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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 제2차 진주성 전투’와 ‘111. 논개’는 전에 이미 전재해서 생략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 시점은 2015년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112. 우연한 만남
“아, 강낭콩 꽃보다 더 푸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야~ 진짜, 시 한번 참 잘 지었네요.”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 성문 앞 강변 쪽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수주 변영로의 시 ‘논개’를 소리 내어 읽은 삼봉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러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는 저 구절이 가슴에 와닿는다야. 흐흐. 그런데 정훈아, 거룩한 분노라는 게 도대체 뭐냐?”
문도도 삼봉을 따라 감상을 말했는데, ‘거룩한 분노’가 잘 이해되지 않는지 웃으면서 정훈에게 물었다.
“글쎄? 논개가 왜놈 장수 껴안고 물에 빠진, 죽음으로써 남편 복수를 하겠다는, 분노 아니겠냐? 마약 거래하는 조폭 같은 나쁜 놈들 박살 내겠다는 것도, 거~룩한 분노일 테고.”
정훈이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요즘 신경 쓰고 있는 마약 단속을 갖다 붙였다.
‘거룩하다’의 사전적인 풀이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이다.
“몸을 바쳐 복수하는 게 거룩한 거야? 그러면 한일전 축구 시합도 거룩한 분노로 붙어야 되겠다, 그지? 낼모레 일본 요코하마에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예선전 있다며?”
문도가 축구광인 삼봉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네요. 상주 팀이 현재 H조 1위인데, 일본 마리노스팀을 거룩한 분노로 꼭 박살내야 되겠습니다. 히히.”
삼봉이 축구 얘기가 나오니까 신나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 삼봉 씨는 축구를 엄청나게 잘하는 모양이요? 국가대표 경기도 아닌데, 스케줄을 훤히 꿰뚫고 있는 거 보니까. 하하.”
정훈이 이외라는 듯 삼봉을 보고 웃었다.
“아닙니다! 잘해서가 아니고,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겁니다. 히히.”
삼봉이 괜한 얘기를 했나 싶어 겸손을 떨었다. 공을 조금 잘 차기는 한다.
“배고프다! 어서 육회비빔밥 먹으러 가자. 큭큭.”
문도가 앞장서 주차장 쪽을 향해 걸었다. 벌써 오후 1시가 훨씬 넘었다.
“어? 저, 저놈들.. 장유파 아니야?”
그때, 문도가 갑자기 멈춰 서며 두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뭐? 장유파라고? 어디, 누구 말이야?”
정훈도 얼른 몸을 움츠리며 문도의 시선을 따랐다.
멀리 주차장에 세운 검은색 승용차 앞에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얼핏 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체격이 탄탄한 사내가 앞장을 섰고,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날렵한 사내가 뒤를 따랐다.
“저기 앞선 놈이 김해 장유파 두목 이무계야. 뒤에 오는 젊은 놈은 행동대장이고.”
문도가 슬쩍 몸을 돌려 촉석루 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네가 저놈들을 어떻게 알아?”
정훈도 함께 돌아서며 믿기지 않는지 문도를 쳐다보며 물었다.
“응, 두어 달 전에 김해에서 두 놈이 함께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때 강철이가 말해줬어. 틀림없는 그놈들이야.”
문도는 김해 강변장어타운 보국 횟집에서 강철, 불곰과 함께 식사하고 나오다가 주차장 건너편 장어구이 집 앞에서 배차돌과 헤어지던 두 사람을 또렷이 보았던 것이다.
“그래? 어제 네가 저놈들 장유파가 부산 유태파하고 손잡고 네 선배가 관리하는 김해 업소를 넘본다고 했던가?”
정훈이 그 말을 기억하고 물었다.
“맞아. 너는 장유파가 여기 진주 이병율파하고 손잡고 있는 것 같다고 했지? 그럼, 저놈들이 혹시 이병율파 만나러 온 거 아닐까?”
문도도 그때 했던 정훈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거 같은데? 저놈들이 설마 진주성 구경하러 왔겠냐?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자.”
해경 소속이면서 요즈음 마약 단속에 주력하고 있는 이정훈 경사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병율파가 마약을 취급한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런 것 같다! 저쪽으로 가자. 내가 다른 얘기도 해줄게.”
문도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이지 않게 슬쩍슬쩍 뒤돌아보며 다시 논개 시비 앞으로 슬금슬금 걸었고, 정훈과 삼봉도 관광객인 척 능청스럽게 뒤를 따랐다.
그러는 사이 장유파 보스와 행동대장이 문도네가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왔다.
“이쪽으로 오는데? 눈치챘나?”
정훈이 끔쩍 놀라며 소곤거렸다.
