㎝.
천상과 지상, 지하의 교주로 신앙되는 세 보살인 천장·지지·지장보살을 그린 불화이다.
화기를 통해 1882년(고종 19)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삼장보살도는 화면 중앙에 천장보살(天藏菩薩)과 그 왼쪽의 지지보살(持地菩薩), 오른쪽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축으로 각 보살 주위에 여러 권속들을 거느린 불화를 말한다. 삼장보살은 천상과 지상, 지하의 교주로 신앙되는 세 보살을 칭하는데, 죽은 자의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인 수륙재와 관련있는 불화로 보고 있다. 도상 또한 중국 수륙화 혹은 수륙벽화에 유사 도상과 명칭이 확인되고 있으나, 조선시대 삼장보살도 도상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장보살도는 대개 1폭으로 조성되지만, 2폭 또는 3폭으로 조성되는 경우도 있다.
이 불화는 대웅전의 좌측 벽면에 봉안되어 있는 불화로, 1882년에 수화승 수룡당 기전(繡龍堂 琪銓)이 대웅전의 영산회상도, 신장도와 함께 제작한 삼장보살도이다. 화면은 상하 2단으로 구분하여, 상단 중앙에 천장보살과 진주·대진주보살, 그 왼쪽에 지지보살과 용수·다라니보살, 맞은 편 오른쪽에 지장보살과 도명존자·무독귀왕 등 보살상의 좌우협시들을 배치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천부·지상·명부계 권속들이 에워싸고 있다. 하단에는 위태천과 사천왕, 무장형의 신장상, 주악천동과 천녀 등이 열을 지어 정연하게 배열된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80여 위에 이르는 수많은 권속들이 보살들을 에워싼 형태이다.
- 특징 삼장보살도의 도상 구성을 통해 화면 하단 중앙에 사천왕과 신장상 외에 위태천과 주악인상이 배치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제석신중도가 많이 제작되었고, 여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위태천과 주악천인 도상이 이 작품에도 흡수된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기전이 제작한 삼장보살도의 도상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채색은 전반적으로 붉은색이 주로 사용되었고, 그 외 도상의 신체와 복식에 황색과 백색, 청색과 녹색이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다. 인물의 표현이나 채색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성된 영산회상도, 신중도와 같이 수룡당 기전의 특징이 드러난다. 또한 화면 전체적으로 80여 위에 이르는 상당수의 도상들로 공간을 꽉 메워 여백이 거의 없다. 이처럼 범어사 삼장보살도의 공간감과 여백 처리는 앞 시기인 18세기 삼장보살도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 의의와 평가 이 불화의 제작자인 수룡당 기전은 19세기 후반 부산·경상남도 지역에서 활약한 불화승으로, 1863년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0년간 30점 이상의 불화 제작에 관여하였다. 특히 이 불화는 19세기 후반의 기전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고,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불교회화와 불화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주요한 작품.
[釜山梵魚寺大雄殿三藏菩薩圖]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웅전 제석신중도」[大雄殿帝釋神衆圖 ]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梵魚寺大雄殿帝釋神衆圖)」는 범어사 대웅전 우측 벽에 봉안된 불화이다. 수화승(首畵僧) 기전(琪銓)이 1882년(고종 19) 「범어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梵魚寺大雄殿三藏菩薩圖)」와 함께 제작한 불화이다.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 형태 및 구성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는 세로 230.5㎝, 가로 231.8㎝ 크기의 비단에 채색을 베푼 것으로, 일곱 폭의 비단을 잇대어 한 화면을 구성하였다. 화면 상단에 녹색 원형 두광과 타원형의 신광을 갖춘 대자재천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범천과 제석천 등 천부상 3위가 배치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일월 천자와 천녀·천동 등의 천부중이 에워싸고, 그 아래쪽으로 갑옷과 무기를 갖춘 무려 33위에 이르는 신장상들이 일체의 여백 없이 4단으로 열을 지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신체 표현에 있어 상단의 중심 인물과 주변 권속들은 백색으로 칠한 반면, 33위의 신장상들은 붉은색 혹은 황색을 곁들인 피부색으로 묘사하여 위계를 구분하였다.
- 특징 ; 대자재천의 좌우측에는 두관에 붉은 태양과 백색 달을 상징하는 원반이 장식된 일천자(日天子)와 월천자(月天子)가 양손에 홀을 쥐고 시립하고, 범천·제석천의 가장자리에는 갑주와 익상관을 착용한 신장상이 1위씩 외호하고 있다. 특히 새의 날개 깃털로 장식된 화려한 익상관을 착용한 신장상은 위태천(韋駄天)[불교에서 호법신이나 가람의 수호신을 칭함]이 착용하는 투구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위태천의 경우 대개 얼굴이 동안(童顔)이면서 합장한 손 안쪽으로 금강저 혹은 보검을 받들거나, 양손에 이를 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의 경우는 동안이 아니라 수염이 길어 장년층의 모습을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지물도 보이지 않아 위태천으로 보기는 힘들다.- 대자재천의 아래쪽 중앙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천동 10위로 구성된 그룹이 역삼각형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어 눈길을 끈다. 천부도상에 악기를 연주하는 그룹의 등장은 조선 15~16세기 천부도상으로 알려진 15세기 일본 즈이세키지[瑞石寺] 소장 제석천도, 1583년 일본 젠가쿠지[善覺寺] 소장 제석천도, 16세기 일본 사이다이지[西大寺] 소장 제석천도 등에서도 볼 수 있어 이와 같은 도상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채색은 차분한 붉은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신체와 내의에 백색, 광배와 착의 및 관모 장식에 강렬한 청색이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다. 1882년에 함께 제작된 「범어사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 「범어사 대웅전 삼장보살도」와 마찬가지로 수화승 수룡당 기전의 설채법(設彩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물 표정 못지않게 농담 있는 바림법과 모근의 세밀한 묘사 또한 범어사 소장 기전 작품의 특징이다.
- 의의와 평가 ; 사찰 대웅전에 후불탱을 봉안한 경우 거의 좌우측 벽에 신중단을 마련하여 신중도를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외 전각에서도 빠짐없이 찾아볼 수 있다.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는 조선 후기 신중도 도상의 몇 가지 유형 중 대자재천과 범천·제석천 등의 주존과 신중들로 구성된 19세기 신중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인물의 표현이나 채색 등에서 수화승 기전의 화풍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기전은 경상북도 사불산 화파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화풍을 답습한 화승으로, 「범어사 대웅전 제석신중도」를 통해 1880년대 부산 지역 범어사 권역으로 영역을 넓혀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지식백과]梵魚寺大雄殿帝釋神衆圖(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7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355.2㎝, 가로 401.2㎝.
범어사에 소장된 19세기 말 영산회상도.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불화이다.
본존인 석가와 협시인 문수·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권속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한 구도이다. 화기를 통해 1882년(고종 19)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화면 상태는 양호하다.
- 내용 ; 영산회상도는 영취산에 모여든 청중들에게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광경을 주제로 그린 불화를 말한다. 이 불화는 대웅전 전각 내에 봉안된 목조석가삼존불좌상(1622년)의 후불벽에 걸려있는 후불도로, 1882년에 수화승 수룡당 기전(繡龍堂 琪銓)이 대웅전의 삼장보살도, 신중도와 함께 제작한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중앙에 항마인의 본존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을 포함한 보살상 8위를, 아래쪽에는 아난과 가섭, 천부상 2위,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위쪽에는 분신불 2위, 10대제자와 팔부중 등이 본존을 에워싸고 있다.
- 특징 ; 본존 석가는 원형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연화대좌에 결가좌한 모습이다. 육신은 황색계를 바르고 두광은 녹청 안료를 발랐다. 착의는 가슴에 녹청색 군의에 홍색 매듭으로 마감하였고 그 위에 대의를 편단우견으로 착용하였다. 신체에서 발하는 물결무늬의 방광(放光)은 청·황·녹·적 등의 네 가지 색 띠를 규칙적으로 번갈아 배치하여 매우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이처럼 한색과 난색의 색동 띠 조합으로 이루어진 방광 표현은 조선 후기 불화에서 한 축을 이루는 광배 표현이면서, 기전이 제작한 불화에서 즐겨 볼 수 있는 광배이기도 하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수룡당 기전의 설채 특징이 드러난다. 차분한 녹색과 적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고, 여기에 18~19세기에 유행한 강렬한 청색이 본존의 두발, 신광, 법의, 연화대좌, 그리고 권속들의 착의에 보조적으로 활용되었다. 불보살상의 신체는 황색계인데 반해 천부 및 제자상, 팔부중은 백색으로 칠하여 신분상의 위계를 나타냈다. 화면 가장 아래쪽에는 붉은색 바탕에 먹선으로 3칸의 화기란을 마련하고 그 안에 긴 내용의 화기를 묵서로 적었다.
- 이 불화의 제작자인 수룡당 기전은 19세기 후반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약한 불화승으로, 1877년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0년간 30점 이상의 불화 제작에 관여하였다. 이 불화는 19세기 후반의 기전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고, 부산·경상남도 지역의 불화의 특징과 불화승의 계보를 밝힐 수 있는 주요한 작품이다
釜山梵魚寺大雄殿釋迦靈山會上圖(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대웅전 청동북(梵魚寺 大雄殿 靑銅金鼓)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청동북이다. 청동북은 절에서 사용하는 도구로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이다.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범어사 금고는 지름 90cm, 두께 15cm의 대형 금고이다. 옆면은 뒷면을 향해 안으로 기울어진 좁은 입구를 가진다. 앞면에 동심원이 새겨 있을 뿐 전체적으로 무늬가 없다. 옆면에는 3개의 고리가 달려있으며, 만들어진 때와 금고에 대한 기록이 새겨 있다. 이 글로 보아 동치(同治) 원년인 조선 철종 13년(1862)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금고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대형 금고인 동시에 만든 시기가 명확한 중요한 자료이다.
* 범어사 종루
종루는 아침 저녁 예불과 의식이나 행사 때 쓰이는 사물(四物) 즉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가 설치된 건물이다.범어사 종루는 원래 심검당 오른쪽 전방 삼층석탑 맞은편 중정에 있었다. 당시의 건물은 숙종 25년(1669)에 명학 스님이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일제 초기에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옮겨 세웠다. 건축 양식이 미륵전과 흡사하여 1889년경에 크게 손질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2층 누각에 정면 세 칸 측면 세칸의 규모로서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법물(四法物)을 갖추었다. 막돌 덤벙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고 2층 누마루를 깔고 다시 2층 기둥을 세워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원래는 1층 누하주를 전부 열었으나 지금은 간벽을 막아서 기념품 판매점을 꾸몄다.- 공포는 미륵전과 흡사한데 창방 뺄목을 돌출시켜서 양봉형상으로 주두를 감싸고 살미는 끝을 만곡시켜서 연꽃을 초각하였다. 다시 행공 첨차와 제2첨차를 첩놓아서 봉두 형상을 초각한 보뺄목과 장혀 및 도리와 결구하고 내부는 한 몸처럼 보아지를 틀었다. 한편 최근에 승가대학 일곽에 세운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 정면 측면 세 칸의 누각형 건물로서 1층 누하주와 바닥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종루 [鐘樓]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 범어사조계문 梵魚寺曹溪門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으나
2006년 2월 7일 보물 제146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일주문은 일렬로 장주형(長柱形) 초석들을 네개 세우고, 이 초석 위에 높이가 낮고 굵은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사이를 창방으로 결구하고 이 위에 다시 평방을 놓아 장방형의 틀을 짠 뒤 공포(栱包)를 놓아 다포식 건축을 이루고 있다.
공포는 외3출목(外三出目)으로서 소첨차나 대첨차는 교두형(翹頭形: 圓弧形으로 깎아낸 모양)이고, 살미첨차들은 강직한 앙서[仰舌]로 되어 있다.
출목 사이와 앞뒤 첨차 사이에는 널판을 대어 순각천장(巡閣天障: 출목 첨차 위쪽에서 막아 댄 반자)을 이루며, 처마는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 얹어진 짤막한 서까래)이 있는 겹처마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측 박공면에는 풍판(風板: 비바람을 막기 위해 댄 널)을 달았으며 모든 목조부재들은 단청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釜山梵魚寺曹溪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일주문 화반
범어사(梵魚寺) 일주문 화반에 그려진 화병과 꽃. 범어사 일주문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사찰의 입구에 있는 문이다. 일주문은 절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를 구분짓는 경계 구실을 한다. 이 건물을 세운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1614년(광해군 6)에 묘전화상이 절내 여러 건물을 고쳐 지을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측되며, 1781년(정조 5)에 백암선사가 현재의 건물로 보수했다. 정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양측 박공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기둥은 높은 주초 위에 짧은 기둥을 세웠으며, 모든 나무재료들은 단청을 하였다. 범어사 일주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부른다.화면에 보이는 화병과 화려한 꽃들은 일주문 안의 장식부재에 그려진 것으로, 파란선으로 묘사된 화병 속에서 뻗어나온 꽃들이 화려하다. 뻗어나온 가지는 하늘색 계열이지만 그 속에 핀 꽃들은 빨강·파랑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화병은 평안을 상징하며, 그 안에 꽂힌 꽃들에 의해 길상적 의미가 변한다. 예를 들면, 모란꽃이 꽂히면 부귀평안, 연꽃이 꽂히면 다자평안, 장미가 꽂히면 사계평안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와 같이 다양한 꽃이 꽂힌다면 만사가 평안하다는 길상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범어사 일주문: 화반 1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길상 이미지), 2003., 한국콘텐츠진흥원)
* 범어사 천왕문[ 梵魚寺天王門 ]
범어사 천왕문(梵魚寺天王門)은 삼문(三門) 가운데 두 번째 문으로서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며, 13단의 높은 석계를 오르는 축대 위에 4구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봉안한 건물이다. 사천왕은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하늘의 동서남북 사방을 담당하여, 인간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가진 불법(佛法)의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에서 범어사 천왕문은 범어사(梵魚寺)라는 성역에 이르기 위해 속세의 티끌을 걸러내는 중요한 통과 의례 장치에 해당한다.
- 범어사 천왕문은 범어사의 일주문인 부산 범어사 조계문(釜山梵魚寺曹溪門)과 중문(中門)인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 사이에 세워져 있다.
