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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집회
신성한 경륜
4. 하나님의 지혜에 따른 신성한 경륜
2013. 7. 28am.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a. 창조 안에 있는 신성한 경륜 (1)
사람을 창조하시고 또 사람으로 오심.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새 창조를 이루심. 분배하기 위해 다양한 과정을 거치심.(성육신-못 박힘-구속-부활-그 영-다시 남) 하나님의 복음은 자신의 성품을 사람 속으로 분배하여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임.
첫 번째가 창조 안에 있는 신성한 경륜이다. 하나님하면 제일 중요한 것이 창조다. 창조는 사람을 창조한 것이 중심이 된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이 나와 있는데, 사실은 사람 창조한 것을 말하려고 여러 가지를 얘기한 것이다. 달이 어떻게 생겼나? 이런 것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런 것을 과학적으로 알아보려고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문제는 사람이다. 목표가 사람이니까. 그렇게 알고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만들어가는 모든 과정이 사람 만드는 과정이다. 예를 들면 어떤 조각가가 돌이나 나무를 갖고 만들어간다. 처음에 보면 뭘 만들려고 하는지 모른다. 차츰차츰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구별이 된다.
창세기 1장은 그런 것이다. 빛이 있으라. 궁창이 있으라. 땅이 있으라.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은 사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어떤 물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만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면 바로 그런 과정이 우리 안에 있다. 빛이 들어오는 과정이 있고, 땅이 드러나는 과정이 있고, 식물이 나는 과정이 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얘기하는구나.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성서학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으로 해석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하면 창조가 중심이다. 창조가 중심이니까 결국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인데, 창조보다 지혜로운 일은 없다. 사업을 해도 창업을 하는 사람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라야 된다. 남이 만들어놓은 회사에 가서 일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할 수 있지만 내가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못하는 일이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창조의 지혜다. 창조의 지혜라는 말은 전혀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말이다. 창조적인 지혜라고 하면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지혜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정주영회장이 울산 갯벌에 현대중공업을 건설한 것은 창조적인 것이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었다. 갯벌 밭에 도면 한 장을 그려서 조선소(중공업)를 만들겠다고 영국까지 돈을 빌리러 갔는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종이 한 장 가지고 가서 돈을 빌려왔다. 그런 일을 아무나 하겠는가? 박대통령이 왜 정주영 회장을 밀어주었는가? 그 사람을 보니 일을 하겠는 것이다. 영국에 가서 은행가를 만나서 도면을 내놓고 내가 조선소를 하려고 하는데 돈을 빌려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사람 같으면 뺨을 때려서 보냈을 것인데, 그 사람들은 속은 똑같지만 겉은 신사적이라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으니까 좋은 생각인데, 배 한척을 수주해오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수주를 못 받아 올 줄로 생각한 것이다. 조선소도 없는 사람이 배 수주를 하겠다고 하면 누가 계약을 해주겠는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선박회사 누구를 만나서 내가 배를 만들어줄테니 계약만 해달라고 했다. 그 사람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계약해주어 보았자 손해날 일도 없고 이상한 사람이 왔는데 뺨 때려 보내기 뭣 하니까 도장을 찍어준 모양이다. 그것을 갖고 다시 영국 은행에 가서 배 한척 수주를 해왔다고 하니까 은행가가 약속을 했으니 어쩔 수 없이 돈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을 아무나 하겠는가? 아무나 못한다.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창업한다는 일은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정주영회장이 특혜를 받았느니 이병철회장이 특혜를 받았느니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아무나 특혜 받을 수가 없다. 특혜 받을만한 실력이 있어야 받는 것이고 자격이 있어야 받는 것이다. 아무한테나 특혜를 주겠는가?
창조라는 것은 아주 신비로운 것이다. 계산해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계산 잘한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이분을 잘 알고, 만일 이분이 우리 속에 계신다면 우리도 창조적인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창조적인 하나님이,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일 우리 속에 생명이 되어서 산다면 나도 창조적인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공짜니까 한 번 생각해보자. 나도 창조적인 인간이 되겠구나.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어떻게 되겠어~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시기만 한다면, 그 하나님이 우리 생명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도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이 생각을 우리가 해야 된다.
이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이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분배하여 그 사람과 한 마음이 되면, 자기와 한 마음이 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갖는 것이다.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자기 마음을 국민에게 분배하여 온 국민이 그 대통령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다면, 그 나라야 말로 하늘로 올라간다. 천당이 따로 있겠는가. 그렇게 못하니까 힘을 많이 쓰고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잘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못한다고 하니까 해내는 것이 어렵겠더라. 그런 소리는 안 듣고 자기 할 일을 해야지 듣고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소리 들으면 잠 못잔다. 하기야 큰 사람들이니까 그런 소리를 들어도 까닥 않고 하겠지만 참 어렵겠더라. 5천만명이 입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이 입이 가만히 있는가. 한 마디씩 하는데, 그것을 잠재워가면서 일을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겠는가. 백성이 대통령의 마음을 알아서 둘이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그보다 좋은 나라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천국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나라가 없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그런 나라가 없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 죽어나 사나 하나님 나라를 기대해야 된다. 되든지 안 되든지 기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늘 대책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하라고 한다. 다른 대책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마음이 되는 것 외는 대책이 없다. 이것은 꼭 세계를 말한 것이 아니고 행복에 대해서도 그렇다. 인생이 참으로 행복하려면 하나님과 내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행복하지 이것이 안 맞으면 행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어놓으신 분과 지음 받은 자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행복하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행복하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마음이 서로 틀리면 행복할 수가 없다.
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는가? 안식이란 말은 여호와의 안식이라는 말이다. 우리 안식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편하게 쉬게 하는 날이다. 하나님이 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피조물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주어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내 키가 165cm인데 165cm를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옷값이 안 들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래야 165cm를 만드신 분이 쉴 것이다. 부모가 165cm를 낳고 싶어서 낳았겠는가? 낳다보니 낳았는데 날마다 와서 왜 나를 165cm로 낳아서 길거리 나가면 창피하게 만드느냐고 하면 그 부모가 어떻게 쉬겠는가? 안식을 못할 것이다. 그런데 165cm된 것이 전철을 타니 너무 편하고, 식당에 가도 편하고, 옷가게 가도 돈도 덜 들어 너무 좋다고 하면 아버지가 편하게 쉬실 것이다. 그 아버지가 쉬는 것이 안식이다. 여호와의 안식이다. 우리 인생이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다. 안식일 그날을 지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가지 지킨다고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열심히 해놓고 나를 왜 165cm로 낳았느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안식이 되겠는가?
