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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장례식
Elvis Presley(1935 - 1977) 장례식
Elvis has really left the building, -by Edward J. Defort
(Funerals of the famous, Volume 3, Kates-Boylston Publications, pp.16~25, 번역 강동구, 2011.6, 사이트: www.kates-boylston.com)
뜨거운 8월 밤의 열기도 열렬 팬들이 록큰롤 황제를 보기 위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그레이스랜드 맨션아파트 밖에 모여드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엘비스를 보기 위해 기다리는 의식은 황제가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있었고 1977년 8월 15일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파트 안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와 그의 여자 친구인 진저 알덴(Ginger Alden), 그리고 엘비스가 아끼는 멤피스 마피아(Memphis Mafia)가 다음 날 저년 메인 주 포틀랜드에 열리는 짧은 투어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엘비스의 매니저인 콜로늘 톰 파커(Colonel Tom Parker)는 행사 전 파티를 위해 포틀랜드에 가 있었다. 스탭들과 뮤지션들은 어둡기 전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포틀랜드로 가 합류할 예정이었고 포틀랜드에 이어 우티카, 시라큐스, 유니온데일, 뉴욕 등의 콘서트 투어를 마친 후 고향 멤피스로 돌아와 2회에 걸친 공연을 할 예정이었다. 투어기간 내의 모든 공연(show) 입장권은 매진되었다.
오후 4시경 엘비스는 일어난 직 후 집 뒤뜰에서 놀고 있는 딸 리사 마리(Lisa Marie)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세계 최고의 음악황제인 것 이상으로 엘비스는 딸을 사랑했다.
엘비스는 언제나 투어를 떠나기 전엔 짜증 섞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 투어에서도 그의 짜증은 상당 수준에 달했다. 이번 투어는 그의 전직 보디가드 두 사람이 “엘비스에게 생긴 일”이란 책을 출판 한 후 처음으로 대중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엘비스의 약복용에 관한 루머에 센세이셔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엘비스의 사생활은 언제나 주의 깊게 베일에 가려있었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러한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참이었다. 사실 딸 리사 마리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엘비스의 집인 그레이스랜드에 머물고 있는 이유 중 하나도 엄마인 프리실라 프레슬리(Priscilla Presely)가 언론의 집중적인 부정적 공격을 당하고 있는 전 남편 프레슬리에게 아이가 힘이 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투어가 가까워짐에 따라 엘비스는 대중, 특히 언론이 자신의 마약복용 증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이에 엘비스는 이번 투어에 최선을 다하고 그의 팬들에게 약이 아닌 자기 스스로 통제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엘비스가 이전의 투어보다 지금 투어에 보다 전문가로서의 압력을 많이 느끼고 있는 원인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팬들이 제일 먼저 안 것은 엘비스의 컨디션이 최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평상시의 180파운드보다 훨씬 체중이 더 나가 250파운드 가량이 되었다. 하지만 엘비스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였고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엘비스는 영화 “맥아더(MacArthur)”를 보기 위해 리지웨이 극장 1인 극장석을 예약하려 했지만 불행하게도 영사기사가 없어 그러지 못했다. 이에 엘비스는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의 주치의 치과의사인 레스터 호프만 박사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됐다. 호프만 박사는 엘비스가 선물한 캐딜락을 타고 다녔기 때문에 그의 방문을 거절할 것 같지가 않았다.
밤 10시, 엘비스는 그레이스랜드 집을 떠나 치과로 향했다. 그는 등 뒤에 DEA(마약단속반)이란 글씨가 새겨진 푸른 색 조깅 수트를 입고 있었고 여자 친구인 알덴과 사촌이자 보디가드인 챨리 호지, 빌리 스미쓰가 동행했다.
엘비스의 집 대문인 Music Gate가 열리자 평상시처럼 팬들의 극성스런 비명이 그들을 맞았고, 엘비스 일행이 엘비스의 차에 오르자 카메라 셔터 불빛들이 명멸했다.
영화를 볼 수 없어 실망했지만 엘비스는 호프만 박사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좋아 있었다. 박사는 간단하게 진료를 했고 일행은 거의 새벽 12시 30분쯤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다. 열광팬들 일부는 여전히 문 밖에 있었다. 대문이 열리자 좀 전처럼 팬들이 환호하고 카메라 셔터 불빛이 번쩍거렸다. 이들은 엘비스의 최후 사진을 찍은 마지막 사람들이 되었다.