- 범어사 천왕문은 1699년(숙종 25)에 승려 자수가 처음으로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 뒤로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을 것이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2010년 12월 15일 방화범의 방화에 의해 전소(全燒)되었으며, 2012년에 시민들과 불자들의 정성으로 복원되었다.
-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중앙 어간(御間)은 통로로 사용하고, 좌우 협간(夾間)에는 사천왕상 4구를 봉안하였다. 동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증장천왕(增長天王)을, 서쪽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배치하였다. 주춧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에는 공포를 짜서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공포는 출목(出目)이 있는 익공(翼栱) 형식으로 행공 첨차 위에 소로를 놓아 장혀를 받치고, 장혀는 보머리와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내진 평주(內陣平柱)로 대들보의 중앙을 받쳤으며,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걸치고 그 위에 판대공으로 초각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는 연등천장으로 조성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梵魚寺天王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불이문
시대 ; 조선/조선 후기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은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으로 오르는 축선상의 삼문 가운데 세 번째 문으로,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와 연결된다.
범어사 불이문은 1699년(숙종 25)에 승려 자수가 범어사 천왕문(梵魚寺天王門)과 함께 창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최근에 정면 기둥의 초석을 교체하였다.
-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주심포작으로 결구되어 있지만 다포식 공포와 흡사한 형상이 특이한 점이다.
- 불이문은 진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강조한 사찰의 상징적인 출입문
범어사 불이문은 조선 후기 주심포식 목구조의 양식적 특성을 갖고 있다.
* 범어사 보제루 梵魚寺普濟樓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 누각 형식의 건물.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담긴 보제루(普濟樓))에서는 예불(禮佛)과 법요식(法要式)이 거행된다.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범어사 천왕문(梵魚寺天王門)·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의 삼문을 거쳐 높은 석계를 올라 도달하는 중간 마당의 첫째 건물이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이다.
- 범어사 보제루는 1699년(숙종 25)에 승려 자수의 주관으로 창건되었다. 사적기(事績記)에 의하면 1813년(순조 13)에 승려 신정의 주관으로 중건되었으며, 이후 1827년(순조 27)에 다시 중건된 기록이 있다. 새로운 보제루 중수를 위해 2010년 철거하였으며 철거되기 전의 건물은 1813년 또는 1827년에 중건한 것으로 추측되며 2014년 증축 완공되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건물로, 이익공식(二翼工式) 공포를 결구하여 팔작지붕을 올렸다.
- 범어사 보제루는 조선 후기 누각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누각 밑을 통과하여 범어사에 들어서는 구조로 되어 있다.
* 범어사 종루[ 梵魚寺鐘樓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종루.
개설
종루(鐘樓)는 원래 종을 걸어 두는 누각을 말하는데, 범어사 종루(梵魚寺鐘樓)에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운판(雲版), 목어(木魚) 등 불전 사물(佛殿四物)이 갖추어져 있다.
위치
범어사 종루는 부산광역시 금정구의 범어사 경내에 위치한다. 범어사의 입구에서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과 범어사 천왕문(梵魚寺天王門), 그리고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을 지나면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가 나오는데, 범어사 종루는 범어사 보제루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범어사 종루의 조성과 관련된 기록은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실린 1714년(숙종 40)의 「미륵 조상 중수기(彌勒彫像重修記)」에서 확인된다. ‘…명학 경진 건 종각(明學庚辰建鐘閣)…’을 통해 1700년(숙종 26)에 승려 명학이 종각을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건(建)’은 중건(重建)으로 추정된다. 이후 범어사 미륵전(梵魚寺彌勒殿)을 중건한 1889년(고종 26)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1904년(고종 41)에 발간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한국 건축 조사 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 수록된 1902년(고종 39)의 「범어사 평면도」를 살펴보면 당시 종루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으로 가는 계단 좌측 옆,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우측 앞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1915년의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와 『조선 고적 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1927년의 범어사 사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범어사지』에 수록된 1947년의 「범어사 안내도」에는 종루의 위치가 현재와 같이 표시되고 있다. 따라서 범어사 종루가 정확히 언제 옮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27년에서 1947년 사이에 이건(移建)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원래는 1층도 개방하였으나 기둥 사이를 벽으로 막아서 기념품 판매점으로 이용하였으며, 최근에는 범어사의 원형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다시 기념품 판매점을 철거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였다.
형태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부정형 덤벙 초석 위에 기둥을 세웠으며, 2층에 누마루를 깔고 그 위에 다시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주심포 형식으로 창방에는 보아지 형상의 창방 뺄목을 두었다. 보뺄목은 용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며, 살미 끝에는 연꽃을 초각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공포의 형식이 전체적으로 범어사 미륵전과 흡사하여 범어사 미륵전을 중건한 시기와 같은 시기에 중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현재 범어사 종루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범어사이다. 범어사에는 범어사 종루 외에 최근 범어사 승가대학(僧伽大學) 맞은편에 세운 또 하나의 종루가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종루의 창건 당시의 모습은 비록 알 수 없지만 기록을 토대로 중건 시기를 알 수 있다. 다만 건축 양식으로 볼 때 현재의 건물은 1700년의 중건 시기에 만들어졌다기보다는, 1889년에 중건된 범어사 미륵전의 공포 양식과 유사하여 19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범어사 종루는 19세기 당시 건축 양식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종루 [梵魚寺鐘樓]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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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범어사 동종 (釜山 梵魚寺 銅鍾)은 부산광역시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구리 종이다.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127센티미터, 종구(鐘口) 지름 92.5센티미터이다. 종신에 만든 시기, 무게, 주로 만든 사람, 시주자 등의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범어사 동종은 1728년에 김성원(金成元)과 김선봉(金善奉)이 만들었다.
개요[편집]
범어사 종루에 매달려 있는 이 동종은 높이 127.0cm, 종구(鐘口) 지름 92.5cm인 규모가 제법 큰 범종이다. 천판(天板) 정상부에 쌍룡의 용뉴(龍鈕)가 조형되어 있고, 동체 윤곽선이 아래로 가면서 서서히 배가 부른 원만한 곡선미를 보여 주고 있다. 종신(鐘身)에는 유곽(乳廓), 보살상, 전패(殿牌)가 양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 동종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종신에는 주성한 시기, 무게, 주종자, 산중질(山中秩), 시주자, 연화질(緣化秩) 등의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산화로 인해 표면이 푸른색을 띠고 있는 것 외에는 파손된 부분이 없이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1728년에 제작된 범어사 동종은 우리나라 18세기 범종 주성에 활발한 활동을 펼친 전라도 출신 김성원(金成元)과 김선봉(金善奉)이 주성한 것이다. 현존하는 18세기 범종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에 속하는 작품이며, 조선후기 범종의 대표작 으로 언급되기도 하는 문화재로서 조선후기 동종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범어사 삼층석탑[ 釜山 梵魚寺 三層石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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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탑. 높이 4m. 보물 제250호. 2층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전형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하 기단의 면석에 탱주 대신 안상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유형 유적
시대 고대/남북국/통일신라
성격 석탑
건립시기·연도 830년 경
소재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 (청룡동), 범어사
소유자 범어사
관리자 범어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250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범어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내용
보물 제250호. 높이 4m. 2층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삼층석탑으로서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상하기단의 면석(面石)에 탱주(撑柱 : 받침기둥) 대신 안상(眼象)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층기단 면석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 사이에 3구씩의 안상을 새기고 두툼한 갑석(甲石)의 윗면에는 2단의 굄을 각출(刻出)하였다. 비교적 큰 상층기단의 면석은 4매의 판석(板石)을 세우고 갑석은 2매 판석으로 구성하였으나 면석에는 가는 우주 사이에 꽉 들어차게끔 큼직한 안상을 새겼다.
갑석 밑에는 부연(副椽)을, 윗면에는 1단의 굄을 조각하여 탑신(塔身)을 받고 있는데, 탑신부는 각 층마다 옥신(屋身)과 옥개(屋蓋)를 별석(別石)으로 제작하였으며 옥신에는 우주를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얇은 편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밑에는 4단의 옥개받침이 표현되었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위에 보주를 얹었으나 보주는 후대에 보충한 것이고 노반은 거꾸로 놓였다. 이 탑은 근년에 보수하면서 기단 밑에 또 하나의 석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탑신을 세웠기 때문에 탑신에 비하여 높은 느낌을 준다. 조성연대는 범어사의 창건시기인 830년(흥덕왕 5)경으로 추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부산 범어사 삼층석탑 [釜山 梵魚寺 三層石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석등
[ 梵魚寺石燈 ]
• 요약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는 신라시대 석등.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제16호
지정일 1972년 06월 26일
소재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 지도
시대 신라
종류/분류 석등
크기 높이 2.62m
1972년에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때의 승려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250)을 건립한 지 3년 뒤인 678년(문무왕18)에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범어사 삼층석탑과 같이 9세기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의 높이는 2.62m로 원래 용화전(龍華殿) 앞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있던 종루를 옮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석등의 형태는 하대석(下臺石) 위에 간주(竿柱)를 세우고 그 위에 상대석(上臺石)을 놓아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덮었다. 하대석,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 등은 8각형으로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이고 기본적인 양식이다. 지대석은 없고 하대석의 윗면은 연화대(蓮花臺)로서 복엽(複葉) 여덟 잎이 엎드린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고 맨 윗부분에는 원형받침을 새겨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상대석의 아랫면도 복엽 여덟 잎이 위로 향해 피어 있으며, 윗면에는 8각으로 된 한 단의 화사석 받침이 있다.
화사석에는 4면에 서로 마주보며 직사각형의 화창(火窓)을 내었으며, 창구의 가장자리에는 음각된 액 안에 화창을 달았던 10개의 작은 구멍이 있다. 옥개석은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은 약간의 반전이 있으며 낙수면에는 합각이 뚜렷하다. 옥개석의 맨 위에는 사각형의 노반(露盤)을 얹었으며 그 위에 연봉형으로 보주(寶珠)를 만들었다. 후세에 보완하였기 때문에 간주석이 빈약하고 상대석이 두터워져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석등은 금당이나 탑과 함께 절의 중심부에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석등 [梵魚寺石燈] (두산백과)
* 범어사 당간지주 [ 梵魚寺幢竿支柱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문화재 지정 일시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당간지주.
개설
사찰 또는 폐사지(廢寺址)에는 두 개의 길쭉한 돌기둥[석주(石柱)]이 있다. 당(幢)을 게양하기 위한 장대[당간(幢竿)]를 세워 고정시키는 시설물로 당간지주(幢竿支柱)라 한다. 당(幢)은 보통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깃발[기치(旗幟)] 중 하나로 통일 신라 시대부터 성행하였다. 당의 표면에는 불교와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당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의식이 있을 때 당간의 정상에 걸었는데, 당 혹은 당간, 당간지주는 사찰의 표식물(標識物)로서 외적 상징성을 띤다. 더불어 내적으로는 실질적 기능 외에 각 사찰들의 위상과 종파적 성격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당간지주를 건립하였다.현재 갑사 철당간, 용두사지 철당간, 나주 동문 밖 석당간 등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지만, 당간 없이 당간 지주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간과 당간지주는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다지 성행하지 않아 우리나라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다. 따라서 당간과 당간 지주는 한국 불교의 특수성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범어사 당간지주는 현재 범어사에 남아 있는 범어사 삼층석탑이나 범어사 석등보다는 늦은 시기인 통일 신라 시대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건립 경위
『범어사 창건 사적(梵魚寺創建事蹟)』과 「범어사 사적비명(梵魚寺事蹟碑銘)」에 33단의 철당간(鐵幢竿)이 범어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33단을 조성한 이유는 불교의 이상 세계인 33천을 표현한 것이라 적고 있어 당간의 상징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범어사 당간지주가 철당간을 지탱하던 당간지주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가능성은 매우 높다.
위치
범어사 당간지주는 범어사 조계문[일주문]에 도착하기 전 진입로 길가에 위치하며, 이는 조성 당시의 위치로 추정된다.
형태
일반적으로 당간지주의 형식은 크게 당간지주를 받치는 기단부와 두 개의 당간지주 그리고 당간을 꽂는 간대부로 구성되는데, 범어사 당간지주는 기단부과 간대부가 모두 없으며 양쪽 기둥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단부와 간대부가 결실(缺失)되었을 수도 있지만, 기단부의 경우 조성할 때 만들지 않고 기둥의 하단부를 깊게 묻어 세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범돌로 만든 두 개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4.5m이다. 당간지주의 단면은 직사각형으로 모두 가로 50㎝, 세로 87㎝이며, 두 기둥 간의 간격은 79㎝이다. 지주는 상단부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기둥머리[주두(柱頭)]의 모양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어 둥글게 처리하였다. 기둥머리 중앙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竿溝)를 두었으며 그 외 간공(竿孔)은 없다.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돌을 거칠게 다듬었고 문양은 새기지 않았다.
현황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당간지주 [梵魚寺幢竿支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비로전
시도유형문화재 제155호(2015.07.15.)범어사 비로전(梵魚寺毘盧殿)에는 본존불로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봉안되어 있다. 『화엄경(華嚴經)』의 교주(敎主)인 비로자나불을 단독으로 봉안한 불전을 ‘화엄전(華嚴殿)’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범어사의 경우와 같이 ‘비로전’이라고 한다.
범어사 비로전은 조선 후기에 건립되었다.
범어사 창건 사적(梵魚寺創建事績)』에 의하면 범어사 미륵전 서쪽에 3칸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서 황폐화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해민(海敏)이 중창하였고, 1721년(경종 1)에 진열(進悅)·관성(寬性)·청우(淸愚) 등이 다시 중수하였다. 불전의 건축 양식이 조선 후기 이후의 것이므로 이후에도 몇 차례 고쳐진 것으로 추측된다. 최근에 기단을 수리하였고, 범어사 미륵전과의 사이에는 쌍여닫이문을 달아 뒤쪽의 범어사 금어선원(梵魚寺金魚禪院)으로 통하게 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이익공(二翼工)[기둥 위에 덧붙이는 쇠 받침이 둘로 된 익공]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축조되었다.
범어사 비로전 내부에는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된 범어사 비로전 목조 비로자나 삼존불 좌상(梵魚寺毘盧殿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이 봉안되어 있다.
