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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러브인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
흔히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라고 하면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로서 중국 원(元)나라를 여행하여 동양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살았던 최부(崔溥)에게 '마르코 폴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그가 마르코 폴로에 비견될 만큼 훌륭한 중국 견문록 즉 {표해록(漂海錄)}을 지었기 때문이다.
사실 최부는 조선 전기 즉 1454년(단종 2)부터 1504년(연산군 10)까지 살았던 사대부이자 관료였다. 탐진(耽津) 최씨인 그는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났고, 자(字)와 호는 각각 연연(淵淵)과 금남(錦南)이다.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고 어머니는 여양(驪陽) 진(陳)씨로 알려져 있으며 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초시를 거쳐 25세(1478년, 성종 9) 때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당시 대유(大儒)로 평가받는 김종직(金宗直)과 사제관계를 맺었고,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같이 공부하였다. 이로서 최부는 사림의 계보 즉 영남사림의 맥을 이어받은 호남사림의 선도자가 되었다. 또한 재학시설 그는 김굉필, 송석충(宋碩沖), 박담손(朴聃孫), 신희연(申希演) 등과 청지교부계(靑志交孚契)를 조직하여 사림의식을 한층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운(官運)은 빠른 편이 아니라서 29세 때인 1482년(성종 13)에야 알성문과에서 을과(乙科) 제1위로 급제하여 관직의 길에 올랐다. 관직길에 오른 최부는 32세 때인 1485년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에 올랐는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통사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특히 최부는 편찬 작업 중에 지위가 낮고 젊었음에도 불구하고 120여 편의 사론(史論)을 저술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따라서 {동국통감}의 사론은 정통 사림의 계보를 이은 최부의 비판의식과 역사관을 볼 수 있는 책인 것이다. 또한 1486년(성종 17)에는 김종직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개찬(改撰)작업에 참여하는 등 그의 역사의식은 널리 인정받았다.
1487년에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 종5품) 등으로 승진하였고, 9월에 제주지역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인 1488년 정월에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제주에서 귀향 중에 풍랑을 만나 남중국에 표류하였다. 북경을 거쳐 요동을 지나 6월 4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의 표류와 중국 견문과정을 {표해록}이라는 책으로 엮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 그렇지만 왕명에 의하여 책을 진상하였다고는 하나, 상중(喪中)에 한가롭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명교(名敎)에 어긋난다고 여겨져서, 최부가 분상(奔喪)을 마친 후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는 문제로 논란을 겪기도 하였다.
결국 40세(1493)에 이르러서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 정5품), 홍문관 교리(정5품)로 관직에 돌아왔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1495년)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으로 할지 "인종(仁宗)"으로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최부는 홍문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인종"을 주장하였는데, 비록 이것이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논리와 주장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며 곧 그의 역사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듬해 크게 가뭄이 들자 수차(水車)제조법을 가르치게 되었다. 최부는 중국을 여행했을 때 수차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고 {표해록}에 기록하였는데, 아직 수차를 이용한 농업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에는 혁신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을 꾀한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에는 1497년(연산군 3) 최부가 3정승과 이조·호조·예조판서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의를 보고 바르게 직언(直言)하는 사대부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최부는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를 계기로 세칭 훈구파의 세력에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의 거두들과 함께 유형(流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에 최부는 함경도 단천에 유배(流配)되어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로 말미암아 훈구파에 의하여 사림파가 거의 대부분 축출되었는데, 사림 중에 멀리 유배되었던 사람들마저 사형을 당하거나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으며, 단천에서 유배 중이었던 최부도 10월 24일 참수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이와 같이 최부는 길재 - 김숙자 -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영남사림의 맥을 계승받고 있었다. 또한 나주 출신인 그가 사림의 맥을 이은 것은 호남지방 사림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므로 곧 호남사림의 선도자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통국통감}의 편찬과, {동국여지승람}의 개찬 작업 등 국가적 편찬사업에 참여한 것은 이미 그가 정통 성리학자로서 역사의식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최부의 역사의식과 성리학자로서의 기본 소양은 그가 저술한 중국 견문록인 {표해록}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표해록}은 1487년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귀향하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나 남중국으로 표류한 사실과 다시 중국 내지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자세하게 묘사한 기행문이자 일기책이다. 사실 최부가 제주에 파견된 목적은 호적대장에서 제외된 호구(戶口)를 밝혀내고 유망(流亡)한 호구수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호구는 국가를 운영하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국가공민(國家公民)에 대한 노동력과 세금 징발이 필수인데, 이를 위해서는 호구는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3년마다 한번씩 호적(戶籍)과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지만, 생계 곤란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호적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최부는 제주지역 3읍의 유망 백성과 도망 노비를 찾아내어 원적(原籍)으로 복구시키는, 즉 추쇄(推刷)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것이다.