맨션 안으로 들어 온 황제는 여전히 잠 잘 생각을 안했다. 새벽 4시 그는 빌리 스미스와 그의 아내인 조에게 전화를 해 자기 집 뒤뜰에 마련된 라켓볼 장에서 진저와 함께 한 게임 하자고 말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엘비스와 진저는 라켓볼 장으로 갔고 엘비스는 빌리와 게임하기 위해 코트로 들어갔다. 여자들은 관람석에서 조용히 이야기 했다. 이후 엘비스는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가 노래 몇 곡을 연주했다. 그가 연주한 곡은 “Blue eyes crying in the rain"과 ”Unchained melody"였다. 넷은 아침 새벽 6시경 라켓볼 장을 나왔다.
조금 후면 비극의 날이 될 그날의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엘비스와 진저는 집으로 돌아와 2층으로 올라갔다. 진저는 땀이 밴 옷을 입은 채 침대위에서 잠에 골아 떨어졌다. 엘비스는 푸른 색 파자마로 갈아입고 침대 앞에 있는 커다란 TV를 켰다.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며 그는 정신심리에 관한 책을 읽었다.
오전 6시 30분, 엘비스는 습관적으로 아래층에 대고 잠자는 약을 가져오라 했다. 약을 먹은 후 침대로 올라가 참을 청했다. 약 90분 후, 진저는 엘비스가 다시 아래층에 잠자는 약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렴풋하게 진저는 엘비스가 머리를 침대 쪽으로 향하고는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그녀에게 욕실에 가 책을 좀 더 읽다가 자겠다고 말했다. 잠이 쏟아지는 진저는 엘비스에게 거기서 잠들지 말라고 말했고 그는 이 20세의 소녀에게 웃으며 “안 그럴게.” 라고 말했다. 이것이 엘비스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Heartbreak Hotel
진저가 잠에서 깬 시간은 1977년 8월 16일 오후 2시 경이었다. 잠에서 깬 그녀는 옆에 엘비스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몇 시간 후 떠나는 투어에 약간 흥분이 된 그녀는 몇몇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곧 집에 갈 거라고 말했다. 약 20분 후 그녀는 욕실 문을 봤고 욕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때 그녀는 아마도 엘비스가 욕실에서 책을 읽다 잠에 떨어져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저는 욕실 문을 수 번 노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반응이 없자 마침내 그녀는 문을 열고 안을 봤다.
거기서 그녀는 엘비스가 독서용 의자의 검은 천 의자에 앉아 얼굴을 앞쪽 바닥으로 향하여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급하게 욕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엘비스를 깨우려 42세 된 록큰롤 황제의 등을 밀쳤을 때 그녀는 공포로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자주색이었고 입엔 충혈 된 피가 응혈되어 있었다. 욕실 전화기로 부들부들 떨며 그녀는 보디가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알 스트라다가 2층으로 뛰어 올라와 엘비스를 보고는 급하게 로드 메니저인 조 에스포시토에게 전화를 건 후 앰블런스를 불렀다.
멤피스 6구역 소방대가 오후 2시 33분 전화를 받고 응급구조사인 챨스 크로스비와 율리리스 존스가 급히 그레이스랜드로 향했다.
안에선 에스포시토가 엘비스에게 구강대구강 회복술을 시도하고 있었다. 엘비스는 등을 바닥에 대고 다리는 무릎 부위에서 구부러져 있었다. 응급 구조사들은 도착하자마자 맥박을 확인하고 환자의 안구에 빛을 비쳐보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2시 48분, 응급차는 그레이스랜드를 빠져나와 급히 인근의 침례병원으로 향했다. 엘비스는 곧 1호 병실로 옮겨졌고, 의사들을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약 30분 후, 의사들은 포기했다. 사실 엘비스는 이미 병원에 도착하기 전 죽어 있었다. 죠 에스포시토가 응급실에서 나오는 의사에게 다급히 결과를 묻자 엘비스의 주치의인 니코폴라스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의사가 답했다.
의사 니코폴라스는 엘비스의 메달, 반지, 파자마 등 소지품이 든 가방을 가져왔고 이어 다음 일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가족에게 알려야 했다. 엘비스의 아버지인 버논 프레슬리는 병환 중이었기에 그의 죽음 소식을 알려야 할지를 망설였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의사가 엘비스의 집에 당도했을 때 버논을 비롯한, 이미 와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의사가 무슨 말을 할지를 일고 있었다. 의사가 “미안합니다.”하고 하자 슬픔의 절규가 맨션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충격에 빠진 진저는 멍하게 창밖을 바라봤고 리사 마리는 울며 이방 저 방을 미친 듯이 뛰어 다녔다.