범어사 비로전은 화엄종(華嚴宗)의 본존(本尊)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불전으로서, 조선 후기 목조 양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부산 지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임이 입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梵魚寺毘盧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비로전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 [ 梵魚寺 毘盧殿 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 ]
부산유형문화재 제71호(2006년 11월 25일 )
본존불은 높이 약 125㎝, 좌·우협시불은 높이 약 100㎝이다.
불상은 사각형 수미단 위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본존불은 등을 곧추세우고 얼굴을 다소 앞으로 숙여 아래를 굽어보고 있으며 수인(水印)은 지권인(智拳印)이다. 좌·우협시불은 본존불보다 작은 편이고 전체적인 조각양식은 본존불과 비슷하다. 범어사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의 《중수도금기(重修塗金記)》가 전하는데, 이를 통해 1638년 해민(海敏) 스님이 비로전을 중창할 때 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722년 진열(進悅), 청우(淸雨), 청휘(淸徽), 관성(貫性), 옥홀 등이 중수·도금 작업에 참여하였음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梵魚寺 毘盧殿 木造毘盧遮那三尊佛坐像] (두산백과)
* 범어사 미륵전 [ 梵魚寺彌勒殿 ]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56호(2015년 7월 15일)
미륵전(彌勒殿)은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한다.
미륵불이나 미륵보살을 모신 불전인데, 다음 세상에 구세주로 강림하는 미륵불을 모실 때는 용화전이라 하고, 도솔천에 있는 미륵존을 모실 때는 미륵전이라고 부르는데, 대개 미륵전이라고 한다.
- 위치 ;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를 지나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이 올려다 보이는데, 범어사 미륵전(梵魚寺彌勒殿)은 대웅전 아래 중정의 북측에 범어사 비로전(梵魚寺毘盧殿)과 함께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 변천 ; 범어사 미륵전은 범어사 창건 당시 2층 규모의 주불전(主佛殿)으로 건립되었고, 835년(신라 흥덕왕 10)에 중창되었으며,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었으나, 1612년(광해군 4)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현재의 자리에 중창하였다. 이후 1638년(인조 16)에 승려 인흡이 중건과 함께 미륵불상을 미륵전에 봉안하였고, 1887년(고종 24)에는 용화전으로 중수하였다. 2014년 전면 해체, 수리하였다.
- 형태 ; 범어사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 너비는 8.86m, 측면은 4.92m이다. 공포는 일출목의 이익공식 구조로 짜여 있으며, 민흘림 원형 기둥에 굴도리로 되어 있다.
- 현황 ; 범어사 미륵전은 2014년 미륵전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건립 연대와 1887년(고종 24)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음이 확인되었으며, 2015년 7월 15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었다. 범어사 미륵전에는범어사 미륵전 목조 여래 좌상(梵魚寺彌勒殿木造如來坐像)[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2호]이 봉안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 범어사 미륵전은 풍부한 조영(造營) 기록을 갖추고 있어서 건립 연대와 중창 시기 등을 확실하게 알수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부산 지역의 시대적, 건축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사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梵魚寺彌勒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미륵전 목조여래좌상 [ 梵魚寺 彌勒殿 木造如來坐像 ]
부산유형문화재 제72호(2006년 11월 25일)
미륵전 안 불단 뒤쪽의 3단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대좌의 하대석은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초기 사이에 제작된 석조대좌로 추정된다. 불상의 높이는 약 169㎝이다. 머리를 앞으로 숙인 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으며 목이 짧아 몸을 약간 움츠린 것처럼 보인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한 사각형이며 표정은 차분해 보인다. 배는 불룩하게 드러나 있고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고 있다. 두 손은 아미타구품인을 하고 있으며 따로 만들어 붙였다. 불상 앞쪽은 두껍게 도금되어 있다. 범어사현판기문(梵魚寺懸板記文) 중에는 1714년 문인 봉상(門人 鳳祥) 스님이 기록한 미륵조상중수기(彌勒雕像重修記)가 있다. 이를 통해 임진왜란 이전 또는 1602년이나 1638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1714년을 넘지 않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梵魚寺 彌勒殿 木造如來坐像] (두산백과)
* 범어사 금어선원 [ 梵魚寺金魚禪院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근대/개항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범어사(梵魚寺)의 개항기 수행 선원.
개설
선원이란 선(禪)을 교육하고 실수(實修)하는 불교의 전문 교육 기관이다. 우리나라의 선원은 통일 신라 말에 선종(禪宗)이 전래된 이후 설치되어, 승려 양성의 중요한 수행 기관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치
범어사 금어선원(梵魚寺金魚禪院)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에 있는 범어사 경내의 오른쪽, 범어사 비로전(梵魚寺毘盧殿)과 범어사 미륵전(梵魚寺彌勒殿) 뒤편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범어사 금어선원은 1899년(고종 36) 금강선사(金剛禪社)와 안양선사(安養禪社)가 처음 문을 연 이래, 1910년(순조 4) 범어사 내원선원 청규에 의해 금어선원(金魚禪院)으로 개설되었다. 1920년에 동산(東山)을 조실로 모셨으며, 1960년에는 범어사 금어선원의 상량식이 있었다.
형태
선원 큰방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수용 인원은 25명 정도이다.
현황
현재 범어사 금어선원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범어사이다. 건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었는데, 특히 1930년에는 성철(性澈)이 하안거를 하기도 하였고, 1950년대에는 많은 납자들이 몰려들어 동래구청에서 따로 식량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80년 이후로는 사방으로 담을 쳐 외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수행에 정진하였다. 2011년도 동안거에는 선덕 일원(一源), 유나 인각(仁覺)을 비롯하여 25명의 납자가 큰방에서 정진하였다. 현재도 1910년에 정해진 규범을 바탕으로 하여 많은 납자들이 정진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금어선원은 성월, 경허(鏡虛), 동산, 성철 등을 배출한 한국 불교계의 중심 수행지이다. 한말~일제 강점기에도 용맹 정진하며, 동시에 많은 납자들을 가감 없이 수용하여 부처의 자비와 진리를 찾으려는 자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범어사 금어선원의 이러한 풍토는 성월, 경허 등의 민족주의적 성격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금어선원 [梵魚寺金魚禪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강원 [ 梵魚寺講院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근대/개항기
근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의 범어사에 설치되었던 승려 교육 기관.
변천
개항기에 일본 불교가 본격적으로 침투하자 사찰별로 전통 불교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범어사는 경허 대사(鏡虛大師)를 초청하여 각 암자에 선원(禪院)을 두고 선풍을 진작하였고, 1900년에 승려 혼해(混海)를 강백(講伯)으로 하여 청풍당, 금당, 범어사 청련암, 범어사 대성암(梵魚寺大聖庵) 등 4곳에 범어사 강원(梵魚寺講院)을 개설하였다. 1906년 6월 20일에 기존 강원 중 금당[金魚庵]에서 근대 교육 기관인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설립하여 개교하였다. 1916년까지는 보통학교 과정의 명정학교와 강원을 병행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다 범어사 강원은 1916년 3월 15일에 체계적인 교육을 위하여 범어사 지방학림으로 변모하였다. 이로써 기존 강원 교육의 사집과(四集科) 과정은 명정학교에서, 사교과(四敎科) 과정은 범어사 지방학림에서 담당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범어사 강원의 학제는 사미과(沙彌科),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大敎科)의 4단계 코스로 되어 있었다. 이를 오늘의 학제에 비교하면 사미과는 초등학교, 사집과는 중학교, 사교과는 고등학교, 대교과는 대학 과정에 해당된다. 수업 연한은 총 10년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특수한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11년도 할 수 있었다. 이밖에 오늘날의 대학원에 해당하는 수의과(隨意科)는 대교과를 졸업한 뒤 진학할 수 있으며 전공과목을 4개년 이상 이수토록 하였다. 이렇듯 수의과까지 포함하면 승가 교육제의 총 수업 연한은 14~15년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 따라 수업 연한이 단축될 수도 있고, 각 사찰에 따라 다소의 차가 있었다.
현황
전문 승가 교육 기관인 범어사 강원은 범어사 경내에서 분리 개원하여 지금은 범어사 승가대학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96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300여 명의 승려들을 배출하였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일본 불교의 침투에 대항한 우리나라 불교계의 적극적인 대응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강원 [梵魚寺講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관음전[ 梵魚寺觀音殿 ]
관음전(觀音殿)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하는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의 서원이 철저하게 중생의 안락과 이익에 있고,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神力)으로 중생을 돕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사찰에 많이 세워져 있다.
위치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범어사 경내에 위치한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을 중심으로 반대쪽의 범어사 지장전(梵魚寺地藏殿)과 함께 협시하는 식으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범어사 관음전의 초창 연대는 확인된 바 없으며, 부산 범어사 대웅전과 함께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창하였다. 1721년(경종 1) 승려 홍보가 다시 중건하였고, 그 후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부산 범어사 대웅전 남쪽 사리탑 자리에 있던 것을 1938년 7층 석가세존 사리탑을 세우면서 범어사 금어선원(梵魚寺金魚禪院) 자리로 옮겨 지었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축조되었으며, 기둥 위에만 포작(包作)한 주심포식 목구조로 결구되어 있다. 포작은 일출목을 짧게 내어서 행공첨차를 걸고 그 위에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쳤다. 덤벙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보머리를 받치는 익공(翼工)을 창방과 교차시켜서 주두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 초각한 익공과 봉두(鳳頭)를 초각한 보뺄목을 받게 하였다. 양쪽 귓기둥을 제외한 중간의 세 기둥은 용두(龍頭)를 초각하여 익공을 받게 하였다.
현황
현재 범어사 관음전에는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범어사 관음전 백의관음보살도(梵魚寺觀音殿白衣觀音菩薩圖)」가 있으며,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된 범어사 관음전 목조 관음보살 좌상(梵魚寺觀音殿木造觀音菩薩坐像)이 본존으로 봉안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관음전은 조선 후기의 주심포 건축 양식과 결구 수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관음전 [梵魚寺觀音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지장전 [ 梵魚寺地藏殿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법당.
개설
지장전(地藏殿)은 명부전(冥府殿) 혹은 시왕전(十王殿),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하는데, 당호에서 알 수 있듯이 저승 세계를 상징하는 법당이다. 주존(主尊)은 지옥 중생을 모두 구제한 다음 부처가 될 것을 서원한 지장보살(地藏菩薩)로, 대원 본존(大願本尊)이라고도 한다. 또한 석가모니(釋迦牟尼) 입멸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 전 시대에 중생 제도를 석가모니로부터 부촉 받은 보살이기도 하다.
위치
범어사 지장전(梵魚寺地藏殿)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범어사 경내에서 상단 구역에 위치한다.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의 좌측에 자리한 건물이 범어사 지장전이다.
변천
범어사 지장전에 대한 창건과 중수 기록은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상세히 적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범어사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고 1603년(선조 36) 관선사의 원력으로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 승려 묘전이 1613년(광해군 5) 가을 3칸의 해회당을 먼저 만들고, 이어 1614년(광해군 6) 7월 법당[여기서는 지장전을 칭함]을 최공을 시켜 완성하였다. 그리고 1658년(효종 9) 9월 법당이 훼손되어 남쪽 끝으로 이건하였는데, 편액에 ‘지장전’이라 하였고 구 재료로 중수하였다. 1694년(숙종 20) 명흡을 중심으로 인연이 닿는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중수하였는데, 명부전으로 편액을 고쳤으며 1891년(고종 28) 다시 중건되었다…….[……萬曆二十年壬辰倭亂之時逢枚兵大千間寶刹一時灰盡十載無家惟成空林觀禪師發大願力壬寅年初……妙全法師乃爲化癸丑秋先成海會堂三間仍爲山役至萬曆四十二年甲寅七月日畢成法堂造成都監召募將師崔公與諸哨官同心執事順治十五年戊戌九月日法堂毁乃移建南邊題額地藏殿此乃舊材移爲重修至康熙三十三年甲戌三月日寺僧明洽大師出白銀十六兩而仍勸租奇大師爲化師募緣檀越與寺主自修大師都監僧將法坦及諸大衆同爲重修改額冥府殿云歲在光緖十七年辛卯正月日法宇……]”1891년의 중건 기록은 「동래 범어사 중수 명부전 상량문(東萊梵魚寺重修冥府殿上樑文)」에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범어사 지정전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1904년(고종 41) 발간된 『한국 건축 조사 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 실린 1902년 범어사의 평면도가 현재 가장 이른 사례로, 부산 범어사 대웅전을 바라본 방향에서 왼쪽에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창고 그리고 중향실 옆에 위치한다. 지금의 서지전(西持殿)에 해당하며, 명부전의 방위는 북향을 하고 있다. 1658년 명부전을 남쪽 끝으로 이건하고 편액을 ‘지장전’으로 바꾸었다는 점으로 보아 초창 당시의 자리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1891년 이후의 기록은 현재 알려진 바 없으나 1988년 화재로 소실될 때 당시 봉안되어 있던 조선 후기 목조 시왕상이 모두 불에 탔으며, 이때까지 명부전으로 이어지던 것이 1990년 새롭게 조성되면서 다시 지장전으로 바뀌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정면이 측면보다 다소 긴 장방형의 모습이다. 다포 형식으로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風板)이라는 가리개를 덧대었다.
현황
현재 범어사 지장전 앞에 큰 평상을 만들어 놓아 예불의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지장전은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창건과 중수 기록을 알 수 있으며, 명칭도 지장전과 명부전 등으로 여러 번 교체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지금의 범어사 지장전은 1990년에 새롭게 지은 건축물이기 때문에 조선 시대 초창과 중수 시의 건물 양식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 고적 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범어사 명부전의 사진을 통해 1920년대 범어사 명부전과 건축 형식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지장전 [梵魚寺地藏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명부전(釜山 梵魚寺 冥府殿)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에 있던 건축물이다. 1986년 5월 29일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1988년 11월 1일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 범어사 일로향각 [ 梵魚寺一爐香閣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일로향각.
위치
범어사 일로향각(梵魚寺一爐香閣)은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이 있는 상단의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우측에 위치한다.
변천
범어사 일로향각은 원래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자리에 있던 범어사 금어선원(梵魚寺金魚禪院)에 딸린 염화실(拈花室)[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머무는 방]이었다. 현존 건물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창건 이후 중건과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축조되었으며, 공포는 짜지 않고 창방 뺄목을 초각 없이 내밀어 주두를 얹었다. 장혀와 창방 사이에는 소로(小櫨)를 4구씩 얹었다.