“쟤들은 나를 몰라! 혹시 네가 들킨 거 아니야?”
문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는 쟤들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아냐?”
정훈도 어이없어 웃었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린 꼴이다.
“강변 쪽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요?”
눈치 빠른 삼봉이 안심하라며 속삭였다.
장유파 두 놈이 직진해서 천천히 도로변 끝의 계단으로 가는 게 보였다.
“저 밑에는 조깅하고 운동하는 강변 둔치밖에 없는데 왜 내려가지?”
정훈이 허리를 펴고 돌로 만든 울타리 저만치 계단 아래를 살폈다.
계단을 다 내려간 두 녀석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서로 몇 마디 나누더니 강가로 걸어가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누군가를 초조히 기다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주변에 남강 구경하러 온 사람 몇몇이 보이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서 산책하며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는 데는 별문제 없어 보인다.
“그냥 바람 쐬러 온 거 아니야? 이병율파 조직원하고 만나려면 어디 호텔 커피숍 같은 데 가면 되지, 보스라는 게 저렇게 사람들 시선도 있는 개활지 강가에서 만나?”
흥신소 ‘배달’의 부산 지부장인 문도는 경험상 아무래도 잘못짚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 조직 간에 처음 만나는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이병율파에서 장유파 두목을 따라온 놈들이 약속한 인원 외에 더 있는지 확인하려고 일부러 저런 데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르지.”
마약사범 단속에 대한 교육을 좀 받았는지, 현역 해경 경사인 정훈이 신중한 생각을 내비쳤다.
“그런가? 꼭 무슨 첩보전 영화에 나오는 장면 같네. 그지, 삼봉아? 큭큭.”
잠시 방심한 게 미안한지 문도가 괜히 삼봉을 끌어들이고 넘어간다.
“아, 참! 아까 네가 다른 얘기도 해주겠다고 했는데?”
깜박했던 정훈이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래. 저기 말이야, 실은 어젯밤에 저 장유파 놈들이 김해 수로왕비릉에 넘어 들어갔어.”
“수로왕비릉에? 뭐 하러? 혹시 도굴이라도 했단 말이야?”
“응. 수로왕비릉 안에 파사석탑이라는 게 있거든. 허 씨 왕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에 싣고 왔다는 문화재야. 그걸 저 자식들이 훔쳐 가려고 했던 모양이야. 흐흐.”
“그래? 그 정도 문화재면 값이 제법 나가겠네! 그런데 그걸 네가 어찌 알아?”
문도 녀석이 생각 외로 아는 게 많다 싶은 정훈이 대견한 듯 물었다.
“응. 마침 거기에 내가 서울에서 데리고 온 직원 두 명이 놀러 갔다가 그 도둑놈들을 발견했어.”
“밤이라며? 야밤에는 그런 유적지는 관광객한테 개방하지 않을 텐데?”
문도가 누구한테서 들은 소리를 제 식구가 경험한 것처럼 지어내나 싶어서 정훈이 캐물었다.
“맞아. 오후 늦게 들어갔는데, 이 자식들이 거기서 소주 까고 놀다가 취해서 잠이 들었던가 봐. 흐흐.”
“아, 그랬어? 그런데, 두 사람이 그 장유파 도둑놈들을 몰아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석탑이라는데, 그런 덩치 큰 문화재를 도둑질하러 갔다면 적어도 열 명은 넘지 않았겠나 싶어 확인했다.
“응. 그놈들이 열 명쯤이라서 처음에는 왕비릉 밖에 나와 신고하려고 도망쳤대. 그런데 그놈들이 잡으러 오니까, 해삼이라는 녀석이 혁대 풀어 휘두르며 막아서고, 멍게라는 놈이 잽싸게 담장을 넘어 나온 거지. 흐흐.”
문도가 자랑스럽게 자기 수하들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랬어? 야~ 너네 해산물 직원들이 용감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정훈이 신나는 문도의 얘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응. 그때 마침 왕비릉 정문 앞에서 강철이 회사 오토바이 배달하고 가던 녀석을 만난 거야. 걔들 데려오던 날 강철이한테 인사시켰거든. 그래서 강철이한테 전화 걸고, 강철이가 근처에 있던 오토바이 배달직원 열댓 명을 보내준 거지. 흐흐.”
“아, 그런 우연한 만남이 다 있네? 그래서 그 강철 씨 직원들이 안으로 쳐들어가서 장유파 도둑놈들을 쫓아낸 거구나! 그런데, 안에 있던 해삼인가 하는 직원은 괜찮아?”
“괜찮기는! 직사하게 맞아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래서 아침 일찍 문병하고 오느라고 너 보고 조금 늦게 오라고 했던 거야.”