경차관(敬差官)은 국왕이 파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중국에서는 흠차대신(欽差大臣)이라하여 황제가 파견한 관리를 지칭하는데, 조선시대에는 황제의 호칭을 쓰지 못했던 까닭으로 '흠(欽)'자 대신 '경(敬)'자를 쓰게 되었다. 최부는 1487년 11월 1일 전라도 해남을 떠나 다음날 제주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1월 30일 부친상(父親喪)의 소식을 전해 듣고, 윤1월 3일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거센 풍랑 때문에 16일까지 표류하게 되었으며 결국 중국 태주부 임해현(臨海縣) 우두외양(牛頭外洋)에 도착하였다. 이후 최부를 비롯한 총 43명의 일행은 왜구(倭寇)로 오해받아 고초를 받았지만,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되어 북경까지 호송되었고 다시 요동을 지나 의주를 거쳐 귀국하게 되었다.
{표해록}에는 이러한 최부일행의 표류와 여정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되고 있어서,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묘사되었다. 이와 같은 기록된 {표해록}은 몇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제주의 풍속과 서해바다에 대한 내용이다. 최부가 귀향하기 위해서 탄 배는 관용선박이 아니라 제주 수정사 승려의 개인 배이다. 또한 여기에 승선한 뱃사람들은 대체로 제주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이나 대화내용을 통해서 제주의 풍속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주에서는 여자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알고 있다.
이 책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즉 제주에서는 여자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효도할 자식이라 생각하고, 사내애가 태어나면 곧 바다에 나가 고래나 악어에게 잡아먹힐 것이라 하여, 아들보다 딸을 귀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제주사람들의 기질까지도 기록하고 있어서 민속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서해바다에서 표류 중에서 목격한 고래를 묘사하고 있다. 고래의 모습은 정약전(丁若銓)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1814)에 기록된 흑산도 앞 바다의 고래와 일치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서해에서 흔치않았다고 생각하는 고래의 존재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두 번째는 한반도의 서남단에서 남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사실 최부는 표류기간 내내 일기상태와 바람의 방향 그리고 바다의 빛깔을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바다의 빛깔은 중국 송나라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1123)에 나온 "백수양(白水洋)·흑수양(黑水洋)"과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그 정확성이 돋보인다.
대체로 고대 한중간의 항로 중 황해남부사단항로는 {고려도경}에 기록된 대로 중국의 명주(지금의 항주)에서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항진하면 흑산도에 이른다. 최부에 의하여 기록된 당시의 풍향과 일기를 분석하면, 난파된 배의 진행방향이 {고려도경}의 항로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조건만으로도 한반도와 남중국간의 이동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이며, {표해록}은 그것을 실증하는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세 번째는 최부와 같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기본소양과 자부심을 알 수 있다.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조선시대의 문사(文士)임을 자부하는 대목과 사림으로서의 흐트러짐이 없는 태도가 엿보인다. 먼저 표류 중인 윤1월 12일 하산(下山)이라는 섬에서 관음불을 자처하는 해적 임대(林大)를 만나게 되어 노략질을 당하였다. 여기에서 잠깐 최부가 해적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자.