가족에게 사실을 알린 후 의사는 병원에 전화를 해 언론에 알리라고 말했다. 침례병원의 공보관인 마우리스 엘리옷이 엘비스가 숨졌으며 사망원인은 심상질환이라고 밝혔다.
멤피스의 법의관인 제리 프란시스코 박사는 그의 사망원인이 “심장부정맥”이거나 아니면 “표이성 심장박동“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역시 엘비스가 이미 심각한 심혈관 질환을 가지고 있었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오늘밤 슬프시죠?
엘비스의 사망소식은 들불처럼 멤피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대혼란이 엘비스 프레슬리 대로에서 벌어졌다. 병원 발표 직후 1000명 이상의 인파가 엘비스 집 대문 밖에 모였고, 한 시간이 지나자 이 위대한 음악가를 추도하기 위해 3000여명 이상이 운집했다. 그리이스랜드 밖의 거리엔 팬들로 넘쳐났고 엘비스의 시신은 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멤피스 장례식장에 연락이 갔고 멤피스 역사 이래 가장 큰 장례식 준비를 위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멤피스 장례식장의 부대표이자 사무장이던 랜돌 M 맥스 스노우는 멤피스에서 가장 저명한 장례지도사 중 하나였다. 그는 회사가 직영하는 포플라 가 채플에서 다른 직영 장례식장인 유니온 가 채플로 이동하는 도중 차안에서 엘비스의 사망 뉴스를 접했다. 스노우는 즉시 자기 회사가 엘비스의 장례를 맡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멤피스 장례식장은 1958년 월 14일 엘비스의 모친 장례를 맡은 바 있었다.
한편 장례식장에선 엠바머인 폴 하워드, 엠바머이자 장례지도사인 켄 스톡틸이 사무실에서 엘비스의 사망소식을 라디오 뉴스로 들었다. 이 둘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인 엘비스의 시신을 맡게 될 것임을 알았다.
스노우는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곧 45명 전 직원을 모이게 하고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요원(security people)들이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곧 장례식장 문을 폐쇄하고 추가 보안요원 2명을 추가 고용해 배치하고 엘비스의 시신이 장례식장으로 옮겨질 때까지 보안 경계를 강화했다.
멤피스 장례식장으로의 전화가 폭주해 전화교환기에 과부하가 걸렸다. 행운이나 불운이 그런 것처럼 때마침 교환수는 엘비스가 죽기 이틀 전 휴가를 떠나 없었다. “전화로 조문을 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스노우는 말했다. 장례식장엔 일반 전화도 있었지만 너무나 많은 팬들이 “엘비스에게 사랑하다고 전해주세요.”와 같은 조문 전화를 했고 이는 장례식장에선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은 야간에도 추가로 교환수를 고용해야 했다. 스노우 부사장은 물론 다른 장례지도사 1명도 팬들 전화에 직접 응대했다고 말했다. “종종 피곤에 지치면 친절하게 응대하고 자세한 답변을 하기가 힘들 때가 있죠. 하지만 그게 일인데요.” 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죠 에스포시토는 엘비스의 부친인 버논 프레슬리에 의해 장례식 총책을 맡게 되었다. “전 젊은 장례지도사인 봅 켄달(지금은 작고)에게 장례의 기획총괄을 맡겼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다른 장례지도사인 데니스 해밀톤과 트렌트 웹이 봅 켄달을 도왔다. 켄달은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었고, 그는 종종 장례식장 리무진으로 버논 프레슬리를 태우고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버논은 종종 이 차를 비려 타기도 했다고 스노우가 말했다.
“버논은 자기 아내의 장례식처럼 해 주기를 원했어요.”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에스포시토와 엘비스의 가족과 협의 한 켄달은 용품을 구했다. 엘비스 가족은 은도금한 코퍼 관을 선택했다. “당시 우리는 해당 제품을 한 개 가지고 있었지만 사이즈가 너무 작았어요. 그래서 모회사인 SCI에 의뢰했고 마침 SCI의 자회사인 오클라호마의 핸쿡 장례식장에서 엘비스에게 맞는 동일 제품이 있었지요. 그래서 급히 그 관을 공수했습니다.”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구리 외관을 골랐다.