현황
현재 범어사 일로향각은 노전승(爐殿僧)[법당에서 아침저녁으로 향불 피우는 일을 맡아보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당우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일로향각을 통하여 조선 후기 목조 양식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일로향각 [梵魚寺一爐香閣]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심검당 [ 梵魚寺尋劍堂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위치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은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를 지나서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으로 오르는 계단 앞마당의 왼쪽에 위치한다.
변천
범어사 심검당은 1613년(광해군 5)에 부산 범어사 대웅전 등을 중건할 때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중건과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낮은 석축 기단에 방형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서 일출목의 주심포를 결구하였다.
현황
현재 범어사 심검당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범어사이다. ‘심검’이란 당호에서 보듯 수도를 위한 승려들의 선방이었는데, 사찰의 규모가 커지면서 선방의 기능을 범어사 금어선원(梵魚寺金魚禪院)으로 옮기고 지금은 강학을 위한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심검당은 조선 말기적 목조 양식의 특성을 갖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심검당 [梵魚寺尋劍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함홍당 [ 梵魚寺含弘堂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개설
범어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원안심료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함홍당은 범어사 경내에서 하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의 사천왕문과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 사이 우측의 건물들 중 중앙의 큰 건물이다.
변천
범어사 함홍당은 1613년 묘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915년의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함홍당이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1891년(고종 28) 범어사 함홍당이 명부전 중수를 위해 시주를 한 기록이 있다[含弘堂 文 二十四兩 米二十斗]. 현재의 범어사 함홍당 건물은 1925년 승려 성월(惺月)이 중수한 것이다.
형태
정면 10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1925년 승려 성월이 중수한 이후 교무소(敎務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사찰의 종무소(宗務所)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함홍당은 범어사의 7대방 중 하나로 조성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1925년 이후부터는 건물의 활용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함홍당 [梵魚寺含弘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해행당 [ 梵魚寺解行堂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위치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은 범어사 경내의 하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의 사천왕문과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 사이 우측의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 옆으로 배치된 큰 건물들 중 중앙의 큰 건물이다.
변천
범어사 해행당은 1613년(광해군 5)에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915년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범어사 해행당이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과 마찬가지로 범어사 해행당 역시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1891년(고종 28) 명부전 중수를 위해 시주한 기록이 있다[解行堂 文 一千兩 米三百斗].
형태
정면 10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현황
범어사 해행당은 현재 속가 대중(俗家大衆)을 위한 교육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해행당은 당호에서 유추되듯이 원래 선방(禪房)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의 기능을 현재 그대로 계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대에 맞게 변화,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해행당 [梵魚寺解行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원응방 [ 梵魚寺圓鷹房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강당.
개설
범어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원안심료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원응방은 범어사 경내의 중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 좌측에 승가 대학이 있는데, 이곳이 범어사 원응방이다.
변천
범어사 원응방은 1613년 묘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915년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범어사 원응방이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어사 안심료(梵魚寺安心寮)와 마찬가지로 범어사 원응방 역시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1891년(고종 28) 명부전 중수를 위해 시주한 기록이 있다[圓應房 米三十斗]. 현재의 범어사 원응방 건물은 1925년 승려 성월(惺月)이 중건한 것이다.
형태
정면 10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만으로는 범어사에서 큰 건물 중 하나이다.
현황
현재 범어사 원응방은 승가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원응방은 일찍이 강당(講堂)과 강원(講院)으로 활용되던 공간으로, 초대 강주가 승려 혼해(混海) 찬원(讚元)이었고 이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등 당대 유명한 대강백들이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쓴 곳이다. 현재는 승가 대학으로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원응방 [梵魚寺圓鷹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안심료 [ 梵魚寺安心寮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개설
범어사(梵魚寺)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안심료(梵魚寺安心寮)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안심료는 범어사 경내의 중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의 좌측에 범어사 승가 대학이 있으며, 승가 대학 좌측에 배치되어 있다.
변천
범어사 안심료는 1613년에 묘전 화상이 범어사 건물들을 중건할 당시 중단 구역에 선방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후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범어사 안심료의 현재 위치가 창건 당시의 자리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1915년의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범어사 안심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간혹 ‘안심료’의 당호(堂號)가 기재되는 예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의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1891년(고종 28)에 명부전을 중수할 당시 안심료가 시주질 명당에서 확인된다[安心寮 文一百五十兩 米一百斗]. 또한 부산광역시의 금정중학교 법당 내에 안치된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52호인 석조 여래 좌상(石造如來坐像)의 바닥 면에는 1892년(고종 29) 9월에 불상을 조성하여 범어사 안심료에 봉안하였다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1909년(순종 3) 1월에는 승려 성월이 범어사 안심료에 선원(禪院)을 창설하였다.
형태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 양식이다.
현황
범어사 안심료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범어사이다. 현재 승려들의 강학 공부와 수행 정진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안심료는 범어사의 7대방 중 하나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선찰 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선원과 선회(禪會)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강학과 수행하는 승려들의 공간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안심료 [梵魚寺安心寮]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관음전 백의관음보살도 [ 梵魚寺 觀音殿 白衣觀音菩薩圖 ]
• 요약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백의관음보살도.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제53호
지정일
2003년 09월 16일
시대
조선
종류/분류
불교회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관음전에 있는 조선시대의 백의관음보살도이다. 관음전의 관음불상 뒤에 있다. 자애로움을 나타내는 관음보살도로서 자연을 배경으로 암좌에 앉아 인간 세상의 온갖 번뇌의 소리를 들어주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와 세로가 2m 이상이다. 사각형 그림 안에 큰 원이 있고 그 원 안에 관음상을 두었다. 관음상은 정면을 바라본 채 해수면 위에 나온 암좌에 유희좌(遊戱坐)로 있으며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걸치고 있다. 관음상이 입은 백의는 보관에서 시작해 양 어깨를 감싸고 발아래까지 흘러내리고, 영락(瓔珞) 장식과 붉은색 영락 띠가 보인다. 관음상이 앉아 있는 암좌는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암좌 위에는 금색 정병이 놓여 있고, 그 뒤쪽에는 세 개의 발이 있는 푸른색 향로와 청조(靑鳥) 한 마리가 날고 있다. 배경으로는 대나무와 구름무늬가 있다. 관음상의 왼쪽 발 근처에는 관음을 숭배하면서 합장하는 선재동자가 있고 그 반대쪽에는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관음을 향하는 인물상이 2명 있다. 화면 아랫부분에 있는 화기(畵記)를 통해 제작시기가 1882년(고종 19)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불화양식을 연구하는 데 이용된다.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관음전 백의관음보살도 [梵魚寺 觀音殿 白衣觀音菩薩圖] (두산백과)
* 범어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梵魚寺 觀音殿 木造觀音菩薩坐像 ]
• 요약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
지정종목
시도유형문화재
지정번호
부산유형문화재 제70호
지정일
2006년 11월 25일
시대
조선
종류/분류
불상
크기
높이 약 102.8㎝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 관음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이다. 불상의 높이는 약 102.8㎝이다. 불상은 팔각대좌 위의 연화좌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연화좌대의 오른쪽에서 뻗어 나온 연꽃 위에는 정병이 있고, 관음상의 왼쪽 앞에는 선재동자가 무릎을 꿇고 합장하면서 보살상을 숭배하고 있다. 허리를 곧추세운 채 어깨를 앞으로 다소 숙이고 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천의 자락은 S자형을 이룬다. 팔각대좌 위 연화대좌 윗면에는 묵서(墨書)가 있는데 이를 통해 제작시기가 1722년이고 진열(進悅), 청우(淸雨), 청휘(淸徽), 관성(貫性), 옥홀(玉)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9년에 개금(改金)하였다. 조선 후기 불상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 이용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관음전 목조관음보살좌상 [梵魚寺 觀音殿 木造觀音菩薩坐像] (두산백과)
* 범어사 안심료 [ 梵魚寺安心寮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개설
범어사(梵魚寺)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안심료(梵魚寺安心寮)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안심료는 범어사 경내의 중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의 좌측에 범어사 승가 대학이 있으며, 승가 대학 좌측에 배치되어 있다.
변천
범어사 안심료는 1613년에 묘전 화상이 범어사 건물들을 중건할 당시 중단 구역에 선방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후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범어사 안심료의 현재 위치가 창건 당시의 자리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1915년의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범어사 안심료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간혹 ‘안심료’의 당호(堂號)가 기재되는 예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의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1891년(고종 28)에 명부전을 중수할 당시 안심료가 시주질 명당에서 확인된다[安心寮 文一百五十兩 米一百斗]. 또한 부산광역시의 금정중학교 법당 내에 안치된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52호인 석조 여래 좌상(石造如來坐像)의 바닥 면에는 1892년(고종 29) 9월에 불상을 조성하여 범어사 안심료에 봉안하였다고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1909년(순종 3) 1월에는 승려 성월이 범어사 안심료에 선원(禪院)을 창설하였다.
형태
정면 7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 양식이다.
현황
범어사 안심료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범어사이다. 현재 승려들의 강학 공부와 수행 정진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안심료는 범어사의 7대방 중 하나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선찰 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선원과 선회(禪會)가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현재에도 강학과 수행하는 승려들의 공간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안심료 [梵魚寺安心寮]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함홍당[ 梵魚寺含弘堂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선방.
개설
범어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원안심료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함홍당은 범어사 경내에서 하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의 사천왕문과 범어사 불이문(梵魚寺不二門) 사이 우측의 건물들 중 중앙의 큰 건물이다.
변천
범어사 함홍당은 1613년 묘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915년의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함홍당이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1891년(고종 28) 범어사 함홍당이 명부전 중수를 위해 시주를 한 기록이 있다[含弘堂 文 二十四兩 米二十斗]. 현재의 범어사 함홍당 건물은 1925년 승려 성월(惺月)이 중수한 것이다.
형태
정면 10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황
1925년 승려 성월이 중수한 이후 교무소(敎務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사찰의 종무소(宗務所)로 활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함홍당은 범어사의 7대방 중 하나로 조성되어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1925년 이후부터는 건물의 활용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함홍당 [梵魚寺含弘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06년 7월 3일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본 건물은 현재 범어사 대웅전 서쪽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부속 불전의 하나로, 적어도 1706년 이래로 존속했던 위치에서 변함없이 존속해 온 건물이다.
1902년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당시까지는 중앙의 천태문(天台門)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팔상전과 나한전이란 별개의 건물이 서 있다가, 1905년 11월~1906년 11월까지 약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따라서 서측의 팔상전 부분과 동측의 나한전 부분의 건축 형식은 변형되거나 고쳐지지 않고 1906년 중건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지며, 다만, 팔상전과 나한전의 노후화 된 부재의 교체와 내부 가구(架構)가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06년에 단장된 독성전(獨聖殿) 부분은 문틀을 하나의 통재를 사용해서 반원형으로 구부려 만든 독특한 모습이고, 창방 사이의 삼각형 벽체 부분에는 통판(通板)으로 넝쿨 형상을 초각하였으며, 창호도 팔상전과 나한전이 교살창인데 비해 독성전은 화문살로 아름답게 꾸미는 등 장식수법이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이처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은 1906년에 중건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간살, 가구(架構)와 평면, 입면 구성 등에서 1706년 이래의 건축 형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고, 특히 하나의 건물에 세 불전(佛殿)을 모신 점, 중아에 위치한 독성전 개구부(開口部)의 뛰어난 의장과 초각수법은 그 예가 극히 드문 만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건물로 평가된다.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梵魚寺 捌相·獨聖·羅漢殿)
범어사 나한전 불상[ 梵魚寺羅漢殿佛像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불상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의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불상 25구.
개설
범어사 나한전에는 석가여래 삼존상을 비롯해 젊은 아난(阿難), 늙은 가섭(迦葉), 십육 나한상, 범천(梵天)과 제석(帝釋)의 천부상, 판관과 사자가 1구씩 총 25구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상들은 얼굴, 신체 비례, 법의 등의 표현 기법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조각가가 동시에 조성한 불상이다.
