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 따라 걷기 (4차), 5월 4일.
삼례읍 대명아파트 앞의 깔끔한 주차장에 모입니다.
오늘도 인원이 다소 적은 것 같습니다. 날씨도 좋아지고, 내일이 마침 어린이날이니까 가족과 나들이도 가야하고, 이리 저리 바쁘겠지요?
비비정교차로를 건너 수도산으로 올라갑니다.
오늘은 쌍안경을 특별장착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폰 사진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예를 들어 글자를 읽어야 할 장면이 있는 경우 쌍안경은 꽤 유효하지요.
수도산 옆을 지나쳐 비비정 정자로 직행.
토요일이지만 아침 이른 시각이라 한산합니다. 일행이 정자를 독차지하고 여유 있게 경치를 즐길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혼자 들렀을 때는 꽤 많은 인파로 다소 복잡했거든요. 구 만경강철교 위에는 서너 칸의 낡은 열차 차량이 얹혀 있어 까페로 운영되고 있는데 인기가 꽤 높습니다. 이런 저런 행사도 열리는 모양입니다. ‘강 위에 걸린 철도교, 그 철교에 있는 열차 칸’이라는 특이한 분위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나는 좀 ‘빙정이 상합니다.’
정자 아래 수도(隧道, 터널) 사진을 찍으려고 가파른 경사면을 ‘죽을 각오라도 한 듯이’ 내려가는데, 터널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까페열차’에서는 아무도 관심 없고 자기들끼리 노는 데 집중하고 있는지 노래 소리만 들리더군요. 사실은, ‘위험하니까 내려가지 말라’고 말려 주거나, 누군가 소방서나 경찰에 신고라도 해주기를 바랐었는데.
비비정이 서있는 산(?) 절벽을 끼고 도는 산책길도 최근에 생겼습니다. 그 길로 내려가면 옛 절벽에 새긴 ‘호산청파’ 글씨도 볼 수 있고, 1백 년 전만 해도 낚싯배가 다니던 그 강변을 경험할 수 있지만, 우리는 갈 길이 바쁩니다.
강변 산책길을 놔두고 이미 용도폐기된 대간선수로의 일부 구간(즉, 「독주항」에게 자리를 내주고 갇힌 물이 된, 옛 「비비정수도」를 통과하던 구간)의 둑길을 걸어 ‘후상제방길’로 올라섭니다. 다시 만경강의 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둑 오른 쪽에는 폐수처리장과 「삼례 금와습지」가 있습니다. 금와(金蛙), 금개구리. 수변공원 설계 중에 금개구리가 관찰되어 이름을 그렇게 붙이고 개구리의 한 살이를 주제로 하는 공원으로 설정했다네요.
지난주와도 벌써 다릅니다. 벚꽃은 다 지고 푸른 잎이 초여름 같습니다.
호남고속도로 고가교 아래를 통과할 무렵에 오른 쪽으로 해전마을이 보입니다. 해전은 海田이라 써서 '물농사'를 짓던 곳이라는 뜻이 강합니다. 이 마을도 옛 만경강의 원래 둑을 따라 형성된 곳이어서 논밭의 모양이 삐뚤빼뚤, 집들이 비스듬히 한 줄로 늘어서 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직도 물이 고여 들기 때문인지 모아서 퍼내는 양수장이 눈에 띕니다. 당연히 강둑에는 물을 빼내는 수문이 거대하지요. 걷는 둑길 왼쪽, 강 안쪽으로는 과거에 퇴적사면이었던 모래톱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4킬로미터 정도를 걷고, 사천마을 앞 정자에서 잠깐 휴식.
내가 가져간 간식이 의외로 인기가 있어서 순식간에 다 팔렸습니다. 다음주에도 같은 것을 준비해 볼까요.
곧 익산천을 만나게 되고 그 개울을 건너면 익산시 경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지난주에 대수로를 답사하면서 「익산천 크로스」를 경이의 눈으로 바라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물론 오늘 걷는 강변길은 대수로보다 훨씬 남쪽이므로 보일 리 없지요.
폭이 1백미터나 되는 익산천을 건너는 것도 장관입니다. 만경강 본류와 합해지는 어귀는 폭이 훨씬 넓습니다. 마침 최근에 익산천 어귀에 다리가 생겨 건너가기 편해졌습니다. 이 다리가 없었다면 못해도 5백 미터는 상류 쪽으로 더 올라가서 건너야 했을 겁니다.