멤피스 침례병원에서 멤피스 장례식으로 엘비스를 운구할 땐 경찰이 에스코트를 했다. “멤피스 침례병원 안치실에서 고인을 운구해 유니온 가(街)에 접어들어서부터는 우리의 사설 보안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죠. 운구차가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언론과 팬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다행히도 우리 장례식장은 유족대기실과 시신안치실이 분리되어 있어서 우리는 곧장 안치실로 고인을 모시고 들어가 바로 문을 닫았다.”고 스노우는 말했다. 멤피스 경창당국은 많은 경찰요원들을 파견했고 보안은 거의 군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경찰과 장례식장 직원만 시신 안치실 출입이 허가되었다.
한편, 그레이스랜드에선 낮엔 경찰이, 밤엔 보안관들이 교대로 순찰을 돌았다. 그레이스랜드를 출입시엔 누구나 통행증이 있어야 했다. 거의 300명의 경찰관과 보안관, 연방 경호원들이 질서 유지를 위해 투입되었다.
엘비스의 사망 뉴스가 나간 지 몇 시간 후, 36세의 스톡힐이 엘비스의 시신을 단장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스톡힐은 엠바밍을 시작하려 할 때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여기, 당신이 평생 듣던 한 위인이, 바로 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라고 스톡힐은 말했다.
멤피스 경찰은 멤피스 장례식장 내부에도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제가 엠바밍을 하는 바로 건너 쪽 커피 룸에 경찰들이 있었죠.”라고 현재는 미시시피의 리만 장례식장에서 장례지도사겸 엠바머로 있는 스톡힐이 말했다. 스톡힐은 그레이스랜드와 단 몇 블럭 떨어진 곳에 살았지만 엘비스를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종종 엘비스가 차를 타고 그레이스를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압박감을 떨치고 일을 시작했다. “메이컵은 어려운 일이예요.” 라고 그는 말했다. 스톡힐이 메이컵과 엠바밍을 마치는 데는 3시간이 걸렸고 동료들은 매우 잘 되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엠바밍이 끝난 후 엘비스의 시신은 바퀴달린 접이식 테이블에 올려 져 마지막 준비를 위한 장소로 이동되었다. 엘비스의 의류담당 매니저는 엘비스의 마지막 옷으로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엘비스에게 준 흰색 수트와 베이비 블루 면 셔츠, 흰색 캐시미르 타이를 골랐다. 엘비스의 헤어 스타일리스트인 래리 겔러는 엘비스의 은회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보다 까맣게 보이도록 염색을 했다. 엘비스는 최근 몸이 불었기 때문에 보다 평화롭게 보였다. 8월 17일 오전 10시 30분, 시신은 가족들의 뷰잉(vieng)을 위해 그레이스 저택으로 떠났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다
당시 꽃배달협회(Florist Transworld Delivery)의 사무총장이던 버드 리핀스키는 그날 저녁 9시 뉴스를 통해 엘비스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약 1시간 반 후, 그는 멤피스 화훼협회 회장인 린 도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 장례준비는 잘 되어 가느냐?” 고 물었지요. 그러자 현재 전미화훼협회 부회장이 된 그는 “그렇지 않네요.”라고 말했다. 이 둘은 몇 가지를 더 상의하고 다음 날 아침 리핀스키가 비행기 편으로 멤피스로 가기로 결정했다. “전 그때 모든 걸 장례지도사가 진행하는걸 알았기에 최상은 멤피스 장례식장에 가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라고 리핀스키는 회고했다. 그래서 그는 멤피스 장례식장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휴스톤의 SCI에 전화를 해 바로 멤피스 장례식장으로 연결을 했다. “전 바로 맥스 스노우에게 전화를 해 꽃에 관한 것을 돕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그는 ‘좋아요’ 라고 쾌히 응낙을 했죠.”
그러는 동안 화훼업자들은 대리점주들과 함께 장례식에 소요될 꽃들을 확보하기 위해 속속 장례식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리핀스키도 비행기로 곧 멤피스 장례식장으로 왔고, 전국으로부터 꽃들이 공수되었다. 리핀스키는 도일회장과 스노우 부사장 그리고 장례를 총 책임지고 있는 장례지도사 봅 켄달을 만났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벌써 500다발의 꽃들이 장례식장에 도착해 있었어요.”라고 리핀스키는 말했다.