만드신 이가 지음을 받은 사람이 ‘참 만족합니다.’라고 할 때 행복하게 되고, 이럴 때 세상이 좋아지게 된다. 대통령이 불철주야 잠도 못자고 애를 쓰는데 ‘정말 수고 많이 하십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용기가 나겠는가? 우리보다 정말 편하게 못 잔다. 잠을 편하게 자겠는가? 보통 심장으로는 잠을 편하게 못잘 것 같다. 강심장들이니까 그렇지. 잘하든지 못하든지 나보다 잘한 것이니까 내가 못할 일을 하는 거니까 그냥 감사하다고 해야 일하는 사람이 힘이 나서 신나서 할 것이다.
하나님에게도 똑같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이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정말 지혜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명석하십니다. 어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했습니까?’라고 해야 하나님이 만족하신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공짜로 막 퍼준다. 사람도 너무 기분이 좋으면 만족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막 퍼준다. 복 받는 것이 다른 것이 없다. 아주 간단하다. 회사(직장)에 나가서 복 받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상사에게 매일 감사하다고 해보라. 그냥 퍼준다. 잘못해도 봐주고, 잘할 수 있는 일만 시키고, 미운 놈한테는 못할 일만 시킨다.
하나님 잘 믿으면 모든 것에 다 통한다. 하나님 잘 믿는다고 밥을 주냐, 옷을 주냐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제대로 몰라서 하는 소리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으면 모든 것에 다 통한다. 세상원리는 다 똑같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우리가 그렇게 알아야 된다. 콧구멍을 봐도 지혜롭게 만들었고, 어디를 봐도 지혜롭게 만들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해보면, 공상이지만 웃음이 나오고 재미있을 때가 많다. 어째서 콧구멍을 두 개를 만들어서 감기가 들어도 막히지 않게 만들어놓았는지. 절대로 두 개가 한꺼번에 막히지 않는다고 한다. 한쪽이 막히면 한쪽이 터지고 또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이 터진다고 한다. 콧구멍을 한 개만 만들어놓았다면 막혀서 죽을 판이다. 그런데 두 개를 만들어서 살게 만들어놓았다. 너무 신기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만들었다고밖에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만든 것을 본 일이 없다. 말이 그렇지 어떻게 하나님이 손가락 발가락을 다 만들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지’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로운 분이 만들지 않았으면 누가 또 이렇게 지혜롭게 만들었겠느냐고 생각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믿는다. 나도 굉장히 따진다. 여러 분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더 따진다. 그런데 도저히 안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믿는다. 나도 옛날에는 의심을 많이 했다. 젊었을 때 몇 년 동안 의심을 했다. 정목사님이 신학교를 다닐 때 촛불 켜놓고 밤새도록 얘기했다. 토론했다. 나도 아주 끈질기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님이 다음에는 초 사갖고 오라고 하셨다. 전기불이 없는 곳이니까. 나도 많이 따졌지만 안 믿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믿었다.
1)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 안에서 창조하심(창1:26)
하나님은 사람을 얼마나 지혜롭게 만들었는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다. 그 말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위임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형상을 따라 그 사람의 모양대로 만들었다. 우리가 지금 해석해보면 예수의 형상을 따라 예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구나. 이렇게 알 수 있다. 위임받은 사람! 하나님이 무엇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뭘 맡길 수 있는 대상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만들었다. 물질적인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맡기려고 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그 존재의 형상의 따라 그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지금 내가 땅을 파서 집을 지으려고 한다. 손으로 해보니까 너무 아프다. 언제 할 수가 없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고 만들어놓은 것이 호미이고, 그 다음 좀 발전한 것이 괭이이고, 그 다음 좀 발전한 것이 곡괭이다. 그것을 가지고도 너무 힘이 들고 어렵다.
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인왕산 꼭대기까지 다 판자촌이었다. 4.19가 나서 무법천지가 되어 인왕산 꼭대기까지 판자촌이 되었다. 이것을 5.16혁명이 나서 김현욱 서울특별시장이 이것을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싹 뜯고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8평짜리 아파트 분양권이라는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공사였다. 딱지를 주고 어디 있다가 오면 아파트가 지어지면 주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 뒤의 여러분이 잘 아는 무너진 와우아파트다. 이 땅이 보통 땅과 다르다. 속에 들어가면 바위고 겉은 부서럭부서럭한다. 이것을 그때 장비가 없으니까 사람이 곡괭이로 팠다. 1m를 팔려면 얼마를 파야 되는지 모른다. 차라리 이것이 돌멩이 같으면 다이나마이트로 깨면 되는데 이것은 깨면 다 부숴져버린다. 곡괭이로 팔 수 밖에 길이 없는 토질이다. 거기에 1m를 파서 기초를 해서 5층 아파트를 지었던 것이다. 그것이 왜 무너졌는가? 그 땅이 파면 팔수록 딱딱한데, 공기만 한 번 들어가면 푸석해진다. 기초해놓은 것이 물 들어가고 바람 들어가니까 푸석해져서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던 것이다. 그 시절에 곡괭이질을 해서 그 아파트를 지었다는 것이 보통 일인가! 군대가 아니면 못한다. 군대가 아니면 발상 자체를 할 수 없다. 군대니까 밀어부쳐서 한 것이다. 거기서 더 좋은 기계가 없을까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굴삭기가 나왔다.
사람 머릿속에는 땅을 팔수 있는 형상이 속에 그려져 있는데, 그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임하기 위한 이런 사람이었으면 일을 맡기겠는데~하는 구상이 있다. 그 사람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뜻이다. 이제 예수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가 된다. 예수의 형상을 따라 예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엉뚱하다. 예수가 언제 온 사람인데 예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것인가? 그 말이 그런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임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이다. 용도가 그렇게 결정되었다. 모든 물건은 만들 때 다 그렇게 만든다. 사람 속에 어떤 구상이 있는데, 그 구상을 따라서 설계하고 만드는 것이다.