형태
범어사 나한전의 가운데에는 석가여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본존인 석가모니(釋迦牟尼)를 중심으로 우측에 제화갈라보살, 좌측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있다. 양측의 보살상은 본존에 비해 크기가 작아 서로 격이 다름을 보여 준다.석가여래 상을 중심으로 특징을 보면, 건장한 상반신과 다리가 이루는 비례감이 좋은 편이며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이다. 석가모니의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손가락이 땅을 향한 촉지인이다. 좌협시는 본존상과 동일한 수인이며, 우협시는 손 위치가 반대이다.석가모니는 건장한 신체에 비해 머리가 작은 편이다. 육계와 머리는 불분명하며 그 경계에는 큼직한 반원형 중간 계주, 정상에는 정상 계주를 각각 두었다. 갸름한 얼굴형에 가는 긴 눈, 오뚝한 코와 큰 입술 등으로 표현했으며, 인상이 개성 있고 독특하다. 법의는 매우 두꺼우며, 대의를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쳐 입어 팔이 드러나는 변형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형식으로 입었다. 가슴 위로 올려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다섯 개의 연잎 모양으로 주름을 잡아 모양을 내었으며, 양다리 사이에는 두 개의 옷주름으로 나누어 펼쳐져 놓았다.양측 협시는 본존상과 신체 비례나 얼굴 등의 표현법이 대동소이하다. 보살상은 여래와 달리 머리에 삼산형의 원통형 보관을 썼다. 좌협시인 제화갈라보살은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입고 그 위 대의를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입었다. 우협시는 하반신에는 군의, 어깨에는 천의를 입어 서로 다른 존명의 보살상임을 표현하였다. 특히 천의를 숄과 같이 입어 양팔로 흘러내린 점이나 양 옆구리에 천의가 돌아 나오는 모습은 범어사 관음전 목조 관음보살 좌상(梵魚寺觀音殿木造觀音普薩坐像)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는 듯하다.삼존상의 양옆에는 10대 제자인 아난이 우측에, 가섭이 좌측에 합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일반적으로 아난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가섭은 자애로운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난의 얼굴은 눈이 사선으로 올라가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가섭은 둥글게 웃고 있는 인자한 인상이다. 그러나 모두 소매통이 넓은 장삼을 입고 있다.양측으로 각각 아홉 구씩 나누어 봉안된 나한상은 민머리의 스님 형태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다. 얼굴은 서로 비슷하며, 전체적 모습이 해학적이다. 법의는 장삼과 그 위에 가사를 돌려 입었으며, 몇몇 상은 상반신을 벗은 나형(裸形)이나 가슴이 드러나도록 장삼을 벌리고 있거나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편단우견으로 가사만을 입은 존상들도 있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조선 후기 나한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특징들이다. 자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좌·우측 세 번째 상은 각각 대칭이 되도록 한쪽 다리를 세운 윤왕좌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상 중에는 학, 호랑이 등의 상서로운 짐승을 다리 위에 앉혀 위세와 위력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나한상의 곁으로 제석과 범천이 각각 있다. 머리에는 2단의 삼산형(三山形) 원통 보관을 쓰고, 장삼을 입고 있다. 얼굴과 법의 특징은 다른 존상들과 동일하다.마지막으로 향좌측 제석의 곁에는 앞이 낮고 뒤가 높아 턱이 진 평정건(平頂巾)과 같은 관모를 쓰고 두 손을 모아 쥔 녹사(綠事) 한 구가 있고, 향우측 범천 곁에는 두건을 쓴 사자상(使者像) 한 구가 있다. 일반적으로 녹사와 사자는 양측에 각각 한 구씩 두는 데 두 구만이 남아 있으며, 인왕상도 보이지 않아 일부의 상이 도난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수염,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얼굴 표정은 나한상에 비해 경박한 이미지로 한 눈에 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징
범어사 나한전 불상은 조선 후기의 석재 불상의 주재료인 불석(佛石)으로 조성되었다. 범어사 나한전에 있는 석가여래 삼존상을 비롯한 25구의 상들은 조선 후기 석조 불상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석재의 덩어리감이 강한 기법적인 특징을 계승하고 있는 반면 두건을 쓴 머리, 갸름한 얼굴형, 새로운 착의법, 즉 상체를 완전히 드러낸다든지, 옷을 느슨하게 입은 모습들은 조선 후기의 단정한 나한상의 표현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이다. 다시 말해 범어사 나한전 불상은 새로운 요소들과 전통적 요소들은 서로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과도기 시점의 양식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나한전에서 보이는 새로운 요소의 등장은 조선 후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근대 불상의 시발점을 알려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범어사 나한전의 불상들은 이러한 특징들을 잘 반영하고 있어 근․현대 불교 조각을 연구하는데 자료적인 자치가 크다 하겠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나한전 불상 [梵魚寺羅漢殿佛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범어사 나한전 나한 탱화」[ 梵魚寺羅漢殿羅漢幀畵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나한전에 봉안된 개항기의 나한 탱화.
형태 및 구성
「범어사 나한전 나한 탱화(梵魚寺羅漢殿羅漢幀畵)」는 총 6폭으로 석가 후불도의 왼쪽에 제1폭을, 오른쪽에 제2폭을 배치하고, 좌측 벽에 제3·5폭을, 우측 벽에 제4·6폭을 배치하였다. 그림 6폭의 화면 크기는 평균 세로 160.0㎝, 가로 220.0㎝로 세로축에 비해 가로축이 넓은 편이다. 제1폭에 (1)빈도라바라타자 (3)가나가바리타 (5)나구라 존자, 제2폭에 (2)가나가바차 (4)소빈다 (6)바다라 존자, 제3폭에는 (7)가리가 (9)지바카 (11)라호라 존자, 제4폭에 (8)바자라푸타라 (10)반타카 (12)나가서나 존자, 제5폭에 (13)가타 (15)아지타 존자, 제6폭에 (14)대나파사 (16)주다반탁가 존자를 각각 배치하였다.
특징
「범어사 나한전 나한 탱화」는 1905년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梵魚寺羅漢殿釋迦牟尼後拂幀畵)」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십육 나한을 모두 6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6폭 모두 진채색으로 그려진 산수를 배경으로 2명 내지 3명의 나한이 동자들과 함께 산속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그렸다. 나한들은 경전을 읽거나 동물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등 자유스러운 모습인데, 배경이 되는 산수에는 십장생을 비롯하여 많은 동식물들이 화려하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마치 민화를 보는 듯하다.화면 하단에는 세 군데에 걸쳐 화기를 기술하고 있다. 6폭 모두 편수(片手)는 보응(普應) 문성(文性)이 맡았으나, 제작은 수화승(首畵僧) 금호(錦湖) 약효(若效)를 비롯하여 그의 문하 화승이 팀으로 나누어 담당하였다. 즉 제1·3·5폭은 금어 금호 약효와 몽화(夢華), 제2폭은 금어 초암(草庵) 세한(世閑)과 법연(法延), 제4폭은 금어 병혁(柄赫)과 도윤(度允), 제6폭은 금어경윤(敬崙)과 경학(敬學)이 그렸다. 범어사 청련암에서 그려 나한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나한전 나한 탱화」는 나한상의 배경이 되는 청록 산수와 같은 자연 경관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학과 거북, 사슴, 소나무 같은 십장생 내지는 길상 모티브를 부각시켜 전통 불화 외에 도교와 민화풍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서양 화법을 응용한 화풍이 돋보이며 나한상의 착의를 중심으로 한 음영 처리가 주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나한전 나한 탱화」 [梵魚寺羅漢殿羅漢幀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나한전 십육나한도(梵魚寺 羅漢殿 十六羅漢圖)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에 있는 불화이다. 2018년 7월 25일 문화재 지정 예고[1]를 거쳐, 2018년 10월 3일 부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05호로 지정되었다.[2]
지정 사유[편집]
범어사 나한도는 나한전의 내부 석가설법도의 양측면으로 나누어 십육나한도를 배치하고 있는데, 모두 여섯 폭이다. 석가설법도의 왼쪽부터 제1, 3, 5폭을, 오른쪽에는 제 2, 4, 6폭을 각각 배치하였다. 제1폭은 빈도라바라타자, 가나가바리타, 나구라존자를 묘사하였고, 제2폭은 가나가바차, 소빈다, 바다라존자, 제3폭에는 가리가, 지바카, 라호라존자를, 제4폭은 바자라푸타라, 반타카, 나가서나존자, 제5폭에는 가타, 아지타존자, 제6폭은 대나파사, 주다반탁가존자로 구성되어 있다. 배경으로는 청록산수와 같은 자연경관을 비중있게 다루었고, 학, 거북, 사슴, 소나무와 같은 십장생 내지는 길상 모티프를 반영하여 풍부한 화면을 만들었는데 도불습합의 민화풍 불화를 연상케 한다.[2]
범어사 나한전 십육나한도는 대한광무 9년인 1905년에 금호약효와 보응문성 등 19세기 후반 마곡사파의 화승 그룹이 참여하여 조성한 불화이다. 배경의 청록산수화풍의 자연경관 묘사와 십장생 등 민화의 모티프를 사용한 점, 나한들의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표정과 자세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금호약효와 보응문성은 마곡사파를 정립한 대표적인 화승이며, 작품의 인물 묘사나 채색기법에서도 마곡사화파의 양식적 특징과 기량이 가감없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범어사 나한전 십육나한도는 대한제국기 충청도 일대를 대표했던 화사집단인 마곡사화파의 화풍과 독창성이 반영된 작품으로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제작시기와 봉안처가 확실하여 학술적 가치가 있 다.[2]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 [ 梵魚寺羅漢殿釋迦牟尼後佛幀畵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나한전에 봉안된 개항기의 석가모니 후불탱화.
개설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梵魚寺羅漢殿釋迦牟尼後佛幀畵)」는 범어사 나한전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으로 1905년에 제작되었다. 제작에는 금호당(錦湖堂) 약효(若效)[1846~1928]의 주관 하에 보응당(普應堂) 문성(文性)이 출초(出草)를 맡고 혜암당(慧庵堂) 정상(正祥), 관허당(觀虛堂) 종인(宗仁), 축연(竺演) 등 총 16인의 화승이 참여하여 제작한 그림이다.
형태 및 구성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의 크기는 세로 206.4㎝, 가로 266.7㎝로 세로축에 비해 가로축이 넓은 편이다. 3폭의 면을 가로로 연결하여 화폭을 만든 뒤 안료를 풀었다. 화면에는 중앙의 본존인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보현보살을 포함한 네 보살, 아난(阿難)·가섭(迦葉)을 포함한 십대 제자와 사천왕을 그렸다.
특징
화면 향우측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수미산 중턱의 남쪽에 있는 ‘유리’라는 지방을 관장하는 천왕]은 양손을 마주잡고 석가모니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특이한 자세의 측면상으로 그렸다. 사천왕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이러한 도상은 중국 청대 소설 등 판화의 영향으로 보인다. 이 밖에 화면 상단 십대 제자들 중 가섭을 포함한 몇몇 제자들은 눈썹 위 이마 쪽 머리 부분이 넓고 둥글며, 턱은 좁고 코는 펑퍼짐하여 콧구멍이 보이는 등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문성 특유의 인물 표현인 듯하다. 또한 각 존상들의 발 아래에 그림자를 표현하여 명암을 시도하는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는 충청도 지역과 금강산, 그리고 경상남도 지역의 화승들이 모여 작업한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주관 화승인 약효의 작화 활동 중 주목되는 시기에 조성된 불화로, 음영법과 서양화법을 응용한 화풍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근대 불화의 중심지로 알려진 계룡산파[마곡사]를 대표하는 화승이자 근대 불화 양식을 수립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화맥이 단절된 상황에서 약효가 그린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는 현대 불화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 후불탱화」 [梵魚寺羅漢殿釋迦牟尼後佛幀畵]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불회도(梵魚寺 羅漢殿 釋迦牟尼佛會圖)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에 있는 불화이다. 2018년 7월 25일 문화재 지정 예고[1]를 거쳐, 2018년 10월 3일 부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04호로 지정되었다.[2]
지정 사유[편집]
나한전의 석가여래삼존불좌상 뒤쪽 벽면에 석가모니불회도가 봉안되어 있다. 화면 중앙에 항마인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연화가지를 든 문수보살, 오른쪽에 여의를 든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합장형 보살 2위,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십대제자상, 사천왕상이 외호하고 있다. 화면 하단의 묵서 화기에 따르면, 대한광무9년(1905)에 수화사 금호약효를 비롯하여 총 16인이 관여하였고, 출초는 보응문성이 담당하였다.[2]
화면에 채색은 전체적으로 진채로 색이 선명하며, 적색을 중심으로 청색, 백색, 녹색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였으며, 구름은 노란색, 석간주, 녹색 등을 엷게 칠하여 천공의 화사한 양청색과 함께 전체적인 색감이 밝다. 또한 불보살을 비롯해 각 존상의 의복은 옷깃을 제외하면 문양은 대부분 생략되었고, 보살의 보관과 지물, 사천왕의 갑옷 일부 등에 금칠을 하여 강조하였다.[2]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불회도는 제작시기를 기록한 화기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어 화기를 통해 정확한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작품을 제작한 출초화승 보응문성(普應文性, 1867~1954)과 수화승 금호약효(錦湖若效, 1846~1928)는 사제지간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 충청지역의 대표적 불화승이자 한국 근대 불화계를 대표하며 마곡사파 불화를 정립한 대표적 화승이다. 마곡사화파는 19세기 후반부터 마곡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20세기 초반까지 계룡산 일대 등 충청도, 경상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작화 활동을 남겼다.[2]
범어사 나한전 석가모니불회도는 마곡사화파의 화풍이 반영된 근대기 초의 석가후불도로 이후 경상도 불화 제작에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따라서 범어사나 한전 석가모니불회도는 조선 말기를 지나 대한제국기인 1905년 조성된 후불도로서 가치가 평가된다.[2]
* 범어사 원응방[ 梵魚寺圓鷹房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강당.
개설
범어사는 임진왜란 이후 1603년(선조 36) 관선사(觀先師)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1613년(광해군 5) 묘전 화상(妙全和尙)이 중심이 되어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 범어사 용화전(梵魚寺龍華殿), 범어사 관음전(梵魚寺觀音殿), 범어사 나한전(梵魚寺羅漢殿), 범어사 일주문(梵魚寺一柱門) 등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범어사 심검당(梵魚寺尋劍堂), 범어사 해행당(梵魚寺解行堂), 범어사 함홍당(梵魚寺含弘堂), 범어사 청풍당(梵魚寺靑風堂), 원안심료 등을 세웠는데 범어사 원응방(梵魚寺圓鷹房)도 이 중 하나이다.
위치
범어사 원응방은 범어사 경내의 중단 구역에 위치한다. 범어사 보제루(梵魚寺普濟樓) 좌측에 승가 대학이 있는데, 이곳이 범어사 원응방이다.
변천
범어사 원응방은 1613년 묘전 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중수 및 이건(移建)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원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1915년 「선찰 대본산 범어사 전경도(禪刹大本山梵魚寺全景圖)」에서 범어사 원응방이 확인되므로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는 위치의 이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범어사 안심료(梵魚寺安心寮)와 마찬가지로 범어사 원응방 역시 『범어사지(梵魚寺誌)』에 수록된 「명부전 중수 유공기(冥府殿重修有功記)」에 1891년(고종 28) 명부전 중수를 위해 시주한 기록이 있다[圓應房 米三十斗]. 현재의 범어사 원응방 건물은 1925년 승려 성월(惺月)이 중건한 것이다.
형태
정면 10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규모만으로는 범어사에서 큰 건물 중 하나이다.
현황
현재 범어사 원응방은 승가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원응방은 일찍이 강당(講堂)과 강원(講院)으로 활용되던 공간으로, 초대 강주가 승려 혼해(混海) 찬원(讚元)이었고 이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 등 당대 유명한 대강백들이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쓴 곳이다. 현재는 승가 대학으로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원응방 [梵魚寺圓鷹房]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산령각[ 梵魚寺山靈閣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산령각.
위치
범어사 산령각(梵魚寺山靈閣)은 부산 범어사 대웅전(釜山梵魚寺大雄殿)[보물 제434호]과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梵魚寺八相·獨聖·羅漢殿)[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3호] 사이의 범어사 지장전(梵魚寺地藏殿) 뒤편에 위치한다.
변천
범어사 산령각이 처음 건립된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05년(고종 42)에 개축되었다.