100대 이상의 밴이 꽃을 제 시간에 제 장소에 배달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먼저 시신이 옮겨진 그레이스랜드 저택의 거실 빈소를 장식했다. 그리고 이어 음악실과 식당, 트로피 진열실, 휴식실이 꽃으로 장식되었다. 여전히 더 많은 꽃이 배달되고 있었다.
“린과 나는 맨션의 바깥에도 꽃을 장식하기 시작했어요.”라고 리핀스키는 말했다. 곧 그레이스랜드 저택 전체가 꽃으로 장식되었다. 한편 협회 실무 책임자인 콜 케이지가 리핀스키를 돕기 위해 급히 합류했다.
리핀스키와 도일, 케이지의 노력으로 멤피스는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엘비스 사망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지자 시의 꽃 도매업자와 함께 전 소매업자들 역시 모여 들었다. 도매업자들은 필요한 꽃들을 미리 구매했다.
이웃 도시의 플로리스트들도 멤피스로 속속 모여들어 화관과 “Elvis”란 글자가 새겨진 꽃 장식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실제 사용된 모든 꽃들은 손으로 일일이 꽂은 것”이라고 리핀스키는 말했다.
그는 덧붙이기를 “그레이스랜드 작업을 마친 후 우리는 주변의 꽃 매장을 찾았어요. 매장들은 꽃을 준비하기 위해 철야로 일을 하고 있었지요. 모두가 바빴어요.”
나를 부드럽게 사랑해 주세요(Love me tender)
8월 17일 오전 11시 30분 직전, 가족들은 가족 뷰잉Oviewing)을 위해 모였다. 약 500송이의 붉은 장미로 장식된 외관이 열렸다. 켄 스톡스틸이 가족들의 시신 접견을 옆에서 도왔다. “전 버논 프레슬리가 한 말 ‘오, 나의 아들아, 오, 나의 아들아, 넌 참 예뻤는데.’ 라고 한 말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라고 고는 말했다.
오후 3시경, 일반 추모객들의 시신접견을 위해 대문이 열렸다. 수만 명의 팬들이 엘비스 프레슬리 가를 따라 거의 1마일이나 줄을 서 대기하고 있었다. 공공 뷰잉은 3시부터 6시 30분까지 이어졌다. “날씨가 무척이나 더웠어요. 많은 팬들이 실신할 지경이었죠.” 라고 맥스 스노우가 말했다.
하루가 저물어가도 늦은 한 여름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지역 적십자사는 추모 군중 중간 중간에 수통을 준비했고 새벽엔 응급구조소도 마련했다. 오후 3시, 팬들의 뷰잉을 위해 대문이 열렸지만 추모를 위해 줄을 선 모든 팬들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오후 6시경 문을 닫을 때조차도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관 앞에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비스의 먼 친척 중 하나인 보비 만은 카메라를 몰래 숨겨 들어가 관 속에 누워있는 엘비스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나중 내셔널 인콰이어러(National Inquirer) 지의 표지사진으로 실렸다. 이 사진은 엘비스가 관의 새틴(satin)에 깊게 누워있는 사진이다.
문이 닫힘에 따라 상당한 팬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경찰은 순간적인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을 정도이다. 경찰 간부들은 병력을 대문 주위에 배치했고, 팬들의 흥분은 곧 가시고 군중들은 흩어졌다.
오후 5시경, 리핀스키는 다음 날 엘비스의 시신이 묘지로 움직여야 함을 알았다. “우린 더 이상 꽃을 그레이스랜드로 가져오지 말고 꽃들을 모두 다음 날 아침 묘지로 운반해야겠다고 결정했어요.” 그 때 그레이스랜드에는 800단의 꽃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러는 동안 130에이커 규모의 포리스트 힐스 묘원의 책임자인 랄프 데이비스는 엘비스 프리슬리의 매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엘비스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곧 엘비스의 모친이 포레스트 묘원에 있기 때문에 엘비스가 같은 묘지에 묻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 알고 있는 언론 역시 사망 뉴스 즉시 기자들을 이 묘원으로 보냈다.
그날 저녁 장례식장에선 리핀스키와 도일은 묘원 사람들과 미팅을 했다. “우리는 묘원 사람들과 꽃을 반입하고 묘원을 치장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어요.” 그날 저녁 늦게 그들은 폴로리스트들과 함께 묘원을 답사했다. “우리는 큰 트럭을 빌려 다음날 아침 일찍 그레이스랜드의 꽃을 묘원으로 옮겼어요. 그레이스랜드의 꽃은 총 3300 다발이었는데 우리가 3300개라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각각의 꽃송이에 붙어있는 추모 글을 모두 떼어 센 후 맥스 스노우에게 전달했고 나중에 그는 이를 다시 가족들에게 전달했기 때문이죠.”