이 탁자도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다. 내 머릿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었다. 우리 교회가 호산나 산부인과에 있을 때 하도 형제들이 밀고 닥치고 하여 앞에 구멍이 뻥 뚫렸다. 새로운 탁자를 만들어야 되는데 보통 교회의 강대상은 우리 교회에 맞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앉아서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없었다. 새로 짜야 하는데 목공소마다 가서 얘기를 해도 못 알아들었다. 어느 목공소에 가서 얘기를 했는데 딱 알아들었다. 됐다 싶어 그 사람에게 맡겼더니 이렇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30년 이상 쓴 것이다. 우리 교회 박물관에 보관해야 할 예정이다. 내 머릿속에 있던 것을 그대로 만들어내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는 말은 바로 그런 뜻이다. 사람은 원래 만들어지기를 어떤 특수한 용도를 목표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 목표에 사용되어지면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나오게 된다. 이 목표에 사용되지 않으면 항상 불만인 것이다. 뭘 해도 불만이 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이는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경륜 안에서 볼 때 인간은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며 저절로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그 위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진 존재인 것이다.
이는 우주 안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우리 편에서 볼 때 그렇다. 원숭이에게 하지 않고 사람에게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원숭이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으면 우리는 저주다. 사람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해보면 축복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 경륜 안에서 볼 때 인간은 우연히 생긴 것도 아니고, 저절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우연히 생겼다, 저절로 생겼다고 하지만 우연히 생길 수도 없고 저절로 생길 수도 없다.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것은 다 엉터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이렇게 만들어졌구나. 그렇게 사용해보면 딱 맞는다. 저절로, 우연히는 다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그 위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어졌다. 우리가 살아보면 확실하게 증명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의 위임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 그리스도의 궁극적 실제는 아들이다. 완전하게 위임을 받아 그 위임을 실행하려면 아들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형상이란 말은 신의 형상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만들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보면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보면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그분이 꼭 마음에 들도록 위임할 수 있으려면 누구라야 자기 생명을 위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들이다. 아들밖에는 없다. 아들의 형상을 따라 아들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아들만이 완전한 위임을 받을 수 있다. 생명의 위임이니까. 일 같으면 아들이 아니어도 되지만 생명의 위임이니까 생명의 위임을 완전히 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들 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해석하기를 아들의 형상을 따라 아들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했다. 우리는 아들의 형상을 따라 아들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아들이 되도록 창조된 것이다. 갈수록 행복하다. 아들이 되도록 만들었다는데 더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이 위임을 실행하려면 아들이어야 된다. 내 생명의 위임을 실행하려면 아들이어야 된다. 다른 사람은 불가능하다. 아들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 때문에 중요하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이 부모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면 기분 나쁜 것이다. 어디가 닮아도 닮아야 기분이 좋은 것이다. 발가락이라도 닮아야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고, 자기 생명이 위임 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임으로 인해서 지어진 존재들이다. 섣불리 저절로 만들어졌다거나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인생 자체를 비하시켜버린 것이다. 완전히 묵사발 시켜버리고만 것이다. 사탄이 한 소리다. 사탄이 제일 시기한 것이 사람이다. 인간 존재를 어떻게 하면 완전히 묵사발 만드느냐가 사탄의 전략이다.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저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사탄의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과학적이고 이치에 맞겠다는 식으로 끌려 들어가면 안 된다. 끌려 들어가면 자기가 망하는 것이다. 원숭이가 진화됐다거나 아메바가 진화됐다거나 그런 소리를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는가? 원숭이가 진화됐다면 자기가 원숭이라는 말 아닌가? 아메바가 진화됐다면 자기가 아메바라는 말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런데 소리를 자기가 함부로 하는가? 누가 옆에 와서 조금만 잘못해도 기분 나빠서 얼굴 붉히는 인간이 아메바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인간이 비참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을 수행하는 자들(천사들)을 하나님 아들이라 칭했다. 그러나 이들은 영이므로 인간을 구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종들을 보내었고 선지자들이 있었으나 완전한 구속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제물들을 통해서 예표를 보여 주셨으나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것은 천사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하나님 명을 수행한다고 해서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말이 나온다. 거기서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말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또 세상에서는 하늘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황제나 시저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천자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신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늘의 위임을 받아서 시행한다는 뜻이다.
이런 영이라는 존재들은 영이기 때문에 인간을 구속할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종들을 보내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구속을 이룰 수 있도록 얘기했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제물을 만들어서 제물을 드려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역시 이 제물도 사람이 아니므로 온전하지 못했다. 상당히 섬세하기는 했다. 레위기 공부할 때 다 보았을 것이다. 제물을 드릴 때는 흠 없는 것으로 드려야 된다. 1년 된 것을 드려야 된다. 1년 된 것을 드리는 것은 송아지도 1년 된 것이 최고로 맛있고, 양도 1년 된 것이 최고로 맛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수입쇠고기가 왜 맛이 없는가? 너무 늙은 것을 가지고 와서 맛이 없다. 폐기처분한 소를 가지고 와서 맛이 없다고 한다. 같은 소고기라도 호텔에 들어가는 것은 1급이 들어간다. 호텔에 가서 먹어보면 너무 맛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사서 먹어보면 맛이 없다.