해삼과 멍게가 수로왕비릉 안에서 술 마시고 놀았다는 얘기를 할 수 없어 정훈에게는 한마디도 안 했던 것이다.
“아, 그랬구나! 그러니까, 어제저녁에 나랑 식사하다가 전화 받고 급한 일이라며 서둘러 가더니, 그 일 때문이었구나. 짜식 하고는! 그런 신나는 얘기를 왜 아까 올 때 말하지 않고 이제야 해주는 거야?”
정훈이 약간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문도를 흘겨봤다.
“아, 그래. 미안하게 됐다. 그런데 우리 애들이 그런 데서 술 먹고 잤다고 말하기가 좀 머시기 해서 말이야. 크크.”
문도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그래, 그럴 만도 하네. 알겠다. 어쨌거나 너네 직원들이 대단한 것 같다. 열 명이나 되는 도둑놈들한테 그 해삼이라는 직원은 혁대 하나로 덤볐다니까 말이야. 삼봉 씨도 그 정도는 되는 겁니까? 하하.”
문도의 심정을 이해한 정훈이 삼봉에게 농담을 걸며 문도의 마음을 풀어줬다.
“아, 예. 저는 웬만해서는 혁대는 잘 풀지 않습니다. 히히.”
삼봉이 머리를 긁적이며 제 딴엔 개그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래야지! 삼봉이 너, 혁대 잘못 풀었다가 오뉴월에 서리 내리면, 논개한테 당한 그 왜노무 세키처럼 뒈지는 줄 알지? 크크.”
문도도 따라서 썰렁 개그를 남발했다.
“어? 저~기, 웬 배가 오는데요?”
따라 웃지도 못하고 곤욕스러워하던 삼봉이 마침 뭔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응? 어디?”
썰렁 개그의 반응이 시원찮아 뻘쭘했던 문도가 얼른 남강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렸다.
“아, 저기 유람선 같은 게 한 척 오고 있네!”
정훈이 배를 발견하고 손으로 가리켰다.
멀리 강 건너 백 미터쯤 되는 거리에 10인승 유람선으로 보이는 배 한 척이 이쪽 강변을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인다.
“웬 유람선이지? 유등축제 때 아니면 남강에 유람선은 안 띄울 텐데?”
정훈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천절에 열리는 유등축제 때는 10인승 유람선 두 척이 10분 간격으로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다닌다.
차양 지붕이 달린 유람선은 장유파 두목과 행동대장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제법 빠른 속도를 내며 곧바로 다가왔다.
유람선을 발견한 장유파 두 사람은 피우던 담배를 황급히 발로 비벼 껐다. 유람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주시하며 자기들이 만나려는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는 눈치다.
“장유파 놈들이 만나려는 이병율파 조직원들이 타고 오는 거 아니야?”
문도가 틀림없다 싶어 유람선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은데! 저렇게 대낮에 남강에 유람선을 띄울 정도면 보통 놈들은 아니다. 유람선을 통째로 임대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러려면 관계 기관에 연줄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
정훈도 뭔가 좋은 장면을 목격할 것 같은 예감에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폼을 잡고 야단을 떨어댄다냐? 그냥 차 타고 가서 인적 드문 들판 길 같은 데서 만나도 될 텐데 말이야?”
문도가 아니꼬운 눈으로 구시렁거렸다.
“아마도 이병율파가 진주 시내는 자기들이 꽉 잡고 있다는 걸 보여주며 세력을 과시하려는 거겠지. 한심한 놈들!”
정훈도 조폭들이 노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운지 피식 웃었다.
잠시 후 네댓 명이 타고 있는 듯한 유람선이 이쪽 강변에 다다르자, 기다리던 장유파 행동대장이 뭐라고 얘기를 나누더니 상대방이 맞는지, 두목을 앞세우고 유람선으로 올라탔다.
유람선에 오른 두목 이무계가 잔뜩 무게를 잡고 들어가, 안쪽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있다가 일어선,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나는지 정중하게 악수하며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을 옮겨 태운 유람선은 후진하더니, 서서히 뱃머리를 돌려 강 한복판으로 이동하면서 상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사이 유람선 안에서는 두 손님과 댓 명의 주인들이 서로서로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해 장유파 보스와 행동대장이 진주 이병율파 수뇌부와 선상에서 밀담할 모양이다.
진주성 지도 (19세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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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까지 곁들인 주변정세와 더불어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이 사뭇 홍미로 울 것 같습니다.
네, 뱃사공님. 두 조직이 마약 거래로 거들먹거리며 만나는데, 재미있을 겁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