꽃다발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이었다. 거의 50개나 되는 벽 크기 만 한 기타 모양의 꽃다발에서부터 하운드 개, 테디 곰, 하트모양, 성경, 왕관모양 등 각양각색이었다. 수백 개의 화환들은 “황제에게, 우리의 황제에게, 유일한 황제”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미국 남부 주에서 온 한 화환엔 “하나님이 불렀고, 엘비스가 응했다.”고 새긴 것도 있었고, 덴마크의 엘비스 팬클럽에선 덴마크 국기 모양의 화환이 도착했는데 불행하게도 플로리스트가 화환의 꽃 색을 잘못 배열해 엘비스 장례식 생중계를 보던 덴마크 팬이 전화해 바로잡는 해프닝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레이스랜드의 밖은 조용하지 못했다. 많은 팬들이 문 밖에서 철야를 했는데 새벽 4시경 흰색 포드자동차 한대가 대로의 차선을 넘어 팬들을 덮쳐 루이지애나에서 온 두 명의 여성 팬이 죽고 여럿이 다쳤다. 운전수인 17세의 소년 트리티즈 휠러는 할 불럭도 못가 체포되었다. 그는 음주 상태였고 2일전 가석방 상태였다. 차엔 10대 소녀 두 명과 다량의 맥주가 실려 있었다. 경찰은 그를 곧 파출소로 연행에 급히 현장을 떠났다.
울음바다가 된 채플(crying un the chapel)
미시시피 주지사인 클리프 핀치는 8월 18일을 추모일로 선언했고 테니시의 주지사 레이 블란톤 역시 주의 모든 국기를 조기로 걸라고 지시했다. 카터 대통령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죽음은 우리나라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다.... 그는 국가 활력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고 말했다. 전 세계 각지로부터 조전과 조화가 쇄도했다.
장례식 수 시간 전까지 조화들이 계속 들어왔다. 이에 묘원은 리핀스키에게 전화를 해 이젠 그만 받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전화주문을 더 이상 안 받기로 했어요. 하지만 화원들은 이미 받아 놓은 주문들이 있었고, 그래서 우린 나머지 꽃다발들을 지역 병원으로 보내 환자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지요.”라고 리핀스키는 말했다.
밖 상황은 비극에서 시장 통으로 바뀌었다. 기념품 판매자들이 호객행위를 해 그레이스랜드 엽서를 1.75불에 팔기도 했고, “엘비스여 영원하라” 라는 자동차 범퍼 부착용 스티커가 빠르게 팔려 나갔다.
오전 9시경 수천 개의 꽃 장식을 묘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 많은 차들이 그레이스랜드를 출입했다. 장례식이 가까워 오자 앤 마가렡, 죠지 해밀튼과 같은 유명 인사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스탬프 콰르텟이 “위대한 그대의 예술, 계곡의 평화”와 같은 찬송가를 불러 전 맨션에 울려 퍼지게 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 에어컨이 쓸모가 없었어요.” 라고 맥스 스노우는 회고했다. “아마도 집엔 200여명이 넘게 있었고,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찼죠.”
코로넬 파커가 리허설을 위해, 그리고 코메디언 잭키 카핸이 추도사를 위해 초대되어다. 그는 “코로넬 파커가 저를 고용했을 때 제게 ‘깔끔하게’ 하라고 말했죠. 엘비스는 언제나 깔끔한 엔터테이너였으니까.”라고 말했다.
주 목사는 C.W.브래들리 목사였다. 엘비스와 그의 어머니는 오순절 신자였지만 엘비스의 계모는 크리스트교 신자였다. 그녀가 설교자를 선정했는데 세 번째 설교자는 TV 복음주의자인 렉스 험바드였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무대 뒤에서 노래를 한 복음 성악가 재이그 헤스, 제임스 블랙우드, 선너가 부른 복음가와 오랜 기간 동안 엘비스의 백업 보칼리스트로 활동한 웨스트모아랜드의 노래였다.