제물을 왜 그런 것으로 드리라고 했는가? 제일 좋은 것으로 드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제일 좋은 것으로 드려도 내 자신이 아니다. 그래서 또 제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라고 했다. 나와 동일시하라는 말이다. 그렇게 해도 나와 안 통한다. 온전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보내시어 이 일을 완성하심으로서 그리스도라 칭하게 되었고 사람들에게도 아들로 인정받게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 안에서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온 우주 안에 선포 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보내셔서 이 일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라는 칭함을 받게 되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생리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은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 안에서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이렇게 이름이 정해졌다. 거의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아들하면 생명의 위임을 받았다는 말이고,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 위임을 실행했다는 말이다. 실행하기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위임을 수행하는 면에서 그렇다. 이것을 생리적으로 존재적으로 하나님은 아들이 있고 없고로 말하려면 끝이 없다. 위임을 수행하는 면에서만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신성한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수행하는 아들이 되도록 지어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고 이를 수행하면 아들들로 인정 된다. 그러나 아들이 아니면 이 위임을 수행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먼저 죽음과 부활을 거처 맏아들이 되시고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을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인간은 신성한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수행하는 아들이 되도록 지어졌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는 우리가 신성한 위임을 받아서 아들이 되도록 아들이라 칭함이 되도록 존재로 지어졌다. 그런데 어떻게 아메바에서 진화했다고 하겠는가? 이것을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안 했지만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희랍어로 번역하면 그리스도다. 왕이나 제사장은 기름부음 받았다. 왜냐하면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기름부음 받은 왕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았다. 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하여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름부음 받았다. 이 사람 역시 신약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면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고 이것을 수행하면 아들로 인정된다. 그러나 아들이 아니면 이 위임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계서 먼저 죽으심과 부활을 거쳐서 맏아들이 됐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맏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그가 맏아들이 되셨다. 맏아들이라는 말은 처음 나왔다는 말이다. 우리가 똑같은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와서 위임을 받아서 그 위임을 실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이름이 되었다. 이것은 혼자만 가진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고 모든 사람에게 분배되려면 맏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왔다. 왜? 이것은 될 수 있기 때문에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왔다. 다음에 아들들이 없으면 맏아들이 아니다. 독자다. 다음에 아들들이 나오면 맏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아들들이 나오기 때문에 맏아들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서 그 위임을 실행할 사람들로 창조된 것이다. 어떤가? 이렇게 해도 감사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감사하지 않고 무엇을 감사하겠는가? 나는 이보다 감사한 일은 없는 것 같다. 세상에 감사한 일이 많기 많지만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은 없는 것 같다. 내가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그 위임을 실행할 아들이구나. 그렇게 나를 지었구나.
150cm면 어떻고 2m면 어떤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 150cm라고 수행을 못하고 2m라고 수행을 못하는가? 그것이 아니다.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나는 이러니까 나는 저러니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너는 나보다 잘났냐, 너는 나보다 못났냐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위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지어졌다. 키가 크다고 잘된 것도 아니고, 키가 작다고 안 된 것도 아니다. 그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돈이 있다고 되고, 돈이 없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성질이 좋다고 되고, 성질이 나쁘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성질 나쁘다고 한탄하지 말라. 성질 나빠도 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성질 나쁘게 만들어놓은 것을 어찌 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쓰신다.
우리 교회에서 보니까 못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다 쓰인다. 이 사람은 이렇게 쓰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쓰인다. 참 신기하다. 교회가 아니면 이런 것이 증명이 안 된다. 교회가 있다 보니까 이런 것이 증명이 된다. 이 사람도 쓰이고 저 사람도 쓰이네. 이런 사람은 이렇게 쓰이고 저런 사람은 저렇게 쓰이네. 이런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볼 수 있으니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넓어지는가. 옛날에는 좁게 생각하여 한 가지 알면 두 가지 모르고, 두 가지 알면 한 가지 몰랐는데, 지금은 모든 것이 알아진다. 또 모든 것이 참아지고, 모든 것이 기다려진다.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절제하며 사랑은 오래 참고 줄줄이 나오는 것을 하려면 도저히 안 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보니까 다 된다. 우리가 그런 마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저렇게 변했나. 이렇게 생각이 든다. 옛날에 그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부끄럽게 된다. 너는 이런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이런 세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는 없다. 한 번 찍히면 그만이다. 영원히 찍히는 것이다. 교회는 얼마나 좋은 곳인지! 사람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내가 그렇게 지어졌다. 우리가 그렇게 지어졌다.
2) 사람은 두 요소로 지어 산 혼이 되게 하심
두 번째는 사람은 두 요소로 지어져서 산 혼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수행하려면 그 일에 적합한 기능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산 혼이 되게 하였다고 했다.(창2:7) 이는 육체는 흙과 같고 그 기능은 산 혼이라는 것이다. 산 혼은 말씀을 받아 생산하는 기능을 말한다. 마치 흙이 씨를 받아 열매를 생산하는 것과 같다. 바울은 하나님을 담기 위한 그릇이라 했다(롬9:21~23). 또한 산 혼이란 표현하는 기능이다 전기를 표현하는 전등, 혹은 모터와 같고, 전파를 표현하는 라디오, TV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수행하려면 그 일에 적합한 기능이 필요하다. 호미를 가져야 땅을 파지 다른 것을 가지고 땅을 파겠는가? 어떤 기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면 어떤 기능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을 산 혼이 되게 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에 불어넣어서 사람이 산 혼이 되게 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사람의 두 구성 요소이다.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니까 산 혼이 되었다. 호미를 보니까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있고 땅 파는 곳은 쇠로 되어있다. 호미는 쇠와 나무로 구성되어 있으나 기능은 땅 파는 것이다.
사람도 역시 두 가지 원소로 지어졌는데, 기능은 산 혼이 되었으니까 무엇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다. 육체는 흙과 같고 그 기능은 산 혼이다. 산 혼은 말씀을 받아서 생산하는 기능을 말한다. 산 혼이라는 것이 똑같아서 안테나와 같아서 모든 전파를 다 받아들인다. 주파수를 선별하지 않으면 온갖 것이 다 들어온다. 시끄러운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주파수가 제대로 맞지 않아 온갖 소리가 다 들어오니까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주파수가 고정이 안 되니까. 옛날 라디오가 온갖 것이 다 나와 시끄러울 때가 있다. 한 가지만 나와야 된다. 인간은 잘난 척하려고 다 들으려고 하지만 다 들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하나만 똑똑하게 들려야 한다. KBS면 KBS 하나만 똑똑하게 들려야지 SBS, MBC 한꺼번에 다 들으려고 하면 안 된다. 한 가지라도 똑똑하게 듣는 것이 낫다.
산 혼이라는 것은 말씀을 받아 생산하는 기능이다. 이것은 흙과 마찬가지다. 흙이 씨를 받아서 열매를 생산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아까 말한 대로 흙의 문제점은 아무 씨나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 가지 씨만 받아들이는 흙은 없다. 모든 씨를 다 받아들이니까 만일 농부가 없으면 잡초밭이 된다. 야당 얘기를 듣다보면 야당이 돼버리고, 여당 애기를 듣다보면 여당이 돼버리고, 하나님 말을 들을 때는 하나님 사람이 되고, 사탄 말을 들을 때는 사탄의 사람이 되고, 듣는 대로 돼버린다.