처음에 임대는 해적의 모습을 하지는 않고 최부를 도와주는 뱃사람이었다.
그러나 밤 9시경에 갑작스럽게 무리를 이끌고 최부일행이 탔던 배에 쳐들어와서 금품을 요구했다. 그러나 표류당한 배인 까닭으로 약탈할 물건이 별로 없자 해적들은 최부의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후 거꾸로 매다는 등 폭력을 행사하며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 와중에서 최부가 관리임을 증명하는 인수(印綬)와 마패(馬牌)를 빼앗기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배안에 있는 물건은 모두 빼앗아 갈 수 있으나 인수와 마패는 곧 나라의 신표(信表)로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으니 돌려주시오"라고 말하며 관리의 도를 지켜내었다.
또 칼로 어깨를 내리치며 부상을 입히면서 금품을 요구하는 해적 임대에게 "몸을 저미고 뼈를 부술 수 있지만 어찌 금은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등, 바로 죽음 자초할 수 있는 말한마디를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와 같이 최부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도적에게 굴복하지 않고 조선의 관리임을 내세우며 당당한 태도를 보여, 결코 비례(非禮)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도적을 만나기전 주변으로부터 상복(喪服)을 벗고 관복(官服)을 입어 위엄을 나타내라고 권유를 받았지만, 예(禮)가 아니라며 따르지 않았다. 또한 남중국에 도착해서 왜구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을 때 그리고 중국 관리 앞에 나아가 본인이 조선의 관리임을 밝힐 때 역시 항상 상복을 입고 있어서 가례(家禮)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한 것은 그가 성리학을 깊숙이 이해하고 실천적으로 따르는 조선의 문사임을 표현한 것이다.
네 번째는 방대한 양의 중국 풍토기록을 알 수 있다. 최부가 중국에 도착하여 바로 항주로 옮겨지고 다시 운하(運河)를 따라 북경으로 가는 동안, 때로는 배와 말을 갈아타고 지나간 길의 주변정황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최부가 운하를 지나가면서 재미있는 풍경이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3월 2일 신안역(新安驛)이라는 곳을 지나 여량홍(呂梁洪)이라는 호수를 지날 때였다. 운하의 물 흐름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지세와 원래 존재했던 강의 흐름에 따라 자주 변하였다. 이때 북경으로 가는 최부일행의 진로와 운하의 물흐름이 반대였다. 최부일행은 배를 타고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 이곳을 통과할 때는 인력(人力)으로는 불가능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부일행이 탔던 거룻배를 소 10마리가 물의 흐름과 반대로 끌어 올라갔다고 한다.
또 이튿날에는 서주(徐州)를 지나면서 인부 100명이 운하의 양쪽에서 최부가 탔던 배를 끌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기록되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표해록}에서 여러 차례 목격된다. 이 책은 15세기 당시 중국 운하주변의 풍경 뿐 아니라 운하를 운행하는 방법까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셈이다.
한편 최부는 운하를 만들면서 쌓은 제방을 당(塘)·제(堤)·언(堰)·패( ) 등으로 구분하였고, 제방의 수문 즉 갑(閘)에 대해서도 서술함으로써 중국 제방의 제도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운하를 가로지르는 홍교(虹橋, 무지개 다리), 석교(石橋), 목교(木橋), 지붕이 있는 다리 등 각종 다리 또한 그 형상을 실감나게 전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시스템인 포(鋪)·참(站)·역(驛) 등에 대해서도 창고의 존재여부까지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자세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도회의 거리를 묘사한 것이나, 당시의 시장인 집(集)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세밀히 전하고 있다.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일반 백성의 신앙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각종 사찰이나 사묘(祀廟) 혹은 당시 중국 민간에서 널리 신봉되었던 관우묘(關羽廟)도 표현하였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군사시스템인 위소(衛所)에 대해서도 그 명칭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호송 도중에 수차(水車)의 제도를 보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적은 것으로 말미암아 훗날 조선의 농업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표해록}은 최부의 사람됨과 성리학자로서의 소양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게다가 한중간의 항로를 추적할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으며, 나아가 15세기 명나라의 지방상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조선의 사신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기록한 소위 {연행록(燕行錄)}은 다수가 존재한다. 이 기록들은 대체로 의주에서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다녀온 기록일 뿐이다. 그렇지만 최부의 {표해록}은 연행록에 나오는 북경에서 의주에 이르는 중국을 동북지역을 기록한 것을 포함하여, 북경의 남쪽에서 항주에 이르는 남중국의 풍광을 정확하고 생동감있게 묘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관리를 제외하더라도 전근대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외국인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며, 그 여행을 밑천으로 작성한 기행문도 적지 않다. 그런데 중국 여행기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바로 마르코 폴로에 의해 발간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1299)과, 일본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9세기)를 손에 꼽을 것이다.
