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er나 daum에 내 이름을 입력하면 나에게 관한 기록이나 사진이 남아 있을까?
아주 오랫만에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 보다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나에
관한 글과 사진을 발견하였다. 다음 카페글에서 '손관식 선생님께서 교생으로
오셨을 때 직접 출연하셨던 '도깨비 나라'의 소품을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다'는
글을 보고 글 전체를 읽기 위해 클릭해 보았다.
'산들바람' 블로그에 실린 글이 었는데 표현이 생생하고 감성적이기에 글쓴이가
여자일 것이라 생각하며 읽다가 윤연숙의 글임을 찾아내었다. 글을 읽는 순간 지난
60년전 일이 소생되었고 더우기 윤연숙의 부친 고 윤부현 선생님과는 친분이 있었기에
앞이마가 훤하셨던 선생님 모습이 생생이 떠올랐다. 윤선생님과는 60년대 말부터
한국 글짓기 지도회 이사로 거의 다달이 만나왔었다.
옛날을 그리며 여기 실린 글을 몇 편 더 읽어 보았다. 윤연숙의 글에 나오는 한광접은
1960년 내가 창영에서 5학년 7반을 담임했을 때 8반인 옆반이었으나 창영 유년대
대원이라 잘 알고 있다. 그 해 우리반에는 김호경, 고광식, 고윤정, 최승주, 김영서 등
착하고 귀여운 애들이 많았다.
4.19 의거가 있던 그 해 가을 교내 학예회에서 나는 연극지도를 담당했는데 흥부놀부 연극에
흥부역이 김호경, 놀부역에 이풍미를 출연시켰었다. 이 두 사람은 졸업후 헤어져 소식도
모르다가 서울대와 이대를 졸업후 우연히 다방에서 만나 사귀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자
나를 찾아와 주례를 부탁하였다. 나는 극구 사양하다가 처음으로 주례를 서느라 신랑 신부보다
더 긴장하고 준비했던 일이 기억된다.
1960년도 부터 시작된 창영의 합창의 메아리 친 교내 합창대회. 일제고사가 없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산수과 기초계산능력이 부족함을 느껴 실시한 교내 산수과 경시대회도 생각난다.
그해 교실마다 창가에는 제라늄 꽃화분을 설치했는데 다른 반 보다 더 잘키우려고 경쟁하던
일도 기억이 새롭다.
나는 창영에 첫 부임하던 해 1957학년도에 남녀 공학인 4학년 11반을 담임했으나 군에
입대했다가 복직후인 1959학년에는 5학년 8반(남자반) 1960학년도에는 5학년 7반(남자반)을
담임했으면서도 윤연숙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어떤 행사를 통해 여러 교사들에게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또 내가 창영에서 가장 나이어린 젊은 남자교사였기에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인 창영의 특별활동을 거의 다 담당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창영 전교 어린이회, 창영 어린이 신문, 창영 어린이 은행, 창영 방송실, 창영 우체국까지 모두
거쳤고 3학년 이상은 학년마다 유년대 두 개대, 유녀대 두 개대, 모두 열 여섯대의 창영
유년유녀대의 총대장도 맡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학교에서 담당부서를 배정하면 어떤
일이든 불평없이 했기 때문에 남들이 제일 꺼리는 대강당 청소, 학교 논관리, 제일 구석진 햇볕이
잘 안드는 화단을 배당해도 군소리 안하고 열심히 했었다.
60년이나 가까이 된 일을 윤연숙의 글 속의 내 이름을 발견함으로써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게
되어 한참동안 혼자 즐거웠었다. 요사이는 팔십이 훌쩍 넘어 흰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어제 한
일도 분명히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새까맣게 잊고 지내던 일이 이렇게 술술 생각나다니.
그리운 옛날이여!
* 자서전 '팔순의 손관식이 살아온 이야기'는 출판사에서 인쇄하기 전 교정을 보아달라고 보낸
것인데 창영에 근무했던 귀한 추억이 담겨있기에 보냅니다.
팔순의손관식이살아온세상.pdf
팔순의손관식자서전표지.pdf
첫댓글 선생님~
코로나 사태로 집에 갇혀있는 시간이 지루해 잠자고있던 카페를 열어보니 선생님의 글이...가슴이 멍멍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이군요..선생님..기억해주셔 고맙습니다..흥부놀부연극에서 전 흥부아내 역할이었어요..놀부아내의 화려한 양단치마 저고리에 비해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내 의상 몰꼴이 속상했지만 대사가 많다는 것에 만족했던 그 어린 날이 떠오르네요..선생님. 저도 한국나이로 71세.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습니다..회답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선생님..전 5.6학년때 1반 반장이었어요..양지순.현덕용선생님반..졸업식때는 글짓기 특기상을 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