그래서 주파수를 고정시켜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 그러면 인간은 안 된다. 인간은 복잡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완전히 의식구조가 다르다. 받아들인 것이 달라서다. 옛날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것과 지금 젊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말을 해보면 말이 안 통한다. 채널이 복잡하다. 우리보고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단순하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모른다. 초자들은 많이 있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고, 고수가 될수록 단순해지는 것이다.
대학교수도 처음 강의를 들으면 지식은 온통 많은데 정리가 안 돼서 이 말하다가 저 말하다가 온갖 것이 다 나온다. 그런데 노교수는 말은 얼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뼈만 얘기 한다. 그것이 명강의다. 많이 안다고 명강의가 아니다. 그런데 젊은이들과 얘기해보면 인생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복잡한 것을 다 겪어왔다. 복잡한 것이 신물나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 씨는 주인 없는 흙이니까 아무것이나 뿌려서 불란서에서도 뿌리고 미국에서도 뿌리고 독일에서도 뿌리고 온갖 사상이 뿌려져있다.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한다. 이것이 문제다.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하나님을 담기 위한 그릇이라고 표현했다. 산 혼이라는 기능이다. 이 기능이라는 것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하는 일이 달라진다. 기능이니까. 자기 스스로가 뭘 하는 것이 아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전기를 예를 들어보자. 전기 스스로가 불을 내는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안 한다.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화재가 나기도 하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전등이 되기도 하고 앰프가 되기도 한다. 소리 나는 것이 다 전기로 하는 것이다. 전기의 기능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다. 우리 인간이 다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전등도 되고 모터도 되고 전파도 되고 온갖 것이 다 된다.
우리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주인이 필요하다. 시시한 것 같으면 주인이 없어도 굴러다녀보았자 피해 줄 것도 없고 별로 나타날 것도 없다. 그런데 아주 좋은 기계는 조금만 손을 잘못대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원자력 발전소 같은 것은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큰 사고가 난다. 우리집 보일러야 터져봤자 우리집 태우면 그만이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터지면 사람이 수십만명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럴수록 더욱더 그것을 조정하는 기술자가 필요하다. 지난번 신문을 보니까 부품 교체를 하는데 사바사바하여 부정 부품을 사용했다고 잡혀갔다. 그런 사람들은 잡아다가 정말 혼을 내나야 한다. 부품을 잘못 썼다가 한 번 사고 나면 사람이 한두명 죽는 것이 아니다. 일 자체가 사바사바해서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귀중한 기능을 갖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기능이다. 이게 보통 기능이 아니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 이것을 생각해보라. 산에서 하나님이 우리처럼 말을 했겠는가? 내가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데 뇌성벽력 치고 번개 치고 소리치고 나팔 불고 난리 치는데, 거기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듣겠는가?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 말을 듣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써놓은 것이 율법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신기한 것이다. 뇌성이 울려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번개가 쳐도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다. 신기한 존재다. 사도바울이 다멕섹에 가다가 우레 소리가 났는데 거기서 엎드려져서 ‘주여 뉘십니까?’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헤아릴 수가 없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전기라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것인데, 제어할 수 없다면 큰일 나는 것이다.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에 너무나 능력이 많은 것이기 때문에 제어를 못 하면 큰 사고가 난다. 초롱불 키는 시대는 아무나 할 수 있고 사고가 나봤자 별 것 아니다. 전기는 사고가 나면 큰 사고가 난다.
인간도 이 우주 안에서 가장 기능이 완벽한 기계와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욱더 하나님이 필요하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더욱 하나님이 필요하다. 나는 잘났으니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자폭탄과 똑같다.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면 더욱더 하나님이 필요한 줄을 알아야 한다. 머리 나쁜 사람은 사고를 쳐봤자 얼마 못 친다. 머리 좋은 사람이 사고 치면 크게 친다. 자기가 머리가 좋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생산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사람이 이라야 한다. 분배받고 나타냄에 진실해야 한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이미 고정 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을 따를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가 중요하다. 저 사람이 옳은 사람이냐 그른 사람이냐, 선한 사람이냐 악한 사람이냐가 제일 중요하다.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중요하다. 조선시대 주자학에서부터 나와서 퇴계학파를 거쳐서 영남학파를 거쳐서 오는 동안에 우리나라 민족성 속에는 선과 악에 대한 관념이 아주 강하게 뿌리박고 있다. 옳으냐 그르냐. 우리 근세사만 보더라도 해방 후로 이승만 박사가 하야할 때까지 오로지 정치적인 투쟁이 무엇이었는가? 왜 혼자 독재를 하느냐였다. 굶어죽느냐를 갖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보릿고개 넘기기가 어려운 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릿고개를 넘기겠는가를 의논하지 않고 왜 혼자 독재를 하느냐였다. 마지막에는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구호였다. 배고파 못살겠다가 아니고 혼자 해먹으니까 못살겠다는 말이다. 그 이후로 똑같다. 지금도 똑같다. 우리민족만큼 선악에 대한 감정이 깊은 사람들이 없다. 교육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 같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경륜을 돌아보면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생산하냐 못하냐가 문제지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지 선하냐 악하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선한 사람이 잘 표현하지 않겠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분배는 받은 사람이 진실해야 된다. 선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악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원래 선한 사람도 없고 원래 악한 사람도 없다. 다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선한 사람이면 훨씬 하나님 말씀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겠냐? 또 하나님을 잘 나타내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생명은 분배 받아서 나타냄에 진실해야 된다. 흑인과 결혼했으면 검은 아기를 낳는 것이 진실한 것이다. 하얀 사람이 좋으니까 하얀 사람을 낳는 것이 진실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는 진실이 필요하다.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이미 고정된 사람이다. 선하다고 고정된 사람이 있고, 악하다고 고정된 사람이 있다. 이 고정된 사람은 안 된다. 고정되면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라는 말은 고정되지 않은 분이라는 뜻이다. 고정되지 않는 분이 움직이는 것에 같이 따라 움직이려면 고정되지 않아야 된다. 우리 인간의 문제가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들어오면 고정시키려고 한다. 어떤 것이라도 오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 안에 고정시켜서 변하지 않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교리를 다 고정시키려고 한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이렇게 고정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고정된 사람은 아무데서도 쓸모가 없다. 좋은데 고정되든지 나쁜데 고정되든지 상관이 없다. 고정되면 하나님에게 다 쓸모가 없다. 고정되지 않는 사람이라야 된다. 언제든지 이리 가라고 하면 이리 갈 수가 있고, 저리 가라고 하면 저리 갈 수가 있는 사람이라야 된다.