{동방견문록}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마르코 폴로가 1275년부터 1295년까지 중국을 여행하고 귀국하여 작성한 책이다. 사실 이 책을 문맹(文盲)이었을지도 모르는 마르코 폴로가 직접 서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귀국 후 베네치아와 제노바와의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1298년부터 이듬해까지 제노바의 감옥에 있었는데, 그 안에서 루스티첼로(Rusticello)에게 동방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경험을 구술(口述)로 말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전해들은 루스티첼로의 서술에 의해 저술된 것이 바로 {세계의 기술(記述)} 즉 {동방견문록}이다. 따라서 이 책은 온전히 마르코 폴로에 구술에만 의존한 채 작성되었는지 아니면 루스티첼로의 대대적인 첨삭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하다. 그 내용이 서아시아·중앙아시아·중국·남해(南海)에 대한 기록이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다분히 서양인의 입장에서 동양에 대한 과장이 섞여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엔닌이 저술한 {입당구법순례행기}는 9세기 당(唐)나라 때 지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얻을 수 있는 자료이다. 엔닌은 일본 헤이안[平安]시대에 살았던 승려이다. 그는 당나라의 밀교를 받아드린 구법승(求法僧)으로 838년 양주(揚州)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순례하고 답사한 후 846년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엔닌의 이러한 구법행위와 수도였던 장안(長安)에 머물렀던 내용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당시 서해를 둘러싼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발하게 해상활동을 전개하였던 신라인들 특히 장보고(張保皐)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동양학자 라이샤워는 엔닌의 여정을 도운 신라인들에 대해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엔닌이 중국으로 항해할 때 신라인 뱃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845년 회창폐불(會昌廢佛)과 같은 중국 정부의 불교탄압 때에도 피신과 귀국이라는 두가지 도움을 모두 신라인들로부터 제공받고 있는데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을 소개하는 2개의 명저는 9세기와 13세기의 중국의 실정을 풍부한 내용으로 자세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최부가 작성한 {표해록}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본 마르코 폴로의 저작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15세기 중국 명(明)나라의 실정을 아주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뿐만 아니라 최부는, 회창폐불 당시 엔닌이 자신이 승려였음을 속이려고 한 것처럼 비굴하지 않고, 조선의 문사(文士)의 기개를 드러내며 결코 중국인들에게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에서 두 여행기의 업적을 뛰어넘을 수 있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표해록}을 3대 중국 견문록의 반열에 올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인정이라도 하듯 최부의 {표해록}은 출간이래, 18세기 일본의 주자학자 청전군금(淸田君錦)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되기도 하였고, 19세기에는 지암(止菴) 박씨부인(朴氏夫人)에 의해 한글 언해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미국학자 Meskill(1953), 일본학자 목전체양(牧田諦亮)(1986), 중국학자 갈진가(葛振家)(1992) 등 외국학자에 의해서도 꾸준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공히 그 가치를 인정받은 {표해록}은 최부가 지닌 사대부로서의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15세기 남중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의 마르코 폴로라 칭송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표류와 중국을 여행하면서 보여주었던 조선 사대부의 기개와 자부심은 현재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되짚어야할 우리의 자세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