형태
건물 양식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소규모 건물에 맞게 간략한 주심포식 가구에 일출목(一出目)을 내고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다. 어간(御間)에는 삼분합, 좌우 협간에는 이분합의 빗살문을 달았다. 대체로 가구 수법이 범어사 팔상·독성·나한전과 흡사한 건축물이다.
현황
범어사 산령각은 소규모 건물로서, 현재 내부에는 가람 터와 산악을 수호하는 산신상(山神像)과 호상(虎像)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은 말 그대로 산의 주인으로서 불교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한국 불교가 재래의 토속 신앙을 수용하면서 불교화한 독특한 존재이다. 위치도 가람의 가장 뒤쪽에 자리하여 불제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산령각 [梵魚寺山靈閣]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기·범어사창건사적·범어사고적판 [ 梵魚寺紀梵魚寺創建史蹟梵魚寺古蹟板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판각.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1700년(숙종 26)에 제작되었으며 6판의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에는 금정산 아래 이중전을 창건하였고 미륵전, 비로전, 대장전 등을 세우고, 《고려대장경》과 《화엄경》, 석가여래상을 모셨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의 지관은 의상이고, 공사를 총 감독한 이는 당시의 대왕이며, 기와일을 감독한 사람과 터를 닦고 재목을 운반한 사람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절의 규모, 계단의 수, 각 전각들을 창건한 사람, 대목의 일을 관장한 사람의 이름 등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답에 대한 문서는 김생이 기록하였는데 사원의 전답은 총 360결이고 노비는 100호가 늘 360방에 거처하였으며, 항상 화엄의 의리를 공부하고 화엄신중을 염송하여 왜인들을 진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범어사의 창건연대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가장 합리적인 것은 678년(문무왕 18) 의상이 중국 당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국민들을 화엄사상으로 교화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이다.
창건 설화에 따르면 왜인들이 10만의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략하려고 하자 왕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태백산 산중에 있는 의상을 만나 함께 금정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서 칠일 밤낮을 화엄신중을 독송하면 왜병들이 물러갈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꿈에서 말한 대로 하여 왜병을 물리치고 금정산 아래에 큰 절을 세웠으니 이것이 범어사를 창건한 유래이다.
신라 때 창건된 이후 변천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2년(선조 35)에 관선사(觀禪師)가 중건하였으나 곧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현감(玄鑑) 등의 스님들이 법당과 요사채, 불상과 시왕상 등을 갖추어 중창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기·범어사창건사적·범어사고적판 [梵魚寺紀梵魚寺創建史蹟梵魚寺古蹟板] (두산백과)
* 범어사 석조연화대좌하대석[梵魚寺石造蓮花臺座下臺石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 미륵전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연화대좌 하대석.
내용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3호.(2006년 11월 25일)
전체 높이 88㎝, 너비 147㎝. 범어사 미륵전의 목조여래좌상이 앉아 있는 석조연화대좌로, 모서리와 측면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대체적으로 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석조대좌는 현재 삼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하대석(下臺石)만 원래의 것으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너비가 147㎝의 큰 규격이며 상·중·하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석 상단부에 새겨진 16엽의 연판은 겹꽃 형태이며 양감이 적어 밋밋하고 꽃잎들 사이사이에 작은 사이 잎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측면의 각 면마다 능화형 안상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평면적인 연꽃잎 표현이나 능화형 안상, 하대석과 하나의 돌로 조각된 하대받침 형식 등은 통일신라 후기 불상 대좌들에 보이는 형식적인 특징이다. 현재는 하대석만 남아 있지만 본래는 올림꽃의 상대석, 팔각의 중대석, 내림꽃 하대석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팔각연화대좌였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통일신라 후기에 제작된 팔각연화대좌의 하대석으로, 범어사에 현존하는 석탑, 석등 등과 함께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지만 대좌 위에 봉안되었을 범어사 석불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석조연화대좌하대석 [梵魚寺石造蓮花臺座下臺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연[ 梵魚寺輦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梵魚寺)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연.
개설
사찰에서 불교 의식이나 불상을 이운(移運)할 때 사용하는 가마 형태의 연(輦)은 장엄(莊嚴) 요소를 많이 가미하여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범어사 연(梵魚寺輦)은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범어사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범어사 연은 가마채인 4개의 손잡이와 작은 집 모양의 몸체, 돔 형식의 옥개(屋蓋)로 구성되어 있다. 손잡이 끝에는 용두(龍頭)를 조각하고 있지만 앞의 두 곳은 결실되었다. 몸체는 풍혈(風穴)이 있는 난간을 사방에 돌리고 네 기둥을 세운 후, 중앙 공간을 비워 둔 채 목조 건축의 창호(窓戶)처럼 짰다. 여기에는 ‘만(卍)’ 자, 불로초(不老草), 연꽃, 불수감(佛手柑), 천도(天桃), 석류(石榴) 등의 문양을 투각(透刻)하여 채색하였으나, 내부에는 단순히 호분(胡粉)으로 채색되어 있다. 정면 두 기둥에는 수술을 늘어뜨리고 있으나 훼손이 심하며, 각 몸체 상부에 주렴(珠簾)을 달았던 쇠고리들이 남아 있다.옥개 처마는 투각 칠보문(七寶文)과 선각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금속제로 보강하고, 천장은 등나무로 돔 형식의 골조를 만든 후 닥종이와 다시 그 위를 검은 비단으로 덮었다. 바깥 네 모서리 합각에는 목조 가구의 광두정 역할의 화형(花形) 장식물처럼 6개씩 배치한 얇은 철판으로 다시 결속시켰다. 옥개 꼭대기에는 얇은 철판으로 4엽(葉)의 연잎을 부착한 후 주홍(朱紅)으로 채색한 목조 보주(寶珠)를 장식하였다.
특징
범어사 연은 각 부분의 장엄 장식이 화려하며 다양한 문양을 베풀었는데,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연은 심한 훼손과 함께 근래에 행해진 엉성한 개도(改塗)로 원형을 많이 잃고 있으나, 조선 후기에 흔히 제작된 연의 형태를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제작된 연이 대부분 소실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예가 드물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한 자료로 평가할 만하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연 [梵魚寺輦]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유제 대발(梵魚寺 鍮製 大鉢)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공양구로, 절에서 공양할 때 밥통으로 사용하던 식기의 일종이다. 1999년 9월 3일 부산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사찰에서 바루 공양을 할 때 밥통으로 사용하던 식기의 일종으로, 몸체 좌우 대칭되는 곳에 2개의 손잡이 고리가 달려 있으며, 길이가 17.6cm, 너비가 40.5cm인 대형 발우이다.
그릇의 입 가장자리를 2cm 가량 벌린 몸체와 3,3cm 높이의 받침은 한 몸처럼 제작되어 있지만 몸체 바깥면 두 곳을 약간 튀어나오게 처리하여 3등분한 것처럼 보이는데, 정교하지 못한 손잡이 장식과 함께 고르지 못한 몸체표면 처리 등에서 조형미가 조금 떨어지는 작품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받침의 바깥 면에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6여자 명문이 점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이 대형 발우가 순조 때인 도광 2년 혹은 5년(1825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 공예품 중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의식용 법구로서 뿐 만 아니라 조선후기 사찰에서 행해진 바루공양 의식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명칭 변경[편집]
종전 문화재 명칭 《도광명 유제양이부대발》(道光銘 鍮製兩耳附大鉢)에서 연호를 삭제하여 2015년 3월 18일 《범어사 유제 대발》(梵魚寺 鍮製 大鉢)로 변경되었다.[1]
* 범어사 사적비[ 梵魚寺事蹟碑 ]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범어사에 세운 비.
건립 경위
1923년 당시 범어사 주지인 승려 담해(湛海)가 범어사의 연혁과 선찰 본산(禪刹本山)으로서의 사격(寺格)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세웠다.
위치
범어사 사적비(梵魚寺事蹟碑)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546번지 범어사 경내에 있다.
형태
전체 높이는 356㎝이고, 비신은 높이 204.2㎝, 너비 85㎝, 두께 43㎝이다.
금석문
비의 제목은 「범어사 사적 비명(梵魚寺事蹟碑銘)」이며,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정산의 정상에 우물이 있는데 옛날 그곳에 이상한 물고기가 놀았다. 그 물고기는 범천(梵天)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우물에는 금빛이 났다. 대개 산의 이름을 금정산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기 1682년 을묘년 신라 무열왕 2년[655]에 대마도의 왜적들이 국경을 침범하여 왕이 크게 근심하고 있던 터에 의상 대사가 태백산으로부터 이 산으로 와서 머물다가 법력으로 적을 물리쳤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평장사(平章事) 유춘우(柳春雨) 등을 보내어 이 절을 창건하도록 하였다.먼저 미륵상을 주조하고 2층의 미륵전을 건설하여 중요한 요지를 진압하였고, 미륵전 서쪽에 비로전을 세우고 비로자나존상을 안치하였다. 그 동쪽으로 대장각을 설치하여 팔만 장경을 보관하도록 하였고, 나머지 각 불상과 석탑·법전·고각·종루·석등·신단(神壇)과 40개의 법체(法體)와 사천왕각과 33층의 쇠 당간과 360여 칸의 요방(寮房)과 360결의 밭과 100호의 노비 그리고 무량한 사물들이 장대하게 마련되었다. 상세한 것은 창사기(創寺記)에 실려 있다. 당시를 상상해 보면 참으로 동쪽의 거대한 사찰임을 알겠다.이는 대개 왕이 부처를 향하는 정성이 대사로 인하여 깊어진 것이요, 대사의 연화(演化)의 기미가 왕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이 절이 사람들과 세상에 복리(福利)를 베푼 것이 성대하였다. 그러나 도를 깨친 선사가 이어지지 못하고 세상의 인정도 많이 변하여, 고려에서 조선으로 내려오면서 흥폐(興廢)하는 일이 없지 않았고, 고찰할 만한 문헌도 없어졌다.불기 2619년 임진년 조선 선조 25년[1592]에 전쟁으로 절이 불타 없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대중이 자그마한 규모로 건물을 얽었으나 단지 빈터만을 지킬 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임인년[1602]에 주지승 묘전(妙全)과 현감(玄鑑)·계환(戒環)이 대웅전을 창건하였는데, 갑자기 하루는 마당가에서 부처의 얼굴이 약간 드러나 곧장 재와 흙을 파헤치고 모셔 내니 바로 전날 만든 미륵상이었다. 사나운 불 속에서도 손상된 곳이 없었다. 지금 미륵전 동쪽을 등지고 앉아 있는 것이 그것이다.임인년으로부터 56년 뒤 무술년 효종 9년[1658]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인견(印堅)과 순식(順湜)·총열(摠悅)·해관(海寬)·계환(戒環)이 주머니를 털어 자금을 출자하고, 재묵(再黙)과 각민(覺敏)이 고루 모연(募緣)하여 재물을 모았으나, 비용이 부족하여 판청(判廳)으로부터 돈을 내었는데 최선(最善)과 대홍(大弘), 최대(最大)가 힘을 썼다.무술년으로부터 41년 뒤 기묘년 숙종 25년[1699]에 자수(自脩)·석경(釋瓊)·문인(文印)·명학(明學)이 보제루(普濟樓)를 창건하였는데, 관찰사 이공과 절도사 이공이 함께 시주한 것이다. 그 외 다른 성전(聖殿)과 향각(香閣), 그리고 청풍(淸豊)·심검(尋劒)·원응(圓應)·안심(安心)·함홍(含弘)·해행(解行)·침계(枕溪)·금당(金堂) 등 8방을 중수할 때 공덕이 있는 사람과 그 연대는 각기 기문이 있어 다시 거론하지는 않는다. 다만 해행방(解行房)만은 최선(最善)이 재산을 다스렸다.한 해 걸러 전답과 자금과 쌀을 내어 사찰과 암자를 보수하여 빈번히 이 절을 지키는 자는 곧 갑계(甲契)이다. 이 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공심(公心)을 위하는 정성과 수고를 함께 나누는 의리는 참으로 불교를 배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에서 배척할 때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한 해를 견디기도 어려웠는데, 이 갑계의 힘이 아니었다면 보존할 도리가 있었겠는가.불기 2932년 을사년 고종 광무 9년[1905]에 팔상전을 다시 세우고 여러 성상(聖像)에 그림을 그렸는데, 혼해(混海)와 학암(鶴庵) 두 선사가 같이 이 일을 맡았다. 