광야 4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정된 것을 풀기 위해서 해결하기 위해서 40년을 헤맨 것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정표를 주고 지도를 주고 찾아가라고 했으면 열사흘이면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런데 이정표도 없고 지도도 없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가라는 말도 없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두어 그것을 따라 오라는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일주일 동안은 구름기둥이 뜨고, 일주일 동안은 불기둥이 뜨면 좋은데 그것이 아니고 언제 뜰지 언제 가라앉을지를 모르는 것이다. 밤에 가라앉을지 낮에 가라앉을지를 모르는 것이다. 처음에 고정된 사람은 무지 힘든 것이다.
교회 와서도 제일 힘든 사람이 누구인가? 어떤 면으로든 한 가지에 고정된 사람이다. 일주일이라고 딱 고정되어 있는 사람은 일주일을 못 넘긴다. 4박5일 집회를 한다고 정해놓았는데, 4박5일을 꼭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힘들 것이다. 5박6일이 될지 6박7일이 될지 누가 아는가? 엿장수 마음대로다. 아예 생각을 놓고 4박5일을 하든지 5박6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하는 대로 간다는 사람은 괜찮다. 뭔가 고정된 사람은 힘들다. 하나님 따라 가기가 아주 힘들다. 그분 자체가 고정되지 않은 분이니까.
하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첫 번째로 제일 어려운 것은 오래 기다리는 것이다. 왜 기다려야 되는가? 기다린다는 말이 시간이 많아서만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고, 어디로 갈지를 모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다. 어떻게 갈지를 모르니까. 구름기둥이 뜨면 뜨고 앉으면 앉으라고 했다. 한달간 뜬다고만 정해졌으면 한달간 살 계획을 세울 것이다. 언제 뜰지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니까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계획 잘 세우는 사람들이 하나님 따라 가기가 또 힘들다. 세상일은 계획대로 해야 되는데 하나님 따라가는 일은 계획대로 안 된다. 내가 계획해놓으면 얄밉게 바꿔버린다. 아주 이상한 분이다.
나는 여러 번 경험했다. 내가 계획해놓을 때마다 하나님이 바꿔버린다. 어떻게 알고 바꿔버리시는지 모르겠다. 아주 이상한 분이다. 초창기에 나는 거꾸로 생각하자. 내 생각과 반대로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내 생각과 반대였으니까. 내 생각과 반대니까 내 생각과 반대로 생각하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생각하면 안 맞는다. 여러 번 실패했다. 언제 구름기둥이 뜰지 언제 구름기둥이 앉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다가 숙곳에 와서 토담집을 짓는다. 토담집을 짓고 자기 딴에는 양무리를 치고 좀 안정되게 살아보려고 했다. 거기서 문제가 생겨서 할 수 없이 도망쳐 나오게 되었다. 토담집을 짓지 말라는 것이다. 벽돌로 집을 지어놓지 말라는 것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천막생활을 하고 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 장막절이라는 절기가 있다. 그 절기는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을 기념하는 절기다. 왜 장막을 쳐야했는가? 이동식이니까. 언제든지 구름기둥이 뜬 것을 모면 주섬주섬 싸서 가면 된다. 그런데 벽돌로 집을 지어놓으면 어떻게 그것을 뜯어서 가겠는가? 못 간다. 그래서 초막절을 지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초막절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 언제든지 같이 움직이려면 같이 움직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져야겠구나. 고정되면 안 되겠구나. 신앙도 고정되면 안 된다. 아무리 잘 믿어도 고정된 사람은 안 된다. 영이신 하나님을 따를 수가 없다. 표현할 수가 도저히 없다. 딱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팔도 한 가지 소리만 난다고 생각하면 싸구려다. 소리가 여러 가지로 변화될 수 있으니까 악기다. 소리를 변조시키느라고 움직이는 것이 줄줄이 박혀있다. 그냥 대롱하나 깎아서 불면 한 가지 소리밖에 안 난다. 그것 가지고는 어떻게 오케스트라를 하겠는가? 노래를 할 수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정된 사람은 한 가지밖에는 쓸 수가 없다. 직장생활을 해도 내가 고정된 관념을 갖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상사가 꼭 나와 맞지 않는 일만 시킨다. 왜 상사는 나를 미워하는가? 왜 나를 갈구나? 이렇게 생각한다. 상사가 일부러 갈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사 마음대로이지 내 마음대로인가. 항상 빈 마음으로 가서 무엇을 시키든지 ‘예’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능한 사람이다. 딱 고정되어 고집하고 있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살이가 아주 힘들다. 이래도 힘들도 저래도 힘들고 가는 데마다 걸리고 안 된다.
등불을 밝히는 데만 필요한 전기가 있다면 그 전기는 모터에는 사용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지으시지 않으시고 자신이 주신 것을 받아 표현하는데 쓰여 질 수 있는 산 혼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흙과 같은 사람, 그릇과 같은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등불을 밝히는 데만 전기가 필요하다. 그런 전기가 있다. 등을 쓰는 것밖에는 못한다. 그러면 그 전기를 어디에 쓰겠는가? 전기가 좋은 것이 등을 밝히는 데 쓸 수 있고, 모터 돌리는 데도 쓸 수 있고, TV만드는 데도 쓸 수 있고, 온갖 것에 쓸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이다. 한 가지밖에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도 그 다양하신 하나님을 언제라도 부르신 대로 따라 가고 표현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지어놓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고정된 인간이 필요했다면 아마 그런 사람을 지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지을 때는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다. 선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다. 잘한 사람도 아니고 못한 사람도 아니다.
산 혼으로만 지어놓았다. 받아들인 것만큼만 표현하도록 지어놓았다. 남은 저렇게 크게 표현하는데 나는 왜 저렇게 표현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팔 생긴 대로 소리 나는 것이다. 큰 나팔의 붕붕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작은 나팔이 따라 가겠는가? 작은 나팔도 있어야 되고 붕붕거리는 나팔도 있어야 된다. 큰 나팔은 이따금씩 붕붕하기만 하지만 그것이 필요하다. 한번씩 쨍치는(심벌즈) 그 사람은 졸리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박자 생각하고 딱 맞추어 쳐야 한다. 자다가 깨더라도 그 시간에는 확실하게 깨야 한다. 그 사람이 제일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간은 고정되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표현하는데 적합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이것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흙과 같다. 씨를 받아서 생산하는 것이 흙의 임무이듯이 사람도 하나님 마음을 받아서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산 혼은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받은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하시고 생명나무 앞에 두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산 혼은 기능이지 생명은 아니다.