장례식의 절정은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고인 시신을 보는 것이었고 관을 닫기 전 맥스 스노우는 엘비스의 커다란 반지를 빼 죠에피스토에게 줬다. 장례식이 끝난 후 장미로 덮인 관은 흰색 운구차로 옮겨졌고 죠 에피스토, 챨리 호지, 빌리 스미쓰, 라마 파이크, 젠 스미쓰, 제리 쉴링, 죠지 니코폴라스 박사, 죠지 클레인 등이 운구를 맡았다.
19대의 운구차(16 coaches long)
장례식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거대한 차량행렬이었다. 엘비스는 자동차, 특히 캐딜락을 좋아했다. 때마침 멤피스 장례식장은 운구차를 최근 새롭게 장만했다. “우린 최근 모든 운구차를 흰색 차량으로 교체했어요. 당시 흰색 운구차는 드물었죠. 한 대의 허스(Hearse)와 8대의 리무진 그리고 7대의 5인승 캐딜락 등 총 50만 불 가량의 장례식장 소속 운구차량이 장례행렬에 참가했지요. 모두가 흰색이었고 모두 캐딜락 제품이었어요.”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흰색은 엘비스의 색이었기 때문에 장관이었다.
음악의 문(The Music Gate)이 마지막으로 엘비스를 위해 열렸다. 행렬은 엘비스 대로로 접어들었고 이어 묘원을 향해 천천히, 그리고 엄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언론사 취재차량과 손님들을 실은 50여대의 차량이 뒤를 이었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들이 행렬을 에스코트 했다. 각각의 길모퉁이에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묘원의 정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 한 시간가량 지나 자동차 행렬은 마침내 묘원 입구에 도착했다. 가족들이 포리스트 묘원에 온 후 20분이 지나 장례행렬은 빠르게 묘원 입구를 통과했다. 경찰과 보안관, 국가 경호원, 묘원 보안요원들로 이루어진 길고 긴 컨보이 행렬은 도리스 양식의 묘지에 도착했고, 묘지는 기타모양, 하트 모양, 왕관 모양 등의 꽃들로 꾸며져 있었으며, 푸른색 스웨이드 가죽 신발들이 버드 리핀스키와 린 도일의 감독 하에 12명의 플로리스트들에 의해 장식되고 있었다.
가족과 조객들이 반원형으로 서고, 엘비스의 시신이 운구차로부터 내려져 14명의 운구요원들이 모슬렘으로 시신을 운구하는 동안 반마일 떨어진 문 앞에선 수천의 추모 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운구차를 따랐고 이들은 고인을 위해 기도하러 머리를 숙였다. “Sweet, sweet spirit"란 선율이 주변을 가득 울리면서 엘비스는 200명의 가족과 친구, 유명인들이 참석한 10분간의 안장식을 뒤로 하고 영원한 쉼터인 묘지 속으로 내려졌다.
엘비스의 외관(vault)은 납골묘에 있는 8개실 중 하나로 청동장식에 두꺼운 대리석 문이 있는, 저명인에게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납골묘의 문은 잠금장치가 가능한 것이었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조객들은 떠났다. 단지 버논 프레슬리만 늦게까지 묘 옆에 남았다.
꿈을 꿀 수 있다면(If I can dream)
주의 깊은 기획, 가족들의 관심 그리고 기꺼이 함께 한 협업이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례식을 별 탈 없이 잘 끝나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전체적으로 맥스 스노우가 훌륭하게 다른 5명의 장례지도사를 이끌었다. 장례식은 끝났지만 많은 꽃다발들이 그대로 남았다. 리핀스키는 묘원이 이 꽃들을 치우는데도 엄청난 경비가 들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장례식이 끝난 후 죠에스피스토와 만나 묘원 측이 허락한다면 다음 날 아침 추모객들이 와 꽃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좋겠다고 말했어요.”라고 그는 회고했다. 죠는 버논과 상의했고 버논도 동의했다. 엘비스의 매장 후 포리스트 묘원이 일반에 공개되자 밖에서 철야한 약 1000여명의 팬들이 묘지를 찾았다. 이어 거의 반마일에 이르는 줄을 서서 대기하던 수많은 추모객들이 엘비스의 묘를 참배했다. 그들은 묘원 밖의 잔디를 훼손하긴 했지만 일단 묘원에 들어서서는 묘원의 안내를 잘 따랐다. 묘원 관계자들은 팬들에게 도로를 따라 이동해 줄 것과 다른 묘지들을 위해 엄숙함을 유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특별한 기물파괴 등도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남아있는 꽃다발들이 없게 되었다. 그날 약 5만 명의 추모객이 다녀갔다. 추모객들은 꽃다발은 물론 꽃다발을 장식한 리본이나 스티로폼 같은 것들도 모두 가져갔다.