현재 아홉 곳의 암자가 있는데, 극락암(極樂庵)·대성암(大聖庵1234)·금강암(金剛庵)·사자암(獅子庵) 네 암자는 그 창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그중 극락암은 해성(海城) 선사가 힘을 다해 보수하였고, 대성암은 울암(蔚庵) 선사가 큰 공력을 들였으며, 금강암은 영명(永明) 선사가 길이 견고하게 하였다.불기 2711년 갑자년 숙종 10년[1684]에 신주(信珠) 선사가 청련암(靑蓮庵)을 창건하였고, 29년이 지난 계사년[1713]에 수좌(首座) 선식(禪識)과 시주자 김치명(金致鳴)이 안양암(安養庵)을 세웠으며, 그 뒤 30년 계해년 영조 19년[1743]에는 신주(信珠)와 섭총(攝摠) 등이 내원암(內院庵)을 창건하였다. 원효암(元曉庵)과 계명암(鷄鳴庵)은 본사와 함께 지어졌는데, 원효암은 중간에 이건하였지만 어느 해 누가 한 일인지 알 수 없다.그러나 옮겨 세우고 수선하는 공로로는 금해(錦海)와 응허(應虛) 두 선사가 으뜸이다. 계명방(鷄鳴房)이 이미 불탔는데, 유독 두 마리의 서계가 동쪽 가장자리에 엎어져 있었다. 불기 2920년 계사년 고종 30년[1893]에 우화(雨華)와 금봉(金峯) 두 장로와 혼해 강백(講伯)이 옛 자국을 파내고 새 칠을 더하여 ‘계명암(鷄鳴庵)’이라고 편액하였다.일을 맡은 소임이 바뀌었던 것을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321년 전엔 주지(住持)가 담당하였고, 180년 전에는 승통(僧統)이 담당하였으며, 32년 전에는 총섭(總攝)이 맡았는데 예봉(禮峯) 선사가 먼저 임명되었다. 16년 전에는 섭리(攝理)가 맡았는데, 경산(擎山) 선사가 그 임무를 맡았다. 13년 전에는 다시 주지에게 돌아왔는데, 주지 성월(惺月) 선사·등암(藤巖)·담해·회현(晦玄)·학암(鶴庵)·경산 등 여러 선사들이 사찰 일에 부지런하여 선법(禪法)을 존숭하자 스님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금정산 일대가 선찰 본산이 되어 도를 연마하고 불법을 강설하는 것이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일찍이 이 산에는 영원 조사(靈源祖師)와 낭백 대사(朗伯大師)와 같은 여러 위대한 인물들의 불도(佛道)와 세상을 위한 높은 지혜와 맑은 행실이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질 뿐 문헌은 사라졌으니,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지금 주지 담해 선사가 대중의 뜻과 같이 사적을 알리는 비석을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구하여 새기고자 한다.‘높으신 법력으로 오랑캐를 몰아내니 임금께서 몸소 시주하셨네. 보배로운 불전과 구름 같은 누대가 우뚝하니 그 모습 갖추었다네. 큰 법고를 울리고 큰 법등을 밝혀라. 중생들의 인연은 얕고 법사는 이어가기 어려워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거의 흥망성쇠를 겪었네. 임진년 전쟁의 재앙으로 사찰의 운명이 크게 막혔네. 이로부터 십 년 뒤 창건하는 자가 비로소 생겨 사찰을 일으키고 암자를 세우니 시대를 따라 그 뒤를 이었네.불법 도량은 맑고 깨끗해 세간에 두루 알려졌네. 스님들 구름처럼 모여드니 선종 대찰이요, 불법 본산이라. 명안(明眼)을 지닌 대덕(大德)들 뒤를 좇아 서로 연 이으니 강당을 열어 두루 펴는 설법이 천년만년 퍼지리라.’ 불기 2950년 계해년 8월 우두산인(牛頭山人) 남천 한규 짓고 쓰다[梵魚寺事蹟碑銘 慶尙南道東萊郡金井山梵魚寺事蹟碑銘幷序 山頂有井 昔游異魚 其來梵天云 而井光金色 盖山名金井·寺號梵魚者 其以此也 敎主千六百八十二年乙卯 新羅武烈王二年 島夷犯國境 王大憂 義湘大師 自太白來 住玆山 卽以法力却之 王大喜 遣平章事柳春雨等 刱玆寺 而先造彌勒像 建二層殿 以鎭重要之地 殿之西 立毘盧殿 安毘盧尊像 其東置大藏閣 藏八萬大經 其餘各佛像·石塔·法殿·鼓閣·鍾樓·石燈·神壇·四十法體·四天王閣·三十三層鐵幢·三百六十寮房·三百六十結畓·百戶奴婢 且無量什物之設施張大 詳載於創寺記也 想象當時 固爲東巨刹也 盖王之向佛之誠 因師而深也 師之演化之機 由王而發也 自此而玆寺之福利於人世者 盛矣 道師不繼 世情多變 所以高麗漢陽以來 其不無興廢之事 而無文可考者 二千六百十九年 壬辰李朝宣祖二十五年 兵火燒盡也 經劫餘 衆小規結搆 只守空墟 過十年壬寅 住持妙全與玄鑑戒環 創大雄殿 忽一日 佛面小露於庭畔 卽開灰土侍出 乃昔造彌勒像也 其猛火裏無傷 今彌勒殿背東而坐 是也 壬寅後五十六年戊戌 孝宗九年 重建大雄殿 印堅·順湜·摠悅·海寬·戒環 傾橐而出資 再黙·覺敏 以均募緣而鳩財 用之不足 故自判廳出錢 而最善·大弘·最大 另力也 戊戌後四十一年己卯 肅宗二十五年 自脩·釋瓊·文印·明學 刱普濟樓 巡相李公·節度使李公 幷爲檀越也 其他聖殿香閣等 且淸豊·尋劒·圓應·安心·含弘·解行·枕溪·金堂八房 其重脩有功之人與其年代 各有其記 姑不更擧 獨解行一房 最善治産 間年出畓與金米 補寺補庵 多大特保此寺者 卽甲稧也 盖斯稧也 不知始於何時 而其爲公之誠·同勞之義 眞學佛之心也 其李朝斥佛之時 隱於深山 措年是難 若非斯稧之力 安有保存之道哉 二千九百三十二年乙巳 高宗光武九年 重建八相殿 繪畵諸聖像 混海·鶴庵二師同幹其事也 現有九庵 極樂·大聖·金剛·獅子四庵 其創時不知 而極樂 海城師極力補守 大聖 蔚庵師大有功 金剛 永明師永堅固也 二千七百十一年甲子 肅宗十年 信珠師 刱靑蓮 過二十九年癸巳 首座禪識施者金致鳴 創安養 此後三十年癸亥 英宗十九年 信珠又與攝摠等 刱內院也 元曉·鷄鳴 與寺同時 而元曉之中間移建 無徵其何年何人之事 然改建脩繕之功 錦海·應虛二師 最也 鷄鳴房 已火 獨有二首石鷄伏東邊 二千九百二十年癸巳 高宗三十年 雨華·金峯兩長老 混海講伯 浚舊而加新 額鷄鳴庵也 按任事改革 踞今三百二十一年前 以住持 百八十年前 爲僧統 三十二年前 爲總攝 而禮峯師先被任也 十六年前 攝理 而擎山師任其任也 十三年前 還爲住持 住持惺月禪師 藤巖·湛海·晦玄·鶴庵·擎山諸師 勤於寺事 而尊崇禪法 衲子雲集 金井一局 遂爲禪刹本山 鍊道說法 無日不然也 曾於玆山 如靈源祖師·朗伯大師等諸偉人之爲道爲世之高慧淨行 多有口傳而文傳見失 是甚遺感也 時住持湛海禪伯 同大衆之意 現寺蹟立石 而求余文以爲銘 銘曰法力驅夷 君王檀越 寶殿雲臺 備體兀兀 擊大法鼓 燃大法燈 衆生緣淺 道師難承 麗代李朝 幾見興替 龍蛇之災 寺運大滯 自此十年 創者稍有 起寺建庵 隨時承後 道場淸淨 普聞世間 衲子雲集 禪刹本山 明眼大德 踵武相連 開堂普說 於千萬年 敎主二千九百五十年癸亥八月日 牛頭山人 南泉 翰奎 撰而書].”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사적비 [梵魚寺事蹟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바라
[ 梵魚寺哱囉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 후기 한 쌍의 바라.
개설
바라는 불교 의식구(佛敎儀式具) 중의 하나로 자바라, 발자(鉢子), 요발(饒鈸), 동발(銅鈸)이라고 한다. 타악기의 일종으로 크기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며, 행사의 종류에 따라 용도 역시 다르다. 대표적으로 설법이나 큰 집회, 장례 및 천도 의식 등 불교 의식(佛敎儀式)을 치르거나, 불교 의식 무용[佛敎儀式舞]의 하나로 승려가 바라춤을 추거나 향공양, 불경 열람, 새 주지를 맞이할 때 등에 행해진다. 범어사 바라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범어사 바라는 2개가 한 쌍으로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보이는데, 지름은 46㎝로 비교적 큰 편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마치 솥뚜껑처럼 생겼는데, 중심부에는 손잡이가 돌출되어 있으며 편평한 원형의 모습이다. 손잡이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는데, 수술과 같은 장식 또는 끈을 달아 손잡이를 잡은 손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손잡이는 바라에서 볼록 솟은 곳에 위치하며, 바라의 가장자리로 향할수록 솟아오른 모습은 완만해진다. 완만해진 지점에서부터 바라의 가장자리까지는 넓고 편평하게 표현하여 마치 접시와 같은 모습이다.
특징
범어사 바라의 가장 큰 특징은 놋쇠를 두들겨 늘여 가며 형태를 잡아 가는 방자 유기(方字鍮器)로 제작된 점이다. 1개의 바라 안쪽에 묵서(墨書)로 ‘을해년월일 □□70량(乙亥年月日□□七十兩)’이라는 명문이 있다. ‘을해년’은 범어사 바라를 제작한 연대의 간지(干支)로 보이며, ‘□□70량’은 범어사 바라의 무게일 가능성이 크다. 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의 범어사 대웅전 청동북(梵魚寺大雄殿靑銅金鼓)의 명문에서도 제작 시기에 이어 금고의 무게를 적고 있어 이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바라는 놋쇠를 두들겨 만든 전통적 방자 유기의 제작 기법을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바라 [梵魚寺哱囉]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범어사 목조팔각불감 [ 梵魚寺 木造八角佛龕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6년 11월 23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나무로 만든 불감(佛龕).
개설
「범어사 목조팔각불감(梵魚寺 木造八角佛龕)」은 개인의 호신불 또는 원불(願佛)을 모시거나 인법당(因法堂)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는 궤(櫃) 형태의 불감이다.
형태
「범어사 목조팔각불감」은 전체적으로 팔각을 기본형으로 하여 다리부분과 몸체부분, 덮개부분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외부 표면에는 검게 옻칠이 되어 있다. 몸체 앞면에는 문을 여닫게 고안된 두 짝의 문이 있으며, 다리는 전통 목가구에 흔히 사용되는 족통과 운각형태로 마감하였다.문짝 앞면에는 문을 잠그기 위해 황동으로 제작된 약과형 앞바탕을 이중 화형으로 조합하여 여기에 국화동자못과 배목 및 뻗침대가 있으며, 측면에는 문짝을 여닫을 수 있도록 약과형 경첩이 상하에 부착되어 있는데 향우측 위쪽 경첩의 경우 근래에 보수를 한 상태이다. 앞면 양쪽 가장자리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금박 장식하였던 흔적이 드러나 있다.내부에는 봉안되어 있었던 주존상(主尊像)을 결실한 채 비어있는 상태이며, 내부 표면에는 옻칠과 금칠 및 주칠 등을 차례로 칠하였다. 그러나 낙수면이 2단 형식을 취한 옆으로 긴 팔각형 지붕의 내부 천장에는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민 용을 조각한 후 안료로 화려하게 채색하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마치 불전(佛殿)의 운궁형(雲宮形) 닫집과 같은 형태의 보개(寶蓋)를 표현하였다.한편 좌우 문짝의 내부에는 원각(圓刻)에 가까운 상반신을 벗은 인왕상(仁王像)들이 눈을 부릅뜨고 입을 꾹 다문 채 권법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특히 이들 인왕상 머리에는 보발(寶髮)과 이를 장식하는 상투관과 같은 장식이 있으며 하반신에는 고의(袴衣)를 입고 몸을 크게 휘감은 천의(天衣)를 두르고 있다.
특징
「범어사 목조팔각불감」은 현재 주존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인왕상 및 보개 부분의 조각에서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인왕상은 조선후기 지장전이나 명부전 등의 전각 좌우에 봉안된 인왕상과 비교가 된다. 이처럼 짤막한 체구에 표현이 너무 과장되지 않은 조각수법은 17세기에 제작된 인왕상들과 닮았는데, 전북 고창 문수사 명부전의 1653년 작 목조인왕상들과 1684년 작 장안사 명부전 석조인왕상 등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상들과 비교가 되므로 이 불감의 제작시기는 17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목조팔각불감」은 불감의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1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는 불감으로서 현존하는 예가 드문 작품이므로 조선 후기 불감의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목조팔각불감 [梵魚寺 木造八角佛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팔상전: 꽃살문
분류
미술/공예 >행복 >식물 >매화
• 유 물 명 : 범어사 팔상전: 꽃살문• 소 장 처 : 부산시 금정구 청룡동• 시 대 : 조선시대• 재 료 : 나무에 채색• 크 기 :
일러스트정보
• 작 품 명 : 매화• 작품출처 : 범어사 팔상전: 꽃살문• 작품종류 : 2D일러스트
상징형 설명
장수/ 얼굴 면(面)/ 눈썹 미(眉)매화는 매실나무의 꽃으로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꽃이다. 때문에 매화는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이라 여겨져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사랑 받아왔다. 선비들이 문인화의 소재로 즐겨 그렸음은 물론이다. 또한 매화는 겨울에 죽은 듯이 보이다가 이른 봄이 되면 꽃이 피는 속성 때문에 회춘(回春)을 의미하고, 대나무와 함께 부부(夫婦)를 뜻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새해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라 하여 신년(新年)의 의미로 그려지거나, 쾌락.행복.장수.순리.절개의 오덕(五德)을 지닌 꽃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또한 매화의 한자어인 매(梅), 흰 매화 가지의 한자어 백매초(白梅梢)는 각각 중국식 한자어 발음과 동음인 얼굴 면(面) 또는 눈썹 미(眉)를 의미한다. 그래서 흰 매화 가지 그림은 눈썹이 하얘지도록 장수하라는 의미의 백미수(白眉壽)를 의미한다. 매화가지에 걸린 달[즐거움 상징] 그림은 미수상락(眉壽上樂), 즉 ‘눈썹이 하얘지도록 장수하는 기쁨이 있길 기원’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또한 까치와 함께 그려진 매화는 얼굴을 의미하며 기쁨을 의미하는 까치와 함께 ‘얼굴에 즐거움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의미의 그림이다.중국에서는 매화를 온실의 보온 없이 싸늘한 겨울 삭풍과 한설에 홀로 꽃을 피워 암향(暗香)을 퍼뜨리는 나무라 하여 꽃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의미하는 화괴(花魁)라 하여 귀히 여기며, 일본에서는 곧게 자란 매화의 어린 가지에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신통력이 있다 하여 매화 지팡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참고문헌>『한국문화 상징사전』1 · 2, 두산동아, 1995 / 김길성,『민간전통 刺繡베갯모』, 삼성문화인쇄(주), 2001. / 임영주,『한국전통문양』1~3, 예원, 1998. / 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27권 / 노자키 세이킨,『中國吉祥圖案』, 예경, 1992. / 정민,『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1 · 2, 효형출판, 2003. / 이상희,『꽃으로 보는 한국문화』1~3, 넥서스, 1998. / 김종대,『우리문화의 상징세계』, 다른세상, 2001. / 조용진,『동양화 읽는 법』, 집문당, 2002. / 허균,『전통미술의 소재와 상징』, 교보문고, 1991. / 허균,『전통문양』, 대원사, 1995. 허균,『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 이성미 · 김정희, 『한국회화사용어집』, 다할미디어, 2003.