산 혼은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서 그 받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이 무슨 씨를 받느냐가 중요하다. 무슨 씨가 중요한데 무슨 씨가 내 마음대로 받아지는가? 뿌린 자가 있어야 된다. 흙에게는 누가 필요한가? 절대적으로 뿌리는 자가 필요하다. 흙에게는 정말로 좋은 것을 뿌리는 농부가 필요하다.
흙이 농부가 없으면 잡초밭이 되고, 농부가 있으면 밭이 된다. 아주 간단하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있으면 밭이 되고, 하나님이 없으면 그냥 잡초밭이 된다. 이 씨도 오고 저 씨도 오고 사방에서 씨가 날라 와서 온갖 것이 다 나버린다. 산 혼은 무엇을 받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금지하고 생명나무를 두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산 혼은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흙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더 농부가 있어야 된다. 흙도 너무 메마른 흙에는 풀도 안 난다. 씨가 떨어져보았자 날 수가 없다. 너무 메말라서. 그런 데는 농부가 없어도 된다. 그런 인간에게는 농부가 없어도 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안 나니까. 사탄이 아무리 뿌려 봐도 나지 않는다. 하나님 씨도 안 나는데 사탄 씨가 나겠는가? 안 난다. 그것은 상관이 없는데, 흙이 진짜 좋은 흙일수록 농부가 없으면 완전히 잡초밭이 된다.
좋은 흙일수록 좋은 농부가 필요하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면 더욱 하나님이 필요하다. 내가 좋은 흙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생명은 기능처럼 한번 받으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양식처럼 계속 먹어야 하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 이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아직 생명을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먹으면 살고 먹지 못하면 죽는 것, 이것이 생명이다.
생명, 생명 하는데 생명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궁금할 것이다. 생명도 기능처럼 딱 고정되어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생명은 기능이 아니다. 기능은 기계적이다. 고정되어 있다. 생명은 기능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한 번 받으면 영원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양식처럼 P속 먹어야 하는 것이 생명이다.
우리 인간이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좌우지간 살고 있다. 살고 있다는 것은 뭔가? 우리가 먹고 있다는 것이다. 안 먹으면 배고프고 먹으면 배부른 것이 생명이다. 다른 것이 생명이 아니다. 배가 고프면 내가 살아있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죽은 사람은 배고픈 줄을 모른다. 배부르거든 내가 살아있네,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살아있다는 것이 먹고 사는 것이다. 안 먹으면 죽고, 먹으면 사는 그것이 생명이다.
나도 이 생명 때문에 많이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생명이 어디에 있는가? 현대의학으로도 사람이 살아있는데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다 모르니까 먹고 사는 것이 생명이다. 먹으면 사는 그것이 생명이다.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아직 생명은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과학적이나 과학적이지 않으나 매 한가지다. 먹으면 살고, 먹지 못하면 죽는 그것이 생명이니까 우리도 과학자 이상이다. 우리가 저 사람 살았네 하면 산 사람이다. 저 사람 죽었네 하면 죽은 사람이다. 현미경을 보지 않아도 저 사람보고 살았네 하면 살았다. 여기 보니까 여러 분은 다 살았다.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이 다 살아있다. 알고 보면 다 생명이다. 연구해봤자 안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날의 만나만을 내려 주셨고 (출16:4) 예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시고(마6:11) 또 내가 생명을 주려고 왔다(요10:10)고 하시면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51)고 말씀하셨다. 떡은 매일 먹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그를 매일 생명의 양식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줄 때 그날의 양식만 주었다. 하루 만나만 주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 그것을 모르고 만나가 내려오니까 그릇을 있는 대로 다 가져가서 가득 담아놓았다. 집에 쟁여놓고 먹으려고. 하루 저녁 자고 나니까 다 섞어서 구더기가 났다. 모세가 책망을 했다. 너희가 왜 이렇게 악한 짓을 했느냐? 공짜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그릇에 갖다놓고 편안히 먹으려고 한 것이 뭐가 잘못한 것이냐? 너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이런 짓을 했다고 대단히 진노하여 꾸짖었다. 그러고 나서 일용할 양식만 구하겠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로 말씀하실 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다. 광야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고 그날 쌀만 사다가 먹으면 안 된다.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을 주려고 왔다. 생명을 주러 왔으면 주고 가버리면 될 것인데, 생명을 주러 왔다고 해놓고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떡이라는 것은 한 번 먹고 끝나는 것인가? 떡이라는 것은 계속 먹어야 되는 것이다. 아침 먹고 왔는데 점심때가 되니 또 밥 먹어야 된다. 하나님이 한 번 주고 가버리면 될 것을 가지고~.
내가 생명을 주러 왔다고 했다. 뭘 주는가 했더니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했다. 그럼 매일 먹으라는 말이다. 떡은 매일 먹어야 한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매일 먹어야 된다. 매일 먹으면 언제 사느냐? 먹는 것이 사는 것이다. 먹고 또 언제 사냐가 없다. 먹는 것이 사는 것이다. 다 먹기 위해 살고 있다.
인생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먹는 것이 사는 것이다. 나도 어떤 때는 하루에 한끼만 먹었으면 좋겠다한다. 먹고 나면 항상 속에서 부담이 되니까 하루 한끼만 먹었으면 시간적 여유도 많고 좋겠다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더 시간되면 배가 고프다. 그래서 안 된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한끼만 먹고 산다고 한다. 참 부럽다.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해야 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안 된다. 하루 한끼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사람. 두끼만 먹어도 참 좋겠다. 아침과 저녁만 먹어도 점심시간과 하루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으니까 아침 먹고 소화시켜야 되고, 점심 먹고 소화시켜야 되고, 저녁 먹고 소화시켜야 된다. 맨날 소화시키다가 시간이 다 간다. 그렇다고 쬐끔만 먹는다고 사냐? 그것도 아니다. 먹을 만큼 먹어야 된다. 여러 분은 내 속을 잘 모를 것이다.