(사진 위 : 춘포면 춘포리 입구.)
지금부터 또, 곡류하던 만경강이 둑을 곧게 펴는 바람에 내륙이 된 곳, 춘포를 만나게 됩니다.
판문, 중촌, 신촌 등 마을들이 반달처럼 원호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구 만경강 둑을 따라 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증표입니다. 판문마을 앞이 옛 강의 입구가 될테고, 반원을 그리며 춘포초등학교 운동장, 중촌경로당, ‘유명한’ 「호소카와(細川)농장주」의 집앞… 그렇게 돌아 나갔었다는 겁니다.
잠시 강둑에 새로 생긴 정자쉼터에 걸터앉습니다. 춘포면과 이 자리는 역사 테마 관광지가 된 듯, 유리판에 면내의 유명한 장소들을 그림으로 안내해 놓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호소카와 가옥」이 육안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호소카와는 이 춘포면에서 가장 큰 농장을 경영하면서 「신사(神社)」를 짓고, 왜인들의 자녀를 위한 「국민학교」와 조선인자녀를 위한 학교를 따로 지었다고 하네요. 지금 있는 춘포초등학교는 어느 쪽의 학교였을까요. 또, 「신사」는 어느 위치에 있었을까요.
‘판문마을’에 대해 어떤 지역출신 인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널문[板門]」으로 잘못 알아듣고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지, 원래 우리는 ‘늘문이’로 불렀다고. 널판으로 대문을 해 단, 잘 사는 집은 아무도 없었어요.”
하지만 ‘늘문’의 뜻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진실은 이미 백 년 전에 묻혀버렸고, 잘못된 서류만 남은 셈이군요.
춘포 시가지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강둑길을 내려서서 옛 만경강을 건너는 다리를 넘어가면 바로 코앞에 호소카와 가옥이 있습니다. 널찍한 정원, 정원 안에 둔 석등 따위의 장식, 일본건축 특유의 ‘변형 2층’ 목조주택이 매우 특이하게 보입니다.
조선인 농민들을 모두 소작인으로 격하시키면서 드넓은 삼포리와 덕실리의 만경평야를 지배했던 권력자의 집. 실제로 이 집에 살면서 호령했던 것은 호소카와를 대리하는 사람이었다지요. ‘에토’라는 사람이라는 설이 있지만, 「수리조합」의 공식서류에는 나가와라 쿠니히코(永原邦彦)가 지배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중촌마을의 골목을 지나면서 또 타임슬립을 경험합니다. 개항기 풍(風)이 아니라, 60~70년대에 머물러 있는 주거구역.
‘대장’이라는 일제 때의 지명을 아직도 상호로 쓰고 있는 영업장이 꽤 많습니다. 이렇게 넓은 들판을 본 적이 없는 산악지대 큐우슈우의 「번주(藩主)」 호소카와의 입에서 “넓은 터!”라는 감탄이 저절로 터져 나왔을테지요. 그래서 봄개라는 우리말 이름 대신 오오바(大場)촌이라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지명에 대해서 또 어떤 이는 “조선시대에도 ‘대장’이라 불렀다”고 주장하지만, 글쎄요, 그렇다면 같은 춘포면에 있는 ‘봉개(봄개)산’은 왜 ‘대장산’으로 부르지 않았을까요?
점심은 유명한 생칼국수집 ‘싱그랭이’에서 먹었습니다. 닭 한 마리를 통째 넣고 삶아주는 국수전골이 너무나 양이 많아 일행 모두 배를 두드리면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었던 구 춘포간이역에는 들르지 않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驛舍)인데 역앞 도로를 새로 포장한 것 외에 아직은 이렇다 하게 활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행 중 박강서 선생이 어릴 때 누님이 재직하던 춘포초등학교에 가보고 싶다며 아까부터 학교 위치를 가늠해보느라 은근히 안달을 내는 모습. 하지만 일행과 떨어져 폐를 끼치게 될까봐 함께 들러보자고 해놓고도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빈 집, 쓰러져가는 집, 거의 만날 수 없는 동네 주민들… 한 시대 전에 포구로 번영했고 그 후에는 대농장으로 유명했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는 오늘의 모습입니다.
춘포를 빠져 나와 다시 강둑길로 올라섭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