원천유물 설명
범어사 팔상전의 꽃살문. 범어사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사찰로, 범어사 경내에는 대웅전 외에 왼쪽으로부터 팔상전, 독성전, 나한전이 한 채에 연이어 있다. 기록에는 1613년에 묘전 화상이 나한전을 창건하고 1705년에 명학(明學)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고 하므로 원래는 이들 세 건물이 별도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905년에 학암(鶴庵) 스님이 팔상·나한·독성각을 중건하고 제 성상(聖像)을 새롭게 조성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렇게 오래 전에 지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정면 7칸, 측면 3칸의 평면에 좌측 3칸의 팔상전에는 삼존(三尊) 소상(塑像)과 팔상탱(八相幀)을 봉안했고, 중앙 네번째 칸의 독성전에는 나반존자를 그리고 우측 3칸의 나한전에는 석가삼존과 16나한을 안치하였다. 전면을 모두 문으로 개방하고 좌우 각 두 번째 칸에는 3분합을 그 밖에는 2분합의 빗살문을 달았으나 네번째 칸의 독성전으로 통하는 문얼굴은 상인방을 아치로 하여 반칸을 들여서 2분합의 화창(花窓)을 달았다. 화면은 특히 팔상전 어간의 격자매화꽃살문이다. 매화꽃은 오덕(五德)을 상징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팔상전: 꽃살문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길상 이미지), 2003., 한국콘텐츠진흥원)
* 범어사 팔상전 삼존불 좌상 [ 梵魚寺八相殿三尊佛坐像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불상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삼존불 좌상.
개설
범어사 팔상전 중앙 수미단에 봉안된 석조 삼존불 좌상(三尊佛坐像)은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협시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두었다. 각 상은 신체 비례, 얼굴, 인상, 법의 등의 표현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형태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에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에 두고 오른손은 손가락이 땅을 향한 촉지인을 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본존과 수인이 동일하며, 우측의 보현보살상은 손의 위치가 반대이다.각 상의 특징을 보면, 우선 석가모니상은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이에 알맞은 다리 폭으로 신체 비례가 좋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중간에 중간 계주, 정상부에는 정상 계주를 각각 두었다. 턱이 둥근 방형 얼굴은 양 볼이 밋밋하고, 이마가 좁고, 수평으로 그은 작은 눈과 콧등이 뾰족한 큼직한 코, 곡선을 그리는 입술 등으로 표현되었으며, 전체적인 얼굴 모습이 색난파의 목조 불상의 얼굴을 보는 듯하다.착의법을 보면, 대의를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쳐 입은 변형 편단우견(偏袒右肩)식이다. 좁게 드러나는 가슴아래 승각기(僧脚崎)는 3개의 연잎형으로 모양을 내었으며, 배 앞으로는 대의의 안쪽 면이 넓게 드러나면서 왼쪽 어깨 뒤로 대의를 넘겼다.우측 보현보살상은 석가모니상과 비슷한 특징을 보이지만 얼굴, 법의 등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다. 얼굴은 방형으로 눈이 작고 가늘며, 좁은 이마와 오똑한 코, 둥근 입술 등으로 표현되었는데 형식상의 특징은 유사하나 전체적인 인상은 차이가 있다. 이 얼굴은 승호가 조성한 대전 청송사 보광전 불상[1685년], 기장 장안사 응진전 불상[1684년]의 얼굴과 닮았다. 머리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통관을 쓰고 있는데 가운데 높은 관 끝이 살짝 들어가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착의법은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입고 그 위에 대의를 변형 편단우견 형식으로 입었으며, 본존상에 비해 옷주름이 가볍고 두께감도 훨씬 줄었다. 양 다리 사이의 가운데 두 개의 옷주름은 가장자리가 바깥으로 접혀 있는데 이는 17세기 후반 경상도에서 활동한 승호(勝浩)의 석조 불상의 전형적 특징이다.좌측의 문수보살상은 두 존상에 비해 상체가 길어지고 가늘어졌다. 작은 얼굴에 유난히 커 보이는 코와 넓은 인중, 그리고 긴 입술 등의 특징으로 표현되었다. 변형된 통견식의 착의법으로 오른쪽 어깨에 3개로 접은 대의 옷주름, 배 앞에 서로 대칭을 이루는 편삼과 대의의 옷자락, 양 다리사이에 펼쳐 놓은 옷주름 등이 보현보살상과 유사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보인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선 후기의 불상의 보편적인 특징이면서도 조각승마다 조금씩 기법적인 차이가 있다.
특징
범어사 팔상전 삼존상은 얼굴, 신체 비례,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들이 조금씩 다르며, 본존상은 색난파의 특징을, 보현보살상은 17세기 후반 활동한 승호파의 불상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문수보살상은 신체가 길어지고 빈약하며, 작은 얼굴에 큼직한 코 등의 모양이 울산 백양사에 있는 삼존상의 특징과 닮았으며, 백양사 상은 18세기 전반경으로 시대를 추정하고 있어 문수보살상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팔상전 삼존불 좌상은 모두 불석제의 석조 불상으로, 17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 석조 조각승으로 알려진 승호파는 물론, 이와 다른 석조 조각승의 활동을 짐작케 하며, 더불어 석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이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좀 더 그 내용이 확실해 질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팔상전 삼존불 좌상 [梵魚寺八相殿三尊佛坐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팔상전 팔상도」 [ 梵魚寺捌相殿捌相圖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현대/현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에 보존된 팔상도.
개설
「범어사 팔상전 팔상도(梵魚寺捌相殿捌相圖)」는 범어사에 보존되어 있는 그림으로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도이다. 화기에는 1978년에 제작되었으며, 화공 우일(又日)이 담당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형태 및 구성
「범어사 팔상전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장면으로 압축, 묘사한 그림으로 총 8폭의 그림이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팔상전 여래 후불도를 중심으로 좌우 벽면에 4폭씩 배치하였다. 후불도의 왼쪽에 제1폭을, 오른쪽에 제2폭을 배치하고, 좌측 벽에 제3·5·7폭을, 우측 벽에 제4·6·8폭을 배치하였다. 벽면의 공간에 따라 제1, 2폭의 너비가 제3~8폭에 비해 50㎝ 정도 더 넓어 다른 화폭에 비해 장면 설정과 산수 표현이 옆으로 확장되어 그려졌다.
특징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 포착과 장면 배열 및 구성 등은 18세기에 조성되었던 「운흥사 팔상도(雲興寺捌相圖)」(1719), 「송광사 팔상도(松廣寺八相圖)」(1728)의 계통을 기본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청록 산수화를 여덟 화폭의 장면마다 세트 장치로 설치하여, 청록 산수화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화면 하단에는 시주질을 밝힌 묵서 화기가 있는데, 그중 제2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화폭에 화공 우일이 제작을 담당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팔상전 팔상도」는 20세기 전반 불상·불화·단청 분야의 대표적인 화승인 보응(普應) 문성(文性)과 금용(金容) 일섭(日燮)의 제자인 우일에 의해 조성되었다. 현대에 제작된 작품이지만, 18세기 팔상도의 전통 도상과 근대기 채색 불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근현대 한국 미술에 대한 재검토와 중요성이 부각되는 흐름 속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팔상전 팔상도」 [梵魚寺捌相殿捌相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고려삼층석탑 [ 梵魚寺高麗三層石塔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고려/고려 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3월 26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는 고려 전기 삼층 석탑.
개설
범어사 고려삼층석탑(梵魚寺高麗三層石塔)은 이중 기단에 옥개 받침을 지닌 옥개석 등 통일 신라 시대 전형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석탑의 전체적인 규모와 하층 기단 면석에 하대 저석(下臺底石)을 조출한 것과 3단 각형으로 얕게 표현된 옥개 받침의 양식 등을 고려할 때 고려 초에 조성된 석탑으로 판단된다.
형태
전체 높이는 1.8m이며, 상하 이중 기단에 전형 석탑 양식을 지닌 삼층 석탑이다. 하층 기단과 상층 기단은 면석(面石)과 갑석(甲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으로 조성된 갑석과 달리 폭이 넓고 좌우 측면 우주(隅柱)[모서리 기둥]까지 표현된 면석 2장과 탱주(撐柱)[가운데 기둥]만 조각된 면석 1장, 그리고 아무런 조각 장식이 없는 면석 1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범어사 고려삼층석탑의 부재 중 가장 온전한 1층 탑신석(塔身石)은 1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모서리마다 우주가 새겨져 있다. 또한 1층 탑신석의 윗면에 지름 10㎝, 깊이 8.5㎝의 사리공(舍利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아랫면에도 역시 지름 11㎝, 깊이 7㎝의 사리공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지대석과 1층 옥개석, 2·3층 탑신석 및 상륜부가 없어졌으며, 석탑 부재 또한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있다. 몇몇 부재의 결실과 표면에 지의류 및 이끼류에 의한 손상이 있지만, 치석(治石) 상태나 탑의 형태 및 체감률 등의 파악은 가능하다.
현황
범어사 고려삼층석탑은 약사전 향좌측에 있다. 약사전이 팔상전을 지나 뒤쪽 편에 있어 대웅전 쪽보다는 인적이 드문 편이다. 현재는 어떠한 표시도 되어 있지 않고 석탑만 세워져 있다.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5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범어사가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고려삼층석탑은 고려 시대 석탑인 범방동 삼층석탑[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3호]이나 경상남도 의령의 성황리 삼층석탑[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14호]과 양식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다. 비록 범어사 고려 삼층 석탑이 앞의 두 석탑과 달리 지대석과 1층 옥개석, 2·3층 탑신석 등이 결실되었지만, 전체적인 짜임새와 날씬한 옥개석 형태 및 치석 등은 더 뛰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부산의 문화재』(부산광역시, 2013)
*** 범어사 3·1 운동 [ 梵魚寺三一運動 ]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복천동, 수안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1919년 3월 범어사 승려와 학생들이 주도하여 동래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을 앞둔 2월 하순경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韓龍雲)이 범어사로 내려와 오성월(吳惺月)을 비롯하여 이담해(李湛海), 오이산(吳梨山)을 만나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에 범어사 주지 오성월, 이담해 등은 김법린(金法麟), 김영규(金永奎), 차상명(車相明), 김상헌(金祥憲), 김상기(金相琦), 김한기, 김봉한 등 범어사 승려와 명정학교 및 범어사 지방학림의 학생 7명을 범어사의 대표로 서울의 3·1 운동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들은 3월 4일 독립 선언서 등 문건과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범어사로 돌아왔다.이 무렵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산에서도 3·1 운동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이에 부산에서는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 학생들과 기독교도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고보[현 동래고등학교]의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범어사 관계자들이 3월 8일 동래 장날에 맞추어 만세 시위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경과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들은 새로운 거사일을 역시 동래 장날인 3월 18일로 잡고 동래 장터 일대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하루 전날인 3월 17일은 범어사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 밤 개최된 졸업생 송별회 자리에서 김영규가 축사 도중에 만세 시위를 독려하고, 다른 주동자들도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자 참석한 학생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이에 시위의 주동자들은 어둠을 틈타 두 편으로 나누어, 18일 새벽 동래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잠입하였다. 하지만 이미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이 사실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출동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이에 검거를 피한 이근우, 김해관, 김재호, 윤상은 등 40여 명의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성 서문 부근에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일 오전 허영호가 주도하여 다시 한 차례 더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후 각각 두 차례의 시위를 더 감행하였다.
결과
시위 후 주동자 35명은 대부분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거쳐, 부산감옥소와 대구감옥소 등에서 징역 6월~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이 의거가 있은 후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을 해체시켰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3·1 운동은 부산진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의 3·1 운동에 이어 구포 장터, 기장면, 정관면, 좌천면 등 부산 전역으로 이어진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20~30년대 부산 및 동래 지역 항일 청년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3·1 운동 [梵魚寺三一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범어사 고려삼층석탑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경내에 있는 범어사 고려삼층석탑이다. 하층 기단과 상층 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대석과 1층 옥개석, 2·3층 탑신석 및 상륜부가 없어졌다.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촬영: )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고려삼층석탑 [梵魚寺高麗三層石塔]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를 노래한 고전 문학 [ 梵魚寺-古典文學 ]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조선/조선
조선 시대 부산의 범어사를 대상으로 지은 한시 작품.
개설
금정산 산마루에 있는 우물에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거기에서 놀았다는 설화에서 ‘범어사(梵魚寺)’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범어사는 신라 시대 원효(元曉)[617~686]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존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최치원(崔致遠)[857~?]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해 각종 지리지에도 범어사 창건 설화가 그대로 전해진다. 영남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범어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고, 명산인 금정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서 부산을 들르는 시인 묵객들이 많은 시를 남긴 곳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를 노래한 고전 문학 [梵魚寺-古典文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범어사 갑계보사비 [ 梵魚寺甲契補寺碑 ]
분야
종교/불교, 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시대
조선/조선 후기, 근대/근대, 현대/현대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 범어사 경내에 세운 14기의 비석군.
조선 후기 범어사의 갑계
조선 후기 사원에는 각종 계(契)가 조직되어, 사원 경제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범어사에도 다양한 계가 조직되어 각종 불사(佛事)의 경비를 충당하여 보사(補寺)하였다. 이 가운데 갑계(甲契)가 가장 활발하였는데, 전답과 현금 등을 헌납하여 계금을 조성하였다. 갑계는 동갑내기 승려들로 구성되는 것이 원칙으로, 범어사 갑계는 자(子)·오(午)년마다 조직하여 6년차의 동갑 승려들로 이루어졌다. 갑계의 자금 운영은 소임(所任)들이 맡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빌려 주고, 기일이 되면 원금과 함께 이자를 회수하여 재회전하는 방식이었다.
범어사 갑계의 보사비
현재 범어사 경내에는 1860년(철종 11) 세운 갑자갑원보사비(甲子甲員補寺碑)부터 1947년 세운 갑오갑보사단비(甲午甲補寺壇碑)·무자갑보사단비(戊子甲補寺壇碑)까지 자연석에 새긴 총 14기의 비가 남아 있다. 이들 보사비는 계원들이 모은 재화를 헌납한 일이나 사찰이나 전각을 중수하거나 불경을 인출(印出)하는 등의 불사를 마치고 세운 기념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범어사 갑계보사비 [梵魚寺甲契補寺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