인간은 빈 그릇이다. 담으면 내용이 있고 비우면 빈 그릇이다. 흙은 씨를 받으면 밭이 되고 추수하고 나면 도로 흙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나님이 있다면, 씨를 뿌릴 자가 있다면, 내용을 넣을 자가 있다면, 이 얼마나 복 된 것인가! 농부가 씨를 뿌리려고 흙을 산 것 같이 하나님은 인간의 내용이 되시려고 사람을 지으셨다. 이것을 알면 인생은 행복하고 완전한 것이다.
인간은 빈 그릇이다. 담으면 내용이 있고 비우면 빈 그릇이다. 인간은 흙과 마찬가지다. 씨를 받으면 밭이 되고, 씨를 안 받으면 빈들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다. 뭘 가졌다 할 것이 없다. 내 것이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빈 그릇이다. 흙이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이렇게 운명만 생각하면 숙명론에 빠지고, 인간이 절망할 것이다. 그런데 그 숙명론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이 없어서 그랬다. 하나님만 있다면 빈 그릇처럼 좋은 것이 없고, 하나님만 있다면 농부만 있다면 흙처럼 좋은 것이 없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나니까 인간이 허무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고 나니까 빈 그릇이 되면 허무한 것이다. 또 누가 와서 채워놓으면 자존심이 상한다. 채우지도 못하고 비우지도 못한다.
흙이 가만히 있으면 누가 와서 씨를 뿌리면 기분 나쁘다. 왜 나한테 씨를 뿌리느냐? 안 뿌려놓으면 허무해진다. 이러니까 언제 인간이 편히 쉬겠는가. 그런데 빈 그릇도 주인을 잘 만나면 좋은 그릇이 되고 흙도 농부를 잘 만나면 좋은 밭이 된다. 농부가 생기고 주인이 생기고 하나님이 있으니까 내 인생이 너무너무 행복하게 생각된다. 주인이 있으니까. 주인이 없을 때는 나 역시도 허무한 사람이다. 여러 분도 주인 없다고 생각하면 참 허무할 것이다. 주인이 있으니까 허무한 것이 아니고 너무 행복하다. 주인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알아서, 주인이 농사를 지어 좋은 것을 얻으려고 얼마나 좋은 씨를 선별하고 얼마나 농사가 잘되게 하려고 노력하겠는가. 농사짓는데 가보면 농부들이 얼마나 흙을 사랑하는지, 거기에 좋은 씨를 심으려고 한다. 해마다 종묘회사에서는 씨를 개량하고 개량하여 연구를 하고 있고, 농부들은 어떻게 하면 좋은 씨를 사다가 심을까 찾아다닌다. 주인이 있는 흙은 아무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주인이 없는 흙은 밤낮으로 걱정해야 된다. 어느 놈이 와서 씨를 뿌릴지 모르니까 밤낮으로 걱정해야 된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참 불행하겠다. 맨날 고민하고 살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 뜻대로 될 것 같지만 안 된다.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이놈이 와서 뿌리고 저놈이 와서 뿌리고 사방에서 뿌려서 가을되면 밭도 아니고 뭣도 아닌 것이 된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농부가 있다는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가 흙이라는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비록 내가 엉겅퀴 밭이었다 할지라도 농부가 있다면 갈아엎고 포도밭을 만들 수가 있다. 농부가 없으면 영원히 저주이지만 농부가 있으면 새 밭이 될 수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너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다. 네가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땅이 너에게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낼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주인이 없다는 뜻이다. 주인이 없으니까 엉겅퀴와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은 원래는 밭으로 생겼다. 주인이 없는 흙이니까 엉겅퀴가 나는 것이다. 이상하게 잡초일수록 더 강하다. 요즘 농작물들은 병충해 때문에 농약을 치지 않으면 못 먹는다. 잡초는 농약을 치지 않아도 어떻게 그렇게 잘 되는지~. 생명력이 너무너무 강하다. 잔디를 가꾸어보면 잡초를 캐내면 어느 사이에 또 나오는지 모른다. 계속 나온다. 잡초와의 전쟁이다. 요즘 농사짓는 사람들도 잡초와의 전쟁이다. 잡초만 아니면 농사짓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잡초 때문에 제일 어렵다. 그래서 제초제를 뿌린다.
농부가 있냐 없냐가 우리 인생에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없다는 소리를 그렇게 쉽게 하고 건방지게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다. 자기가 저주받을 소리이다. 난 농부가 없다고 흙이 말한다면 그 흙은 저주받은 흙이다. 나는 주인이 없는 그릇이라고 하면 저주받았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 말을 쉽게 하는가? 모르니까 쉽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니까 그런 소리를 안 하게 된다. 농부가 있으니까 흙이 행복하다. 주인이 있으니까 그릇이 행복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로 지혜롭게 지어놓으셨다. 주인만 있으면 행복하도록 지어놓았다. 그런데 사람이 욕심이 많아서 주인이 없어도 행복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주인이 없어도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인 없이 주인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행복하려고 노력하니까 힘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행복하지 못한다.
원래 생겨먹기를 흙으로 생겨먹었는데 주인 없이 좋은 열매가 나오겠는가? 스스로 흙이 있다고 해서 좋은 귤만 나오겠는가? 그런 흙은 절대로 없다. 농부가 심으니까 귤이 나오는 것이다. 저절로 귤만 나오는 법은 없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지혜로 지어놓았다. 우리 생각할 때는 좀 불편한 것 같지만 주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으로 지어놓았다. 그것이 지혜다. 주인이 있어야 되도록 지어놓으신 그것이 지혜다. 하나님의 지혜를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다. 누구도 변경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변경시킬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다. 주인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라고 해야 된다. 그리고 나도 좀 행복하게 해달라고 사정해야 된다. 자기는 행복할지는 모르지만 남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니 말짱 거짓말이다. 주인 없이도 좋은 밭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주인 없이도 금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진실한 말은 우리는 주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이 겸손한 말이고 진실한 말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지혜로 인생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있으면 농부만 있으면 주인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되는 그런 존재로 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담은 그것을 버리고 떠나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스스로 농부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엉겅퀴와 가시를 낼 뿐이지 행복을 내주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불러주셔서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창조하신 자리로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하고, 이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