“제 생각엔 약 27명의 플로리스트들이 추모객들이 꽃다발을 가져가는 것을 도와준 것 같아요. 묘원 측의 배려로 꽃들이 의미있게 소진된 것이지요.”라고 리핀스키는 회고했다. 리핀스키에 따르면 3,300여개의 꽃다발은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 때보다 많은, 미국 장례역사상 가장 많은 수였다. 추가로 장례식 때 보내온 640여개의 화분과 꽃병이 엘비스의 이름으로 그 지역 병원에 기증되었다.
너무나 많아서(Too much)
리핀스키는 아직 할 일이 있었다. 장례식이 끝난 지 10일 후, 린 도일은 버논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는 도일에게 꽃을 보낸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전 말했어요. ‘3,300여명이나 되는데요?’ 그러자 그는 ‘그렇다’라고 답하더군요. 하지만 문제가 많았어요. 보낸 분들이 대개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조안과 돈이’라고만 적혀있었거든요.” 보낸 이의 주소가 대부분 없었기 때문에 죠안과 돈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리핀스키와 도일은 전화번호부를 찾아도 보았으나 발신자 모두의 주소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논에게 이 사실을 설명했죠. 당시 우리는 TV에서 엘비스의 최후의 콘서트란 프로그램이 방영될 것이란 걸 알았어요. 프로그램 끝나기 직전 약 2~3분간 버논이 출연, 아들을 대신해 시청자들에게 인사하는 코너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버논에게 ‘TV에서 직접 조화를 보낸 전국의 모든 팬들에게 인사하는 게 어떻겠어요?’라고 말했죠. 약 한달 후 그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끝날 즈음 버논이 출연해 꽃을 보낸 모든 이들에게 감사 말을 했지요.” 라고 리핀스키는 회고했다.
마치는 말(Epilogue)
황제의 매장 후 수일이 지나, 약 300야드 떨어져 있던 엘비스 모친인 글레이디스의 시신이 아들 곁으로 이장되었다.
버논이 포리스트 묘원에 있는 아들 엘비스와 부인 묘를 그레이스랜드의 메디테이션 가든묘원(Meditation Garden)으로 옮기기 위해 멤피스 조정위원회(Memphis Board of Adjustment)와 쉘비 카운티로부터 인가를 받는 데 거의 2개월이 소요되었다. 개장은 9월 25일 아침 7시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26일 아침 6시에 하려했으나 언론에 정보가 유출되어 비밀리에 일정을 바꾸었다. “한 TV방송국이 우리가 시신을 그레이스랜드로 옮기려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일이 워낙 신속히 이루어져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그들은 뭔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랐지요.”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어둠을 틈타, 우리는 엘비스와 모친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었어요. 버논이 첫 번째 운구차의 앞좌석에 타고 우리는 곧바로 그레이스랜드로 향했지요. 두개의 외관과 시신 하강기가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묘원까진 보안관이 에스코트를 했고, 9시에 도착해서 바로 시신을 매장했어요. 아무도 몰랐죠.”라고 스노우는 말했다.
멤피스장례식장의 14명의 장례지도사가 개장에 참여했다. 엘비스와 그의 모친의 시신은 아무런 의식 없이 40평방피트의, 동산모양에 몇몇 조각상을 가진 묘지에 재매장되었다. “개장을 안 사람은 가족들과 변호사밖에 없었어요. 목사도 없었기 때문에 젊은 변호사가 짧고 간단한 기도를 했지요. 그게 전부였어요.”라고 스노우가 말했다.
묘비 석을 즉시 만들어 사용하기는 힘들지만 다행히도 30*72인치 동판 플레이크(plaque)에 화강암 마커(marker)를 사용할 수 있었다. 추가로 모친의 이전 묘지에 있던 기념물을 가져와 다시 세웠다.
마커에 “버논은 많이 배우지는 못해 읽고 쓰는 데는 까막눈이었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다.”라고 새긴 사람은 부친인 버논이었다. 1956년 이후 엘비스는 실상 생각 이상의 위인이었다. 그가 죽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의 전설은 여전히 살아있다. 엘비스에 관한 책이 수개월에 하나씩 나오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가 40여년 이상 음악 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